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1화 (501/521)

⚔️

“억울해.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낸 시공간에 가둬서 싸우게 하는 게 어딨어? 눈발이 너무 심해서 아무것도 안 보였단 말이야! 내가 요젠도 아니고,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싸워? 제대로 싸웠으면 그렇게 쉽게 기절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반이랑 동급이라니? 억울해, 억울해, 억울하다고!”

“……시끄럽다, 요정 놈. 머리 울리니까 저기 떨어져서 징징거려.”

하나둘씩 깨어나는 기사들 속에서, 라이돈은 본인이 쉽게 의식을 잃었던 이유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기 바빴다. 본인은 절대 그렇게 쉽게 쓰러질 요정이 아닌데, 마왕이 비겁한 수를 썼다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반 역시 할 말은 많았지만, 구구절절하게 늘어놓기엔 체력이 아까웠다.

그는 마밀이 불로 지져 준 옆구리를 쓸어내리며 미간을 좁혔다. 자신이 어이없게 쓰러져 있던 사이, 제법 많은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첫 번째로, 소린이 사라졌다. 그의 행방을 알아낼 방법은 없었고, 깨어난 엑토는 소린의 실종에 침묵을 택했다. 허공을 바라보는 눈빛에선 부하의 죽음을 직감한 자의 씁쓸함이 비치고 있었다.

두 번째로, 루멘이 마왕과 대적하고 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가 자신보다 오래 버텼다는 것도 놀라운데, 마왕의 본체가 직접 그를 상대하러 나섰다니.

반의 시선이 활짝 열린 문 너머를 향했다. 방 안의 풍경은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려져 있어,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자신은 분신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한계를 느꼈다. 그런데 루멘은 분신과 본체를 한꺼번에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도저히 긍정적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실력을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상대가 마왕인 이상, 그 누구래도 희망을 품긴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당장 시공간을 넘어가 루멘을 도울 수도 없으니. 아직 문밖으로 시체가 튀어나오지 않았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마밀의 얘기에 따르면, 카델은 이미 성에 도착했을 확률이 높았다. 마왕의 반응을 보고 짐작한 것뿐이지만, 슬슬 때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곳은 마왕이 만들어 낸 특수한 시공간이기 때문에, 그녀의 허락 없이는 만나기 힘들 것이라는 짐작도 했다.

‘드디어 단장이 돌아오는 건가.’

아마 가르엘도 함께 있겠지. 그들이 합류한다면 마왕을 상대하는 일도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하지만 반은 카델의 합류를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내가 과연 단장의 곁에서 든든하게 싸울 수 있을까. 이런 몸, 이런 상태로…….’

짐이 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모들렌의 응급 처치를 받은 몸은 이미 한계에 접어들었다.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기사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요젠도, 애써 강한 척을 하며 고통을 숨기는 라이돈도, 가장 답 없는 상황을 맞닥뜨린 루멘도. 한계에 다다른 몸으로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까. 과연 그에게 보탬이 되어 줄 수 있을까.

나약한 생각을 떨치듯 강하게 고개를 털어 낸 그가 대검을 지팡이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나아간 곳은, 루멘이 끌려간 시공간의 앞. 잠시 그 흐린 배경을 노려보던 그가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대충 정신 차렸으면 이리 와. 망할 도련님이 죽기 전에 구할 방법을 찾아보자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