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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랄, 마밀 경! 멈추시오! 여기서 경을 잃을 수는 없소!”
참다못한 엑토가 걸음을 뻗었으나, 그보다 먼저 움직인 라이돈이 앞을 막아섰다.
“뭣 하는 건가! 비키게!”
“비키면? 네가 저 인간을 대신해서 뭘 할 수 있는데? 지금보다 효과적으로 마왕의 기운을 막을 수 있어?”
“기운의 이동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마밀 경을……!”
“그 말은, 카델을 죽이자는 거야?”
칼처럼 박혀 오는 냉랭한 시선에 엑토가 이를 갈았다. 그도 잘 알았다. 도착한 카델과 무사히 합류하기 위해서는, 그가 마왕과 대면하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는 걸. 하지만 그의 입장에선 마밀 역시 소중했다. 이 전투에 필요한 마법사이자, 이곳까지 함께해 온 전우였으니까.
그러니 막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때 대마법사의 영광을 누렸던 자가 스스로 자멸하는 것을.
“모들렌 경. 방법이 없겠소?”
엑토가 도움을 바라듯 바라보았으나, 모들렌 역시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불가능했다. 일단은 마밀과 마왕을 감싸고 있는 무수한 마법진을 뚫고 갈 힘이 없었고, 뚫고 들어간다 한들. 자신에게는 마밀의 손상된 마력관을 복구해 줄 치유력이 없었다.
톱니바퀴처럼 회전하며 맞물리는 마법진들. 마밀과 마왕을 가둔 무수한 마법진이 안쪽에서 폭발하는 마기를 억제하고 있다. 아군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곤 좁은 틈새로 비치는 화려한 불꽃이 전부였지만. 복도의 바닥. 그들이 선 곳까지 흘러들고 있는 상당량의 핏물로 알 수 있었다. 마밀은 죽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도움을 구하지도, 개입을 허락하지도 않았다.
“요젠, 넌 이대로 마밀 님이 죽어도 괜찮은 거냐? 단장의 스승님이라고!”
“본인의 선택이야.”
“요정 놈! 너라면 힘을 보탤 수 있을 거 아니야! 뭐라도 해 봐!”
“내가 끼어들어 봤자 방해만 될 뿐이야. 그냥 입 다물고 지켜 봐.”
마밀의 상태를 알고 있던 라이돈과 요젠은 그가 진즉에 죽음을 각오했다는 걸 알았다. 그렇기에 악역을 자처해서라도 다른 이들이 마밀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것이 마밀의 의지를 존중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부디 마밀이 죽기 전에 카델이 도착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어……! 저길 보세요!”
그렇게 마밀을 앞세워 마왕을 억제하던 중. 모들렌이 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 반사적으로 이동한 모두의 시야 속으로, 중력을 거스르듯 느리게 추락하는 세 남자의 모습이 들어찼다. 가장 먼저 그들의 정체를 눈치챈 반과 라이돈, 요젠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단장!”
“카델, 카델! 기다려! 내가 마중 갈 테니까!”
오로지 카델만을 바라보던 라이돈이 흥분하며 날개를 펄럭였다. 지금까진 마왕의 본체를 견제하고 마밀을 지키기 위해 남아 있었으나, 카델이 나타난 이제는 알 바 없었다.
“……뭐야? 왜 이렇게 몸이 무겁지?”
하지만 마치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머리를 짓누르기라도 하듯, 날개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카델과 가까워지지 못하니. 답답하다는 듯 끙끙거리는 라이돈의 모습에, 옆에 있던 요젠이 입을 열었다.
“그만둬. 여긴 마왕의 힘이 가장 크게 작용하는 공간이야. 함부로 빠져나갈 수 없어.”
“뭐? 그런 건 빨리 말해 줬어야지! 괜히 힘만 뺐잖아!”
“……물어보지 않았잖아.”
“꼭 물어봐야 대답을 해 줘? 답답하네, 정말.”
결국 마중을 포기한 라이돈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하늘을 올려보았다. 마밀이 기운의 이동을 저지한 덕에 탈출할 틈이 생긴 모양이었다. 이대로 저들이 내려올 때까지만 무사히 버텨 준다면.
“가르엘 경이 있군. ……도련님도 저기 있네.”
카델의 양옆에 자리한 두 동료의 모습에 반이 반사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어둠 속에서 기이하게 반짝이는 루멘의 꼴은 상당히 거슬렸으나, 그 덕에 카델의 얼굴이 잘 보이게 되었으니 불만은 없었다.
“내려오는 속도가 너무 느리군. 여기서 도와줄 방법은 없는 건가?”
그들의 낙하를 지켜보던 엑토가 초조하게 말했다. 라이돈도 비행할 수 없으니 그들과 직접 접촉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바닥에서 하늘로 밧줄을 던져 줄 수도 없었으니.
여기서 더 시간을 끌었다간 마밀이 정말 죽어 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허공에 뜬 적린 기사단까지 위험해진다. 떠오르는 여러 비극적인 사태에 엑토가 근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콰아아아아―
마밀과 마왕을 가둔 마법진이 으스러지며, 불꽃을 품은 마기가 복도를 휩쓸었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뜻밖의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완벽하던 계획이 조금씩 통제 밖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원인이 뭐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인간들을 차례차례 격파하며 개미 떼 같던 놈들의 수를 줄여 갈 때도. 그들이 한 줌짜리 전력을 끌고 기어이 성 앞까지 쳐들어왔을 때도. 에밀리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의 모든 행동과 선택이 예상 범위 내였으니까.
‘전부 켈리건의 검 때문이야.’
이 불쾌한 상황은 그 검이 뽑힌 순간부터 예견된 것일까. 시체에 박혀 뽑히지 않는 검을 잠시 들판에 버려둔 게 잘못이었던가. 그 검이 기어이 죽은 자의 몸에 생명을 불어넣은 순간부터 계획이 일그러진 거다. 그 빌어먹을 인간이 켈리건의 힘을 빌려 자신의 시공간을 조각낼 줄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아니.’
사실은 켈리건의 검 때문이 아니었다. 그 검을 뽑아 든 인간 때문도, 자신을 가둔 마밀 키파 때문도, 하다못해 카델 라이토스 때문도 아니었다. 에밀리아는 무엇이 자신을 여기까지 몰아세웠는지 잘 알았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너흴 전부 죽여 버리고 카델 라이토스에게 시체를 던져 주려고 했는데. 계획이 많이 틀어졌어. 열심히 시간을 번 보람이 있겠구나, 마밀 키파.”
폭풍 같은 마기에 밀려난 마밀이 무력하게 바닥을 굴렀다. 황급히 그를 받아 낸 모들렌이 곧장 치유술을 전개했다. 마밀은 다급히 제 몸을 더듬는 모들렌의 아래에서 느릿느릿 바닥을 짚었다.
에밀리아를 응시하는 그의 얼굴은 온통 피 칠갑이었다. 피가 흐를 수 있는 구멍이란 구멍에선 전부 피가 흐르고 있다. 앞이 보이기는 하는지 의문이었다. 오로지 죽음밖에 느껴지지 않는 마밀의 혼탁한 얼굴에, 에밀리아가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를 신랄하게 능욕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았다.
“날 막던 힘도 결국 끝이 났네. 모쪼록 얌전히 죽어 줘. 너한테 더 힘을 쏟긴 싫거든.”
에밀리아는 인간들을 앞에 둔 채 하늘을 올려 보았다. 그곳에는 보란 듯이 낙하하는 카델 라이토스가 있었다. 양옆에 거슬리는 로렌스의 조카와 켈리건의 검을 든 인간을 달고서.
카델 라이토스의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의 얼굴은 수정 구슬을 통해 들여다본 게 전부다. 실제로 본 카델 라이토스는, 생각보다 훨씬 존재감이 뚜렷했다. 덩치가 큰 것도, 특이한 오라를 가진 것도, 외모가 화려한 것도 아닌데. 이질적으로 느껴질 만큼 그의 윤곽만이 유독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자신이 그에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죽이고 싶은 자가 잘 보이니 잘된 일이었다.
에밀리아가 카델을 향해 손을 뻗자 기다렸다는 듯 공격이 퍼부어졌다. 사정없이 쇄도하는 공격에도 에밀리아는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모든 공격은 그녀가 두른 마기에 튕겨 나갈 뿐이었으니까. 그녀를 가둬 둘 마법도 이제는 없다.
“모들렌 경! 경은 뒤에서 마밀 경을 보호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축 늘어진 마밀의 시야 속으로 마왕에게 달려드는 아군의 모습이 들어찼다. 그들은 분명 빠르고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눈에는 모든 동작이 느리게만 보였다. 숨소리가 머릿속을 댕댕 울리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울컥울컥 피가 역류했다. 모들렌의 빛 마력이 체내로 스며드는 감각이 느껴졌으나, 그의 치유술은 단 1할의 고통도 상쇄시켜 주지 못했다. 쓸데없는 짓이니 관두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탁해진 눈동자가 천천히 하늘을 향했다. 새까만 하늘 위,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낙하하는 제자. 그의 아래로 날카로운 결정처럼 뻗친 무수한 마기의 가닥이 드리우고 있었다. 낙하는 멈출 수 없고, 공격도 멈출 리 없으니. 카델에겐 직접 마기를 떨쳐 내거나, 장막으로 보호하는 수밖엔 없을 것이다.
“마밀 경, 꼼짝도 하지 마세요. 불편해도 뒤척이시면 안 됩니다. 지금 경의 몸은…….”
바쁘게 치유술을 전개하던 모들렌이 참담한 목소리를 냈다. 마밀의 몸은 산 사람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절망적으로 망가져 있었다. 모조리 터져 나간 마력관은 물론이고, 마력관이 터져 나갔기에 당연히 폭주해야 할 마력. 그 마력을 억지로 잡아 두고 있는 몸이 조금씩 부풀고 있었다.
모들렌은 어떻게든 손상된 내장과 근육을 회복시키려 했다.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어서라도 마밀을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마밀은 그런 모들렌의 간절함을 거부했다.
“……마지막 마법을 전개하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