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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결계는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은 곧장 계단을 올라 4층으로 향하지 않았다. 위층의 기운을 탐색한 요젠의 말 때문이었다.
“마왕의 기운이 옅어지지 않아. 저 위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는 게 확실해.”
마왕이 저 위에 있다. 본래 있어야 할 꼭대기 층이 아닌, 그들의 바로 위층. 그곳에서 오도 가도 않은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분신도 만들어 낼 수 있는 녀석이다. 분신일 확률은 없는 건가?”
“그 분신의 기운은 나도 알아. 저건 본체야. 진짜 마왕.”
그의 확신에 기사들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이는 계속된 거절에도 꿋꿋하게 반의 치료를 마친 모들렌이었다.
“다들 불편한 곳이 있다면 지금 말해 주십쇼. 마왕을 상대하는 도중에는 제대로 된 치유술이 불가능할 테니까요. 계속 저 위에서 저희를 기다리고 있겠다면, 가능한 만큼 준비를 해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성의 꼭대기까지는 몇 층을 더 올라야 했는데, 직접 마왕이 행차해 주셨으니. 상대해야 할 적의 수도, 체력 소모도 적어지지 않겠는가. 좋게 좋게 생각하자며 분위기를 끌어 올리는 모들렌의 앞으로, 엑토가 다가왔다.
“허리를 조금 삐었소. 더 놔뒀다간 전투에 지장이 생길 것 같으니, 여기서 손을 봤으면 좋겠군.”
“예. 이리 오십쇼.”
마왕이 직접 아래로 내려올 생각은 없어 보였으므로, 기사들은 모들렌의 말대로 마지막 전투를 위한 점검에 들어갔다. 피가 굳어 뻣뻣해진 검날을 닦고, 기운을 갈무리하고, 자잘한 상처를 손보았다.
긴장 때문인지, 조급함 때문인지. 그들의 준비는 그리 길지 않았다. 모든 점검을 마친 그들이 계단의 앞에 모이고. 선두에 선 엑토가 마지막으로 기사들을 둘러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층계를 올랐다.
‘결국 마왕의 앞까지 와서도 이 검을 사용하지 못하는 건가.’
행렬의 최후방에 선 루멘이 마검의 검집을 움켜쥐었다. 우둘투둘한 겉면이 피부를 쓸어내리니 현실감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뭐에 홀린 것처럼 내내 마검을 들고 다녔지만, 몇 번의 시도에도 뽑히지 않았다.
‘결국 짐이 될 뿐이다. 짐을 들고 싸워도 될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직접 보고 느끼지 않았는가. 고작 분신을 상대했을 뿐임에도 자신은 무력하게 밀렸고, 아끼던 검까지 분질러졌다. 계단을 오를수록 고민은 부질없어졌다.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쉰 루멘이 허리띠에서 마검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버릴 것이라면 빨리 버리고 떠나는 게 낫다.
하지만 그의 마검이 허리띠를 벗어나기 직전.
“……!”
그들이 오르던 계단의 위쪽에서부터, 눈부신 섬광이 터져 나왔다. 모들렌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과하게 강렬했다.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린 루멘이 질끈 눈을 감았다.
‘마왕인가?’
마왕이 빛까지 다루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모들렌의 것이 아니라면 적의 것이 아니겠는가. 손으로 앞을 가린 루멘이 실눈을 뜨고 너머를 보았다. 뿌옇게 번진 시야가 어렴풋이 전방을 비췄다.
“……마밀 님?”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바로 앞에서 계단을 오르던 마밀의 모습이. 그 앞에 자리했던 동료와 나머지 아군도 마찬가지였다.
섬광은 사라졌다. 거칠게 눈을 비빈 루멘이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서둘러 깜빡이는 눈꺼풀을 따라 차근차근 시야가 돌아왔다. 그리고.
“여긴…….”
루멘은 자신이 계단이 아닌, 새로운 공간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검집을 꾹 움켜쥔 그가 조심스럽게 발을 뻗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4층인가? 평범한 성의 내부……라고 보기엔 어렵겠군.’
그의 앞에는 아주 기다란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어디가 끝인지도 가늠할 수 없어, 도저히 실재하는 복도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쭉 깔린 붉은 카펫이 기묘한 음산함마저 더해 주었다. 루멘은 복도 끝자락에 맺힌 심연을 응시하다, 천천히 눈을 굴렸다.
‘방이 아주 많군.’
복도의 양옆으로 방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너머로는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고, 열려 있는 문도 없었다. 루멘은 문들을 열어 보는 대신 조심스럽게 지나쳤다.
‘환각……. 마왕이 내게 환각을 보여 주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앞서가던 이들도 같은 환영을 보고 있을 확률이 높겠군. 환각을 보는 동안은 무방비한 상태가 되기 쉽다. 한 번 삐끗하면 전멸이야.’
오감을 곤두세우고,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공격에 대비해야 했다. 환각으로 눈을 가린대도 공격의 기척까진 가릴 수 없을 테니.
‘요젠이라면 환각에 걸리지 않았을 거다. 다 같이 층을 올랐으니 같은 공간에 들어왔을 테고. 요젠이 먼저 이상을 눈치챈다면, 분명 신호를 보내올 거다.’
그가 신호를 보내올 때까지, 섣부르게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적이라고 생각해 해친 상대가 아군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신중하게 걸음을 옮기고, 주위의 기척에 집중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리 생각하며 나아가던 때였다.
“이게 환영이라고 생각하는구나?”
부드러운 여자의 음성이 바람처럼 귓가를 스쳤다.
음성이 들려온 방향으로 다급히 고개를 돌리자, 목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왕…….”
“안녕. 또 보네.”
에밀리아는 뒷짐을 진 채 살포시 고개를 기울였다. 곱상한 얼굴에 미소가 어렸으나, 따뜻한 분위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루멘은 곧바로 검집에 손을 올린 채 에밀리아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대답해 봐. 넌 이게 환영이라고 생각하니?”
“……진짜라고 여기기엔 너무 꿈 같은 공간이라 말이야. 만약 이게 실재하는 공간이라면, 다른 인간들은 어디로 보낸 거지?”
“저승.”
간단한 대답에 루멘의 눈썹이 움찔하자, 에밀리아가 가느다란 웃음소리를 흘렸다.
“농담이야. 다들 살아 있어. ……아직은 말이지.”
“다들 나와 같은 공간에 있는 건가?”
“하하……. 나에게서 정보를 빼내려는 거야? 그렇게 열심히 알아내 봤자 살아남지 못하면 아무런 쓸모도 없을 텐데.”
본체인가? 아니면 분신? 분신을 상대해 본 적은 있지만, 앞에 본체가 없었다면 분신이라고도 생각지 못했을 형태와 힘이었다. 루멘은 자신이 상대했던 분신의 특징을 더듬으며 마왕의 정체를 가늠하려 했다.
그런 루멘을 빤히 응시하던 에밀리아는 어느새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카델 라이토스. 그 아이가 네 주인이지?”
“그걸 왜 묻는 거지?”
“그 아이를 내 앞으로 데려와 줄래? 그렇게 해 준다면 너와 다른 인간들은 모두 살려 줄게. 약속해.”
에밀리아는 진심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새끼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마왕이 어떻게 카델의 존재를 인지하고, 콕 집어 그의 목숨을 원하는가? 이해할 수 없는 요구에 루멘은 이 상황이 가짜임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소중한 존재를 들먹이면서 내 정신을 교란하려는 거겠지. 뻔하다. 절대 넘어가지 않아.’
눈앞의 존재가 환각이라면 두려울 건 없지만, 더더욱 조심해야 했다. 환영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검집을 쥐고 있던 손을 느슨하게 풀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넘기도록 하지. 하지만 그 전에 이 환영을 없애고 함께 온 인간들……과 요정 한 명의 안전을 확인하게 해 줘.”
“정말 환영이라고 생각하는구나.”
“먼저 내 요구 사항을 들어준다면 나도 네 요구를…….”
루멘은 상대에게 도발 당하지 않으려 침착을 유지했다. 그의 정신은 이성적이었고, 어떠한 혼란과 흥분의 기색도 없었다. 그러니 환각에서 풀려났으면 풀려났지, 악화할 일은 없을 터인데.
“이건 현실이야. 믿고 싶지 않겠지만.”
에밀리아가 오른쪽에 있던 문을 열자, 그 안에서부터 누군가가 풀썩 쓰러져 나왔다. 피로 흠뻑 젖은 몸뚱이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도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루멘의 시선이 빠르게 쓰러진 인간을 훑었다.
‘모들렌 경?’
정체를 파악한 루멘의 눈빛이 짧게 떨렸다. 바닥에 엎어진 터라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입고 있는 단복으로 그가 모들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진짜 모들렌 경이라고……? 그럴 리 없다. 내가 환각에 빠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어. 그 짧은 새에 저렇게까지 엉망이 됐다는 건…….’
진짜 마왕을 상대했거나, 기습당하지 않은 이상 불가능했다. 무려 황혼 기사단의 단장이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치유술에 집중하긴 하나, 그의 전투력은 전혀 얕볼 만한 게 아니었다.
루멘이 믿는 기색이 아니자, 에밀리아가 곤란하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의심이 많구나. 아니, 신중하다고 해 줄까? 뭐, 그래. 직접 봐야 믿을 수 있겠다면 충분히 보여 줄게. 이 인간도 데려가. 직접 느끼고 만져 보도록 해.”
에밀리아가 가볍게 손짓하자, 마기가 섞인 바람이 불며 의식을 잃은 모들렌이 힘없이 튕겨졌다. 루멘은 제 앞으로 굴러오는 모들렌을 받아 들면서도 에밀리아에게 닿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쾅! 쾅! 쾅!
그의 주변에 있던 방문들이 요란하게 열리며, 내부의 풍경이 드러났다.
“……!”
그곳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던 그의 동료들과 기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 방에 한 명씩 자리한 그들은, 모두 에밀리아와 대치하며 전투를 벌였다. 뿐만 아니다. 방 안은 마치 개별적인 시공간처럼 각기 다른 배경을 품고 있었다.
어느 곳은 숲, 어느 곳은 바다, 어느 곳은 절벽, 어느 곳은 화산, 어느 곳은 설원. 루멘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숲의 방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엑토와 에밀리아가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바로 맞은편에 쓰러진 모들렌과 자신이 있음에도, 엑토는 이쪽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에 루멘이 직접 그 방으로 발을 들이려 했으나.
“소용없어. 거긴 내가 만든 시공간이거든. 나 이외의 누구도 간섭할 수 없어. 네 앞의 인간처럼 의식을 잃으면 저절로 빠져나올 순 있겠지만.”
투명한 장막이 방을 가로막고 있었다. 강하게 내리쳐도, 검기를 흩뿌려도 마찬가지였다. 에밀리아는 루멘이 열심히 장막을 두드리는 과정을 전부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루멘이 드디어 장막 부수기를 포기한 듯 보이자,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인간들은 전부 내 분신을 상대하고 있어. 너도 겪어 봐서 알겠지만, 평범한 분신이 아니야. 진짜 내 영혼을 나눈 분신이거든. 너희가 이길 확률은 없어.”
“…….”
“그리고 네 앞에 있는 나는, 진짜 나. 분신이 아니야.”
이 모든 게 현실이란 말인가? 루멘은 쓰러진 모들렌의 상태를 확인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만약 이것이 현실이라면, 이곳에 있는 모두는.
“오직 너만 시공간에 가두지 않고 내 제안을 듣게 한 이유는, 네가 그중에서 가장 똑똑해 보였기 때문이야. 그러니 카델 라이토스를 데려와. 전부 죽고 싶지 않다면.”
코앞에 드리운 전멸의 위협에, 루멘이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