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4화 (48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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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운명의 궤도에서 이탈하였습니다.」

「스토리를 재생성합니다.」

「변경된 운명의 흐름에 따르십시오.」

「거부 시, 클리어 특전이 소멸합니다.」

특전이 사라진다고? 본래 세계로 돌아갈 수도, 이곳에 남을 수도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 해도 이제 와 겁을 먹고 물러날 일은 없었다. 오히려 이판사판이라는 마음마저 생겼으니.

남자의 가슴에 올려 두었던 손을 떼어 낸 카델이 코피를 훔쳐 냈다. 두 번째 형제를 죽이는 데에도 성공했다. 여자 하나와 남자 하나. 두 명의 몸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고, 그들에게선 어떠한 생명의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멀쩡히 누운 나머지 한 명의 남자에게로 향했다. 처음 화마의 검에 닿았던, 흉터 난 얼굴의 남자였다.

‘운명의 흐름은 바뀌었어. 그럼 성공한 거겠지만…… 마무리를 확실히 해 둘까.’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전부 버려두고 가르엘을 찾으러 가고 싶었다. 그가 걱정되는 것은 물론이고, 마력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이런 상태로 마왕을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이 암담하기만 했다.

그러나 카델이 마지막 형제에게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흐아아아아아!”

찢어지는 기합과 함께, 그가 몸을 숨기고 있던 나무가 기울었다. 주위를 가리던 뿌리가 완전히 뽑혀 나가며, 점점 환해지는 시야 속으로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셀레브……!”

셀레브라면 지금쯤 가르엘이 상대하고 있어야 하는데. 거인화를 해제한 그녀는 반쯤 정신을 놓은 듯한 표정으로 나무를 통째로 뽑아 버렸다. 카델의 뒤편으로 기울어진 나무가 큰 울림을 내며 쓰러지고. 셀레브는 그대로 카델을 덮쳤다.

“죽어! 죽어어어!”

빠르게 장막을 만들어 몸을 감쌌다. 하지만 장막의 마력을 올릴 필요는 없었다. 셀레브의 정신없는 주먹질이 카델의 얼굴과 몸을 때려 댔으나, 예상했던 충격이 느껴지진 않았다. 일반적인 이들보다는 월등히 강한 힘이긴 하다. 그러나 그녀 본래의 파괴력은 5퍼센트도 나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셀레브의 힘은 여전히 카델보다 강했고, 카델의 마력 역시 그녀의 마기만큼이나 시원찮은 상태였다. 카델은 셀레브에게 깔린 몸을 빼내기 위해 마구 발버둥 쳤다. 그런 그를 가까스로 제압하던 셀레브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두 구의 시체와 한 명의 남자. 그의 얼굴에 난 흉터를 발견한 셀레브가 기괴한 소리를 냈다.

“에단 님, 오필리아 님…….”

죽은 두 마족의 이름을 읊조린 그녀가 몸을 일으키곤, 벗어나려는 카델을 한 번에 들어 바깥으로 던져 버렸다. 무력하게 굴러간 몸이 나무 기둥에 막혀 튕겨 났다. 척추를 타고 오르는 고통에 이를 악문 카델이 더듬더듬 바닥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젠장……!”

다급히 고개를 들자, 하나 남은 고위 마족을 들고 날아가는 셀레브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는 뻔했다. 빠르게 마력을 끌어 올린 카델이 [화련]을 뻗어 셀레브를 붙잡으려 했으나. 순식간에 고도를 높인 그녀를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마력을 거둔 카델이 무릎을 꿇었다. 당장 셀레브를 쫓아 달린다면 그녀를 붙잡을 수도 있다. 힘이 거의 다 빠진 것 같으니 공격을 이어 간다면 추락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카델은 셀레브를 쫓지 않았다.

“……가르엘.”

늘어진 몸을 꾸역꾸역 일으킨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셀레브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은, 가르엘에게서 벗어났다는 소리다. 혹시 놓친 셀레브를 따라 이곳으로 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기다렸으나, 시간이 지나도 가르엘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설마, 아니지?’

가르엘이 패배했을 리 없다. 그리 확신하면서도, 몸은 정직하게 불안에 떨었다. 카델은 가르엘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직접 그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추적이 힘들 것이라 예상했으나, 의외로 금세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카델이 숨어 있던 나무에서 조금 떨어진 곳. 그곳에서부터 마기가 일렁였다.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갈수록 마기의 색이 짙어졌다.

카델은 점점 짙어지는 마기를 이정표 삼아 지친 몸을 이끌었다. 열심히 뛰어나가는데도 속도가 나지 않아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아무리 달려도 보이지 않는 가르엘에 애를 태우던 무렵.

“끄으… 흐으으…….”

멀지 않은 곳에서, 흐느낌을 닮은 신음이 들려왔다. 잠시 멈칫하던 카델이 소리를 따라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르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끼는 사내. 그의 주위로 짙은 마기가 아른거렸다. 지금껏 가르엘이 사용했던 마기보다 훨씬 농도가 짙어, 처음 카델은 이것이 가르엘의 마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운은 전부 가르엘의 것이었다.

그에게 다가갈수록 카델의 걸음이 느려졌다. 가르엘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앞에 축 늘어진 시체를 발견한 카델의 눈빛이 떨렸다.

‘저건 로렌스잖아. 저 녀석이 여길 어떻게…….’

왜 로렌스가 여기에 있는지, 가르엘은 어떻게 그를 죽인 것인지. 큼직한 의문은 곧 자취를 감췄다. 카델의 시선이 쓰러진 로렌스의 가슴을 향했다. 그의 가슴에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너저분하게 뜯긴 가슴 속에는 차오르는 핏물밖에 보이지 않았다.

심장을 뽑아 버린 것일까?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하다. 좀 전의 자신도 적의 심장을 불태워 버렸으니까. 그리 생각하면서도 카델은 불길한 마음을 떨치지 못했다.

그리고 카델이 조금 더 가까이서 로렌스의 시체를 살피려던 순간.

“우웁……!”

발작하듯 몸을 떤 가르엘이, 얼굴을 가리던 손을 치우고 바닥에다 속을 게워 냈다. 괴로운 구역질을 따라 그의 등이 크게 오르내렸다. 반사적으로 반응한 카델이 그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차마 발을 뗄 수 없었다.

구토로 엉망이 된 바닥. 그곳에는 진득한 보라색의 핏물과 큼직하게 조각난 덩어리들이 퍼져 있었다. 속의 것을 게워 낸 가르엘이 손등으로 입가를 쓸고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단장님.”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한 쌍의 마안. 괴롭게 일그러진 그의 눈동자 위로, 투명한 눈물이 고였다.

“제가, 심장을 먹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아이처럼 울 수 있는 사내였나. 괴롭게 일그러진 표정과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제가 게워 낸 것들을 더듬는 손짓. 죄라도 지은 듯 푹 숙인 고개 아래, 지독한 자괴감과 혐오감이 들끓었다.

카델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도 가르엘만큼이나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지만, 침착해야 했다. 천천히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자 역한 비린내가 훅 끼쳤다.

“심장을 먹었다는 게 무슨 소리야.”

“로렌스가……. 로렌스 하이웨일이 셀레브를 구하기 위해 여기 왔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러니까…….”

떨리는 호흡을 따라 보라색 핏물로 범벅이 된 입술이 달싹였다. 카델은 손을 들어 그의 입가를 문질러 닦아 주고는, 새하얗게 질린 뺨을 쓸었다.

“떨지 마, 가르엘. 괜찮아. 난 설명을 듣고 싶은 것뿐이야.”

소심하게 맞춰 온 시선은 검었다. 그에겐 인간의 눈동자가 남아 있지 않았으나, 카델에겐 여전히 똑같은 가르엘이었다. 온기로 가득한 카델의 눈빛 앞에서 가르엘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셀레브를 먼저 해치우려고 했어요. 그래야 단장님이 안전해질 테니까. 분명 그렇게 생각하면서 싸웠는데…….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아요.”

“정신을 잃어? 공격을 당했던 거야?”

“아뇨. ……이성을 잃었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셀레브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제 아래에는 로렌스가 있었어요. 죽은 상태로요. 그리고…… 제 입 안에서 엄청나게 역겨운 맛이 맴돌았는데…….”

아직도 그 맛이 느껴지는 듯, 가르엘은 헛구역질을 하며 입을 가렸다. 카델은 그런 가르엘의 등을 두드리며 연신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다.

“……단장님.”

“응.”

“이대로 마족이 되어 버리면 어떡하죠?”

“그럴 리가 없잖아. 부정적인 생각 하지 마. 심호흡부터 하자. 여기서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실 일회용 약이 아니었어요.”

힘없이 품을 뒤적거린 가르엘이 약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카델이 약병을 쥐고 뚜껑을 열려 하자, 가르엘의 그의 손을 감싸 저지했다.

“마족의 힘을 증폭시키는 약. 마왕의 형제들이 회복한 뒤에 먹이려고 개발한 약이래요.”

“……약이 가득 차 있는데. 여러 개를 가져온 거야?”

“아뇨. 냄새만 맡았어요. 그것만으로도 효과가 좋았거든요. 그런 약을 함부로 들이켰다가 무슨 부작용이 생길지도 모르고요. ……셀레브를 상대할 땐 괜찮았어요. 상태가 아주 멀쩡해서 연속해서 향을 들이마셨죠. 그런데 로렌스를 보자마자…….”

말을 잇던 가르엘이 퍼뜩 몸을 떨었다. 괴롭다는 듯이 머리를 감싼 그가 거칠게 헐떡이고. 갑작스러운 가르엘의 행동에 놀란 카델이 그를 끌어안았다.

“가르엘! 가르엘, 괜찮아. 진정해.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어.”

카델의 위로도, 따뜻한 숨결도. 전부 다른 세계의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뇌를 찌르는 두통과 함께 잊고 있던 기억이 습격처럼 떠올랐다.

“이미 그 힘을 깨우쳤으니, 너는 더 이상 인간으로 살 수 없다. 결국 마족이 되었구나!”

“닥쳐!”

“지금이라도 마족임을 인정하고 인간들을 죽여라. 그리고 함께 돌아가 폐하를 뵙자꾸나. 네 동료의 목을 베어 가져온다면, 폐하께서도 아량을 베푸실 거다.”

“닥쳐, 닥쳐, 닥치라고!”

“가르엘, 내 조카야. 이것이 네 본능이다. 절대 바꿀 수 없는 본질이지.”

“으아아아아악!”

제가 낸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괴성이었고, 제가 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폭력이었다. 인간이 아닌 괴물의 싸움이었다. 제대로 된 검술을 사용하지도 못했고, 악귀처럼 달려들어 맨손으로 그의 살점을 뜯어냈다.

미친 듯 용솟음치던 마기와 로렌스의 놀란 얼굴. 기어이 로렌스를 쓰러뜨리고, 시간에 쫓기듯 허겁지겁 그의 가슴을 꿰뚫던 손. 그리고 그 안에서 끄집어 낸 묵직한 심장. 그것을 우적우적 씹어 넘기며 배를 채우던, 그때의 자신은 분명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으으……. 아, 아니야…….”

충족감을 느꼈다. 로렌스의 힘이 제 몸속에 스며드는 감각에 변태처럼 흥분했다.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피로 범벅이 된 손을 빨아먹기도 했다. 그것이 달았다. 지금껏 먹었던 어떤 음식보다 달콤했다.

“아, 아아아…….”

그건 인간이 아니었다. 꾸며 낸 인간성으로 억누르고 있던, 약의 힘으로 기어이 깨어나 버린. 제 안의 본성. 역겨운 마족의 본능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따위 더럽고 역겨운 몸뚱이로 뭘 해야 좋은 것인가. 이대로 죽어 버리고만 싶었다. 처음 마족의 힘을 깨우쳤을 때보다 더한 절망과 혐오감이 몰아쳤다. 누군가 자신을 가차 없이 죽여 줬으면. 이 세상에서 한 방울의 피조차 남지 않도록 소멸시켜 줬으면. 이토록 강렬하게 죽음을 바라는데도, 몸속에선 여전히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 끔찍한 일이었다.

가르엘은 납작 엎드려 있던 몸을 들고는, 자신을 끌어안은 카델에게 빌 듯이 애원했다.

“절 죽여 주세요, 단장님. 이곳에서 죽여 주세요. 제게 아직 이성이 남아 있을 때, 단장님의 손으로 직접…….”

죽음을 애원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뜨거운 불꽃도, 날카로운 칼날도 아니었다. 가르엘은 코앞으로 다가온 카델의 눈을 바라보았다. 피로 질척해진 입술에 닿은 온기를 느끼고, 그 틈새를 가르고 오는 뜨끈한 덩어리를 느꼈다.

가르엘은 굳은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목석처럼 뻣뻣해진 그에게, 카델은 열과 성을 다해 입을 맞췄다. 혀끝으로 지독한 피 맛과 시큼한 향이 번졌다. 농담으로라도 달콤하다 할 수 없는 입맞춤이었다. 그럼에도 카델은 아무런 내색 없이, 오히려 기쁘다는 듯 눈을 감고 가르엘의 뺨을 감쌌다.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는 혀를 문질렀다. 뒤늦게 주춤거리는 몸을 따라 제 몸을 기울이고, 틀어지려는 고개를 연신 바로잡았다.

“하, 하지 마세……!”

가르엘이 경악하며 빠져나가려 했으나, 카델은 모든 거부를 무시한 채 그의 위로 쓰러졌다. 맥없이 밀려난 가르엘이 바닥에 몸을 눕혔다.

마치 혼이라도 빨린 것처럼, 가르엘은 눈도 감지 못하고 카델의 속눈썹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니 그의 평온한 얼굴을 담아내며, 눅진하게 제 입 속을 헤집는 열기를 느꼈다.

아주 더러울 텐데. 냄새나고, 역겹고, 불쾌할 텐데. 어째서 카델은 제게 입을 맞추고 있는 걸까. 자신이 무섭지도 않나? 께름칙하지도 않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넘쳐흐르던 자괴감은 당혹스러운 의문으로 뒤바뀌었다. 반응 없는 남자에게 한참이나 입을 맞추던 카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가르엘에게선 더 이상 떨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카델은 그런 가르엘의 뺨과 목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사랑해.”

자신이 바라던 말이 아니었다. 바라던 행동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르엘은 무언가 묵직한 것이 제 심장을 치고 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뜨거운 열기가 관자놀이를 적시며 흘러내렸다. 눈물이었다.

“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사랑해. 네가 무슨 선택을 하더라도 사랑해.”

“…….”

“그러니까 난 널 죽이지 않아.”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보는 것처럼, 오로지 애정만이 가득한 눈빛. 옅은 미소를 머금은 카델이 가르엘의 눈가를 문질렀다.

어느새 그의 오른쪽 눈동자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카델은 소리도 없이 눈물을 흘리는 가르엘을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이것 봐. 돌아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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