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8화 (498/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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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절벽 끝자락에 위태롭게 서 있었고, 도망칠 곳도 없는 상황에서 홀로 분신을 상대해야 했다.

그럼에도 요젠은 싸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는 우선 분신의 뒤편으로 위치를 옮겨 추락의 위협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아무런 예고도 없이 솟구친 지면은 간단하게 그의 중심을 무너뜨렸고, 요젠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머리에 묵직한 충격이 가해진 것까진 떠오른다. 그 후로는 기억이 없는 걸 보니, 그대로 기절한 모양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의식이 돌아오는 중인가 보지. 요젠은 조금씩 찾아드는 감각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정신이 드셨나 보군요.”

가까운 곳에서 몹시 지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들렌의 것이었다. 요젠이 소리 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뜨끈하게 열이 오르던 가슴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모들렌이 치유술을 전개 중이었던 듯했다.

“전 다음 분을 깨우러 가야 합니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일어나 마밀 님을 도와주십시오.”

“마밀……?”

“제겐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요젠 경.”

요젠은 바닥을 더듬어 곧장 상체를 일으켰다. 이곳은 안전한 침소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마왕 성에 있다는 사실을 빠르게 인지하고는, 미약한 힘을 끌어모았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건 불꽃……. 카델의 스승의 기운이다. 그 너머에는…….’

마밀. 그리고 마왕의 본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운이 충돌하며 만들어 낸 거대한 파동이 그려졌으나, 장막 너머로는 마기 한 가닥도 흘러들지 못했다.

‘마왕의 본체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버틴다고?’

가능할 리 없다. 마밀의 실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기운은 뛰어났고, 재능에 관록과 경험이 더해져 자신보다 뛰어난 점도 많았다. 그러나 이곳까지 오르는 동안, 마밀은 계속해서 방어와 공격을 부담해야 했다. 새로운 힘을 깨우쳐 일시적인 각성 상태에 돌입한 라이돈에 비하면 온통 소모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마왕의 본체를 상대할 만한 힘이 남았을 리 없는데.

요젠은 장막 너머에서 꼿꼿하게 선 마밀의 기운을 느끼며 불꽃 위로 손을 뻗었다. 암기를 두른 손끝이 마력을 거스르며 부드럽게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전히 장막을 뚫고 나온 요젠의 앞으로, 등을 보이고 선 마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요젠의 존재를 느꼈음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드디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한 모양이로군.”

마밀을 앞에 두고서야 요젠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지금껏 마왕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 줄 수 있었는지.

“카델에게 이걸 전해 주거라.”

마밀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요젠에게 무언가를 던져 주었다. 그것을 낚아채자, 손안으로 매끈한 병의 감촉이 느껴졌다.

“원래는 [증폭의 풀]을 선물해 주려고 했는데 말이다. 몇 개 있던 걸 전부 먹어 버려서 말이지. 욕심 많은 스승이래도 할 말이 없겠군.”

[증폭의 풀]이 무엇인지, 요젠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섭취한 마밀의 기운이 너무도 강력해졌으며, 그 기운을 이기지 못한 마력관이 빠른 속도로 터져 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느껴졌다.

고통으로 인해 제대로 설 수도 없을 텐데.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온몸을 난도질당하는 것보다도 괴로울 텐데.

“……그만둬. 죽게 될 거야.”

요젠의 불안한 경고에도 마밀은 작게 웃으며 앞을 가리켰다.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저 녀석의 힘을.”

그곳에는 공중에 떠오른 에밀리아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적극적으로 마밀을 압박하던 그녀였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지금은 거리를 유지한 채 마기만 개방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녀의 주위로는 원형의 장막이 생성되었고, 그 위로 나선을 그리는 마기의 덩어리들이 회전했다. 불규칙적으로 쏘아지는 마기의 덩어리는 마밀과 너머의 장막을 난타했고, 곳곳에 새겨진 마법진이 그 모든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쉼 없이 쏟아지는 마기가 일정 구간을 지나칠 때마다. 미리 설치해 둔 마법진이 발동되며, 그 안에서 튀어나온 뱀의 아가리가 마기를 집어삼켰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하나의 뱀이 수용할 수 있는 마기의 덩어리는 두 개. 뱀이 두 개의 마기를 삼키면, 그 즉시 머리가 터져 나가며 마법진이 소멸한다.

마밀은 같은 자리에 마법진을 재설치하며 말했다.

“내 제자가 오고 있을 거다. 영웅처럼 등장한다 했으니, 머지않아 도착하겠지. 그러니 너는 카델의 옆에서 싸우거라. 그때까지 내가 무너지는 일은 없어.”

마밀이 죽는다면 카델은 몹시 슬퍼할 것이다. 어쩌면 자책하며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죽지 말고, 이 앞은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그리 말하고 싶었으나, 이미 부질없는 짓임을 알았다. 그렇기에 요젠은 마밀을 저지하는 대신 단검을 빼 들고 부탁했다.

“마왕이 방어 태세에 들어간 지금이 기회야. 가까이서 빈틈을 노려 볼 테니, 엄호를 해 줘.”

에밀리아의 분신은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한 채 휙휙 고개를 돌렸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시야 속으로 흐릿한 잔상이 비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확하게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건만. 켈리건의 검이 육체 능력까지 향상시켜 주던가? 루멘의 속도를 좇을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다. 루멘의 잔상을 따라 허공에 금이 그어지고 있었다. 푸른 빛을 품은 얇다란 금이 서서히 너비를 벌리더니, 이내 유선형의 구멍이 되었다. 허공에서 벌어진 구멍의 안쪽에는 눈부신 섬광이 하나의 덩어리처럼 꿈틀거렸다.

빠르게 늘어나는 구멍의 개수를 따라 분신이 선 곳이 환하게 밝혀지기 시작했다. 무대에 선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았다. 분신은 루멘의 위치를 가늠하며 동시에 주변을 둘러싼 구멍의 정체를 짐작했다. 분신은 영혼의 일부일 뿐이나, 지금은 본체의 주의력이 몰려 있으니. 분신에겐 충분한 판단력과 사고력이 있었다.

‘마법은 아니야. 마력이 느껴지진 않으니까. 저건…… 그래. 내가 만든 시공간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거다. 켈리건의 힘으로? 하지만 구멍 안쪽에 있는 기운은 낯설지가 않은데. 대체 무슨 기술이지?’

방심해선 안 된다. 루멘이 뽑아 든 것은 다름 아닌 켈리건의 검.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 간 신의 무기였다. 분신은 마기의 검에 기운을 불어넣으며 자세를 낮췄다.

‘움직임을 좇을 수 없다면, 녀석의 행동 범위를 통째로 베어 내면 돼.’

가느다란 팔에 힘이 들어가며, 흰 피부 위로 검은 마기가 피어올랐다. 분신은 루멘을 좇는 것을 포기하고 검에 집중했다. 품은 마기의 양이 늘어날수록 검에서부터 둔탁한 공명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공명의 빈도가 잦아지며, 소음이 커져 갔다. 귀가 아릴 정도로 요란하던 공명음이 일순 자취를 감추고. 다음 순간, 에밀리아의 분신이 몸을 회전해 검 끝으로 커다란 원을 그렸다.

후우웅―

검은 구의 잔상이 사위를 훑었다. 그와 동시에, 찢어지는 폭음과 충격파가 들판을 휩쓸었다.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빈틈없는 공격. 분신은 자세를 바로 세우며 천천히 눈을 굴렸다. 공격에 나가떨어졌을 루멘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

들판을 나뒹구는 인형은 없다. 기척을 따라 빠르게 뒤를 돌자, 등을 보인 채 반 뼘 빠져나온 검을 납검하는 루멘의 모습이 보였다. 당당하게 등장한 인간에 분신이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으나.

“어떻게 이 검으로 마왕을 죽일 수 있었는지, 조금 알 것도 같군.”

빛을 품고 있던 유선형의 구멍에서부터, 무수한 검기가 쏘아지기 시작했다. 직선을 그리는 푸른색의 검기가 무자비하게 허공을 갈랐다. 환한 무대 위로 쏟아지는 박수갈채처럼, 어디에도 피할 곳은 없다. 결국 분신은 루멘을 뒤로한 채 쏟아지는 검기에 집중해야 했다.

루멘은 순식간에 검기에 파묻힌 분신의 실루엣을 응시하며 검의 손잡이를 진득하게 문질렀다. 이루 말할 데 없이 강력한 검이다. 신의 가호가 온몸을 적시고 있음이 절절하게 느껴져, 성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해. 이 검을 완벽하게 활용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검을 손에 익히고, 넘쳐흐르는 힘을 통제할 시간이.’

강한 힘을 얻었다고 해서 단박에 끝낼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루멘은 켈리건의 검을 통해 얻은 힘을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역시 힘이 부족하군.”

시공간의 일부가 벌어질 만큼 욕심껏 욱여넣은 검기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범람하는 검기 속에서, 분신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좀 전의 자신이었다면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공격이다. 그런 공격을 퍼붓고도 잠시 시간을 벌었을 뿐, 분신의 무릎 하나 꿇리지 못했다.

암담할 만큼 극심한 격차였으나, 루멘은 절망하지 않았다.

“죽음 위에 빛이 있으리.”

그 안에 담긴 뜻을 제대로 생각하지도 않았으면서, 그저 홀린 것처럼 중얼거렸다. 루멘은 빠르게 줄어드는 검기의 수를 확인하며 곧장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몇 번이고 공격을 이어 분신을 쓰러뜨리겠노라. 서늘하게 눈을 빛낸 루멘이 검집에 손을 올리려 했다. 하지만.

“……!”

이 자리에 있어선 안 될 인물이, 그의 눈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마왕. 분신이 아니었다. 자신이 상대하던 분신은 아직도 검기의 비 속에 파묻혀 있다. 빠르게 눈을 굴려 분신의 위치를 확인한 루멘이 마른침을 삼켰다.

‘벗어나야 한다.’

눈앞에 나타난 이는 진짜 마왕. 마왕을 무릎 꿇리기엔 아직 켈리건의 검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여기서 마왕을 상대했다간 켈리건의 검을 뽑은 의미도 없이 패배하고 말리라. 직감한 루멘이 발끝을 틀었다.

그러나.

“네 멋대로 날뛰게 두진 않아.”

루멘의 발끝이 떨어지기도 전. 눈 깜짝할 새 거리를 좁혀 온 마왕의 얼굴이, 루멘의 시야 가득 들어찼다.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함에도 움직이지 못했다. 공포심? 마왕의 새로운 마법? 그 무엇도 이유가 아니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번지는 뜨거운 열기. 불가항력의 힘을 따라 목구멍을 타고 오르는 비린 액체. 반사적으로 부릅뜬 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를 바라보고. 그곳에는, 정확히 자신의 심장을 꿰뚫은 켈리건의 검이 자리하고 있었다.

언제 검을 빼앗아 제 심장에 처박은 것인지. 그것을 생각할 새도 없이, 에밀리아가 손목을 비틀었다. 날카로운 검날이 심장을 헤집는 감각이 생생했다.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창백한 얼굴에 대고 말했다.

“너희의 사랑이 절절했길 바라. 내가 겪은 고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카델 라이토스가 끔찍한 고통 속에 파묻히길 바라.”

그래서 차라리 죽여 달라 애원하게 되기를. 고저 없이 퉁명스러운 속삭임을 끝으로, 루멘의 몸이 크게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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