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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마법사들이 소환진을 해제할 수 없다니. 고위 마족의 방해 때문에 그래요?”
[그런…… 예 불가……. 징벌의 문…… 당장 탈…….]
“뭐라고요? 안 들려요. 좀 더 크게 말해 봐요! 야!”
몇 차례 통신을 시도하던 카델이 신경질적으로 [울로]를 내리쳤다. 이 애매한 소통으로도 바깥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쯤은 알아낼 수 있었다. 빠져나간 고위 마족이 벌써 난동을 부리고 있는 걸까? 내로라하는 기사 대부분이 마계에 갇혀 있으니, 대응이 어려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소환진 해제할 여력조차 없단 말인가.
얼굴도 모르는 마법사들의 무능함에 분노한 카델이 부득부득 이를 갈며 다시 [울로]를 들었다. 그러나.
“자기!”
“……라이돈?”
멀리서부터 날아온 라이돈이 부드러운 바람을 끌고 카델의 옆에 착지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카델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 라이돈이 한껏 진지한 얼굴로 그의 어깨를 잡아챘다.
“저 소환진, 인간들은 해제하지 못해. 아니, 어떤 마력으로도 해제가 불가능해.”
“그게 무슨 소리야. 직접 확인해 봤어?”
“방금 해 보고 오는 길이야. 가르엘의 마기로는 조금이나마 건드릴 수 있나 본데, 내 마력은 아니었어. 마력으로는 소환진의 흐름을 전혀 건드릴 수 없어. ……마왕이 마족만을 위해 남긴 유산인 거야.”
설마 바깥의 마법사들이 소환진을 해제하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었나? 마족만을 위한 마법진이라, 인간은 전혀 관여하지 못한다고? 정말 그런 거라면 어떡하지? 이대로 영영 닫히지 않는다면? 영원히 인간계와 마계를 잇는 포탈처럼 존재한다면?
최소한 소환진의 유지 시간이라도 알아내고 싶었으나. 답을 아는 유일한 존재는 제 손으로 죽여 버린 뒤였다.
‘말도 안 되잖아. 이딴 거지 같은 사건이 스토리일 리…….’
마왕을 무찔렀는데도 또 다른 고난이 남았을 리 없다. 이런 스토리 전개를 가진 게임이라면, 유저들은 모든 컷 씬에서 스킵 버튼을 연타하게 될 테니까. 그리 생각하던 카델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신은 운명의 궤도에서 이탈하였습니다.」
「스토리를 재생성합니다.」
스토리 재생성. 그때는 그저, 스토리의 중요한 부분을 건드렸기에 카델 라이토스에게 새로운 변화가 생긴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손해는 오로지 제 몫일 거라고. 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만약, 이 재앙 같은 상황이 시스템이 만들어 낸 새로운 스토리라면.
‘대체 뭘 원하는 거야……?’
카델은 제 상태를 살피는 라이돈 앞에서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마계 전쟁의 씨앗은 사라졌다. 남은 마왕의 형제도, 마왕도. 모두가 힘을 합쳐 해치웠다. 시스템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짓을 벌인 걸까?
‘인간계와 마계의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인식을 심으려는 건가? 그동안 새로운 보스라도 만들어 볼 셈이야? 무슨 수로.’
전쟁의 씨앗이 사라진 세계에 억지로 불을 붙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아니. 절대 놈의 생각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괜찮아. 말했잖아. 우리에겐 평화의 돌이 남았어. 마계를 완전히 봉인한다면 소환진도 힘을 쓰지 못할 거야.”
“마력으로 닫히지 않는 소환진이 봉인석으로 닫힐까? 봉인도 결국 마력으로 진행될 텐데.”
“닫혀. 분명히 닫힐 거야.”
단호한 대답에 라이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소환진이 닫히지 않는대도, 카델에겐 적룡이 붙어 있지 않은가. 제 생각을 더 털어 내 봤자 카델의 불안을 증폭시킬 뿐이다. 라이돈은 굳은 얼굴을 한 카델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곤, 드러난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카델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믿어.”
애교스러운 미소에 그제야 카델의 입꼬리도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마지막으로 카델을 꽉 끌어안은 라이돈이 다시 날개를 움직였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카델의 옆에 붙어 있고 싶었으나. 이 이상 고위 마족이 인간계로 넘어가게 둬선 안 됐다.
빠르게 고도를 높이는 라이돈의 뒷모습을 좇던 카델이 [울로]를 강하게 그러쥐었다. 무겁게 움직인 시선이 요란하게 허물어지는 마왕 성을 담아냈다.
얼음 계단은 여전히 성의 상단부와 하단부를 잇고 있다. 하단부는 폭삭 내려앉은 지 오래였지만, 여태 하늘에 떠오른 상단부는 녹아내리듯 서서히 파편을 떨어뜨리고 있었으니.
힘의 근원인 에밀리아가 죽었음에도 저토록 천천히 무너지는 성이다. 문득 그녀가 가진 힘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실감이 났다.
‘만약 에밀리아가 소환진 생성을 포기하고 그 힘을 모조리 내게 퍼부었다면……. 어쩌면 승리하지 못했을 수도 있어.’
그러나 이만한 마법진을 보험으로 남겨 둬야 했을 만큼 그녀 역시 궁지에 몰렸던 거겠지. 여러모로 대단한 여자였다. 카델은 [울로]의 작동을 포기한 채 무너지는 성을 향해 달려갔다. 지금은 답도 없는 소환진의 해제보다 [평화의 돌]을 확보할 엑토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미친 척하고 꼭대기로 올라가 볼 걸 그랬지.”
엑토와 함께 돌을 찾았다면 이 절망스러운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후회와 함께 성 앞에 다다른 카델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득히 높은 하늘에서부터 무수한 파편이 떨어졌지만, 그중 어디에도 엑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얼음 계단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찾지 못한 건가?’
저렇게나 위태롭게 흔들리는 성이다. 제대로 탐색하기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테다.
‘차라리 라이돈한테 부탁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날아서 올라간다면 탈출도 쉬워질 테니까.’
어쩌면 그게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초조하게 하늘을 응시하던 카델이 결국 비행을 결정했다. 라이돈도 제 부탁이라면 들어줄 것이었다. 하지만.
“라이돈 경! 살려 주시오!”
카델보다도 먼저, 라이돈의 이름을 부르는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움직인 시야 속, 파편에 뒤섞여 떨어지는 자그마한 점 하나가 들어찼다. 단박에 그 점의 정체를 알아챈 카델이 다급하게 팔을 휘저었다.
“라이돈! 어서! 엑토 경을 받아!”
부하에게 날개가 달렸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카델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양손을 그러쥐었다. 곧 엑토를 발견한 라이돈이 하늘 높이 솟구치고.
“좋아……!”
파편을 피해 비행한 그가 무사히 엑토를 낚아챘다.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발견한 카델이 그제야 경직된 몸에 힘을 풀었다. 라이돈은 명령 없이도 엑토를 카델의 앞으로 데려다주었다.
“하아, 무거워서 죽는 줄 알았어. 카델은 솜털 같은데, 이건 쇳덩이 같잖아.”
“잘했어, 라이돈. 정말 최고야. 네가 있어서 진짜 다행이야. 진심이라고.”
“……흐응, 뭐. 알고 있어!”
금세 의기양양해진 라이돈의 눈앞으로 엄지를 치켜들어 준 카델이 서둘러 엑토의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이걸 챙긴다고 탈출이 조금 늦어졌소.”
엑토는 망토로 둘둘 싸맨 거대한 무언가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가 ‘무언가’를 바닥에 세워 둔 채 망토를 풀자, 곧 투명한 얼음덩이가 드러났다. 그 안에 자리한 것은 얼어붙은 마밀의 얼굴. 그 얼굴을 마주한 카델이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미처 회수하지 못한 스승의 시체였다. 사라진 시체의 위치를 파악하기엔 시간도 정신도 없었으니. 되찾을 기회는 사라졌다 여기고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조심스럽게 얼음을 쓸어내린 카델이 짧게 숨을 골랐다. 차마 스승의 얼굴을 볼 수 없어 시선을 내리깔자, 라이돈이 그의 손등을 덮었다.
“이리 줘. 내가 옮길게.”
“……싸우는 데 방해될 거야. 내가 지키고 있을게.”
“괜찮아. 나한텐 이렇게 멋진 날개가 있잖아? 시체 하나 운반한다고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니까. 문제 될 건 없어, 카델.”
머뭇거림은 길지 않았다. 마밀의 시체를 계속 곁에 뒀다간 간신히 다잡은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으므로, 카델은 순순히 라이돈에게 마밀을 맡겼다.
다음은 평화의 돌 차례였다. 먼지로 엉망인 단복을 툭툭 털어 내던 엑토가 카델을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이걸 찾소?”
그가 주먹 쥐고 있던 손을 펼치자, 자그마한 돌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델은 엑토의 손에서 돌덩이를 집어 들어 긴장된 얼굴로 그것을 살폈다.
기름칠한 것처럼 겉이 번들거리는 검은 돌이었다. 그것에는 우주를 담은 듯 반짝이는 하얀 점들이 촘촘하게 담겨 있었다. 이것이 자신이, 그리고 인간계의 모두가 그토록 바라던 평화의 돌이구나. 불쑥 벅차오르는 감정을 따라 돌을 강하게 그러쥐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엑토 경. 정말로요.”
“마왕을 쓰러뜨린 건 카델 경이오. 평화의 돌이라도 찾아오지 않으면 내 체면이 서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지.”
“이젠 정말 탈출만 남았군요.”
더 많은 고위 마족이 빠져나가기 전에 서둘러 인간계로 나가야 했다. 하지만 이곳에 남은 마법사들에게 [징벌의 문]을 개방할 정도의 마력이 남았는지가 의문이었다.
바깥의 마법사들에게 연락을 취하는 게 가장 괜찮은 방법일 텐데. 걱정하며 [울로]를 꺼내 든 순간. 루멘의 외침이 들려왔다.
“대장! 동쪽을 봐!”
반사적으로 시야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너울거리며 피어난 암흑 마력. 거대한 심연처럼 드리운 마법진이었다.
“저건……!”
“징벌의 문이오! 바깥에서 열었나 보군. 서둘러 빠져나가야 하오. 모리톨 경!”
징벌의 문을 발견한 엑토는 서둘러 모리톨을 찾아 나섰다. 그를 떠나보낸 카델은 얼음덩이를 옆구리에 낀 라이돈의 팔을 잡아당겼다.
“문이 하나뿐이야. 여러 개를 만들 만한 여력이 안 되는 모양이니까, 유지 시간도 길지 않을 거야. 닫히기 전에 이동해야 해.”
“안아다 줄까?”
“아니. [환언]으로 기사들에게 문의 위치를 전달해. 우린 마지막까지 남아서 고위 마족의 탈출을 저지한다. 그 정도 마력은 남았지?”
“흐응, 힘든데.”
“할 수 있잖아, 라이돈.”
카델은 약한 척 눈썹을 늘어뜨리는 라이돈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곤, 어느새 훌쩍 멀어진 엑토의 뒤를 쫓았다.
“엑토 경! 기다리세요!”
“기다려 줄 여유 없소! 징벌의 문이 하나밖에 열리지 않았으니 한시라도 빨리…….”
“알고 있으니까 잠깐만 멈춰 보시라고요!”
기어이 엑토를 멈춰 세운 카델이 다급히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손안에 들어차는 익숙한 감각을 느낀 엑토의 미간이 좁아졌다. 평화의 돌. 맡겨 둔 것을 왜 다시 돌려주는 것인가. 엑토의 의아한 표정을 마주한 카델이 덤덤히 입을 열었다.
“돌을 가지고 먼저 빠져나가세요. 마법사들에게 넘기면 봉인식을 진행할 겁니다. 그동안 적린 기사단은 마계에 남아 고위 마족을 제압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함께 탈출하지 않겠다는 말이오? 안 될 말이지. 그러다 타이밍이 어긋나서 마계에 남겨진 채로 봉인이 완료되기라도 한다면……!”
“그럴 일은 없습니다. 걱정 마세요. 이 고생을 해 놓고 마지막에 허무하게 죽어 버리는 짓은 하지 않아요.”
부하들이 함께 있는 한, 절대로 그런 선택은 하지 않는다. 단호한 카델의 표정에 잠시 망설이던 엑토가 짧게 혀를 찼다.
“밖으로 나가서도 계속 통신을 시도할 테니, 되도록 징벌의 문 근처에서 싸우시오. 아슬아슬해질 때까지 버티면 안 되오. 봉인의 낌새가 느껴지면 바로 빠져나와야 하오.”
“제가 죽고 싶어서 환장한 놈으로 보입니까? 아슬아슬은 무슨, 조금만 작아져도 바로 빠져나갈 거니까 통신이나 멈추지 마십쇼.”
라이돈의 [환언]이 기사들의 전투를 멈추게 하고, 엑토와 모리톨은 기사단장들에게 징벌의 문의 존재를 알렸다. 탈출을 목전에 둔 이들의 정신 없는 움직임 사이. 적린 기사단은 계속해서 고위 마족의 이동을 저지했다.
다행인지 아닌지, 에밀리아를 잃은 고위 마족은 탈출에만 급급해져 있었다. 뒤를 살피지 않는 그들의 빈틈을 찌르기는 비교적 쉬웠다.
“여기 있어, 카델. 지켜 줄게.”
속삭임을 닮은 요젠의 말을 따라 순순히 자리에 선 카델이 기사들의 행렬을 지켜보았다. 제게 충분한 힘이 있었다면. 아니, 처음부터 시스템의 저의를 제대로 파악했거나, 에밀리아의 의미심장한 말을 신경 썼다면. 지금쯤 그들은 안전하게 이동 마법진을 열고 탈출했을지 모른다.
여전히 탈출하지 못한 채 전투를 이어 가는 부하들의 모습을 보니 절로 마음이 착잡해졌다. 당장이라도 기사들을 밀쳐 내고 제 부하들을 앞세워 내보내고 싶었다.
‘……그럴 수가 없다는 게 제일 슬프네.’
봉인의 변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고위 마족의 탈출을 저지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봉인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진 움직일 수 없었다.
부하들이 고위 마족을 상대하는 동안 벌써 반 이상의 기사가 빠져나갔다. 그들의 움직임이 빠르기 때문이라기보단, 남은 이들의 수가 현저히 적은 탓이었다. 널브러진 동료의 시체를 회수하지도 못한 채, 기사들은 겨우 숨만 붙은 몸을 끌고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카델 경! [울로]를 놓지 마시오!”
징벌의 문 근처에서 마밀의 시체를 건네받은 엑토가 우렁차게 외쳤다. 카델은 대답 대신 머리 위로 커다란 원을 그렸다. 가장 후방에 있던 엑토가 징벌의 문을 넘었다는 것은, 마계에 남은 기사는 적린 기사단뿐이라는 소리였다.
완전히 붕괴한 성과 여기저기서 솟구치는 마기 기둥. 충혈된 눈으로 기둥 속으로 몸을 던지는 고위 마족. 산처럼 쌓인 시체와 진동하는 피비린내. 그 황량한 풍경을 담아내니 자신들이 최후의 인간군이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으스스한 분위기에 괜스레 소름이 돋았다.
[울로]를 힘주어 그러쥔 카델이 흩어진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다들 징벌의 문에서 멀어지지 마! 부르면 3초 안에 도착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 원거리 공격으로 견제만 해도 충분하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나, 그들은 카델의 말을 따라 조금씩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카델 역시 징벌의 문을 향해 이동했다.
징벌의 문에 가까이 서자 너머의 풍경이 어렴풋하게 비쳤다. 기름막이 낀 것처럼 흐릿하긴 하나, 인간계의 하늘이 유화처럼 번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 발짝 앞에 출구가 있으니 소란하던 마음도 조금씩 진정이 됐다.
[들리오? 바로 봉인을 시작하라고 지시했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요.]
징벌의 문 앞에 섰기 때문인지 [울로]의 통신이 비교적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주 작은 잡음을 제외하고는 인간계에서 쓸 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엑토의 통신에 응답한 카델이 마른침을 삼키며 부하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몹시 지쳤을 텐데도 그들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부지런히 기운을 짜내고 있었다. 그나마 고위 마족의 반격이 적었기에 버틸 수 있는 것이다. 봉인이 끝나 가면 자연히 소환진도 차단될 테니, 이상을 느낀 고위 마족이 본격적으로 달려들 가능성이 컸다.
‘그때까지 버틸 이유는 없어. 봉인이 끝나가는 기미가 보이면 바로 탈출한다. 괜히 질질 끌다가 부상을 입고 탈출이 어려워질 수도 있어.’
엑토의 통신에 의지해 즉각적으로 행동해야 했다.
[봉인을 시작하겠소! 징벌의 문을 주시하시오, 조금씩 닫히게 될 거요.]
“알겠습니다. 진행도를 계속 전달해 주세요. 마계 소환진의 변화도요.”
[알겠소. 걱정 마시오.]
이제는 타이밍 싸움이었다. 카델은 에밀리아와 마주했을 때도 잠잠하던 심장이 요동치고 있음을 느꼈다. 탈출이 코앞이라는 기대감 때문일까. 아니면 혹시 모를 끔찍한 가능성을 가늠하기 때문일까. 기대인지 불안인지 모를 감정을 품은 채, 카델이 목소리를 높였다.
“탈출할 준비를 해! 멀어지지 마!”
반, 루멘, 라이돈, 가르엘, 요젠까지. 모두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금방이라도 달려올 수 있을 만한 위치를 선점 중이라는 것을 재차 확인한 카델이 조금씩 거칠어지려는 숨을 골랐다.
[봉인석이 마력을 방출하고 있소. 성공이오!]
엑토의 통신을 따라 바로 옆에 있는 징벌의 문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흐릿한 바깥의 풍경이 일그러지고, 우람하던 몸집이 미세하게 쪼그라들었다. 봉인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봉인의 속도가 빨라질 거요. 여유롭게 기다릴 시간은 없으니, 이제 탈출하시오!]
여전히 소환진에 올라탄 고위 마족의 수는 많았다. 하지만 욕심을 부리기엔 한 번밖에 없는 기회의 시간이 촉박했다.
“합류해, 얘들아! 징벌의 문으로 모여!”
엑토의 말대로 징벌의 문이 줄어드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다급하게 부하들을 불러 모은 카델이 소환진을 지켜보았다. 봉인이 진행됨에 따라 징벌의 문은 평화의 돌의 힘에 짓눌려 소멸하고 있다. 슬슬 마계 소환진 역시 변화를 보여야 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부하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지친 숨을 고르며 벌써 절반이 줄어든 징벌의 문을 올려다보았다.
“대장, 이제 우리가 넘어갈 차롄가?”
입을 열지 않는 카델을 대신해, 엑토의 통신이 이어졌다.
[빠져나오시오! 봉인이 끝나 가고 있소!]
당장 나가야 한다. 머뭇거리다 징벌의 문이 닫히기라도 하면, 자신들은 전부 마계에 갇혀 죽게될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카델은 징벌의 문을 나서지 않았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그가 [울로]에 대고 말했다.
“……엑토 경. 아직 소환진의 상태를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소환진은, 사라지고 있습니까?”
너무도 멀쩡하게, 오히려 좀 전보다 풍성한 마기를 내뿜으며 고위 마족을 운반하는 소환진. 에밀리아를 죽인 뒤부터 이상할 정도로 후덥지근해진 몸에 열기가 더해졌다.
“대답해 주세요, 엑토 경. 소환진은 어떻게 됐습니까.”
가라앉은 목소리에 부하들의 표정 역시 조금씩 굳어 갔다. 착실하게 닫혀 가는 징벌의 문 앞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들은 흘러나오는 엑토의 통신을 들었다.
[……닫히지 않았소. 그러니 어서 빠져나오시오.]
어째서. 봉인이 진행되고 있으니, 소환진 역시 자연스럽게 사라져야 하는 게 아닌가. 마계가 닫혔는데. 마계를 봉인했는데 어떻게 마계의 마법진이…….
‘……아직 봉인이 완벽하게 끝나지 않아서 그럴 거야. 처음 고위 마족이 등장했을 때도 그랬잖아. 봉인에 균열이 생겨서, 그 틈을 비집고 나왔던 거잖아. 그러니까 지금도 봉인이 끝나면 소환진이 사라질 거야.’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울로]를 쥔 손의 떨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만약 정말로 이 재앙 같은 상황이 시스템의 뜻이라면? 마왕의 자리를 이을 후계자가 전부 사라졌으니, 이런 식으로 고위 마족을 퍼뜨려 위협을 이어 갈 생각이라면? 자신이 꿈꿔 온, 영원한 평화의 세계는 애초에 만들어 낼 수 없는 허상에 불과했던 거라면?
그런 생각까지 미치자 승리에 대한 도취감은 빠르게 사그라졌다. 카델은 가슴을 가득 메우는 불쾌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부하들을 돌아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눈앞에 놓인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라도 제게 희망의 대답을 내놓아 주었으면. 그리 바라기만 할 뿐이었다.
“걱정할 것 없어요.”
고개를 수그린 카델의 앞으로, 가르엘이 다가왔다. 그는 징벌의 문이 있는 방향으로 카델을 가볍게 밀어 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마력은 통하지 않아도 마기는 통합니다. 제가 바깥에서 소환진을 해제하면 돼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탈출합시다. 여기서 더 지체할 시간 없잖아요.”
“하지만…….”
“괜찮아요. 어차피 이미 알 사람은 전부 아는걸요. 시끄러워지면 쿤라 님과 고요의 산맥에서 은거나 하죠, 뭐. 단장님만 가끔…… 아니, 자주 찾아와서 들여다봐 주시면 충분합니다.”
[울로]에서는 계속해서 엑토의 부름이 들려온다. 이제 정말 봉인이 끝난다는 다급한 외침. 징벌의 문 너머에서까지 어렴풋한 소란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먼저 빠져나간 이들이 적린 기사단을 빼내야 한다며 난동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뻔한 방법이 있는데도 자멸을 택하는 건 단장님과 어울리지 않아요.”
어깨를 짚은 온기에 무게가 더해졌다. 그제야 카델은 가르엘을 제대로 올려 보았다. 아무런 고민도 느껴지지 않는 평온한 눈빛. 그 온화한 눈빛을 응시하던 카델이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그 약을 먹으려고 하는 거잖아.”
불안한 물음에도 가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자체로 이미 대답이었다. 냄새를 오래 맡았다는 이유만으로 이성을 잃고 로렌스의 심장을 파먹게 만든 약이다. 마왕의 형제에게 먹이기 위해 만들어진 약. 소환진을 전부 해제하기 위해선 결국 약의 힘을 빌어야만 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가르엘은.
“진짜 마족이 되어 버릴지도 몰라.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도 모르잖아. 너무 위험한…….”
“카델.”
“…….”
“모두를 구할 수 있는 길입니다. 제가 그런 길을 포기할 것 같나요?”
“가르엘…….”
“오로지 저만이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물러나고 싶진 않아요.”
익숙한 미소를 머금은 입꼬리가 짧게 떨렸다. 깊은 다정함 속, 미처 숨기지 못한 미련이 불쑥 튀어나왔다. 쉴 새 없이 카델의 얼굴을 담아내던 가르엘이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상처와 피로 더럽혀진 입술에 부드러운 온기가 번졌다. 모두의 앞에서 입맞춤을 했음에도, 쏟아지는 비난은 없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을 뿐인 담백한 입맞춤의 끝. 터뜨릴 듯 강하게 카델을 끌어안은 가르엘이 짧은 들숨과 함께 그를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둘러싼 동료들을 한 명씩 돌아보며 말했다.
“준비가 필요합니다. 단장님을 데리고 먼저 문을 건너가세요.”
카델은 결국 제 발로 떠나지 못할 것이다. 가르엘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루멘이 카델을 잡아끌었다.
“가자, 대장.”
“난 가르엘이랑 같이 탈출할게. 너희들은 먼저 나가 있어.”
“가르엘 경이 원치 않을 거야.”
루멘의 말에 동조하듯 가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카델은 고집스럽게 눈에 힘을 주었다.
“네가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어. 그러니까 같이 나가.”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음에도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모든 변화를 지켜봐 주겠다는 지극히 사랑스러운 사내. 결연한 카델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가르엘이 이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이 세상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다들 잘 부탁해요."
왜 당장이라도 세상과의 연을 끊을 사람처럼 말하는가. 카델이 욱하며 나서려 했으나, 그는 가르엘을 붙잡을 수 없었다.
“뭐야! 이거 놔!”
“곧 문이 닫힐 거예요. 서둘러요.”
한 팔로 카델을 안아 든 반이 힘으로 그를 제압한 것이다. 당황한 카델이 악을 쓰며 버둥거렸으나, 이미 기력이 다한 그가 반의 힘을 이겨 낼 리 만무했다. 카델의 발악을 무시한 반이 가장 먼저 징벌의 문을 빠져나가고. 순식간에 밝아진 사위와 함께, 요란한 웅성거림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카델 경! 제기랄, 나오지 못하는 줄 알았잖소!”
“카델 경, 괜찮습니까? 다른 분들도…… 나오고 계시는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아득하던 시야가 빛에 적응하자, 넓게 펼쳐진 들판과 기사들의 모습이 들어찼다. 널브러진 부상자들과 빠져나오는 고위 마족을 상대하는 기사들, 그리고 한데 모인 수많은 마법사. 둥글게 선 그들의 위로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일곱 개의 봉인석이 떠올라 있었다. 기사들은 그 봉인석을 파괴하려는 고위 마족들을 막아 내기 바빴다.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거칠게 반을 밀친 카델이 모두의 시선을 떨쳐 내며 징벌의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곳에서 하나둘씩 빠져나오는 부하들의 모습이 보였다. 가장 먼저 루멘이, 그다음으로는 라이돈이, 다음으로는 요젠이. 그들이 빠져나오는 동안 징벌의 문은 거의 개구멍이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좁아졌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몸을 욱여넣으면 어떻게든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카델은 자그마한 문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너머를 내다보려 했다. 흐릿하게 번진 풍경 너머, 가르엘의 윤곽을 찾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가르엘은커녕 그의 손가락 한 마디조차 문을 빠져나오지 않았다. 견딜 수 없는 조급함에 카델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내가 들어가서 확인해 봐야겠어. 위험한 약이야. 그걸 먹고 상태가 이상해져서 나오지 못하는 걸 수도 있어.”
당장이라도 다시 마계로 들어갈 기세인 카델의 모습에 모두가 기겁하며 나섰다.
“기다려, 카델.”
그중 가장 먼저 카델을 붙든 이는 요젠이었다. 그는 잔뜩 흥분한 카델의 심정을 안다는 듯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가르엘과 얘기를 나누고 왔어.”
“무슨 얘기?”
“징벌의 문으로 나오지 않을 거래.”
“뭐……?”
“소환진을 전부 해제하고, 딱 하나의 소환진이 남았을 때. 그때 그 소환진을 타고 인간계로 나오겠대.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이 말을 네게 전해 달랬어.”
소환진을 타고 밖으로 나오겠다고? 물론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마법진을 해제할 수 있다면, 그 마법진을 사용할 수도 있을 테니. 하지만 그렇게 등장했다간 분명 많은 이들이 가르엘의 변한 모습을 목격하게 될 텐데. 그토록 열심히 숨겨 왔던 정체를 이토록 허무하게 밝혀도 되는 걸까.
잠시 걱정이 들었으나, 금세 떨쳐 냈다. 가르엘은 인간들을 구한 영웅이나 다름없다. 누군가 그를 비난한다면 자신이 가장 먼저 짓밟아 주리라.
다소 거친 다짐과 함께, 징벌의 문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가르엘이 소환진으로 빠져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음에도 일순 심장이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그 말 정말이지? 요젠. 가르엘이 정말 그렇게 말한 거지?”
요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카델의 시선이 움직였다. 성공적으로 봉인을 마친 마법사들 사이에서 탄식과 환호성이 뒤섞여 퍼졌다. 찬란하게 빛나던 봉인석이 빛을 잃은 채 그들의 사이로 곤두박질쳤다.
그럼에도 여전히 기세를 꺾지 않은 마계 소환진. 높게 일렁이는 마기가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다. 다행히 아직까지 새로 머리를 들이민 고위 마족은 없었다. 미처 막지 못했던 몇몇 고위 마족이 본인을 소탕하려는 기사들을 피해 용을 쓰고 있을 뿐. 마계에서와는 달리, 새롭게 충원된 기사들과 난무하는 마도구에 고위 마족은 제힘을 쓰지 못했다.
카델은 지친 몸을 끌고 서둘러 소환진을 향해 걸어갔다. 자연히 그의 뒤를 따른 부하들이 카델을 보호하듯 둘러싸고. 카델은 넓게 펼쳐진 소환진 사이에 섰다.
이곳 어딘가에서 가르엘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마도 그는 완벽한 마족의 모습을 하고 있겠지. 그가 어떤 식으로 변화할지는 알 수 없다. 그 변화로 인해 이성을 잃고, 자신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몸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카델은 가르엘을 품어 낼 준비를 했다. 그가 자신을 향해 칼을 들이민대도, 다정하게 안아 줄 것이다.
그런 카델의 기다림에 보답하듯, 사방을 메우던 소환진이 하나둘 소멸하기 시작했다. 자욱하던 마기가 사그라지고, 발광하던 마법진은 힘을 잃은 채 흔적으로 뒤바뀐다. 가르엘의 마기는 빠른 속도로 들판을 청소하고 있었다.
카델은 사라지는 소환진의 위치를 눈으로 좇는 동시에, 남은 소환진을 살피며 그곳에서 무언가 나오지는 않는지 확인했다.
이제 남아 있는 소환진은 세 개.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기에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소환진을 눈에 담아야 했다.
두 개. 다행히 가장 가까이 있던 소환진 두 개가 남았으므로, 카델은 그 소환진 사이에 자리 잡았다.
한 개. 부하들보다 먼저 남은 소환진을 찾아낸 카델이 허둥지둥 그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소환진 안에 빠져들 기세로 몸을 기울였다.
‘빨리 나와, 가르엘.’
다시 나온 네가 진짜 마족의 날개를 달고 있대도, 한 쌍의 역안을 가졌대도, 푸르스름한 피부를 하고 있대도. 전혀 상관없으니까.
기도하듯 양손을 그러쥔 카델이 소환진을 응시하고. 쿵쾅거리는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던 때.
“……가르엘?”
그가 주시하던 마지막 소환진의 빛이, 완전히 꺼졌다.
“가르엘.”
떨리는 목소리가 가르엘의 이름을 불렀다. 힘없이 바닥에 꿇어앉은 카델이 들풀이 무성한 흙바닥을 연신 쓸어내렸다. 마법진의 흔적이 사라질 때까지 땅을 파 내리듯 문지르다, 그 위로 거친 숨을 뱉어 냈다.
이상했다.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져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가르엘은 어디 있지? 분명히 소환진을 타고 나온다고 했는데. 소환진을 전부 정리하고, 마지막 하나 남은 소환진을 통해 빠져나오겠다고. 그리 말했다고 했는데.
부들거리는 주먹을 움켜쥔 카델이 이를 갈았다.
“요젠!”
발작적인 외침에 반응한 요젠이 조용히 그의 곁에 섰다. 배신감이 아른거리는 날카로운 눈빛이 요젠의 얼굴을 훑어 냈다.
“가르엘이 소환진을 타고 나온다고 했잖아. 너한테 그렇게 말했다며.”
요젠은 말수와 더불어 표현도 적은 사내다. 그런 사내의 속내를 알아내기 위해 카델은 그의 미세한 표정 변화에 집중해야 했다. 그가 어떤 상황에 무슨 표정을 짓는지.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 외우듯 기억해 왔다. 그런 카델이었기에,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거짓말이었어……?”
“…….”
“……어떻게?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해……?”
온몸이 오한이라도 든 것처럼 벌벌 떨려 왔다. 떨림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었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카델이 요젠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힘도 들어가지 않는 손아귀의 움직임을 따라 요젠의 몸이 맥없이 흔들렸다.
“가르엘이 뭐라고 얘기한 거야. 얘기를 하긴 했어? 걔한테 뭘 듣기는 했냐고. 요젠, 대답해.”
울고 싶지 않음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아직 끝이 아니다. 가르엘을 구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분명 그럴 텐데도 전부 끝난 것처럼 흐르는 눈물이 화가 났다. 카델은 굳게 다물린 요젠의 입술을 노려보며 거칠게 멱살을 흔들었다.
“대답해! 어서!”
이렇게 끝날 리 없다. 가르엘도 다 생각이 있을 것이다. 가르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과의 영원한 이별을 택할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살아남아, 어떻게든 마계를 벗어나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위태로운 믿음은 요젠의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깨어졌다.
“소환진의 근원이 마계에 있으니까. 소환진을 완벽하게 해제하려면 인간계가 아닌 마계에 있어야 한다고 했어. 카델이 알면 분명히 따라 들어오려고 할 테니, 잘 둘러대 달라고…….”
조금씩 작아지던 음성은 결국 말을 끝맺지 못했다. 카델은 내쉬지 못한 숨을 연신 들이마시며, 힘없이 몸을 비틀거렸다. 조금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가르엘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방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굳게 쥐고 있던 요젠의 단복을 놓아준 그가 천천히 거리를 벌렸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참을 수 없는 원망이 온몸으로 새어 나왔다. 그것이 자신에게 거짓을 고한 요젠을 향한 것인지, 기어이 희생을 택한 가르엘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요젠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농담의 기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의 죄스러운 태도에. 카델은 서서히 무너졌다.
“이제 다 끝났단 말이야. 이제 전부……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이 비극을 되돌릴 힘이, 자신에겐 남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전부 끝났다. 모든 것을 바쳐 기어이 해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시야가 흐리게 번졌다. 자신의 앞에 선 요젠과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부하들. 너머에서 봉인을 축하하는 마법사들과 소환진 소멸의 이유를 궁금해하는 단장들, 뒤늦게 동료의 생사를 확인한 기사들의 한숨까지. 모조리 현실감이 없이 아득해졌다.
승리의 기쁨에 잠긴 사람들 틈에서, 카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무력하게 뒷걸음질 치는 것뿐이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카델은 하지도 못할 도망을 택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기사 ‘가르엘 몬자시’의 영향력이 걷잡을 수 없이 증가합니다.」
「해당 기사를 위험인물로 간주. ‘피할 수 없는 죽음’ 디버프를 생성합니다.」
흐려지는 세상 속, 유일하게 선명한 시스템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