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1화 (49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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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똑같은 제안을 한 인간이 있었어. 그 인간은 죽어도 카델 라이토스를 불러내지 않겠대. 절절하고 멍청한 사랑을 하기 때문이야. 우습지? 고작 사랑 하나를 지키겠다고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는 게.”

“…….”

“넌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 그러니 서둘러 줘. 내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거든.”

그녀의 앞에 선 이는 소린 살라모. 치열했던 전투 도중 끌려 나온 그는 빈말로라도 멀쩡하다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저 악으로 버티고 있었다. 다른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상처가 적은 몸이었기에 치기라도 부려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꾹 쥐고 있던 오른손을 펼치자, 거대한 해머가 빛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앞에는 쓰러진 단장님과 기사들이. 열린 방문 너머에선 자신이 상대했던 것과 똑같은 괴물을 상대하는 루멘과 마밀이.

이미 전멸인 상태나 다름없지 않은가. 루멘 도미닉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카델 라이토스를 부르지 않은 것인가. 미련했다. 미련하고 이기적인, 그야말로 최악의 선택이었다.

소린은 텅 빈 손을 주먹 쥐고 펴기를 반복했다. 손바닥에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정신력으로 버텨 온 것이 대체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듯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에밀리아를 마주 보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개인의 사랑을 위해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짓은 하지 않는다.”

“당연히 그렇겠지.”

“하지만 카델 라이토스가 마왕조차 경계하는 위협적인 인간인 거라면…….”

그는 힘이 빠져 떨리는 손으로 장검을 뽑아 들었다. 예상 밖의 행동에 에밀리아의 표정에 금이 갔다.

“그가 제국을 넘어 세계를 구할 영웅이긴 한가 보군. 카델 라이토스를 불러내지 않겠다. 사랑이 아닌, 대의를 위해 그를 지키겠다.”

“……이젠 우습지도 않네.”

소린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아군의 몸을 넘어, 그들을 지키듯 앞에 섰다. 강렬하게 번뜩이는 눈빛이 에밀리아를 향하고. 불쾌한 짜증을 드러내는 그녀에게, 소린이 선언했다.

“누구에게 묻더라도 같은 대답이 돌아올 거다. 그러니 덤벼라! 내 목숨으로 네 바짓가랑이라도 붙들 수 있다면, 난 몇 번이고 사지에 뛰어들 테니!”

마왕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분신을 상대하는 일이 훨씬 간단하겠다만. 마밀은 도저히 다행이라는 생각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어디 은둔이나 하면서 노년을 즐길 걸 그랬지. 안 그런가, 젠가? 어디서 자네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하늘에서 부르고 있는 게지?’

나이 든 몸과 함께 떨어진 체력, 질리도록 쥐어짜인 마력. 심지어는 앞에서 주의를 끌어 줄 아군도 없다. 짧은 영창 마법으로 상대할 수 있는 적도 아니다. 그래서 마법 전개를 위해 거리를 벌릴라치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어 몸을 박아 주시니. 마밀은 자신이 아직도 쓰러지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둘 중 하나가 죽지 않는 이상 이곳을 벗어날 순 없어. 죽는 게 내가 되진 않을 테니, 순순히 눈을 감는 게 낫지 않겠어?”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드러누워 눈을 감았을 게다.”

이건 노인 학대였다. 마밀은 1초 뒤에 눈앞의 분신에게 패배해 사망한대도 그다지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고마운 마음마저 들 정도다. 이런 지경까지 왔음에도 꾸역꾸역 마력을 끌어 올려 버티는 이유는 단 하나.

‘네 귀한 손자가 도통 오질 않는구나, 젠가. 얼굴은 보고 죽어야 할 텐데. 녀석이 돌아와 처음 보는 게 스승의 시체라면, 저승에서도 낯부끄럽지 않겠어.’

돌아올 카델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 주어야 했다. 자신에겐 더 이상 마왕을 해치울 힘이 없다. 젊을 적이었으면 몰라도, 지금은 절대 하지 못한다. 평소에도 부정적인 사고를 일삼는 그였지만, 이 판단만큼은 지극히 이성적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너무 많은 힘을 소모했다. 마왕의 계획에 나보다 더 잘 놀아난 인간은 없을 테지.’

[징벌의 문] 앞에서 치렀던 전투를 시작으로, 마왕 성까지 오는 동안 마밀은 일당백 그 이상을 해냈다. 청혈 기사단은 원래도 마법사의 수가 적다. 마밀의 존재를 믿고 적극적으로 마법사를 발굴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 안일한 국왕의 업보를, 마밀은 정말이지 온몸으로 견뎠다. 그랬기에 이젠 회심의 일격으로 마왕의 뒤통수를 후릴 힘조차 남지 않은 것이다.

축 늘어진 손등으로 코피를 훔쳐 낸 마밀이 무의식적으로 품속을 더듬었다.

‘당장 이걸 먹는다면 승산이야 있겠다만.’

그는 마왕을 상대한 지 대략 3분이 지났을 무렵. 눈앞의 마왕이 진짜가 아님을 눈치챘다. 가짜라기엔 과도하게 강했으나, 진짜라기엔 기운이 흐렸으니. 고작 가짜를 상대하는 데도 이렇게나 버거운 몸이다. 이런 몸에 뭔가를 더 투자하기는 영 아까웠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살아 나가, 네게 이걸 전해 주마. 내 느려 터진 제자야.’

오직 카델을 위해, 마밀은 다 찢어진 입술을 달싹여 영창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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