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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남은 시간은 고작 3분이다. 카델은 좀처럼 쓰러지지 않는 에밀리아를 좇으며 턱에 힘을 주었다.
‘움직임이 너무 빨라. 그만큼이나 당했는데도 지치지 않은 거야?’
마법에 당한 에밀리아의 육체는 수복되지 못한 상처로 가득하다. 뿐만 아니다. 루멘에게 당한 왼팔은 여전히 비어 있고, 암흑 마력이 끝까지 파고든 오른쪽 눈은 완전히 시력을 잃었을 터. 그에 반해 카델은 큰 상처 하나 없이 에밀리아를 상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한계까지 몰린 에밀리아에게 최후의 일격을 먹일 타이밍이 생겨야 하는데.
‘정말이지…… 최종 보스답네.’
급박한 상황임에도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내가 그 고생을 하면서까지 찾아왔는데, 싱겁게 죽으면 허탈하잖아.’
남은 시간이 3분밖에 없다면, 그 안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으면 된다. 깊게 숨을 들이쉰 카델이 쫙 펼친 양손을 맞댔다. 시공간을 채운 마법을 유지하는 동시에, 체내에 남은 모든 마력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코밑을 타고 흐르는 뜨끈한 감촉을 무시하고, 눈알이 빠질 듯한 압력과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 또한 무시했다.
‘이상하게 자꾸 네가 떠오르네……. 같은 마법사라 그런가?’
영창 따윈 필요 없다. 카델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제가 아는 한 가장 효과적으로 전장을 지배할 수 있는 마법을 전개했다.
[영구동토]. 물론 원조는 따라가지 못하겠지만, 그저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빙판……?”
광활한 시공간을 가로지르며 펼쳐진 빙판에 미친 듯이 돌격하던 에밀리아의 표정이 구겨졌다. 발아래에만 깔린 것이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든 에밀리아의 시야 가득, 거울처럼 투명한 얼음 장막이 들어찼다. 위아래 수평으로 펼쳐진 빙판이 그녀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잠시 공격을 멈춘 그녀의 맞은편. 카델은 가볍게 날개를 움직여 빙판 위로 착지했다.
“슬슬 답답해져서 말이야.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리 좀 마련해 봤어. 어때. 마음에 안 들어?”
자신의 시공간에 직접 전장을 만들어 낼 줄이야. 이렇게 되면 카델은 이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이동하며 공격의 범위를 넓힐 수 있게 된다. 반면 자신의 행동반경은 좁아지고, 카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빙판을 딛기라도 하는 순간. 곧장 발을 붙들리게 되리라.
서로의 의중을 짐작하는 교차된 시선 속으로 날 선 적의가 오갔다. 에밀리아는 겨우 짐작만 할 뿐,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알지 못한다. 끝까지 여유를 꾸며 내고, 그녀가 최후의 발악조차 하지 못하도록 끝장을 내 주리라.
제가 만든 빙판 위에서, 카델은 다시 한번 마법을 준비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기! 갑자기 프러포즈라니, 황홀해서 죽어 버릴 것 같아! 내 심장이 터진대도 남은 시체랑 결혼식을 올려 줘.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잔뜩 흥분한 라이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델의 고개가 빠르게 움직였다.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조급하게 움직이던 다갈색의 눈동자 속으로 곧 하나의 복도가 들어찼다. 전투의 여파를 아슬아슬하게 피할 정도로 거리를 벌린 복도의 단면. 그 너머에 부하들과 엑토, 모들렌이 자리하고 있었다.
찰나의 시선만으로도 반의 부재를 눈치챌 수 있었으나. 그 이유를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기어이 싸움을 방해하러 왔나 보네.”
함께 인간들을 발견한 에밀리아가 히스테릭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에게는 안된 일이었지만, 카델에게는 쾌재를 부를 만큼 잘된 일이었다.
“이걸 어쩌냐. 네 추측대로 내 힘이 일시적인 거였대도, 마무리를 지어 줄 기사들이 저렇게 많이 남았는데.”
남은 시간 안에 결착을 내 주리라. 카델은 [영구동토]의 면적을 넓히기 시작했다. 부하들이 있는 복도와 이어 그들을 빠르게 합류시켜야 했다.
“네 마음대로 하게 둘 것 같아?”
카델의 작전을 눈치챈 에밀리아가 모든 공격을 [영구동토]의 위로 쏟아부었다. 처음부터 거슬리던 빙판이다. 이것이 마밀 키파의 불길처럼 골칫거리를 끌어오도록 놔두진 않을 것이다.
‘제발 적당히 강하란 말이야.’
대체 그녀가 가진 힘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카델은 [영구동토]를 내리찍는 무시무시한 기운의 충돌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영구동토]는 라이돈의 마법처럼 완성도가 높지 않다. 이런 식의 맹공이 쏟아진다면 아군을 안전하게 데려오는 일은 더욱 어려워질 터. 마력을 거두고 에밀리아를 저지하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 걸까.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이건 우리의 버진로드야!”
시공간을 울리는 경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복도에서부터 널찍한 빙판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얼음 결정이 부딪히며 만들어 낸 맑은 마찰음, 피어나는 하얀 냉기. 순식간에 몸집을 불리던 빙판이 기어이 카델의 [영구동토]와 입을 맞췄다.
‘라이돈……? 제정신이야?’
고민할 것도 없는 라이돈의 힘이다. 그의 돌발 행동에 카델이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자신이 대마법인 [영구동토]를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각성제나 다름없는 약의 힘 덕분이었다. 약이 없었다면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마법.
그러나 라이돈은 각성제는커녕 치료제도 먹지 못했고, 한차례 폭주를 겪은 데다 회복도 덜 된 몸으로 전투를 이어 오지 않았는가. 그가 만들어 낸 빙판은 규모가 크지 않아도, [영구동토]와 결이 같았다. 그런 마법을 전개할 정도의 마력이 남았을 리 없는데.
카델의 예상을 증명하듯 가르엘이 무어라 잔소리를 쏟아 내는 모습이 보였다. 그럼에도 라이돈은 못 들은 척 빙판을 보강할 뿐이었다. 그의 고집을 누가 꺾겠는가. 결국 카델은 한숨과 함께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덕분에 바라던 기회를 잡게 되었으니 그걸로 됐다.
“날 앞에 두고 얼음 부술 여유가 있나 봐? 에밀리아. 그만하고 이쪽을 봐. 어서 끝장을 내자고.”
“친구들이 도착하니까 아주 의기양양해졌네. 어차피 여긴 내 시공간이야. 한데 뭉쳐 봤자 다시 떨어뜨려 두면 그만이지.”
“아직도 그럴 힘이 남았어?”
힘이 남았다면 곤란하다. 이젠 정말 남은 시간이 없었고, 여기서 다시 에밀리아가 아군을 떨어뜨려 놓는다면. 천장까지 올라갔던 승률이 지하를 뚫고 내려가게 되리라.
아군이 도착할 때까지 에밀리아의 주의를 모조리 끌어와야 했다. 마력을 쏟아붓는다면 짧게나마 그녀를 압도할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한 카델이 연쇄 마법을 준비하던 순간이었다.
“큽……!”
공중에 떠오른 에밀리아가 일순 가슴께를 붙들며 인상을 구겼다. 허공에 멈춘 그녀의 표정에선 당혹감과 낭패감, 희미한 충격까지 아른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힘이 동나기라도 한 걸까? 카델의 집요한 시선 속에서, 에밀리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어느 한 지점을 바라보았다. 아주 먼 곳의, 아주 작은 점을. 자연스럽게 에밀리아의 시선을 좇은 카델의 미간이 조금씩 구겨졌다.
“저건…….”
고요하고 어두운 시공간 너머. 정체 모를 파편과 동강 난 복도만이 떠다니는 그곳에, 붉은 점 하나가 떠올라 있었다. 마치 행성의 폭발을 따라 하듯 새빨갛게 물든 기운의 덩어리. 화려한 태양처럼 이글거리고, 진득하게 뭉친 채 발광한다. 그 붉은 기운의 정체를 파악한 카델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반.”
저것은 분명한 반의 오라였다. 카델이 지금껏 보아 왔던 그 어떤 기운보다 강렬하고 사나운, 제 부하의 기운. 오라가 왜 저렇게 먼 곳에서 폭발하고 있는 걸까? 아군의 틈에 반이 없던 이유와 연관이 있을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의 오라가 에밀리아에게 영향을 주고 있음은 확실했다.
‘저렇게 떨어진 곳에서 영향을 줄 만한 공격이라면……. 분신인가? 진즉에 해치운 줄 알았는데, 뭔가가 더 남았던 모양이네.’
지금껏 어떤 공격에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돌격만 해 왔던 여자다. 그런 그녀가 적을 앞에 두고도 고통을 드러낼 정도라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카델의 예상대로, 에밀리아는 전에 없이 지독하게 몰아치는 통증과 공허함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분신의 핵을 없앴어. 대체 어떻게……?’
영혼의 일부를 나눈 분신이다. 그 분신을 쓰러뜨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거슬렸건만. 여태 핵이 깨지지 않았기에, 인간군이 모습을 드러낸 때에도 에밀리아는 내심 그들의 등장을 반겼다. 분명 그들에게 분신의 핵이 있을 테니, 죽이고 빼앗아 힘을 보충하려 계획한 것이다. 그런데 이 꼴은 대체 무엇인가.
입 안으로 울컥 핏물이 차올랐다. 혀끝에 맴도는 피의 맛이 낯설었다. 결국 치미는 욕지기를 버티지 못한 에밀리아가 그대로 피를 게워 냈다. 더는 되찾아 올 힘이 없다. 카델 라이토스와의 전투로 엉망이 된 이 몸이, 지금 그녀가 가진 전부인 것이다.
“큭, 크크…….”
실성한 듯 튀어나오는 웃음을 멈출 도리가 없었다. 축축한 입가를 쓸어 낸 그녀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좋아. 아주 좋네.”
마왕이 된 자신이 이토록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 정도는 되어야 재미가 있지 않겠는가. 이 정도 싸움에선 이겨 줘야, 마계를 해방하는 맛이 있는 거다.
에밀리아는 더 이상 자신의 완승을 믿지 않기로 했다. 인정했다. 카델 라이토스는 강하고, 그들 인간에게도 승률은 존재한다는 것을. 그러니 지금부터, 진창에 빠질 각오로 그들을 철저히 무너뜨리겠노라. 허공에서 펄럭이던 날개가 경직된 것처럼 빳빳하게 곤두섰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에밀리아의 신형이 사라졌다.
“뭣……!”
잔상조차 남기지 않은 어마어마한 속도. 카델의 눈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아군이 접근하고 있는 한, 에밀리아의 동선엔 너무 많은 경우의 수가 생긴다. 자신에게 장막을 집중하기에도, 아군에게 장막을 나눠 주기에도 애매한 상황. 그렇게 카델의 망설임이 극에 달한 때.
“정신 똑바로 차리는 게 좋을 거야.”
아무런 전조도 없이, 에밀리아의 신형이 카델의 눈앞에 드리웠다. 반사적으로 날개를 구부린 카델이 에밀리아의 접근을 저지하려 했으나.
“내가 널 인정했거든.”
정면에서 몰아치는 충격과 동시에, 카델의 뒤편으로 무수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마법진에서부터 빠져나오는 날붙이의 향연. 뒤늦게 그 존재를 깨달은 카델이 공격을 회피하려 했으나. 끊임없이 몸을 밀착해 오는 에밀리아의 돌진을 튕겨 내기란 어려웠다.
‘젠장, 다치면 곤란한데……!’
안 그래도 촉박한 시간이다. 싸움에 방해가 될 요소는 하나도 허락해선 안 됐다. 카델은 어떻게든 에밀리아를 떨쳐 내고 마법진을 피해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
카델의 행동보다도 먼저, 서늘한 냉기가 그의 몸을 감쌌다.
슈슈슈슈슉.
마법진에서부터 발사된 날붙이가 사정없이 허공을 할퀴어 댔다. 둔탁한 타격음이 귓가를 시끄럽게 울렸다. 에밀리아를 떨쳐 내지 못한 탓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카델은 앞뒤로 조여 오는 모든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를 보호한 얼음 장막 덕분이었다.
“자기, 내가 왔어!”
“라이돈……! 얘들아!”
생각보다도 빠르게 합류한 그들이 카델의 전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카델은 그제야 에밀리아를 떨쳐 내고는, 날개를 펄럭이며 아군을 등졌다. 에밀리아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듯 선 카델이 반가운 얼굴을 확인하는 대신 외쳤다.
“힘을 아끼지 마! 총력전이다!”
그 이상의 명령은 필요 없었다. 적린 기사단과 엑토, 그리고 모들렌까지. 쓸데없는 전술은 접어 둔 채 모든 기운을 개방했다. 지금이 바로 지겹도록 쫓아온 마왕을 토벌할 절호의 기회였다.
「[데폴로의 분노] 유지 시간 : 00 : 00 : 58」
1분이 채 남지 않은 시간.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카델은 자신을 지나쳐 돌격하는 부하들의 뒷모습을 한눈에 넣으며, 심장이 터질 듯한 고양감을 느꼈다.
이 자리에 서기까지 그들이 겪어야 했던 모든 고난과 역경.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겨 낼 수 있도록 만든 소중한 마음. 자신이 지켜야 할 전부를 앞에 두고, 패배를 상상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모든 마력을 개방한 카델의 마법과 함께, 아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영구동토]는 오롯이 카델의 영역. 에밀리아의 마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빙판에서, 그들의 움직임은 자유로웠다.
푸른 벼락과 함께 새겨지는 섬광. 검은 마기를 지워 내는 빛. 튕겨 나는 몸을 보호하는 얼음. 흩어진 마력 사이를 그림자처럼 지나는 암기. 사정없이 쏟아지는 공격이 어두운 시공간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자신에게 남은 모든 것을 끌어내 단 하나의 적에게 쏟아붓는 아군의 후방.
쿠웅, 쿠웅―
시야가 흔들릴 만큼 강한 진동을 동반한 묵직한 발소리가 대기를 울렸다. 그 소리의 주인을 짐작하고 있음에도, 카델은 굳이 뒤를 돌아보았다.
걸음걸음을 따라 빙판에 새겨지는 짙은 균열.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는 붉은 기운과 호흡을 따라 흩어지는 증기. 중력을 거스르듯 묵직하게 공간을 짓누르는 오라의 중심에, 익숙한 인형이 있었다. 끝이 뾰족하게 솟구친 흉악한 악귀의 가면이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으나. 카델은 일말의 거리낌 없이 그를 반겼다.
“가자, 반. 네 모든 걸 여기서 보여 줘.”
자신의 옆에 있었기에 언제나 망가질 수밖에 없던 사내.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다면, 불행할지언정 괴롭지는 않은 삶을 살았을지 모를 사내. 카델에게 있어 반은 그런 존재였다. 그랬기에 그의 사랑을 받을 때면 언제나 목이 메었다.
그리고 결국 여정의 마지막에서조차, 그는 자신을 위해 망가지기를 택했다. 그럼에도 자신은 그대로 온몸을 부딪치라고, 망가지더라도 끝까지 싸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돌아올 대답이 무엇일지, 걱정마저 관둔 채로.
“…….”
반의 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부서진 빙판의 파편이 그의 주위를 넘실댔다. 쿵, 쿵, 묵직한 소리를 내며 걸어온 그는 카델의 [영구동토]에 발을 들이고서야 겨우 파괴를 멈췄다.
걸리는 것 없이 마주친 시선. 카델은 두꺼운 가면 아래 드러난 새빨간 눈동자를 응시했다. 줄어드는 시간이 아깝지 않을 만큼 소중한 눈맞춤. 고작 수 초일 뿐이었다. 눈을 깜빡이면 끝날 만큼 짧은 시간을 움켜쥔 채, 반은 그대로 카델을 지나쳐 달려갔다.
그의 뜀박질을 따라 [영구동토]에 요란한 진동이 번지며, 빠르게 퍼지는 오라가 시야를 붉게 물들여 갔다.
아군과 적을 구분하지 않는 오라는 그저 닿는 것만으로도 아릿한 통증을 안겼다. 그에 반응한 라이돈의 장막이 한층 더 두터워졌다. 오라를 잘 관리하라는, 평소라면 곧장 튀어나왔을 잔소리마저 잠잠했다. 그들은 오로지 에밀리아만을 바라보며, 혼신의 힘을 다해 무기를 휘두를 뿐이었다.
그들이 잃은 것은 무수했고, 얻을 것은 찬란했다. 지금까지의 삶을, 남아 있는 미래를 모조리 바쳐서라도 손안에 쥐고 싶은 것. 이곳의 모두가 각자의 희망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지켜 줄게. 너희의 희망을.’
「[데폴로의 분노] 유지 시간 : 00 : 00 : 42」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생사결의 싸움을 치러 왔는가. 숨 쉬듯 마법을 쏟아 내며, 카델은 문득 생각했다. 죽을 각오로 넘어왔던 수많은 역경. 어느 때는 힘이 모자랐고, 어느 때는 인원이 모자랐고, 어느 때는 행운이 모자랐다. 그랬기에 쉬운 싸움 하나 없이 몇 번이고 바닥을 구르며 계단을 올라야 했다. 매번 죽음을 불사하며, 모든 것을 쥐어 짜내며 고난을 이겨 냈다.
하지만 이 순간. 진정한 최후의 결전을 치르는 지금, 카델은 절감했다. 지금이야말로 자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음을.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어도 좋을, 생명 한 톨 남기지 않고 쏟아부어야만 후회 없을 싸움이 바로 이것임을.
전혀 두렵지 않았다. 훅훅 빠져나가는 마력도, 빠르게 소모되는 육체도, 줄어드는 제한 시간도. 치열하게 싸우는 부하들의 모습을 눈에 담는 동안엔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영구동토]의 위로 창처럼 내리꽂히는 벼락. 우람한 벼락이 만들어 낸 찰나의 섬광이 시야를 뚝뚝 끊어 낸다. 연속된 벼락을 따라 뒤바뀌는 풍경들이 영화의 장면처럼 이어졌다. 명화와 같은 아군의 화려한 몸놀림 너머, 형형색색의 불줄기가 아름다움을 더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투지가 시공간을 휘몰아치고.
기어이 오라에 붙들린 에밀리아에게 사정없는 공격이 퍼부어졌다. 포효 같기도, 기합 같기도 한 찢어지는 비명이 시공간을 울렸다.
「[데폴로의 분노] 유지 시간 : 00 : 00 : 30」
한차례 폭발한 마기의 충격을 따라 아군이 빙판을 굴렀다. 동시에 빙판을 가득 메우는 마기. 에밀리아의 것이 아니었다. 밀려나는 그들의 몸을 붙잡고, 새로운 힘을 불어넣는 마기의 주인은 가르엘. 날개를 만들어 낸 그가 에밀리아의 퇴로를 차단하고. 무섭게 뻗친 오라의 줄기가 그녀의 발목을 휘감았다.
그녀를 노리며 새겨지는 섬광과 검기의 궤적을 따라 내리치는 번개. 허공에 떠오른 그녀와 빙판 사이로 얼음 계단이 생성되며, 검은 그림자가 그 위를 내달렸다. 그림자처럼 암흑에 잠긴 요젠이 소리 없이 에밀리아를 덮치고. 순식간에 날개를 잃은 그녀의 몸이 맥없이 추락했다.
「[데폴로의 분노] 유지 시간 : 00 : 00 : 20」
양손에 마기의 검을 그러쥔 에밀리아가 사나운 기운을 흩뿌렸다. 초승달을 닮은 검기가 천장과 바닥을 내리찍을 때마다 몸이 찢어질 듯한 충격파가 번졌다.
엑토의 우렁찬 기합이 빙판을 울리며, 어마어마한 무형의 기운이 휘몰아쳤다. 우직하게 내리찍은 대검이 그녀의 왼쪽 검을 가로막자, 기다렸다는 듯 휘두른 반의 대검이 그녀의 오른쪽 검을 가로막았다. 눈 깜짝할 새 주도권을 빼앗긴 그녀의 위로 다시금 맹공이 쏟아졌다.
「[데폴로의 분노] 유지 시간 : 00 : 00 : 10」
물러서야 살 수 있으나, 그녀에게 물러날 곳은 없었다. 엑토와 반, 어느 한 쪽도 떨쳐 내지 못한 에밀리아가 서둘러 마기의 장막을 두르고. 카델과 라이돈의 마법이 그녀의 장막을 거세게 두드렸다. 기운을 흩뜨리는 날 선 마력에 견고하던 장막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조금의 틈도 놓치지 않는 검기와 암기가 장막을 매섭게 파고들었다.
「[데폴로의 분노] 유지 시간 : 00 : 00 : 5」
카델의 시야가 흐려졌다. 뜨거운 무언가가 눈물샘을 치고 올랐다. 그것이 눈물이 아님을 알면서도, 카델은 더욱 강한 마력을 끌어 올렸다. 가빠지는 호흡을 따라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카델은 아예 눈을 감기를 택했다. 그리고 마왕의 시공간, 고작 그 한편을 차지한 제 빙판 위로 모든 것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3초.
아군의 틈새에서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한 목소리였으나, 내용을 파악할 여력은 없었다.
2초.
툭, 투둑. 무언가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이 자신의 몸에서 나는 것인지, 마왕에게서 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1초.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마법의 여파도, 맹렬하게 몸속을 순환하던 끝없던 기운도. 빠른 속도로 사그라지고 있었다. 좀 전까지의 굳건함이 우스울 정도로 가뿐하게 힘이 빠졌다.
「[데폴로의 분노]의 유지 시간이 종료됩니다. 금기된 힘이 자취를 감춥니다.」
숨통이 오그라드는 듯한 아찔한 감각과 함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곧 머리가 으깨질 듯한 둔탁한 충격을 느낀 카델이 이를 악물었다. 욱신거리는 눈을 거칠게 문지르자, 뿌옇던 시야가 차차 되돌아왔다.
바닥에 처박힌 고개를 일으키는 카델의 표정이 서서히 경직되어 갔다. 그의 시야에 들어찬 것은 빙판이 아니었다.
익숙한 붉은 카펫. 기다랗게 이어진 복도의 바닥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설마.’
후들거리는 손으로 애써 바닥을 짚고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불쑥 튀어나오는 기침을 따라 핏방울이 퍼졌다.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만큼 힘들었으나, 카델은 오로지 자신의 앞에 자리한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일어섰다.
“컥… 커흡……!”
괴로운 신음이 텅 빈 복도를 울렸다. 카델의 것은 아니었다. 완전히 몸을 세운 그는 피가 묻은 입술을 닦아 내며 눈을 끔벅였다.
달린 문 하나 없이 기다랗게 이어진 복도. 이전의 복도와는 달리, 그가 선 복도는 조금만 멀리 내다봐도 끝이 보였다.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작달막한 복도의 위. 카델의 시선이 바닥에 엎어진 채 괴롭게 기침하는 에밀리아를 담아냈다.
그녀는 이제까지의 여유와 강인함을 모조리 잃은 채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몸을 바르작거릴 때마다 자주색 핏물이 흥건한 흔적을 남겼다. 완전히 뜯어진 날개와 곳곳에 남겨진 짙은 상흔. 더는 재생을 위한 마기도 피어나지 않는다.
‘남은 힘을 전부 짜내 이 복도를 만든 건가.’
자신이 최후의 힘을 짜내 그녀를 몰아붙이는 동안. 그녀 역시 최후의 힘을 짜내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어찌 보면 탁월한 선택이다. 자신은 이미 모든 힘을 잃은 상태였으니. 만약 에밀리아에게 남겨 둔 힘이 있다면, 자신은 이곳에서 죽게 되리라.
“……그래도 상관없어, 에밀리아. 내가 여기서 죽는대도 네 목숨을 거둘 존재는 넘쳐나니까.”
잔뜩 쉰 목소리가 힘없이 흩어졌다. 카델은 비척대는 몸을 복도의 벽면에 기대곤 실실 웃었다. 그에 화답하듯 힘겹게 고통을 삭이던 에밀리아 역시 흐릿한 웃음을 내뱉었다.
“이젠 아무래도 좋아.”
넝마가 된 그녀가 작게 중얼거리며 차오르는 피를 삼켰다. 하나 남은 눈이 카델을 담아냈다.
“너만 죽이면 돼. 그 아이의 복수는 하고 떠나야지.”
“…….”
“반쯤은 도박이었는데. 이제 네 힘도 끝이 났나 보구나.”
짧게 숨을 들이쉰 에밀리아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일어나기를 멀뚱히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으나, 카델에게는 그녀를 저지할 힘이 없었다. 벽에 기댄 채 정신을 가다듬는 것이 고작이었다.
가만 서 있기만 해도 피가 줄줄 흐르는 몸뚱이에 힘을 주며, 에밀리아가 두 주먹을 그러쥐었다. 카델을 향한 그녀의 시선에는 오로지 독기만이 담겨 있었다. 카델 라이토스를 죽일 수만 있다면 뭐든 상관없다는, 그 지독한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조심스럽게 눈을 내리깐 그가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여기서 쿤라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면 송장이나 다름없는 에밀리아를 토벌하기란 간단해진다. 도움을 구하듯 간절하게 펜던트를 그러쥐던 카델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허탈한 웃음을 흘린 그가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이 얼마나 처절한 싸움인가. 서로의 전부를 내놓고도 결국 끝을 내지 못해, 마지막까지 멋없는 개싸움을 하게 생겼으니.
“의미는 달라도, 에밀리아. 난 죽을 때까지 널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녀 또한 같은 생각인 걸까. 당연히 돌아올 줄 알았던 코웃음 하나 없이, 비장하게 눈을 번뜩인 그녀가 몸을 날렸다.
휘두르는 주먹에 희미한 마기가 번지고, 미약한 충격을 방어한 불의 장막은 하찮은 불씨가 되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밀려나고, 휘청거리고, 별것 없는 반격을 이어 간다. 그들의 싸움은 모든 것을 쏟아부은 자들의, 그럼에도 끝내지 못한 지겨움이었다.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한 호흡. 공격의 궤도를 좇으면서도 반응하지 못하는 몸. 망가진 라이터처럼 어설픈 불씨만 탁탁 튀겨 댈 뿐, 제대로 된 마법을 완성하진 못한다. 그녀 역시 같은 처지임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가.
“난 내 모든 걸 걸었어. 모든 걸 걸고, 결국 가장 커다란 걸 잃었어.”
곧 죽을 듯 숨을 할딱이면서도 에밀리아는 끊임없이 팔을 휘둘렀다. 마법을 사용할 기운은 남지 않은 것일까. 다수로 한 명을 노리던 이쪽과는 달리, 그녀는 홀로 다수를 상대해야 했으니. 어쩌면 자신보다도 빨리 한계에 봉착했을지 몰랐다.
“가장 커다란 걸 잃어? 여태 네가 빼앗아 온 것들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 모든 건 전부 네 욕심 때문이야, 에밀리아. 인정하지그래.”
에밀리아의 기세가 조금씩 꺾이고 있었다. 내지르는 주먹에는 맥이 없고, 애써 끌어 올린 마기 역시 금세 흩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만큼은 처음 싸움을 시작한 것처럼 매서웠다.
“맑은 하늘을 보고 싶은 게 욕심이라고? 이 지긋지긋한 지하 세계를 벗어나는 게 욕심이란 말이야? 아아, 인간들이란!”
“자유를 갈망한 것처럼 말하지 마! 한 줌의 자유도 꿈꿔 본 적 없는 놈들이, 불쌍한 척 굴지 말라고. 너흰 그냥 세계의 패자가 되고 싶었을 뿐이잖아. 죄 없는 생명을 학살하면서 즐거워하던 주제에 이제 와서 불쌍한 척을 하겠다고?”
“복수야! 우리를 이딴 지하에 처박아 둔 너희에 대한 복수! 너흰 지금 그 죗값을 받지 않겠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뿐이라고!”
쩍쩍 갈라진 건조한 외침이 복도를 울렸다. 연약한 장막을 따라 몸이 크게 비틀거렸다. 그래 봤자 보잘것없는 공격이다. 카델은 어떻게든 직접 공격을 회피해 보려 했으나. 완전히 힘이 빠져 버린 두 다리로는 바닥을 딛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게 인간을 학살해 왔으면서, 인간들이 너흴 가뒀다는 게 그렇게 억울해? 진짜 자유를 원했다면 대화를 시도했어야지.”
“대화? 한낱 인간 따위에게 머리를 숙였어야 한다는 거야?”
“그래, 못하시겠지. 그러니까 나는 너를 영원히 이해할 마음이 없어. 뿌리부터 글러 먹었거든.”
“이해받고 싶다는 생각 따위 한 적도 없어!”
악에 받친 소리와 함께 내지르는 공격에 결국 중심이 무너졌다. 에밀리아가 넘어진 카델의 위로 쓰러지듯 올라탔다. 둔탁한 충격이 전신을 두드리고. 눈을 부릅뜬 카델이 양팔을 교차했다. 대체 어디서 나온 힘인 건지. 카델을 짓누른 채 마기를 쏟아붓는 에밀리아는 악착같았다.
“널 죽여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게 가장 끔찍해. 끔찍하다고, 카델 라이토스!”
쇄도하는 공격을 따라 늘어진 흑발이 살갗을 간지럽혔다. 날 선 외침이 귓속을 파고들고, 공격의 반동으로 몸이 북처럼 울려 댄다. 아주 엉망이었다.
결국 미약한 장막을 거둔 카델이 더욱 미약한 불덩이를 쏘았다. 지척에 있는 대상을 노린 공격은 시전자에게도 피해를 주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거 정말 위로가 되는 말이네. 네가 결국 진창에 처박혔구나.”
힘없는 폭발은 카델의 살갗을 그을렸지만, 에밀리아의 육체에는 흠집을 내지 못했다. 고위 마족의 몸은 가죽도 두꺼운 모양이었다. 절망적인 사태에 카델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틀려. 진창에 처박힌 건 너야. 이미 한참 전에 처박히고도 그걸 모르고 있지. 말했잖아.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승리는 가질 수 없어.”
거친 주먹이 안면을 가격하며, 카델의 고개가 힘없이 돌아갔다. 쌕쌕 바람 빠지는 숨소리와 함께 입 안으로 지겨운 피 맛이 맴돌았다. 혀 밑에 모여든 핏물이 저항 없이 새어 나왔다. 카델은 바닥에 뺨을 댄 채 눈을 깜빡였다.
“내가 잃은 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많은 걸 잃게 될 거야. 기대해. 네가 만약 살아서 이 성을 나간대도, 네게 미래는 없어.”
대꾸하지 않았다. 카델은 돌아간 고개를 바로잡지도 않은 채, 무력하게 구타당했다. 그 태도를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에밀리아가 흥분에 잠긴 눈을 번뜩이며 온몸에 힘을 더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으윽……!”
얌전히 숨죽이던 카델이 기습적으로 에밀리아를 떨쳐 냈다. 그녀를 제 위에서 밀어 낸 그가 도망치듯 바닥을 기었다. 더듬더듬 넘어간 몸을 일으킨 에밀리아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이제 와 볼품없이 도망가려는 것인가. 고작 저런 인간에게 셀레브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걸 막지 못한 스스로에게 혐오감이 들 정도였다.
성난 짐승처럼 이를 간 에밀리아가 다시 카델의 뒤를 덮쳤다. 요란한 타격음과 함께 한데 뭉친 그들이 복도를 굴렀다. 카델은 기도하듯 양손을 모은 채 정신없이 굴러가는 몸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에밀리아의 몸이 아래를 향한 순간.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내리눌러 위에 올라탔다.
한순간에 완벽히 뒤바뀐 위치. 표독스럽게 이를 드러낸 에밀리아가 카델을 떨쳐 내려 곧장 공격을 퍼부었다. 자유로운 한쪽 팔이 거침없이 카델의 몸뚱이를 두드렸다. 카델은 그 모든 공격을 묵묵히 감내했다.
“난 내가 이 성에서 죽는대도 좋아. 마계에 내 시체가 버려져도, 그 시체가 평생을 농락당하다 썩어 버린대도 상관없어.”
“웃기지……!”
날카로운 외침은 끝을 맺지 못했다. 크게 벌어진 눈과 숨을 머금은 채 굳어 버린 입술. 경악으로 물든 시선이 미끄러지듯 카델을 훑어, 그 아래를 향했다. 새하얀 가슴팍. 곧은 쇄골 아래, 간절하게 포개진 카델의 두 손이 있었다.
“기억해. 소린 경이 목숨 던져 만든 상처. 고작 이 작은 상처 하나 때문에, 너는 오늘 죽게 되는 거야.”
그가 움켜쥔 것은 요젠이 단 한 번을 곁에서 떨어뜨리는 일이 없던 단검이었다. 그런 소중한 단검이 복도 한편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모습을 발견한 순간. 카델은 멍하니 생각했다.
‘난 역시, 너희가 없으면 안 돼.’
나의 죽음은 고려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이 세계에, 온전해진 세계에 너희가 존재하기만 한다면. 나의 생은 그것으로 완성된다.
그녀의 가장 약한 부위에 꽂아 넣은 단검은 심장을 꿰뚫지는 못했으나,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카델은 제 미약한 마력을 남김없이 끌어모아 단검의 위로 쏟아부었다. 뜨거운 마력이 날붙이를 타고 마왕의 육체에 스며들었다. 발작하듯 발버둥 치던 그녀의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네게 승, 리는… 없… 어…….”
저주의 말을 지껄이며, 빠르게 탁해지는 눈빛은 끝까지 카델을 응시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최후의 발악일 뿐이었다.
발발 떨릴 정도로 강하게 힘을 주던 손이 느슨하게 풀렸다. 인형처럼 굳은 마왕의 얼굴 위로 투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카델은 자신이 울고 있음에 당황하면서도, 도저히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애도의 눈물은 아니었다.
“정말 해냈어. 내가, 우리가 해냈다고…….”
굳건하던 복도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균열이 번진 벽이 허물어지며, 파편 대신 새까만 기운이 내려앉았다. 천천히 에밀리아의 위에서 내려온 카델이 그녀의 옆에 누웠다.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잠에 들 것처럼 나른해진 몸으로, 어둠에 잠기는 시야를 받아들이는 것이 전부였다.
“……쿤라. 보고 있어요?”
자그마한 중얼거림과 함께, 그를 둘러싸던 복도가 완전히 허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