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2화 (51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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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같이 있었으면서 대체 알아낸 게 뭡니까? 그냥 옆에 서서 멀뚱히 대장 얼굴이나 쳐다보고 있었던 거 아닙니까?”

“뻔하지. 안 봐도 눈에 그려지는군.”

“지금은 동료가 아니라 마왕을 때려야 하는 거 아니었나요? 마음의 상처는 재생할 수 없답니다.”

가르엘의 정보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세 남자는 최단 시간 안에 분신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카델이 얼마나 버텨 줄 수 있을지 모르니, 이쪽에서 최대한 빠르게 분신을 해치워 본체의 파괴력을 저하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술의 핵심은 루멘. 켈리건의 검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전해 들은 그들은 분신을 쓰러뜨릴 일격을 루멘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루멘의 공격 환경을 갖추는 과정이었다. 그 역할로는 반과 가르엘이 투입되었다. 반 혼자서는 분신의 주의를 완전히 끌기가 어려웠기에, 가르엘이 함께 보조해 주어야 했다.

자연스럽게 모들렌은 후방 엄호가 아닌 본래 가르엘의 역할이었던 치유술을 담당하게 되었다. 분신의 공격으로부터 아군을 지키는 광역 치유술을 전개. 집중 공격을 받을 반의 충격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전투가 매끄럽게 이어지기 위한 개인 치유술에도 집중해야 한다.

“할 수 있겠어, 모들렌?”

가르엘의 주의 사항을 듣는 모들렌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안 그래도 짙게 내린 다크서클이 심연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치유사의 역량에 따라 전술의 성패가 갈릴 만큼 중요한 역할이었으니. 부담될 만도 했다. 가르엘은 전혀 자신 없어 보이는 모들렌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었다.

“못 하겠대도 해야 해. 넌 황혼 기사단의 단장이잖아. 안타깝게도 여기엔 네 실수를 무마해 줄 상사가 없거든.”

“단장님은…….”

“응?”

모들렌의 가라앉은 시선이 가르엘을 향했다. 가까이서 본 가르엘의 오른쪽 눈은 정말 마족의 것과 다를 것 하나 없었다. 선명한 역안. 생전 실수 한 번 안 하던 사내가 실수로 마족에게 눈을 잃었다며, 어색한 웃음과 함께 시꺼먼 안대를 달고 왔을 때부터. 그 아래에는 마족의 눈이 달려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죄로 여겨 황혼 기사단을 떠날 준비를 하던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단장의 역할을 떠넘기기 시작했다. 단순한 이별 준비라고, 남겨질 황혼 기사단을 위한 대비였던 거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들렌은, 가르엘에 대한 배신감을 꾹꾹 내리누르며 종종 생각하곤 했다. 그가 자신에게 단장직을 넘기려 했던 것은, 그만큼 자신을 믿기 때문이 아닐까. 본인이 피땀 흘려 일궈 놓은 기사단을 제대로 이끌어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은 보란 듯이, 가르엘 몬자시가 없는 황혼 기사단을 최강의 기사단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부터 가르엘 몬자시를 뛰어넘는 성기사가 되어야 했다.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그 일을 해내야만, 모들렌은 가르엘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을 완전히 떨쳐 낼 수 있었다.

“단장님은, 제가 아는 기사 중 가장 뛰어납니다.”

“……갑자기 칭찬이야?”

“그래서 도저히 단장님이 이끌 때보다 훌륭한 기사단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어요. 제게 맡겨진 황혼 기사단이 조금씩 망가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반과 루멘이 합을 의논하는 동안, 자신은 모들렌에게 자신감이나 불어넣어 줄 생각이었다. 그가 제 역할을 해내야 전술이 성공할 수 있고, 가르엘이 생각하기에 모들렌은 그만한 역량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런 약한 소리를 늘어놓을 줄은 몰랐다.

당황하는 가르엘의 앞에서 모들렌은 두 주먹을 그러쥐었다.

“하지만 이제야 실감이 납니다. 단장님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황혼 기사단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게.”

가르엘이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는 고작 심경의 변화 따위가 아니었다. 마족의 피가 섞였기에 그는 신을 섬기기를 포기했고, 아끼던 부하들을 떼어 내면서까지 죽음을 택했다. 그렇게 벼랑 끝까지 몰려 있던 그를, 있는 그대로의 그를 찾아내고 받아 준 것이 카델이었다. 카델은 모국에 남아 백성을 위해 싸워 봤자 결국 질타와 손가락질밖에 받지 못했을 가르엘을 완벽하게 구원했다. 그러니 가르엘의 마음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황혼 기사단의 단장이 되어 주지 않을 것이다.

“저도 모르게 희망을 품고 있었나 봅니다. 언젠가 단장님이 다시 돌아와 기사단을 이끌어 줄지도 모른다고.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이제 현실을 직시할 차례겠죠.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마족의 피가 섞인, 자신의 옛 단장. 다시는 그의 등을 보며 진군할 일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가르엘 몬자시는 영원한 자신의 우상일 테다.

“힘들겠지만 해 보겠습니다. 가르엘 경. 저는 꼭 당신 같은, 당신보다 훨씬 나은 성기사가 되어 보일 거예요.”

폭발하는 온갖 기운들 속에서 루멘은 계속해서 위치를 옮겼다. 그저 신형을 지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빈틈. 루멘은 분신을 면밀히 살피며 완벽한 일격을 위한 치명적인 빈틈을 찾고 있었다.

‘……존재하지 않아.’

하지만 아무리 두 눈에 불을 켜고 분신의 주위를 배회해도. 그녀의 복제된 육체에선 약점 따윈 찾을 수 없었다. 목숨을 앗아 갈 만한 기회를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루멘이 마왕의 팔을 베어 낼 수밖에 없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녀의 모든 육체를 통틀어, 가장 베어 낼 가능성이 컸던 부위가 왼팔이었으니까. 그마저도 켈리건의 기운을 흡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마왕의 팔을 잘라 내는 데 성공했으나, 동시에. 루멘은 절감할 수 있었다. 자신만으로는 마왕을 죽일 수 없다. 만약 이 검이 자신의 영혼과 의지를 삼켰다면 보란 듯이 마왕의 심장을 찌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직접 검을 휘두르기를 택한 자신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어. 이 분신을 쓰러뜨려야만 내 부활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마왕의 심장도 아닌, 고작 분신을 쓰러뜨리지 못해 카델을 도울 수 없다니. 그 정도로 나약하기엔, 자신은 너무 귀한 기회를 얻었다.

‘나는, 내 검은 시공간을 갈랐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엄청난 힘을 움켜쥐었다. 그러니 상대가 약점 하나 없는 완전무결한 분신이래도, 승산은 있었다.

푸른 눈동자가 차분히 복도를 훑었다. 분신의 앞뒤를 가로막고 맹공을 펼치는 두 동료. 오라에 뒤덮인 반은 조금씩 거대해지는 기운 속에서 맹렬하게 대검을 휘둘렀고, 맞은편의 가르엘은 마기와 빛이 섞인 장검으로 분신의 기운을 파고들었다.

그들을 향한 분신의 반격은 범위 공격. 짙은 마기가 먹구름처럼 천장을 뒤덮더니, 이내 빗방울 같은 기운을 떨어뜨렸다. 툭툭 떨어지는 마기는 언뜻 별다른 공격력을 갖추지 않은 것처럼 보였으나.

‘한 방울도 맞으면 안 되겠군.’

추락하던 마기의 방울은 그대로 낙하지점을 꿰뚫었다. 떨어지는 마기를 따라 바닥에 촘촘한 구멍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위험을 감지한 가르엘이 마기의 날개를 펼쳐 반의 머리를 가려 주었으나. 날개까지 찢어발긴 마기는 두 사내의 몸을 할퀴고 지났다.

총알 세례나 다름없는 마기의 폭우 속에서 아찔한 상처가 수를 늘리고. 곧장 모들렌의 광역 치유술이 전개되었다. 환한 빛이 복도를 가득 메우며, 성스러운 기운이 아군의 몸을 휘감았다. 바닥에 꽂은 장검의 위로 모여든 환한 빛이 바닥을 타고 뿌리처럼 뻗어 나갔다.

확실히 가르엘의 치유술보다는 효과가 덜했지만, 반과 가르엘의 쇼크사를 막을 정도는 됐다. 여기까지는 전부 계획대로였다. 남은 것은 반과 가르엘의 사이를 파고들어 분신의 핵을 베어 내는 것. 오로지 자신의 역량에 달린 마무리뿐이다.

‘……카델. 네게 부끄럽지 않은 기사가 될게. 그게 내 유일한 소망이니까.’

색이 진한 푸른 눈동자에 맑은 빛이 차오르고. 검집을 움켜쥔 루멘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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