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4화 (49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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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루멘 도미닉’의 의지가 운명의 벽을 두드립니다.」

「기사 ‘루멘 도미닉’의 한계 돌파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실패 시, 한계 돌파 퀘스트 소멸. 기사 ‘루멘 도미닉’ 사망.」

“왜 하필 지금……!”

갑작스럽게 떠오른 시스템 창에 카델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껏 가르엘과 루멘, 두 부하를 제외한 모두가 한계 돌파에 성공했으나. 카델은 남은 둘까지 한계 돌파에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바란 적이 없었다. 오히려 하지 않기를 바랐다. 한계 돌파를 위해선 얼마나 커다란 시련을 이겨 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단장님? 왜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루멘이 위험한 것 같아.”

“루멘 경이요? 그걸 어떻게……. 설마 그 ‘시스템’이라는 녀석이 알려 준 겁니까? 그렇게 친절한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요.”

빠르게 계단을 오르는 동시에 새어 나온 공격을 방어하고, 대화까지 이어 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카델은 절반도 더 넘게 남은 계단을 올려보며 대답해 주었다.

“직접 위험을 경고해 준 건 아니야. 단원들이 위기를 이겨 내고 한층 더 강한 힘을 얻게 될 때, 시스템은 그 시련이 시작됐음을 알려 주거든. 하지만 말했듯이 그건 위기를 이겨 냈을 때의 얘기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인 만큼,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알림이나 다름없어.”

소린이 죽고, 나머지는 마왕을 상대하고 있을 지금. 루멘에게 한계 돌파 퀘스트가 생겼다는 건 너무나 위험한 신호였다. 다른 이들의 힘까지 합쳤음에도 궁지에 몰렸다는 뜻이었으니.

터질 것 같은 허벅지의 고통을 씹어 삼키며 계단을 두 칸씩 타고 오르는 카델의 옆. 그의 얘기를 곱씹던 가르엘이 말했다.

“제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까? 제법 많은 역경을 헤쳐 왔으니, 있었을 법도 한데요.”

“아니. 너는 없었어.”

“……다른 동료들은 전부 있었다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루멘까지 시작했으니, 널 제외하곤 전부 있었다고 볼 수 있지.”

별 상관도 없는 얘기였다. 하나 남은 가르엘이라도 평생 한계 돌파의 필요성 따윈 모르고 살게 하고 싶었다. 이야기를 끝마쳤다고 판단한 카델은 입을 다물고 계단 오르기에 집중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힘차게 다리를 뻗은 순간. 카델의 허리를 낚아채 단숨에 안아 든 가르엘이 당황한 얼굴에 대고 중얼거렸다.

“자존심이 벅벅 긁히는군요.”

차마 눈 뜨고는 못 봐 줄 광경이었다. 비소를 흘리는 에밀리아의 맞은편. 활짝 열린 문 너머에는, 넓은 들판 위에서 허물어진 몸을 가까스로 일으켜 세우는 루멘이 있었다.

“저것 봐. 난 저 아이가 너희들 중 가장 똑똑할 줄 알았는데, 가장 미련스러워. 그게 조금 화가 나네. 내 안목이 잘못됐다는 뜻 같아서.”

에밀리아는 자신의 분신과 대적하는 루멘의 모습이 우습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지금은 최대한 에밀리아의 장단을 맞추며 그녀의 주의가 기사들에게 옮겨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마밀은 차마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웃을 수 없었다.

‘저 녀석도 마왕의 제안을 받았을 테니, 의식을 잃으면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거다. 그런데도 저렇게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구나.’

루멘은 분신을 쓰러뜨리고 자력으로 빠져나오길 택했다.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전멸을 예상했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본인까지 쓰러지면 승리와는 영영 멀어질 테니까?

글쎄. 마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카델에게 듬직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는, 한없이 허세스러운 판단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가능성이 큰 것은.

‘활로가 없는 순간에도 더 높은 곳을 꿈꾸는 게냐. ……대단하군. 젊은 날의 치기라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대단해.’

루멘은 눈앞의 분신을 꺾음으로써 제 한계를 넘어서는 힘을 움켜쥐려 하고 있다. 그의 전투에서 집념과 갈망이 느껴졌다.

인간계의 평화를 향한 희망, 돌아올 카델에게 힘을 보태야 한다는 의지. 물론 그런 것들도 루멘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일 것이다. 그러나 마밀은 루멘에게서 지독한 갈증을 느꼈다. 그것은 향상심이라는 말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혀를 내두를 만큼 집요한 욕심이었다.

무엇이 그를 ‘더 강해질 수 있다’라고 확신하게 만든 걸까? 살아남는 데에 집중해야 할 때다. 대체 어떤 확신에 사로잡혔기에 목숨을 건 도박을 감행하면서까지 전투를 이어 가는 걸까. 진심으로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마밀은 루멘의 싸움에 오래 집중할 수 없었다.

꿈틀.

은은한 불꽃에 타들어 가던 모들렌의 왼팔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마밀은 불꽃의 화력을 높이며 자연스럽게 몸을 밀착시켰다. 제 움직임이 부산스럽게 느껴지지 않도록 마왕에게 말을 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영혼을 나눠 준 분신이라고 했으니, 상대하는 적의 능력도 느낄 수 있는 겐가?”

“그래. 나눠 준 영혼에 집중하면 좀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지. 저 아이의 죽음이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궁금해?”

“척 봐도 곧 죽을 것 같긴 하다만, 궁금은 하군.”

“나와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한다면……. 남은 생명력은 5퍼센트 미만이야. 슬슬 쓰러지겠네.”

마밀은 의미 없는 반응을 보이며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신음을 뱉으려 하는 모들렌의 머리를 바닥으로 꾹 짓눌렀다. 그가 깨어났다는 사실이 들통난다면 그는 물론 자신까지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된다.

“……몸이 고되니 눕고 싶군. 누워서 지켜봐도 되겠나?”

앉아 있는 상태로는 모들렌을 돌보기가 영 어려웠다. 마밀은 황당한 부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에밀리아를 찔러 보았다. 그에 루멘의 전투를 지켜보던 그녀의 고개가 움직였다. 닿아 온 시선은 차갑고 냉담하기만 했다.

“무슨 수작이야?”

“수작이라니. 늙은이의 진솔한 투정일 뿐이네.”

“……네 이름은 뭐지?”

“마밀 키파라고 하네. 자네는?”

“알 필요 없어.”

얇게 휘어지는 눈웃음은 상황에 맞지 않게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에밀리아는 태연한 척 표정을 꾸며 내는 마밀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마밀 키파.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뭘 말하는 겐가?”

“네가 뒤에 쓰러진 인간에게 마력을 흘려보내고 있는 거. 정말 모를 줄 알았냐고.”

웃음 섞인 질문에 마밀의 표정이 굳어졌다. 숨기지 못한 반응에 웃음을 터뜨린 에밀리아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여긴 내 성이야. 내 공간이고, 내 세계야. 아주 미세한 기운의 흐름도 곧장 알아챌 수 있지. 지금 네 뒤의 인간이 희미하게 움직였다는 것도, 나는 이미 알고 있어.”

“……알고 있으면서도 왜 가만히 놔둔 거지?”

“소용없으니까. 네가 한 명을 깨우고, 두 명을 깨우고, 거기 있는 전부를 깨워도. 너흰 내 상대가 되지 못해. 그래서 놔뒀어. 혼자 열심히 꼼지락거리는 게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아이처럼 반짝이던 에밀리아의 눈빛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그녀는 탁하고 건조한 시선을 움직여 다시 루멘의 전투로 관심을 돌렸다.

“마음대로 해. 하지만 너희가 다시 날 공격하려 든다면, 의식을 잃는 정도로 끝나진 않을 거야.”

전부 알고 있었음에도 방치했단 말인가. 그녀에겐 자신들 모두가 한 번에 달려들어도 압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잠시 입을 다문 채 에밀리아를 응시하던 마밀은, 이내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복도를 울리는 쩌렁쩌렁한 웃음소리에 에밀리아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고. 마밀은 완전히 뒤를 돌아 모들렌을 흔들어 깨웠다.

“자네, 들었는가? 자비로운 마왕 덕에 시간을 벌었군. 어서 일어나 치유술을 전개해 주게.”

모들렌은 반쯤 풀린 눈을 끔뻑이며 마밀을 올려다보았다. 조금씩 돌아오는 의식 속에서 자신이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아내려 애썼다. 그런 모들렌에게 마밀은 대강의 상황을 성의껏 설명해 주었다. 아군의 재기를 감출 의지도 없어 보이는 우렁찬 음성에 에밀리아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렇게 건방지게 굴어도 봐준다고는 하지 않았어. 은밀하게 일을 꾸미는 모습이 귀여웠던 거야. 기어오르는 건 봐주지 않아.”

“이 나이에 귀엽다는 소리를 다 듣고,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구만.”

“마밀 키파.”

“내 이름이 마음에 들었나? 제법 잘 부르는구만그래.”

모들렌은 여전히 혼미한 정신을 가지고도 빛의 마력을 끌어내고 있었다. 마밀은 그런 모들렌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에밀리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의자에서 내려왔다. 마밀을 응시하는 표정에선 두려울 만큼 살벌한 분노가 아른거렸다.

“지금의 난 뭔가를 더 참아 줄 만한 여유가 없어. 거슬린다면 죽여 버릴 뿐이야. 이 이상 거슬리지 않게 조심해.”

“그건 곤란하네. 난 카델이 도착하기 전에 남은 기사들을 모조리 깨워, 너를 궁지로 몰아가고 싶거든.”

마밀이 짧은 영창과 함께 손을 휘두르자, 그와 모들렌의 사이로 복도를 가리는 화염의 벽이 피어났다. 단단하게 솟아난 화염 벽과 그 앞에 선 마밀. 굳건히 선 노인을 비추는 강렬한 배경에, 에밀리아의 턱에서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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