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9화 (489/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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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없이 떠들어 대니 결국 자신을 이루고 있던 대부분의 비밀을 털어놓게 되었다. 어째서일까? 그 이유를 찾을수록 비겁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자신은 마족이 되어 심장을 먹어 치우는 가르엘이라도 사랑할 테니, 그 역시 이런 자신을 사랑해 달라는. 협박에 가까운 갈구.

카델의 긴 이야기를 한 번의 질문도 없이 경청하던 가르엘이 천천히 숨을 골랐다. 허공을 바라보는 눈빛은 복잡했고, 표정에선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사실 말입니다. 어떤 비화를 듣던, 단장님의 진짜 정체만큼 놀랍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뇌에 과부하가 올 것만 같은 지독한 진실의 폭탄 속에서도, 가르엘은 끝까지 이해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전부 이해하고, 소화해야 했다. 그래야 카델과 가까워질 수 있었으니.

“그런데 세계선의 소멸과 재생이라니. 이건…… 이건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군요. 제 기억엔 전혀 없는 일이니까요. 여태껏 그런 막연한 싸움을 해 왔던 겁니까? 당신은.”

하지만 생각할수록 황당하고 불쾌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카델에게 드는 감정이 아니었다. 이 세계. 또한 신여환이 살고 있던 세계의 신. 그를 괴롭혀 왔던, 이 세계를 깨부수던 무시무시한 힘에 대한 감정이었다.

자꾸만 흐려지려는 현실감을 되찾기 위해 애썼다. 그 삭막한 진실의 길을 홀로 걸어왔던 카델의 고통이 전부 현실임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나요? 어떻게 버틴 건가요? 저라면 진즉에 도망쳐 버렸을 겁니다. 단원들이 눈에 걸린대도, 그냥 눈 딱 감고 본래의 몫인 전쟁에만 집중했을 겁니다. 그래도 충분히 억울한 입장이잖아요. 다시 전쟁이 되풀이된대도, 그게 뭐 이상합니까? 전쟁이야 인간계에서도 자기들끼리 숱하게 벌여 왔는데요. 전쟁의 패배가 세계선의 소멸로 이어지는 건 씁쓸하지만, 존재 자체가 죽어 버리는 것도 아니잖아요.”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 말을 쏟아 내는 가르엘의 앞에서, 카델이 내놓은 대답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화내지 않는 거야?”

“……네?”

“내가 원래 세계에서 어떤 식으로 너희들의 고통을 즐겼는지, 네가 겪었던 비극을 얼마나 아무렇지 않게 치부했는지. 전부 들었잖아. 그런데도 화내지 않아? 원망……하지 않아?”

척박한 땅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던 가르엘이 그제야 카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카델은 잔뜩 기죽어 있었다. 벌을 받는 아이처럼, 몰려올 분노의 매질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잔뜩 긴장한 채 이쪽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일순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터질 듯 들어찬 감정을 모조리 쏟아 내고 싶었다. 그러나 가르엘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대신, 카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왜 단장님한테 화를 냅니까. 알고 그랬던 게 아니잖아요. 오히려, 오히려 당신에겐 그냥 게임에 불과하던 세계였는데. 지금 그 세계를 당신의 목숨을 걸어 가면서까지 지켜 주고 있는 거잖아요. 얼마나 힘들었을지 감도 안 잡히는 이 지독한 싸움을 혼자 버텨 내고 있던 거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화를 냅니까.”

“내가 한심하진 않아?”

“……그만두세요. 정말 화가 나려고 하니까.”

지금껏 혼자서 얼마나 삭이고 억눌러 왔던 것인가. 전쟁에서 이겨도, 이기지 못해도 본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오로지 자신들의 평화를 위해. 이 세계의 안전을 위해 이곳에 남아 몸을 던지기로 결정했다.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는데, 이 미련한 단장님은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가르엘은 제 품에서 떨리는 등을 토닥이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라고, 미친 듯이 안도하고 있습니다. 말해 줘서 고마워요. 내가 진짜 당신을 지킬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요.”

「경고! 기사 ‘가르엘 몬자시’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증가합니다. 해당 기사가 스토리를 변형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억제하십시오.」

「실패 시, 기사 ‘가르엘 몬자시’에게 ‘피할 수 없는 죽음’ 디버프가 생성됩니다.」

가르엘의 품속에 안긴 채, 카델은 멍하니 눈앞의 시스템 창을 응시했다.

‘피할 수 없는 죽음…….’

그것은 게임 내에도 존재하는 디버프였다. 디버프가 발생한 지 30초가 지나면 해당 캐릭터는 무조건 사망. 최종 보스인 마왕을 상대할 때나 특정 스테이지를 진행할 때 드물게 발생하고는 했다.

디버프를 피할 방법도, 막을 방법도 없다. 플레이어는 디버프가 발생하기 전에 전투를 끝내거나, 디버프가 달린 캐릭터를 죽인 채 게임을 이어 가야 했다.

‘그 디버프가 가르엘한테 생성된다고……? 왜? 내가 진실을 알려 줬기 때문에?’

알려 준 내용의 양은 다르지만, 자신이 빙의자라는 사실은 반도 알고 있다. 쿤라는 가르엘보다도 더 많은 사실을 안다. 그런데 어째서 가르엘에게만.

혼란함에 심장이 널뛰었다. 무슨 기준으로 가르엘이 쿤라보다 스토리를 변형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건지. 도대체 뭘 어떻게 억제하라는 건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카델의 호흡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눈치챈 가르엘이 그를 품에서 떨어뜨렸다. 그러자 창백하게 굳은 얼굴이 드러났다.

“단장님?”

“……가르엘.”

“왜 그래요? 제가 너무 세게 끌어안았나요?”

“네가…… 죽을지도 모른대.”

“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가르엘이 얼빠진 표정으로 반문했다. 잠시 당황스럽게 눈을 굴리던 그가 어떻게든 카델의 말을 이해해 보려 애썼다.

“그 ‘시스템’이라는 존재가 그러던가요? 제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이 전쟁에서 네 영향력이 커지는 걸 원하지 않나 봐. 하지만…… 하지만 너는 내 기산데.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잖아? 대체 뭘 어쩌라는 거지? 널 전투에서 배제라도 하라는 건가?”

“그건 불가능합니다. 제가 없으면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될 거예요.”

그렇다. 가르엘을 전투에서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는 주인공인 ‘카델 라이토스’의 기사였고, 이 전쟁의 주역이나 다름없다. 시스템이 요구하는 ‘억제’가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네가 뭔가 특별한 선택을 해서, 시스템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전쟁이 흘러갈 확률이 있나 봐. 그 가능성을 경계하는 거겠지. 마치 하이론 님처럼…….”

“하이론 님의 죽음도 시스템과 연관이 있었던 건가요?”

카델이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자, 가르엘도 더는 캐묻지 않고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어느새 차가워진 카델의 손을 자신의 온기로 부지런히 녹여 낸 가르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 이미 이번 전쟁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단장님과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거예요.”

“그딴 결심은 내다 버려. 난 절대 널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

“단장님.”

“시끄러워! 네가 죽어도 좋다는 소리 하는 걸 듣자고 사실을 말해 준 줄 알아? 죽지 않을 방법을 같이 고민하자는 거잖아!”

날카로운 외침에도 가르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에 카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결국 분을 참지 못한 그가 벌떡 몸을 일으키고. 매서운 눈빛이 가르엘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딴 생각 품고 있을 거면, 난 널 여기 묶어 두고 혼자 마왕 성으로 돌아갈 거야.”

“정말 귀여운 협박이네요.”

“진심이야. 여태 내 얘기를 어디로 들은 거야? 내가 이 싸움을 선택한 건 전부 너희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서라고 했잖아. 전쟁에서 살아남기를 바라서라고!”

“저도 살기를 원합니다. 살아남아서, 이런 몸으로라도 꾸역꾸역 살아남아서, 영웅이 된 단장님 곁에서 평생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그런데 왜……!”

“죽음을 가정하지 않는 전쟁이 어디 있나요? 모든 전쟁은 목숨을 걸고 치르는 겁니다. 이곳에 살아남을 작정으로 싸우고 있는 기사는 없어요. 그리고 저는 반평생을 기사로서 살아왔습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그를 따라 카델의 고개도 올라갔다. 가르엘은 여전히 화가 나 보이는 카델의 뺨을 부드럽게 문지르고는, 제법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스템이 제 죽음을 걸고 단장님을 협박한대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전 싸울 겁니다. 인간계를 함락시키려는 마왕과도, 세계를 무너뜨리려는 시스템과도. 이 마음만큼은, 단장님도 꺾을 수 없어요.”

“나는…….”

네가 위험에 빠지는 모습을 볼 수 없다. 네가 죽음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다. 그리 말하고 싶었지만, 이내 그 말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새삼스러웠다. 자신도, 부하들도, 다른 모든 기사들도. 전부 목숨을 걸고 승리를 위해 싸우고 있는데. 죽을지도 모르니 싸우지 말라는 말을 하기엔, 이미 너무 먼 곳까지 와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가르엘의 의지를 응원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하기만 했다. 끝내 입을 열지 못하는 카델의 앞에서, 가르엘은 그의 어깨를 감싸 끌어안았다.

“마왕 성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봐요. 그동안 저도,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얘기를 들려줄게요.”

마왕 성까지 걸어 돌아가기에는 길도 알지 못하고, 남은 체력도 없다. 때문에 그들은 처음 시도했던 대로 어딘가 존재할지 모를 복귀용 마법진을 찾아보기로 했다.

거인화 한 셀레브의 난동 때문에 마을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지만, 원래도 폐허에 가까웠던 터라 크게 아쉬울 건 없었다.

그렇게 한층 더 난잡해진 유령 마을을 거닐며. 가르엘은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몬자시 가문은 썩 나쁘지 않았어요. 태어나자마자 부모를 잃은 제게 다들 친절히 대해 주셨죠. 다른 친척 형제들은……. 뭐, 가깝게 지내진 못했습니다만, 그리 멀지도 않았습니다. 제 외모에 빠진 몇 누님들로 인해 소동이 일기도 했죠. 그때가 참 웃겼는데. 혈육끼리는 혼인할 수 없다는 얘기에 누님들이 식음을 전폐하셨거든요.”

시스템을 통해 가르엘의 과거를 볼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매일 밤 눈을 감을 때마다, 그의 과거를 통해 그를 더욱 세밀하게 알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꿋꿋이 과거를 보지 않은 이유는, 그가 가르엘 몬자시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고통을 딛고 어떻게든 앞만 바라보려 하는. 필사적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남자이기에. 그런 사내의 과거를 들춰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언젠가, 그의 입으로 과거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했었는데.

“이 잘난 얼굴로 계속 가문에 붙어 있다간 큰 사달이 날 것 같아서, 결국 성기사가 되기를 택했습니다. 눈치받은 기억도 없는데 스스로 눈칫밥을 찾아 먹어서인지, 그때의 제겐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었거든요. 많은 사람을 구하고 싶었습니다. 또…… 보세요, 제 얼굴. 어딜 가도 귀찮은 일이 벌어지니, 꽤 지쳤었습니다. 신의 은총에 기대 신실한 삶을 살고 싶었달까요.”

“……그래. 네 얼굴을 보니 농담하지 말란 소리도 안 나오네.”

기대는 기대로 끝날 줄 알았다. 이대로 전쟁을 끝내고 자신이 사라진다면, 가르엘의 과거를 들을 기회는 영영 사라질 테니. 체념도 일찌감치 했다. 분명 그랬는데. 지금 자신은 가르엘의 입을 통해 직접 그의 과거를 듣고 있었다.

가르엘이 그려 주는 생생한 발자취는 카델에게 묘한 충족감을 가져다주었다.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황혼 기사단에 말단으로 들어가, 처음으로 목표가 생겼거든요. 매일같이 신상 앞에서 무릎 꿇고 앉아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무도 눈물 흘리지 않는 날이 찾아오기를 바라게 돼요. 그게 제 목표였습니다. 누구보다도 강한 성기사가 돼서, 누구도 눈물 흘리지 않는 날이 찾아오게 만드는 것.”

“아주 멋진 남자였네.”

“그렇죠? 멋모르던 시절이지만, 순진했던 만큼 행복했습니다.”

가르엘은 무너진 폐허 위로 마기를 불어넣으며 마법진을 탐색했다. 쿤라가 응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카델에게 마력을 아껴 두라며 홀로 탐색을 도맡았다.

이번 폐허에도 감지되는 것은 없다. 몸을 일으켜 손바닥을 털어 낸 가르엘이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전 노력한 만큼 성장하는, 재능 있고 운 좋은 남자였어요. 최선을 다하는 세월이 이어지니, 금세 기사단장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죠. 제법 어린 나이였거든요. 대륙에서 꽤 화제가 됐었는데, 단장님은 모를 겁니다. 이 세계에 오기 전일 테니까요.”

“응. 몰랐어. 난 게임을 할 때도 너희들의 비화 같은 건 잘 읽지 않았거든.”

“하하! 다행이네요. 아주 꼴불견이었을 텐데. 어쨌든, 어린 나이에 강대국의 기사단장이 됐으니, 쏟아지는 시기 질투에 몸 둘 바를 몰랐었죠. 어찌나 더러운 정치가 판을 치던지, 솔직히 초반엔 혀를 내두를 정도였어요.”

“너라면 아주 매끄럽게 잘 넘어갔을 것 같은데? 넉살 좋은 녀석이잖아.”

카델의 말에 가르엘이 음흉한 미소를 연기했다. 참지 못한 웃음을 터뜨리는 카델의 어깨를 가볍게 쓸어내린 그가 다음 장소를 향해 이동했다.

“맞아요. 제가 우직하고 묵묵하게 실력만 갈고닦을 성격은 아니죠. 당한 만큼 갚아 주면서 자리매김을 했습니다. 제 자리를 노리던 녀석들에게도 신의 철퇴를 먹여 줬죠. 그렇게 3년간은 열심히 기사단을 물갈이했습니다. 정말 믿을 만한, 성실하고 정직한 부하들로 채워 넣었죠. 그 녀석들을 열심히 키우고, 함께 화이트 왕국을 지키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한참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가 길을 꺾어 안쪽으로 들어갔다. 새롭게 발견한 폐허는 벽이 온통 무너져 원형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가르엘은 아무렇지 않게 잔해에 걸터앉아 마기를 개방했다.

“정말 열심히 삶을 꾸려 나갔는데.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여전히 잊히지가 않습니다. 그날은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불었고, 이유도 없이 컨디션이 최악이었어요. 그런데도 소탕해야 할 마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죠.”

“단장님! 아래쪽은 대충 마무리했습니다. 이제 아덴텔 평원과 마을 근방만 정리하면 될 것 같은……. 단장님?”

부지런히 달려와 상황을 보고하던 모들렌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시선이 말 위에 앉아 눈가를 문지르는 가르엘을 향했다. 모들렌이 가까이 말을 몰자, 짧게 숨을 들이쉰 가르엘이 몸을 바로 세웠다.

“어디가 불편하신 겁니까? 많이 힘드시면 인원을 나눠 저희가 아덴텔 평원까지 정리하겠습니다. 그 정도 여유는 됩니다.”

“하하, 모들렌. 날 걱정하는 거야? 모들렌에게 걱정을 받는 날이 오다니, 슬슬 단장 자리에서 물러날 때가 됐나 보네.”

“……언제쯤 예전의 절 잊으실 겁니까. 더 이상 단장님 일 검에 나자빠질 일은 없으니, 무리하지 마시고…….”

“눈이 좀 뻑뻑해서 그래. 어제 잠을 설친 탓인가 보지. 걱정은 넣어 두고, 어서 마을로 부하들을 보내. 치료가 필요한 주민들이 많아.”

마물 떼의 습격에 몇몇 마을과 근방이 쑥대밭이 됐다. 반나절이 넘도록 마물을 소탕하고 사람들을 돌보았는데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소동의 근원지인 리보케이프 마을의 주민 상당수가 중상을 입었기에, 단원들을 전부 마을로 보내 치료에 전념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동안 단장인 자신은 아덴텔 평원을 돌며 남은 마물을 소탕한다.

보통 이런 잡일은 부하들을 시키는 게 맞겠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컨디션이 좋지 않았으니. 괜히 치유술을 사용하다 헉헉대면 단원들의 걱정만 사게 될 것이다.

가르엘은 염려를 떨치지 못한 모들렌을 억지로 돌려보내곤, 평원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쫙 펼쳐진 들판에 말의 질주에도 속력이 붙으니,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렇게 얼마나 내달렸을까. 널찍한 평야를 꼼꼼히 살피던 가르엘의 시야 속으로, 한 무리의 마물이 들어찼다.

“오우거 두 마리에, 고블린은…… 열다섯인가. 잘도 같이 다니네.”

마물들은 마을이 아닌 너머의 숲을 향하고 있었다. 아마도 저 숲에 기거하고 있는 듯한데, 가만 놔뒀다간 언제 다시 마을을 습격하러 올지 모른다. 놈들이 본거지로 돌아가기 전에 없애야 했다. 가르엘은 말의 허리를 치며 속도를 높였다.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에 귀 밝은 고블린이 먼저 가르엘의 접근을 눈치챘다. 약탈한 것이 뻔한 무기를 치켜들며 괴성을 질러 대는 고블린에, 둔한 오우거도 묵직한 고개를 돌렸다.

“팔팔한 놈들이길 바라마. 그래야 부하들에게 들려줄 무용담이 생기지.”

중심을 잡기 위해 낮췄던 허리를 세우고, 검을 뽑아 들었다. 종으로 세운 검날을 얼굴 앞에 가져다 대자, 대칭을 이룬 완벽한 이목구비가 도드라졌다. 밝게 빛나는 자색의 눈이 스르르 감기고. 기도문을 중얼거리는 낮은 음성을 따라 검날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의 백마는 괴물들을 앞에 두고도 주인의 의지에 끌려 막힘없이 질주했다. 점점 좁혀지는 거리에 오우거는 방망이를 치켜들었고, 고블린은 펄쩍펄쩍 뛰어 대며 오우거의 뒤에 섰다. 그리고 굵직한 오우거의 팔이 방망이를 휘두른 순간.

한층 더 속도를 높인 말이 마물들의 틈새를 비집고 들었다. 기도를 마친 가르엘이 눈부시게 빛나는 검을 움켜쥔 채 몸을 바짝 숙이고. 묵직한 방망이가 가르엘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공격을 회피한 가르엘이 감사를 표하듯 말의 갈기를 쓰다듬더니, 이내 추락하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인이 떨어졌음에도 말은 멈춤 없이 달려 마물의 틈새를 빠져나갔다. 안전하게 착지한 가르엘은 모든 마물을 무시한 채 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러자.

콰아아아아―

마물 떼를 아우르는 거대한 빛기둥이 솟구쳤다. 살가죽을 난도질하는 빛줄기 속에서, 오로지 가르엘이 앉은 자리만이 난무하는 비명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수호신 세보시여, 오늘도 제게 내려 주신 충만한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어렴풋한 미소와 함께 빛기둥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빛이 사라진 자리엔 온몸이 뜯겨 나간 참혹한 시체들만이 자리할 뿐. 가르엘은 놈들의 핏물이 자신 쪽으로 흘러넘치기 전에 빠져나가려 했다. 단복에 묻은 피는 지우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채 다섯 걸음을 옮기기도 전.

“큿……!”

갑작스러운 이명과 함께, 왼쪽 눈동자에서부터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눈을 불태우는 듯한 열기에 다급히 눈가를 짚은 가르엘이 크게 비틀거렸다. 빠르게 치유술을 전개했지만, 그럴수록 통증은 심각해질 뿐이었다.

‘눈을 공격당한 기억은 없다. 먼지나 피가 들어간 것도 아니야. 그런데 왜…….’

영문을 알 수 없는 고통은 시간이 갈수록 강렬해져, 결국 그는 마물의 피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야 했다. 눈을 짚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차라리 뽑아내고 싶을 만큼 지독한 고통이었다.

당장이라도 바닥을 뒹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 낸 그가 손을 내렸다. 이런 곳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고통에 혼절하더라도 자신을 돌봐 줄 단원들이 있는 마을에서 쓰러져야 했다.

그리 생각한 가르엘이 멀쩡한 오른쪽 눈을 치켜떴다. 멀리서 기다리고 있을 말을 불러야 했다. 그러나.

“……?”

반쪽짜리 시야 가득, 주변을 뒤덮은 시꺼먼 기운이 들어찼다.

‘뭐지……? 마물?’

발견하지 못한 적이라도 있었던 걸까. 하지만 근방에 이런 기운을 뿜어내는 마물은 없을 텐데. 혼란은 찰나였고, 가르엘은 곧 자신을 둘러싼 검은 기운이 ‘마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족이 사용하는 마계의 기운. 그 불쾌한 기운이 조금씩 범람하고 있었다. 가르엘은 반사적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어디서 적이 튀어나올지 몰랐다. 이런 몸 상태로 마족과 대적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도망갈 시간이라도 벌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족은커녕 마물 한 마리조차. 그는 어떠한 공격에도 당하지 않았고, 위협도 받지 않았다.

그렇게 정적 속에서 긴장된 숨을 고르길 몇 분. 가르엘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그는 더 이상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왼쪽 눈꺼풀을 지그시 쓸어내리곤, 구부정한 몸을 일으켰다.

마기가 없는 깨끗한 공기를 들이마셔야 했다. 힘 빠진 다리를 움직여 마기를 헤치고 나아갔다. 찰박찰박, 피 웅덩이를 밟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축축한 소리가 오래도록 이어졌으나, 이상하게도 마기를 벗어날 순 없었다.

분명 저 앞에는 마기가 드리우지 않았었는데. 저곳이 마기의 범위 밖이었는데. 짙은 마기는 집요하게 가르엘을 붙들어 두었다. 고통의 여운에 헐떡거리며 아무리 움직여 대도. 그는 마기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가르엘은 깨달을 수 있었다.

“나한테서…… 나오고 있어.”

어째서? 왜 자신의 몸에서 마기가 나오는가? 이해할 수 없었다. 적의 공격? 누군가의 술수? 흑마법인가? 하지만 누가? 무슨 이유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생각이 이어질수록 눈앞의 마기가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임이 확실해졌다.

더러웠다. 불쾌했다. 빛 마력을 개방해 마기를 떨쳐 내고 싶었으나, 나오지 않았다. 빛 마력을 개방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나오는 것은 마기였다. 마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와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소름 돋는 감각에 진저리를 치던 그가 퍼뜩 제 왼쪽 눈을 더듬었다.

‘이 눈의 통증과 관계가 있는 거라면?’

마기는 눈의 통증이 극심해졌을 때 모습을 드러냈다. 연관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가르엘은 제 가슴팍을 더듬어 길게 늘어진 십자가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힘주어 잡아당기자, 목걸이가 끊어지며 십자가를 눈앞에 댈 수 있었다. 은으로 만들어진 십자가다. 얼굴을 전부 비추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한쪽 눈 정도는 무리 없이 비출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내 눈이……. 내 눈이 왜…….”

마안이 비쳤다. 마족의 눈이었다. 하얗고 깨끗하던 흰자위가 검게 물들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흑마법이 분명하다. 누군가 자신을 시기해 흑마법사에게 사주를 넣은 것이다. 방심한 새에 흑마법에 당해 왼쪽 눈이 마족의 것처럼 변하고, 마기가 흘러나오는 몸이 되어 버린 거다.

아니, 어쩌면 환각일지도 모른다. 꿈을 꾸고 있나? 오늘 유독 피곤하기는 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원정을 다닌 탓에 피로가 쌓였을 것이다. 하필 꿈을 꿔도 이딴 꿈을.

미친 듯이 눈을 긁어내렸다. 십자가를 눈에 쑤셔 박을 듯 가까이 가져다 대며, 본래의 눈이 비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눈꺼풀을 긁어 대도, 문질러도, 두드려도. 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르엘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는 십자가를 움켜쥔 채 양손을 모아 기도했다. 자신을 이 악몽에서 깨워 달라고. 시험을 이겨 낼 힘을 달라고. 구원해 달라고. 신의 은총을 내려 달라고. 연신 기도하다, 간절하게 손을 들어 십자가에 눈을 비췄다.

달라진 것은 없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없다고! 내가 왜!”

누구도 정체를 알지 못하던 아버지와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죽어 버린 어머니. 내내 궁금했으나 아무도 알려 주지 않던 출생이 떠오르며, 가르엘의 앞으로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십자가를 던지듯 팽개친 그가 검을 뽑아 들었다. 긴 검을 꾸역꾸역 역수로 치켜들어, 망설임도 없이 왼눈을 찔렀다.

생전 겪어 본 적 없던 아찔한 통증이 번졌다. 그럼에도 가르엘은 비명 한 번 내지르지 않았다. 그저 검을 꽂고, 뽑았을 뿐.

“이, 이렇게 하면 되는 거잖아. 그렇지?”

꿈이든 현실이든, 이딴 징그러운 눈 따윈 없애 버리면 그만이다. 한쪽 눈으로 생활하는 것은 불편할 테지만, 못할 일도 아니었다. 고통을 다스리듯 숨을 내쉰 그가 엉금엉금 기어 떨어진 십자가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기대에 찬 표정으로 눈을 비췄다.

“아……. 아아…….”

잔인하게 흘러내리는 피눈물. 한껏 오그라든 눈동자. 그 위로 마기가 파고들고 있었다. 그의 의지를 배반하며 마구잡이로 흘러든 마기가 눈알에 스며들었다. 그 검은 기운은 생채기를 아물게 하고, 흉터를 지워 냈다. 그는 자신의 눈동자가 재생하는 모습을 꼼짝없이 지켜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선명한 마안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가르엘은 직감했다. 자신은 더 이상 신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 이후로는……. 정말 볼품없는 나날을 보냈죠. 차마 이름도 부르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고, 구걸하고, 원망하고, 화도 냈습니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은 깡그리 쓸어 제 곁에 뒀어요. 평생을 품고 가려고요.”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음까지 섞어 가며 털어놓은 과거사였으나. 카델은 조금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겪었을 끔찍한 절망이 생생하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 시절이 후회돼요. 지금처럼 단장님을 만나고, 새로운 동료가 생기고, 제 존재를 부정하지 않아도 되는 미래가 올 줄 알았다면……. 부끄러운 과거를 산처럼 쌓게 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미래를 알아도 아무런 후회 없이 살아갈 순 없어. 세상에 완벽한 선택은 없으니까. 중요한 건 지금 네 옆에 내가 있고, 내 옆엔 네가 있다는 사실이지.”

어느새 탐색을 멈춘 가르엘이 돌무더기에 걸터앉은 몸에 힘을 풀었다. 습관처럼 입꼬리를 끌어 올렸으나, 과거의 여운에 잠긴 눈빛에선 즐거운 기색이 비치지 않았다. 카델은 그런 가르엘의 앞으로 다가가 긴 전투에 거뭇해진 손을 감쌌다.

“네가 정말 멋있는 남자라고 생각해.”

“……아주 탁월한 위로네요. 정말 멋있는 남자가 되고 싶다는 의욕이 생겨요.”

핏줄이 돋은 손등을 살살 쓸어내리고, 널찍한 손바닥을 주물렀다. 가르엘은 앞에 쭈그려 앉아 제 손이 장난감이라도 되듯 만지작거리는 카델을 내려보았다. 하얀 뺨이 피로 얼룩졌음에도 그의 얼굴은 유독 밝았다.

“진심이야. 만약 내 인생이 너와 같았다면, 난 버티지 못했을 거야. 아니, 애초에 자책하지도 않았을걸? 아주 뻔뻔스럽게 힘을 숨기고, 계속 황혼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살아갔을 거야. 아주 어렵게 오른 자리잖아? 겨우 단장이 됐는데, 내 탓도 아닌 일로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고. 모두를 속여 가며 버텼을걸.”

“저도 모두를 속여 가며 버텼습니다. 지독히도 오래요. 단장님과 만나지 못했다면, 끝까지 속이다 죄책감에 미쳐 어딘가로 훌쩍 떠나 버렸겠죠. 실제로 그럴 계획도 세웠었는데요.”

“너는 너를 너무 낮추는 경향이 있어.”

“그건 단장님도 마찬가지잖아요?”

피식 웃음을 흘린 카델이 고개를 들자, 자신을 향한 따스한 시선이 닿아 왔다. 가르엘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았으나, 딱 하나. 끝내 알리지 못한 것이 있다.

전쟁이 끝나고 시스템을 제거하면, 자신은 결국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 자신이 사라지면 카델 라이토스의 육신도 죽게 된다. 어떤 형태로든 그들의 곁에 남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 사실만큼은 알릴 수 없었다. 그와의 마지막을 눈물로 보내고 싶진 않았으니까. 또한 가르엘에게만 미리 이별을 고한다면, 나중에 알게 될 부하들이 그를 원망할 수도 있었다. 슬픔에 원망까지 떠안게 하는 것은 너무한 처사이지 않겠는가.

“그럼 우린 끼리끼리 아주 잘 만난 거네.”

“천생연분이라고도 할 수 있죠.”

그와 자신은 끝까지 비밀 없는 사이가 될 수 없겠지만.

“……죽지 말자.”

“…….”

“죽지 말고, 끝까지 살아남자.”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은밀한 사랑을 나누었던 사이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가볍게 몸을 일으킨 카델이 가르엘에게 입을 맞췄다. 버석한 입술의 촉감이 느껴졌다. 짧은 입맞춤으로 끝내려 얼굴을 떼어 내자, 가르엘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아 왔다. 훅 기울어진 중심에 카델이 반사적으로 가르엘의 목을 끌어안았다.

혹시라도 넘어질세라 자신을 꽉 마주 안은 카델의 힘을 느끼며. 가르엘은 그의 목덜미 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신여환. 당신의 원래 이름도 정말 예쁩니다.”

“콩깍지야.”

“뭐든요. 그러니까 전 당신이 가진 두 개의 이름, 영혼, 몸. 무엇하나 잃게 하지 않을 겁니다. 제 지난했던 과거와 찬란한 현재, 기대되는 미래를 걸고서.”

카델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이루고 있는 살과 뼈, 피와 가죽까지 모조리 내어 줄 수 있었다. 이것은 사랑을 넘어선 맹목적인 신앙임을 알았다. 받는 이를 괴롭히는 못된 감정임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카델을 강하게 끌어안은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근처에 마법진이 있습니다. 더 욕심을 채우고 싶지만, 이젠 동료들을 도우러 가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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