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1화 (51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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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질질 흐르는 코피를 훔치면서도 라이돈은 온몸으로 즐거움을 표출했다. 온통 얼음으로 둘러싸인 복도. 넓게 퍼진 얼음 곳곳에 짙은 암기가 웅덩이처럼 고였다. 뻥 뚫린 구멍처럼 칠흑 같은 암기 속에서 요젠의 형체를 갖춘 그림자가 끊임없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좀 더 꺼내 봐! 아하하! 개미 떼 같아!”

“……이렇게 많은 분신을 만들어도 괜찮은가?”

라이돈은 엑토의 염려를 무시하며 요젠을 부추겼다. 무수한 그림자 분신이 노리는 것은 단 하나. 복도 중앙에 우두커니 선 마왕의 분신이었다.

빠르게 접근하는 그림자를 공격으로 분류한 분신이 계속해서 마기를 쏘아 댔으나. 코앞의 그림자를 터뜨려 봤자 계속해서 새로운 그림자가 몰려들 뿐이었다. 한도 끝도 없는 물량 공세에 분신은 서서히 파묻혀 갔다. 특기인 은신과 기습을 버린 요젠의 새로운 공략법이었다.

라이돈은 제 뒤에 정좌를 틀고 앉은 요젠을 돌아보며 격양된 목소리를 냈다.

“얼마나 더 꺼낼 수 있는 거야? 네 그림자 분신끼리 손을 잡게 하고 복도 아래로 늘어뜨리면, 카델이 있는 곳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밧줄처럼 잡고 내려가는 거지!”

눈을 반짝이는 라이돈의 제안에 침묵을 택한 요젠이 차분하게 암기를 끌어 올렸다. 나름 괜찮은 생각 같은데 무시하다니, 역시 카델을 제외한 인간은 전부 바보들이었다.

심심한 반응에 입술을 삐죽인 라이돈이 다시 분신으로 주의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시선이 완전히 돌아가기 전.

“응?”

잘린 복도의 단면 너머로 펼쳐진 어두운 시공간. 그 암흑의 풍경 속으로, 익숙한 불꽃이 스치듯 솟구쳤다. 찰나에 가까운 순간이었으나, 라이돈은 그 불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카델…….”

부름 같은 중얼거림과 동시에. 복도를 지나쳤던 불꽃이 아래로 추락했다. 고작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작은 불덩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시 모습을 드러낸 불꽃은, 복도를 한참 동안 지나칠 만큼 거대한 운석이 되어 있었다. 얼굴을 환하게 물들이는 눈부신 불꽃에 라이돈이 입을 벌렸다.

힘을 아낄 필요는 전혀 없었다. 자신의 최종 목표가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 후회 한 점 남지 않도록 모든 걸 퍼부으리라.

우박처럼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유성. 묵직한 불덩이가 그들이 선 복도를 맹렬하게 두드렸다. 하늘에서는 빈틈없는 유성이 추락하고, 바닥에는 널찍한 전기 그물이, 허공에는 빛을 품은 요정들이 너울거린다.

공간을 가득 채운 마법 속에서 에밀리아는 필사적으로 마기를 난사했다. 그녀의 기운은 유성을 빗겨 치고, 전기 그물을 회피하고, 빛의 요정들을 갈라냈으나. 모든 것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공격을 방어하는 데에서 그쳤다. 카델의 암기로 시야를 차단당한 탓이었다.

“계속 발버둥 쳐 봐, 카델 라이토스. 넌 행복해질 수 없어. 결국 이곳이 네 무덤이 될 테니까.”

깜깜한 시야와 육체를 난타하는 강력한 마법. 카델 라이토스의 밑천은 도무지 드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에밀리아는 신랄한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카델은 별다른 대답 없이 에밀리아의 마법진 위로 빛의 요정을 날려 보낼 뿐이었다. 새끼손가락만 한 작은 요정들이 마법진 앞에 다다르자, 그들이 뿌려 대는 빛가루가 마법진을 좀 먹기 시작했다. 빛 가루가 만들어 낸 미세한 폭발이 놀라운 속도로 반복되며, 에밀리아의 마법진은 완성되지 못한 채 허물어졌다.

재생을 위해 피어난 마기가 그녀의 몸을 한가득 뒤덮고 있다. 눈알을 좀먹는 암흑 마력을 밀어 내려는 강력한 힘이 느껴졌으나, 카델은 끝없이 마력을 보충하며 그녀의 마기를 압도했다. 지금의 그는 그것이 가능했다.

‘에밀리아가 아군을 그냥 떨어뜨려 놓았을 리는 없어. 분명 본인의 힘을 분산시킨 분신을 함께 뒀을 거다. 각개 격파로 변수를 줄일 셈이겠지.’

인원 분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몰라도, 부하들이 모여 있는 한. 그들이 쉽게 당하는 일은 없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해야 할 것은 그들이 분신을 쓰러뜨릴 때까지 마왕을 압박하는 것.

‘지금 당장 마왕을 쓰러뜨려 봤자 2차전이 발생할 뿐이야. 분신에게 나눠 준 힘. 그 힘이 전부 소진된 순간이 마왕을 격퇴할 기회다.’

흥분과 분노로 널뛸 줄 알았던 심장은 차갑기만 했다. 더없는 침착함이 카델의 판단력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마계에 내려온 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또렷한 감각이었다.

무수한 희생을 밟고 이곳까지 올라왔다. 에밀리아를 독대하며 마밀의 유품을 움켜쥔 순간, 카델을 그 무게를 절절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 절대로 망칠 수 없다. 어떤 감정으로도, 어떤 실수로도.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과연 그 힘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확실해져. 네 그 말도 안 되는 힘. 꼭 수호신이라도 거느리고 있는 것 같은 그 힘은 네 것이 아니라고. 잠시 빌려 쓰고 있는 것뿐이잖아. 안 그래?”

그녀의 주위를 회전하는 원판 같은 마기가 유성을 튕겨 냈다. 하지만 시야를 차단당한 그녀에게 완벽한 방어는 불가능하다. 떨어진 유성의 파편이 전기 그물에 튕겨 나오며, 그녀의 살갗을 찌릿하게 할퀴어 댔다. 에밀리아는 쉴 틈 없는 고통에 몸을 떨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런 에밀리아를 바라보던 카델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추측인가, 희망 사항인가?”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까지 숨기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 인간들이 수백씩 죽어 갈 동안 힘을 아끼고 있었을 뿐이라고? 하! 그럼 네가 살인자와 다를 게 뭐지?”

“꽤 간절하게 내 힘이 거품이길 바라고 있나 본데. 그렇게 고통스러워? 아직 제대로 된 공격은 시작도 안 했어.”

“쓸데없이 강한 척하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야.”

이해가 불가능한 마력의 폭발을 에밀리아는 일시적인 각성으로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전부터 생각했지만, 확실히 판단력과 추리력이 뛰어나다. 통찰력이 예지력과 다를 게 없으니, 마왕으로서의 자질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었다. 과연 이 세계의 최종 보스.

‘남은 시간은 대략 8분. 만약 시간이 끝날 때까지 아군이 분신을 해치우지 못한다면…….’

완전히 바닥났을 마력을 긁어모아 에밀리아의 심장에 쐐기를 꽂아야 할 것이다. 이젠 화조차 나지 않는 쿤라의 부재를 딛고 마왕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사실은, 오로지 승리만을 바라보는 카델에게도 제법 아득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시스템이 남은 시간을 착실하게 표시해 주고 있다는 거지.’

초 단위로 줄어드는 제한 시간. 이 시간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막연하게 부하들의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다.

‘열심히 몰아세운 에밀리아를 쓰러뜨릴 만한 마법……. 그런 마법을 준비하려면 적어도 1분 이상은 필요하다.’

물약의 제한 시간이 1분 남았을 때. 그때까지도 아군이 분신을 처리하지 못했다면, 카델은 최후의 일격을 준비할 셈이었다. 만약 그러고도 쓰러뜨리지 못한 분신이 본체에 흡수되어 2차전이 시작된다면. 자신에게 생존 가능성은 남지 않는다.

‘거기까진 가지 않으리라고 믿는 수밖에. 많이 지쳐 있겠지만, 내 부하들이야. 그 강한 녀석들이 분신을 쓰러뜨리지 못할 리 없어.’

그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지금까지 수많은 역경을 헤쳐 온, 무엇보다 강직하고 소중한 사내들을. 자신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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