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2화 (50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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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루멘의 죽음을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을 무렵. 루멘을 죽인 장본인, 에밀리아는 조금도 개운하지 않은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봉인이 풀린 켈리건의 검은 그녀에게도 접촉을 허락했다. 그녀는 단숨에 검을 빼앗아 루멘의 심장을 찔렀고, 그의 죽음을 확신한 뒤 다시 검을 회수하려 했다. 하지만.

“……잡아먹히고 있네.”

단단한 바위에라도 처박힌 듯,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축 늘어진 루멘의 시체는 검에 꽂혀 쓰러지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의 심장은 검을 움켜쥐고 내놓지를 않았다.

“죽은 인간의 심장을 잡아먹고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걸까? 여기 어디에도 널 휘둘러 줄 인간은 없단다.”

힘을 주어 검을 빼내려던 에밀리아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이렇게까지 애를 쓰는데도 뽑히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지금은 검을 뽑는 데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으니까.

성안에 카델 라이토스가 있다. 어차피 자신이 만든 시공간에 있는 한, 검과 시체는 아무 짓도 하지 못한다. 그녀는 루멘의 시체를 바깥으로 튕겨 내려는 공간의 힘을 거슬러 그를 묶어 두었다. 그를 여기 잠시 보관해 두고, 빠르게 카델 라이토스를 처리할 셈이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켈리건의 검을 수거해 죽은 카델 라이토스의 심장에 박아 넣어야지. 그의 시체를 박제해 성문 앞에 장식해 둘 것이다. 긴 세월 동안 마족들에게 치욕을 당하도록.

검의 회수를 포기한 에밀리아가 손을 놓자, 그제야 루멘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털썩, 힘없이 쓰러지는 시체에서 검집을 뺏어 든 그녀가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자리에 멈춰 있던 그녀의 분신이 흩어지며, 나눠 주었던 영혼의 조각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기다려, 카델 라이토스. 너의 죽음이 달려갈게.”

“젠장, 뭘 해도 뚫을 수가 없군.”

공격의 반동에 밀려난 반이 비틀거리며 숨을 골랐다. 벌써 몇 번째 검기를 날린 것인지 셀 수도 없었다. 검기뿐인가? 암기와 마력까지 합세해 공세를 퍼부었음에도 방은 굳건했다.

“아직도 저쪽의 기척은 느끼지 못하는 거냐?”

“……못해. 암기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루멘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지니, 문 앞에 모여 선 이들의 표정은 심각해지기만 했다. 그에 모들렌의 치유술을 거부한 채 뒤편에서 휴식하던 마밀이 입을 열었다.

“마왕도 루멘 도미닉도, 아직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건 제법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뜻일 게다. 무작정 걱정할 일이 아닐지도 몰라.”

루멘이 마왕과 호각을 이루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진 말자는 뜻이었다. 마밀치고는 상당히 희망적인 발상이다. 그러나 반도, 요젠도, 라이돈도. 그의 꿈같은 희망 사항을 비꼬지 않았다. 진심으로 그러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한참이 지나도 진전이 없는 루멘 구출 작전에 라이돈이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마법이라면 멀리서도 쓸 수 있으니, 대충 앉아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마밀의 근처로 걸어가던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붉은 눈동자가 힘없이 벽에 기댄 마밀의 모습을 유심히 훑어보았다.

“……?”

갑자기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에 마밀의 시선이 움직였다.

“할 말이라도 있는 게냐?”

“풀 냄새.”

“풀?”

“너한테서 [증폭의 풀] 냄새가 나.”

라이돈의 말에 마밀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리자, 라이돈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몇 개를 먹은 거야?”

“내가 훔친 건 아니다. 암거래상에게 어렵게 구해 온 거야. 모아 뒀던 돈을 전부 털었지. 오래전에 누군가 채집했던 걸 고이 보관해 둔 거라고 하더군.”

“몇 개를 먹었냐고 물었어.”

마밀이 계속해서 대답을 회피하자 라이돈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평범한 인간이 [증폭의 풀]을 연달아 먹으면 죽어. 최소 1년 정도는 텀을 둬야 해.”

“알고 있다. 그런 건 어떤 욕심 많은 인간이 무식하게 배를 채워 얻어 낸 정보 아니겠냐. 책으로 읽어 익히 알고 있었지.”

“……알고 있는데도 먹었다고?”

“그래. 제자에게 시쳇더미를 선물해 줄 순 없었으니까.”

빤히 마밀을 내려다보던 라이돈이 이내 그의 앞에 쭈그려 앉아 손목을 낚아챘다. 맥을 짚는 라이돈의 신중한 얼굴에 마밀이 힘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카델의 스승이라고 걱정해 주는 게냐?”

“정확해. 널 보살피면 카델도 기뻐하겠지.”

“소용없다. 이젠 뭘 해도 되돌릴 수 없어.”

“…….”

“날 대신해 모두를 잘 지켜 주거라.”

마밀이 죽는다면 아군의 보호에 전념해 줄 마법사는 라이돈밖에 남지 않는다. 그가 제대로 아군을 도와야 카델도 힘을 쓸 수 있을 테니. 마밀이 연달아 당부하자, 조심스럽게 손목을 내려놓은 라이돈이 작게 중얼거렸다.

“카델 앞에서 죽지는 마.”

“허! 그럼 미리 죽어 있으란 게냐? 그게 더 꼴불견이겠다만.”

“……꼭 카델 앞에서 죽어야겠다면, 이 말을 전해 줘.”

“내 유언도 할 수 있을까 말까인데 전언을?”

“스승님이 인정한 진정한 남자는 라이돈뿐이라고. 그러니 라이돈을 가장 예뻐하면서 둘이 백년해로하라고. 이걸 네 유언으로 정하면 되겠네.”

세상에 이런 뻔뻔한 자가 다 있는가. 고통을 이겨 내는 황당함에 마밀이 헛웃음을 뱉었다. 농담으로 치부하기엔 자신을 힐끔대는 눈빛이 제법 진지하다. 라이돈은 설설 고개를 젓는 마밀의 앞에서 어서 대답하라는 듯 눈을 치떴다. 그러나 마밀이 이 고약한 요구에 대답을 꺼내 놓기도 전.

“다들 물러서!”

다급한 요젠의 외침과 함께, 훅 몰아친 대량의 마기가 복도를 휩쓸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세운 라이돈이 마밀의 앞을 가리고. 마기가 불어온 방향을 좇아 눈을 굴리자, 곧 닫혀 있던 시공간을 빠져나오는 에밀리아의 모습이 들어찼다.

붉은 눈동자 위로 경계의 빛이 어렸다. 모두에게 얼음 장막을 둘러 준 그가 빠르게 시선을 옮겨 마왕의 뒤편을 살폈다. 그녀가 방을 완전히 빠져나왔음에도 루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패배한 거라면 시체라도 방 밖을 굴러 나왔어야 하는데.

드디어 돌아온 마왕에 복도를 이루는 공기가 팽팽해졌다. 사위를 채운 기사들의 적개심 속에서, 낮은 숨을 내쉰 에밀리아가 머리칼을 정돈했다. 적을 경계하는 시늉도 하지 않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그런 에밀리아를 노려보던 반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그 검은…….”

그녀의 오른손에 들린 검집. 검집에 새겨진 문양을 확인한 반이 당황한 목소리를 내자, 에밀리아가 기다렸다는 듯 반응했다. 그녀는 정확히 반을 바라보며 손에 들린 검집을 흔들었다.

“알아보겠어? 맞아. 네 동료가 훔쳐 간 검이야. 되찾아 오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됐네.”

루멘의 검집은 마왕의 손에 들렸고, 마왕이 나왔음에도 루멘은 여전히 다른 시공간에 갇혀 있다.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불길한 예감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갔다. 입을 다문 아군 사이, 선두의 엑토가 누구도 섣불리 꺼내지 못한 질문을 던졌다.

“안에 있던 인간은 어떻게 한 거지? 의식을 잃지 않아 가둬 둔 건가?”

“아니, 죽었어. 심장에 꽂은 검이 잘 안 빠지길래, 그냥 나중에 회수하려고 안에 남겨 두고 왔지. 너흴 전부 죽인 뒤에 다시 뽑으러 갈 거야. 그때가 되면 그 인간의 시체도 빠져나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루멘이 죽었다. 에밀리아의 깔끔한 답변에 반과 요젠, 라이돈의 얼굴 위로 동요가 스쳤다. 나머지 아군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그들의 당혹감은 적린 기사단이 느낀 감정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믿을 수 없었다. 그 루멘이, 루멘 도미닉이 죽었다고? 어떻게든 치열하게 버텨 숨만 붙은 상태로라도 돌아올 줄 알았는데. 그저 마왕의 농담이라 치부하기에는, 루멘의 생존을 증명할 길이 없었다.

굳어 가는 표정을 즐기듯 미소를 머금은 에밀리아가 마기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결국 기사들이 전부 의식을 되찾고 말았으나, 간신히 눈만 뜬 게 전부다. 가르엘이 없다면 이들이 완전히 회복할 일은 없었다. 겨우 정신을 붙들고 있는 송장들을 상대로 패배할 확률은 0퍼센트.

이곳에서 모조리 도륙한 뒤, 일말의 희망도 남지 않은 묫자리에 카델 라이토스를 불러내리라. 미소를 머금은 그녀가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단숨에 적을 압도할 공격을 개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

인간들의 심기를 거스르기 위해 가져왔던 검집. 그저 장식품에 불과한 검집에서부터, 미약한 진동이 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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