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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다른 복도에 떨어진 반과 루멘, 가르엘, 모들렌. 네 남자 역시 새로운 분신과의 대치에 한창이었다.
“빌어먹을, 장난칩니까? 뭐 하자는 건데요? 다 같이 뒈지자고?”
“아니 그게…….”
“갑자기 끼어들면 어떡합니까, 가르엘 경! 동선에 방해가 되잖습니까!”
“……미안합니다.”
평소라면 본인의 성격처럼 유연하고 능청스럽게 협공을 이어 갔을 가르엘이다. 하지만 그는 위험한 분신을 앞에 두고 고장 난 로봇처럼 버벅댔다. 혼자 뻣뻣하게 군다면 몰라도, 그의 이상이 동료의 전투에 치명적인 방해 요소가 되어 버렸으니. 그 탓에 벌써 몇 번이나 공격에 실패한 반과 루멘이 예민함을 드러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모들렌과 함께 보조나 해 줄 것이지. 굳이 근거리 공격을 하겠다며 튀어나와서는 방해만 해 대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분신을 해치워야 카델의 안전에도 도움이 될 텐데.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한 반이 허공에 악을 지르고.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린 가르엘의 옆에서, 가까스로 한숨을 삼킨 루멘이 말했다.
“안대는 어디다 버려두고 온 겁니까?”
“열심히 싸우다 보니 잃어버렸습니다.”
“……가르엘 경. 옛 부하와 같은 곳으로 떨어진 건 참 안타깝습니다만, 이런 때까지 정체를 숨기려고 발악해야겠습니까? 상황이 그 정도로 여유롭진 않은 것 같은데요.”
루멘의 건조한 말투에 가르엘이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 꿰뚫었다. 모들렌과 같은 복도에 떨어졌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부터, 가르엘은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이어 가며 그에게 자신의 왼쪽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노력했다.
버릇인 척 손으로 왼쪽 얼굴을 가리거나, 땀을 닦아 내는 척 내내 문지르기도 했다. 복도의 정체를 파악하는 동안에는 그런 쓰잘머리 없는 행동도 그러려니 했으나. 요란함이 전투에까지 영향을 끼치니 더 이상 봐줄 수가 없는 것이다.
“옛 부하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는 게 당장 마왕과 싸우고 있을 대장을 구하는 것보다 중요합니까?”
“그럴 리가 있나요. ……알겠습니다. 어차피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도 까발려진 정체, 모들렌 한 명 더 안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겠죠.”
마왕의 분신을 앞에 두고 언제까지고 허둥댈 순 없었다. 결심한 이상 뻔뻔스럽게 싸워 나갈 수밖에. 가르엘은 눈을 딱 감고 이젠 너무도 익숙해진 마기를 개방했다. 차마 뒤를 돌아 모들렌의 반응을 살필 용기는 없었다. 차라리 없는 셈 치고 싸우는 편이 나으리라. 이럴 땐 카델의 얼굴을 떠올리는 게 즉효였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검을 움켜쥔 그가 마음을 다스리던 순간이었다.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껏 옛 단장의 헛짓거리에도 침묵을 지키던 모들렌이 크게 외쳤다. 본능적으로 돌아간 고개가 뒤편의 모들렌을 향하고. 곧장 마주친 시선에 놀란 가르엘이 서둘러 눈을 피하려 했으나.
“절 살린 게 단장님의 마기란 거, 이미 알고 있었다고요. 단장님은…… 마족의 피를 가지고 있던 거죠? 그게 저희를 떠난 이유였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에 가르엘의 눈빛이 흔들렸다. 바로 앞에서 동료들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에도, 도저히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굳은 것처럼 멈춰 버린 가르엘의 귓가로 다시 한번 쩌렁쩌렁한 외침이 날아들었다.
“저희에게 설명 하나 안 해 주고 도망쳐 버린 거! 두고두고 원망할 겁니다! 평생 우려먹을 거예요! 그러니 나중에 잔소리 덜 듣고 싶으면 멋진 모습 좀 보여 봐요! 저희에겐 보여 주지 못했던 진짜 단장님의 싸움을, 여기서 보여 주시라고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날, 어영부영 흘러가던 대화로 모들렌은 마음속에 쌓인 앙금을 조금이나마 풀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뿐이라고. 자신이 황혼 기사단을 나온 진짜 이유를 알지 못하는 한, 그에게 진심으로 용서받을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전쟁을 치르며 생각보다 많은 이들에게 정체를 들켰다. 그보다 많은 이들에게 의심받고 있겠지. 그럼에도 가르엘은 끝까지 잡아뗄 생각이었다. 적어도 황혼 기사단에게만큼은 끝까지 거짓을 고하리라. 그게 불가능하다면, 고요의 산맥에서 평생 은둔이라도 하려 했다. 하지만 가르엘의 결심은 전부 부질없어졌다.
‘그때 이미 깨어 있었던 건가. 그런데도 눈치채지 못한 척, 평소처럼 대했던 거야. ……날 위해서.’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쓰러졌으니 완전히 의식이 나갔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가르엘의 치유술을 인지했고, 본인의 몸을 파고드는 마기를 감지했다. 몹시 당황스러웠을 텐데도 자신의 치유술을 거부하지 않았다. 놀란 티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옛 단장의 치유술을 받아들였을 뿐.
문득, 과거 모들렌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존경합니다, 가르엘 단장님. 전 나중에 꼭 단장님처럼 멋진 기사가 될 겁니다.”
“나처럼? 그러려면 일단 얼굴부터 뜯어 고쳐야 할 텐데. 괜찮겠어?”
“……정정하죠. 단장님의 능력만 본받고, 그 인성은 조금 더 보강해 보겠습니다.”
“하하, 기력이 남아도나 보네. 훈련장 50바퀴 뛰고 오자. 실시.”
“예? 오늘 훈련은 이미 끝났잖습니까!”
“뭐 해? 명령에 불복하겠다는 거야? 달려!”
울상이 되어 뛰어가는 모들렌을 바라보며, 그의 미래를 그렸었다. 만약 모들렌이 자신처럼 멋진 기사가 된다면, 아주 먼 훗날. 단장직을 물려줘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보라. 지금의 모들렌은 과거의 자신보다 훨씬 나을뿐더러 그의 말대로 인성까지 완벽하게 보강한, 훌륭한 기사가 되어 있었다.
“……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었으려나.”
가르엘은 떨리는 입술에 힘을 주고, 검을 바로 쥐었다. 이미 시원하게 정체도 들켜 버렸다. 이 이상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일 일은 없었다. 가르엘은 모들렌에게 대답하는 대신, 넓은 등을 보였다.
“정신 차리고 왔습니다. 단장님 품으로 달려가기 위해서는 이 분신을 해치워야겠죠. 잘해 봅시다.”
“경이나 잘하십쇼.”
“싸늘하네요, 반 경. 이런 때에도 매력을 잃지 않다니, 대단해요.”
반의 경멸 어린 시선에 미소로 화답한 가르엘이 분신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공격이 주춤한 사이, 분신은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본인의 사방으로 마법진을 설치하고 있었다. 천장, 옆벽, 후방. 총 네 개의 마법진을 설치했음에도 마기를 거두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전방에도 마법진을 설치하려는 듯했다.
“방어 마법을 전개할 작정인가 보군요. 완성하게 놔뒀다간 지금보다 공격이 어려워질 겁니다. 두 분이 정면에서 분신을 상대하면, 제가 네 개의 마법진을 해제해 보겠습니다.”
“지금 저희에겐 단단한 장막을 만들어 줄 마법사가 없습니다만. 정체도 모르는 마법진을 무턱대고 뚫고 들어가는 건 위험합니다. 차라리 완성된 마법을 확인하고 움직이죠.”
“이런, 루멘 경. 무서워하지 마세요. 저희에게 든든한 마법사는 없어도, 끝내주는 치유사가 둘이나 붙어 있지 않습니까.”
갑자기 몸과 머리가 분리되지 않는 이상, 그들이 급사할 일은 없다. 가르엘의 장담에 한숨 같은 웃음을 흘린 루멘이 중얼거렸다.
“인정하기 싫지만, 든든하긴 하군요.”
루멘과 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듯 응시하다, 이내 한 마디 신호도 없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분신의 정면. 사라진 루멘의 신형을 대신해 돌진한 반이 그녀의 머리를 노리고. 그의 일격이 마기의 장막에 막힘과 동시에, 분신을 감싸던 마법진에서부터 자색의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힘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반은 굴하지 않고 오라를 개방했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다. 할 수 있어.’
홀로 마왕의 분신을 상대하던 때와는 다르다. 그 당시 반의 패인은 방심이나 단순한 무력의 차이가 아닌, 육체의 한계였다. 마왕이 가진 마기는 마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순도 높고 강력한 기운. 그 기운을 맞닥뜨린 오라는 걷잡을 수 없이 흉포해지며 몸의 주도권을 빼앗으려 했다. 모아 둔 피로도 모자라 주인의 피를 흡혈하고, 몸을 통째로 집어삼켜 마기에 대항하려 한 것이다.
도와줄 이 하나 없는 공간에서 이성을 잃었다간 무슨 참사가 벌어질지 모른다. 그랬기에 반은 오라를 거뒀고, 간단히 패배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몸이 뒤틀려도 회복시켜 줄 가르엘과 모들렌이 있고, 이성을 잃은 자신을 제압해 줄 루멘도 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상대해 주지.’
분신의 마기를 정면으로 맞닥뜨린 오라가 빠르게 몸집을 키워 가기 시작했다. 반은 오라의 개방을 억제하지 않았고, 묵직한 대검으로 온 기운을 퍼부었다. 조금씩 강력해지는 힘을 감지한 분신의 시선이 반을 향하고. 몸을 보호하던 마기가 반에게로 날을 세운 순간.
“확실히, 시선 끌어 주는 사람이 있으니 편하긴 하군.”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루멘이, 파랗게 빛나는 눈을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