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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바깥에선 아직도 전투가 한창이었다. 자신이 마왕의 형제들을 처리할 동안 싸움이 마무리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승리의 두각 정도는 드러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착실하게 인간군의 수를 쪼개던 에밀리아의 계획이 제대로 빛을 발한 모양이었다.
“치유술을 사용하기엔 부상자의 수가 너무 많군요.”
“황혼 기사단은 몇 명이나 보여?”
“하나, 둘, 셋……. 열 명이 조금 넘는 수준입니다. 말도 안 돼요. 전부 죽었을 리가 없는데. 모들렌도 보이지 않습니다.”
“모들렌 경이라면 얼음 계단을 타고 올라갔을 거야. 너 다음으로 강력한 치유술을 사용할 수 있는 기사니까.”
카델은 혼란스러워하는 가르엘을 능숙하게 달래며 한숨을 삼켰다.
‘비등비등은커녕 밀리고 있는 형국이다. 기사들의 체력엔 한계가 있어. 성기사의 수가 점점 줄어들면서 치유술에도 차질이 생겼으니. 반면 고위 마족에겐 숨만 붙어 있어도 사라지지 않는 재생력이 있다. 장기전이 될수록 인간군에겐 절망뿐이야.’
열심히 싸우고 있는 그들에겐 미안한 말이었지만, 인간군이 끝까지 버텨 주리라는 가정은 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전멸하기 전에 마왕을 찾아가야 했다. 카델은 인간군을 뒤로한 채 서둘러 얼음 계단을 타고 오르려 했다. 그러나.
“카, 카델…….”
근처에서 그를 부르는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카델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가르엘이 그를 끌어당겼다.
“저길 보세요, 단장님. 드레프 경입니다.”
“드레프라고……?”
가르엘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누군가의 시체 위에 쓰러져 있는 드레프의 모습이 보였다. 피를 뒤집어쓴 처참한 모습에 카델이 서둘러 달려갔다.
“드레프! 많이 다친 거야?”
“봐, 봐라…….”
“심한 상처가 있어? 어디? 젠장, 시간이 없는데……. 일단 가르엘에게 치유술을 부탁해 볼게.”
“그딴 건 필요 없, 어……! 이걸……!”
카델의 반응이 답답하다는 듯, 땅을 짚은 드레프가 몸을 억지로 일으키려 했다. 그에 기겁한 카델이 다시 그를 눕히려 했으나.
“내가 죽였, 다. 해냈… 다고…….”
카델의 손을 떨쳐 낸 그가 제 아래에 깔린 시체를 가리켰다. 그제야 시선을 옮긴 카델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이 녀석은…….”
“내가… 이 녀석을 죽여서……. 원거리, 견제는… 하지 않아도……. 절대… 못, 죽일 것 같았는데… 내가…….”
힘겹게 말을 잇던 드레프가 왈칵 피를 토하며 시체 위로 쓰러졌다. 초점이 완전히 풀린 그의 모습에 카델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아틀라스 몽스텔이야. 우선적으로 죽여 둬야 하는 적이었지. 원래라면 나나 부하들이 해치웠어야 할 놈인데…….’
해치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다른 일로 경황이 없어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카델의 방치 속에서 아군을 학살해 가던 아틀라스를, 드레프가 기어이 무너뜨린 것이다.
아틀라스는 드레프가 쉽게 해치울 수 있는 고위 마족이 아니다. 그의 능력을 폄하하는 게 아니었다. 시스템은 카델과 그의 기사들이 정해진 적을 해치우길 바랐고, 다른 이가 그 과정에 개입되기를 원치 않아 했다. 지금껏 개입된 이들을 농락하며 카델에게 제거를 부추겨 왔으니까.
그 사실을 몸소 깨우쳐 온 카델이었기에, 드레프의 전투가 얼마나 참혹했을지. 그가 얼마나 큰 절망을 견디며 주어진 운명을 꺾어야 했는지. 누구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고생했다. 정말, 정말 고생했어.”
“그딴 말을… 듣자고…… 죽인 게 아니야.”
카델의 진심 어린 칭찬에도 드레프는 힘 빠진 성질을 냈다. 그는 반쯤 감겨 가물거리는 눈을 애써 부릅뜨며 말했다.
“몇 놈이고… 끝까지 물어뜯어 줄 테니까……. 이쪽은… 걱정하지 말고. 마왕을 죽여라. 중요한 일을…… 특별히… 맡겨 주는 거야…….”
걸레짝이나 다름없는 몸으로 어떻게 더 싸움을 이어 가겠다는 것인지. 잠꼬대 같은 말이었으나, 드레프가 말했기에 그것은 소중한 의지로 뒤바뀌었다. 지그시 입술을 깨문 카델이 뒤편의 가르엘을 불렀다.
“죽지 않게 해 줘.”
시간이 없어 완벽한 치유술은 불가능하겠지만, 최소한 목숨이라도 붙여 둬야 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가르엘이 마기를 개방하고. 그의 치유술이 드레프의 호흡을 안정시킬 무렵이었다.
콰과과과광!
아득히 높은 곳에서부터 들려온 폭음과 함께, 점같이 아주 자그마한 무언가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저게…… 뭐지?”
“사람입니다!”
가르엘의 외침에 카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 높은 곳에서 떨어질 만한 사람이라면. 마왕을 상대하러 간 이들 중 한 명임이 틀림없다.
순식간에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서둘러 마력을 끌어 올린 카델이 빠르게 가까워지는 점을 조준하며 바람을 일으켰다. 완전히 충격을 없앨 순 없겠지만, 적어도 터져 죽지는 않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 그냥 떨어지고 있는 게 아니야! 뭔가에 떠밀리고 있어!”
“떠밀리고 있다고요?”
“힘이 부족해! 가르엘!”
카델의 바람으로도 속도를 조절할 수가 없었다. 다급한 도움 요청에 가르엘이 치유술을 멈추고 마기를 끌어 올렸다. 사방이 보는 눈이었지만, 남의 시선까지 의식할 여유는 없었다.
마기를 따라 그의 등으로 반쪽짜리 날개가 늘어지고. 높이를 가늠하던 그가 날개를 움직여 가볍게 날아올랐다. 높게 날 수는 없었으나, 바람 마력으로 최대한 추락 속도를 늦춘 인간을 낚아챌 정도는 됐다.
가르엘은 그를 낚아채 안전하게 착지하려 했으나. 카델의 말대로, 추락하는 이는 무언가에 떠밀리고 있던 듯했다. 기이한 힘에 짓눌려 훅 꺼지는 몸은 마기의 날개도 버티지 못했다. 가르엘은 품 안의 인간을 꽉 끌어안은 채 추락의 충격을 최대한 자신에게 몰아 지면에 처박혔다.
“가르엘! 괜찮아?”
요란하게 떨어진 두 인형에 카델이 기겁하며 달려갔다. 나풀거리는 흙먼지를 치워 내자, 누군가를 품에 안고 콜록거리는 가르엘의 모습이 드러났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재생 가능해요. 그것보다…….”
카델을 안심시킨 가르엘이 제가 안고 있던 인간을 바닥에 눕혔다. 그제야 그의 얼굴을 확인한 카델이 눈살을 찌푸렸다.
“소린 경……? 소린 경! 정신 차리세요! 소린……!”
“잠시만요. 단장님.”
소린을 흔들어 깨우려던 카델이 가르엘의 시선을 따라 눈을 굴렸다.
“이건…….”
“마기입니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소린 경의 몸을 파고들고 있어요.”
명치 부근에 자그마한 마기의 덩어리가 박혀 있었다. 언뜻 정지한 상태인 듯 보였으나, 그것은 여전히 맹렬하게 회전하며 소린을 좀먹고 있었다. 이것이 소린을 바닥으로 떠밀던 힘의 근원.
그것을 바라보는 카델의 안색이 흐려졌다.
마왕을 상대했던 게 틀림없다. 벌써 그녀와 접촉했을 줄은 몰랐는데. 자신이 형제들을 노리고 있으니, 그걸 견제하기 바빠 행동이 더딜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충돌이 빠를 줄 알았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서두를 것을.
카델은 미약하게 뛰는 소린의 맥을 짚고는 가르엘을 돌아보았다.
“아직 숨이 붙어 있어. 깨워서 얘기를 들어 보자.”
“명치에 박힌 마기를 제거하지 못하면 치유술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선 이것부터 해치워 보죠.”
가르엘의 마기가 에밀리아의 마기를 도려내듯 주위를 감쌌다. 최대한 힘을 주어 덩어리를 빼내려 했으나, 아무리 용을 써도 꼼짝하지 않았다. 조급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델이 제 마력이라도 보태 보려던 순간.
“……소린 경! 정신이 듭니까? 제가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죽은 것처럼 미동도 없던 소린이 눈을 떴다. 그가 메마른 입술을 달싹이자, 입꼬리를 타고 얇은 핏줄기가 흘렀다.
“이제야…… 왔군.”
“말을 아끼십쇼, 소린 경. 아직 몸에 박힌 마기를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가르엘의 경고에도 소린은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빛은 흐릿했으며, 늘어진 몸에선 일말의 기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상태임에도 입 무거운 사내가 굳이 말을 꺼내려 한다는 것은, 그만큼이나 전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는 거겠지.
카델은 소린이 말을 할 수 있도록 가르엘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소린이 피가 끓는 듯한 괴상한 소리와 함께 다시금 입을 뗐다.
“아주 작은, 상처를 냈다.”
“마왕에게 말입니까?”
“그래. 아주 자그마한 상처에 불과하나……. 마왕은 회복하지 못했지. 내 모든 것을 쏟아부었으니… 짙은 흉으로 남을 거다.”
아주 작은 흉을 남긴 대가로 하늘에서 추락한 것인가. 카델은 착잡한 마음을 숨기려 애썼다. 그리고 그런 카델의 앞에서, 소린은 잘 올라가지도 않는 팔을 들었다. 굳은살투성이의 손이 땅을 짚고 있던 카델의 손을 움켜쥐었다.
느슨한 손길이었으나, 카델은 흠칫 놀라며 시선을 옮겼다. 무언가를 건네주려고 하는 것이라기엔 맞닿은 손 이외의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는다.
“예전에 말했지.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라이토스가 필요하다……. 그리 생각한다고.”
“예. 그러셨죠.”
“오늘의 나는, 인간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카델 라이토스가 필요하다……. 그리 생각했다.”
아직도 몸에 박힌 마기가 움직이지 않는지, 가까이서 가르엘의 곤란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본인이 가장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럼에도 소린의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카델을 향했다.
“필요하니 기다렸을 뿐이다. 언제나 그랬지. 평화를 위해선 네가 필요했기 때문에……. 나는 도전적이고, 무모하고, 때로는 못된 선택을 해 왔어.”
“……이제 그만 말을 아끼세요. 상처가 깊습니다.”
“한 번 돕는 일 없이 네 힘을 축내기만 한 나를…… 원망해도 좋다.”
“소린 경. 괜찮습니다. 그만 하세요.”
“그러니 제발, 제발 평화의 돌을 되찾아다오. 나로는 해내지 못한 일을 해 주게. 부탁, 한…….”
카델은 제 손을 감싼 미약한 힘이 완전히 풀어졌음을 느꼈다. 고통과 슬픔에 일그러졌던 얼굴은 느슨해지고, 고여 있던 한 방울의 눈물이 그의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단장님. 죄송합니다.”
가르엘의 나지막한 사과에도 반응하지 못했다. 소린에게 어떤 애틋한 감정을 느낀 적은 없다. 오히려 언제나 일정한 거리감을 느꼈다. 자신의 출신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임에도 그랬다. 딱딱하고 건조한 성격, 오로지 제국만을 위해 살아가던 지극히 기사다운 사내.
게임 속에서도 그가 죽었던가? 하이론 때와 같은 시스템의 반응은 없었으니, 어쩌면 시스템이 정한 운명대로 죽은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의 죽음은 시스템이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아주 사소한 사건일 수도 있지. 그의 죽음과 생존, 둘 중 무엇도 시스템에겐 타격을 입힐 수 없기에. 그렇기에 반응하지 않은 것이라면.
“……해내겠습니다. 꼭 해낼게요. 그러니 경의 죽음은 헛되지 않습니다.”
그 오만방자한 시스템을 어떻게든 꺾어 버릴 것이다. 한 사람의 의지를 이렇게나 간단히 내다 버리는 끔찍한 괴물을 해치워, 이 세계에 자유를 가져다주어야 했다.
“두 사람을 구석에 옮겨 두자.”
카델과 가르엘은 의식을 잃은 드레프와 소린의 시체를 성의 뒤편까지 끌어다 두었다. 만약 드레프가 깨어난다면 눈을 뜨자마자 동료의 시체를 발견해야겠지만. 차마 소린을 전장에 버려둘 수가 없었다.
가지런히 누운 두 남자를 내려다본 카델이 주먹을 그러쥐었다.
“서둘러야겠어. 소린 경에게 자세한 설명을 듣진 못했지만, 소린 경이 추락하는 걸 라이돈조차 돕지 않았어. 심각한 상황인 게 분명해.”
“제발 남은 사람들은 무사했으면 좋겠군요.”
라이돈의 얼음 계단은 아직 건재하다. 계단이 멀쩡할 때 빠르게 성의 상층부를 향해야 했다. 이미 한 무리의 인간군을 성에 들였기에 적들의 시선이 계단에 집중되지는 않았다.
다행히 이쪽은 인원이 둘뿐인 데다 암흑 마력으로 연막을 칠 수도 있으니. 버릇처럼 펜던트를 움켜쥐던 카델이 행동을 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