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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경! 절 보십쇼! 제가 누군지 알아보겠습니까?”
날카롭게 뻗친 마기의 줄기를 베어 낸 가르엘이 다급히 외쳤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분신의 맞은편. 마기의 검과 대검을 맞댄 반의 찡그린 얼굴이었다. 그의 외침에 붉게 물든 눈동자가 작게 흔들리는 듯하더니, 오라에 덮인 입술이 달싹였다.
“시끄럽게 굴지 마십쇼. 아직 멀쩡하니까.”
“아……. 아직이었나요? 표정이 하도 살벌하길래. 하하, 하긴. 반 경은 원래 단장님 볼 때 빼곤 항상 화난 얼굴이었죠.”
정신을 잡게 하려는 건지 나가게 하려는 건지. 울컥 치솟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른 반이 이를 갈았다. 가르엘의 역할은 함께 분신을 압박하며 위급 상황을 대비한 근접 치유술을 준비하는 것이지만. 반의 상태를 점검하며 그가 이성을 잃지 않도록 조절해 주는 역할도 있었다. 하지만 하는 짓을 보니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망할 도련님은 아직도 준비가 덜 된 건가?’
마왕의 공격을 직격으로 받는 탓에 몸 상태가 점점 저조해지고 있었다. 물론 즉각적으로 들어오는 치유술로 상처를 치료하고는 있지만, 정식적 스트레스는 해소해 주지 못하니. 위태로운 정신 싸움을 이어 가야 하는 그에게는 꽤 치명적이었다.
‘재촉할 수도 없고……. 젠장.’
재촉한다고 빠르게 해치울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다. 반은 불시에 꺼지고 돌아오길 반복하는 의식 속에서 꾸역꾸역 카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의 목소리를 되새기고, 그의 손길, 온기, 웃음소리, 부드러운 피부 따위의 감각을 떠올렸다. 다행히 그리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그가 싸우는 이유는 오로지 카델이다. 패배한다면, 하나의 순정으로 이어 온 자신의 삶에도 패배의 낙인이 찍힐 테니. 죽는 것보단 버티는 게 쉬웠다.
반은 망상인지 기억인지 모를 카델의 얼굴을 떠올리며 대검의 위로 강한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
루멘의 신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분신의 왼편에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이미 발도술을 마쳤다는 뜻. 항상 반 뼘 정도 뽑혀 있는 검을 납검하는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절단 난 몸뚱이가 분리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는 납검을 하지 않았다.
“반 경, 이거…… 저한테만 보이는 거 아니죠?”
가르엘의 당황한 시선은 분신의 왼쪽이 아닌 오른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왼쪽과 똑같이 분신에게 등을 보이고 선 루멘이 있었다.
두 명의 루멘이라니. 반은 분신의 마기를 버티며 이 황당한 상황을 이해해 보려 애썼다. 한 명만으로도 충분히 짜증스러운 존재가 두 명으로 늘어났다니? 끔찍한 절망감을 가까스로 떨쳐 내니 곧 루멘의 신형이 묘하게 흐릿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환상처럼 윤곽이 흐리게 번졌으나, 그만큼 환하게 빛났다. 저것은 루멘이 아닌 그의 잔상이다. 또한 잔상은 아주 미세하게 움직임을 이어 가고 있었다.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잔상의 행동이 조금씩 바뀌었다. 검집이 닫히고, 열리고, 다시 닫히고 열리기를 반복했다. 딛고 있는 발끝의 위치도, 보폭도, 머리칼의 위치까지도. 루멘은 정확히 한곳을 맴돌며 같은 발도술을 반복하고 있었다.
고작 4초. 반과 가르엘이 두 개의 잔상을 응시하며 분신을 붙들어 두던 시간은 고작 4초에 불과했다.
서걱.
횡렬로 교차한 기다란 섬광의 향연이 분신의 몸을 뒤덮었다. 일순 눈이 멀 것처럼 강렬한 빛이 그들의 시야를 가리고.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반의 시야 가득 들어찬 것은. 잘게 엇썰린 채소처럼, 모조리 어긋난 채 허물어지는 분신의 육체. 미끄럽게 흘러내린 납작한 육편이 검은 마기가 되어 흘러내렸다.
고요하고, 깔끔하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분신의 몸이 조각났다. 반은 곧 자신을 밀어붙이던 힘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너지는 분신의 너머, 입을 벌린 가르엘의 얼굴이 드러났다. 두 사내의 시선이 짧게 마주치고.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왼쪽 잔상의 자리를 차지한 진짜 루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전과 다를 것 없이 곧은 자세로 검을 남겁했다.
하지만 검을 들고 있는 그의 오른팔. 넝마처럼 찢긴 그의 단복 너머로, 하얀 팔을 핏줄처럼 타고 오른 푸른 기운이 비쳤다. 흰 피부 아래서 묵직하게 맥동하는 기운이 도드라졌다. 그다지 좋은 징조는 아닌지, 경직된 오른팔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루멘은 동료들이 자신의 상태를 언급하기 전, 먼저 뒤를 돌아 입을 열었다.
“1분 23초. 분신을 죽이는 데 걸린 시간이다. 이 정도 검술이면, 요젠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겠나?”
이런 건 대수롭지 않은 고통이라는 듯, 비스듬히 올린 입꼬리에 장난기가 맺혔다. 그제야 루멘의 팔에서 시선을 뗀 가르엘이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글쎄요. 워낙 재능 넘치는 사람이니. 비슷한 수준까진 올라왔으려나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대답에 루멘이 헛웃음을 뱉었다. 그에 천천히 긴장을 푼 반이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뭐야. 요젠한테 경쟁심을 품고 있었던 거냐? 고상한 도련님치곤 꽤 질척거리는 감정이군.”
“왜. 너한테 느끼는 게 아니라서 서운해?”
“아직 오라를 갈무리하지 않았거든. 열받게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러고 보니 너와 대련하지 않은 지도 오래됐군.”
가르엘은 틈만 났다 하면 투덕거리는 둘의 사이를 신기해하며 자연스럽게 가운데를 파고들었다.
“자, 우정은 나중에 쌓으시고. 다들 이걸 보십쇼. 모들렌, 너도 이리로 와.”
“죄송합니다, 단장…… 아니, 가르엘 경. 다리에 힘이 풀려서요. 그냥 큰 소리로 설명해 주시죠.”
“……내 뻔뻔함을 뛰어넘을 필요는 없는데.”
어깨를 으쓱한 그가 분신이 쓰러진 자리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질척한 액체로 변모한 마기가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꿈틀거리고 있었다.
“복도 바깥으로 빠져나가려는 것 같습니다. 분신을 쓰러뜨리긴 했지만, 그것만으론 기운까지 소멸시키지 못하나 보네요. 다른 방법이 필요하겠어요.”
“다른 방법……. 전혀 생각나는 게 없습니다만.”
“더 잘게 다져 봐, 도련님. 엉성하게 자르니까 이 사달이 나는 거 아냐.”
고작 한 움큼에 불과한 마기 처리에 여러 의견이 오가고.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아 골머리를 앓던 무렵이었다.
“어……?”
누구도 만든 적 없는 새하얀 마법진이, 마기의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은은하게 발광하던 마법진은 이내 투명한 구멍이 되어 아래를 비췄다. 복도의 바닥에 구멍이 뚫렸다면, 그 너머엔 필시 검은 시공간이 보여야 할 터. 하지만 그들의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검은 시공간이 아닌 동그란 금발 머리였다.
“라이돈……?”
루멘의 황당한 목소리와 함께 구멍 너머로 고개를 빼 든 라이돈이 눈을 깜빡였다. 호기심 가득한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둘러싼 동료들을 발견하고는, 이내 환한 웃음을 퍼뜨렸다.
“아하하! 진짜 요젠 말대로네? 자, 받아!”
라이돈은 조금씩 넓어지는 구멍에서 몸을 빼내며 그들을 향해 무언가를 냅다 던져 올렸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 낸 반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손안으로 시린 냉기가 퍼졌다.
“대체 뭘 얼린 거야? ……마기?”
묵직한 얼음덩이 속에 파묻힌 것은 다름 아닌 마기였다. 그 새까맣고 불길한 기운을 코앞에서 감지한 반이 진저리를 쳤다. 라이돈은 그런 반의 호들갑을 무시한 채 완전히 빠져나와서는, 구멍 아래에 머리를 대고 외쳤다.
“힘들어! 30초 뒤에 마력 거둘 거니까 그 안에 넘어와!”
대체 뭘 했다고 힘들다는 것인지. 과장된 한숨과 함께 땀도 나지 않은 이마를 쓸어내린 라이돈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루멘은 건조한 이마를 닦을 시간에 흥건한 코피나 닦으라고 하고 싶었으나, 돌아올 반응이 뻔해 말을 관뒀다.
“엑토 경! 잡고 올라오십쇼.”
구멍에서 새롭게 머리를 들이민 이는 엑토였다. 초췌한 꼴로 올라오는 그를 발견한 가르엘이 손을 뻗자, 잠시 그의 눈을 바라보던 엑토가 순순히 손을 잡고 몸을 끌어 올렸다.
“치유술 좀 부탁하지. 제대로 걸을 수 있을 정도면 되네.”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흐응, 그것 좀 버텼다고 빌빌거리다니, 한심해. 힘은 내가 다 썼는데 말이야.”
“라이돈 경의 말은 정신 건강에 좋지 않으니 무시하시고요.”
가르엘은 거의 기듯이 빠져나온 엑토를 복도의 벽에 기대게 한 뒤, 마찬가지로 일어날 기력이 없어 보이는 모들렌을 불러 함께 그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요젠이었다. 그는 조금씩 몸을 빼내던 둘과는 달리 담장을 타는 고양이처럼 가뿐하게 구멍을 넘었다. 라이돈은 그가 착지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장 마력을 거둬 구멍을 메웠다.
“이걸로 대장을 제외한 아군은 전부 모였군. 그쪽의 분신도 처리한 건가?”
“응. 좀 전에 처리하고 왔어.”
“내 대단한 마력 덕분이었지. 정말이지, 다들 나 없으면 어떻게 살려나 몰라. 난 카델 건데 말이야.”
라이돈의 말처럼 그 덕에 해치웠다고 하기엔, 요젠의 컨디션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제법 많은 기운을 소모한 듯 지쳐하는 그를 일별한 반이 묵직한 얼음덩이를 다시 라이돈에게 던져 주었다. 그의 행동에 전혀 집중하지 않던 라이돈이 제 가슴팍을 가격한 얼음덩이에 짜증을 냈다.
“내 넓은 가슴이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을 해! 치졸한 짓을 하네, 반!”
“개소리를……. 하. 됐고, 그 마기는 대체 뭐지? 혹시 너희 쪽도 처리한 분신에서 마기가 나온 거냐?”
대답은 라이돈이 아닌 요젠에게서 나왔다. 그는 벽에 몸을 기댄 채 답지 않게 피로를 드러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기가 이동하려는 곳이 마왕의 본체인 줄 알았어. 그걸 막으려고 라이돈의 마력으로 마기를 얼렸는데, 어쩌면 다른 쪽 분신과 합쳐지는 게 우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얼음 안에 가둬도 움직임은 멈추지 않아. 방향 정도는 가늠할 수 있으니까, 그 방향을 쫓아 이동 마법진을 설치해 보기로 한 거야. 만약 본체와 연결된대도 카델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마왕의 시공간에 이동 마법진을 설치했다고?”
루멘의 놀란 시선에 라이돈이 뭘 보냐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저 마를 새도 없이 흐르는 코피는 그런 무리를 행해서일까.
“다행히 세 번 만에 합류할 수 있었어. 이제 저 두 개의 마기를 합쳐 봐야지. 이후에도 계속 움직이려 한다면 그곳이 바로 본체가 있는 곳일 거야.”
“마기를 없애는 건 본체의 위치를 찾은 다음이어야겠군.”
반의 결론에 요젠이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긴 눈꺼풀 아래 고인 어둠 속, 익숙한 얼굴이 그려졌다. 자신들이 무사히 합류할 때까지, 그 역시 무사히 버텨 주기를. 걱정과 동시에 그의 무사를 믿었다. 카델은 그가 봐 왔던 인간 중 가장 눈부시고, 가장 강한 마법사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