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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밀의 불꽃은 파우르를 상대하는 반과 요젠을 엄호하고, 아군의 내장을 파고들던 거미줄까지 섬세하게 태워 냈다. 그 과정에서 상당량의 마력이 소모되었으나, 의식을 되찾은 모들렌이 마밀의 마력관을 손본 덕에 위급한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마밀의 마법과 모들렌의 치유술로 깨어난 기사들은 지체없이 3층을 향했다.
“한 층 위에 결계가 쳐져 있어. 그 결계를 지나 몇 층을 더 오르면 성의 꼭대기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요젠의 말에 반이 미간을 좁혔다.
“그 전에 이 층에 있을 마족을 해치우는 게 우선이겠지만.”
“응.”
기사들은 느리고 신중한 걸음으로 3층을 돌아보았다. 이전 층보다 훨씬 면적이 좁고, 자리한 가구도 일절 없다. 장식품이나 조명 따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눈에 띄는 특징이 있었으니.
“아무리 있는 게 없는 층이라지만, 벽까지 없을 필요가 있나.”
헛웃음을 뱉은 엑토가 설설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는 층의 천장과 바닥을 잇고 있어야 할 외벽이 없었다. 외벽은커녕 천장을 받칠 기둥 하나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층이 내려앉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덩그러니 떠올라 있었다.
언제 천장이 내려앉아 압사당할지 모른다는 문제점은 미뤄 두고도, 뻥 뚫린 외벽 너머로 비치는 드높은 상공이 묘한 불안감을 조성했다.
“흐응, 요젠 말대로 바깥엔 아무것도 없어. 기분 나쁘게 생긴 새 몇 마리는 봤지만, 전부 죽였으니까 정말 아무것도 없게 됐어.”
성 바깥을 돌고 온 라이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에 근방을 둘러보던 루멘이 물었다.
“요젠이 말했던 결계는? 성 바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나?”
“연한 초록색 장막이 하늘을 가리고 있더라. 공격해 봤는데, 정확히 두 배의 위력으로 튕겨 냈어.”
라이돈은 덤덤하게 말했으나, 그의 공격으로도 뚫리지 않는, 심지어 두 배의 힘으로 반격하는 장막의 존재는 제법 심각한 문제였다.
“4층으로 올라가는 것부터가 골치겠군요.”
모들렌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봐도 여긴 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요젠 경, 처음 들어왔을 때 층마다 고위 마족이 자리하고 있댔죠? 여기도 마찬가지인 게 맞습니까?”
“……처음엔 분명히 감지됐어.”
“지금은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가요?”
“아니. 느껴져. 처음과 다른 점이라면, 고위 마족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뿐이야. 마기는 분명히 남아 있어.”
모들렌은 요젠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요젠도 더 명확한 설명을 해 주고 싶었지만, 그 또한 헷갈리는 상황이었다.
마족의 기운은 느껴진다. 하지만 그 기운이 마치 잔향 같았다. 층을 아우르는 기운은 언뜻 2층과 비슷했지만, 파우르의 것보다는 훨씬 밀도가 낮고 희미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점은.
“……수가 너무 많아.”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소린이 표정을 굳히며 되물었다.
“적의 수를 말하는 건가?”
“기운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달라. 그런 종류의 기운이 다양하게 퍼져 있어. ……조금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던 거야.”
“그렇다면 이미 4층으로 올라갔을 수도 있겠군. 이곳은 천장을 받치는 벽이 없소. 이대로 층을 없애 우리를 압사시킬 셈일 수도 있지.”
“……틀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살펴본다면, 이 희미한 기운을 쫓아 적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은 요젠의 편이 아니었다.
“크읏……!”
뻥 뚫린 벽 너머, 상공에서부터 어마어마한 강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바람은 사면을 압박하며 그들이 선 바닥을 향해 모여들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그들은 무엇 하나 잡고 버틸 것 없는 장소에서 바닥에 무기를 박아 넣거나, 서로를 붙드는 식으로 버티려 애썼다. 그럼에도 몸은 점점 밀려났고, 결국.
“붙지 마라……! 불쾌하다고……!”
“나라고 붙고 싶은 줄 아나?”
바람을 따라 기사들이 층의 중심부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서로를 압박하는 바람에 어떻게든 저항해 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마치 한 덩어리처럼 옹기종기 붙어 모인 기사들의 틈. 아예 저항하기를 관둔 요젠이 목소리를 높였다.
“올라오고 있어!”
“뭐? 뭐가 올라온다는 거야?”
“마족이야. 다섯…… 아니, 여덟. ……열 이상이야.”
열 이상의 고위 마족. 요젠의 끔찍한 발언과 동시에, 그들을 밀어붙이던 바람이 멎었다. 간신히 숨통이 트인 기사들이 서둘러 무기를 꺼내 들고. 라이돈과 마밀이 장막을 둘렀다.
지독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짧은 발소리와 옷깃이 스치는 소리, 최대한 억누른 숨소리가 공기 중에 뒤섞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침묵을 뚫고 나오는 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에 참다못한 반이 적의 위치를 물으려 했으나.
“이히히히히히!”
“하하하하!”
“후후하핫!”
높다란 웃음소리가 층을 울렸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한 웃음소리에 기사들의 시선이 혼란스럽게 움직였다.
“바깥을 봐라!”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하늘의 빛이 새어 들던 층이 어두워졌다. 차단된 시야에 모들렌과 마밀이 서둘러 빛과 불을 띄우고. 곧이어 그들의 앞에 드러난 것은.
“……절망적이군. 스물은 족히 넘어 보이는데.”
뻥 뚫려 있던 벽을 채운 무수한 마족의 향연. 성의 벽면을 따라 둥글게 늘어진 그들은 서로의 손과 손을 맞잡고 벽을 이루고 있었다. 마력의 빛 아래서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섬뜩한 미소가 드러났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건드려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숫자였다. 기사들이 공격의 타이밍을 재며 태세를 갖추는 동안, 벽을 두른 고위 마족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맞잡은 손을 앞뒤로 가볍게 흔들며, 마치 놀이를 하듯 둥글게 돌기 시작했다. 둥글게 둥글게, 조금씩 속력을 높이는 마족들의 움직임에 잔상이 비치고. 이내 하나의 물체처럼 미친 듯이 회전하는 그들의 앞에서, 요젠이 큰 소리로 외쳤다.
“숙여!”
순식간이었다. 그들이 요젠의 말을 따라 몸을 숙임과 동시에, 무수한 그림자가 방 전체를 가로질렀다. 등줄기를 스치는 서늘한 감각. 간신히 공격을 회피한 엑토가 마른침을 삼켰다.
조심스럽게 치켜든 눈 안으로, 여전히 맹렬하게 회전 중인 마족들의 모습이 들어찼다.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듯, 그들의 모습은 이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조금 전의 공격은 분명…….”
그들은 섣불리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바닥에 쭈그려 앉아 사위를 경계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함부로 몸을 일으켰다간 날아오는 마족과 부딪힐 수 있어. 직접 봤겠지만, 그 속도로 날아오는 마족과 충돌한다면 무사하지 못할 거야.”
방 안을 통째로 가로지르던 무수한 그림자들은, 전부 마족의 잔상이었다. 그들은 회전 속도의 배는 될 법한 속력으로 튀어나와선, 본인의 맞은편 자리로 파고들었다. 위치를 바꿔 가며 둥글게 회전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기사들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인 행동이었다. 자칫했다간 고위 마족의 대규모 이동에 치이게 생겼으니.
“언제 발사될지 모르니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군. ……이봐, 도련님. 네 동체 시력으로도 놈들의 움직임을 쫓지 못하는 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최대한 몸을 웅크린 반이 묻자, 마찬가지로 몸을 낮춘 루멘이 미간을 좁혔다.
“보이기는 해. 다만, 보여도 소용이 없다. 이 원을 이루고 있는 모든 마족이 동시에 움직여. 피할 빈틈이 없다고.”
그들의 이동이 보이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3층 어디에도 마족의 이동을 피해 몸을 숨길 만한 공간이 없다. 납작 엎드리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낭패라는 듯 탄식을 내뱉는 기사들 사이. 완전히 몸을 줄여 버린 라이돈이 편안하게 누운 자세를 고쳤다.
“흐응, 그럼 요젠은 어떻게 마족들이 튀어나온다는 걸 알았는데? 뭔가 징조가 있으니까 알아챈 거 아니야? 아니면 그냥 음침한 인간의 촉?”
제집 안방인 양 편안해 보이는 라이돈의 모습에 황당한 시선들이 모여들었으나, 라이돈은 아랑곳 않고 팔로 머리를 받쳤다. 암기를 퍼뜨리는 요젠에게 제가 누운 범위는 건드리지 말라는 엄포를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든 마족의 기운이 하체에 밀집됐었어. 기운이 그런 식으로 이동하면 보통 도약이나 질주를 시작하거든.”
바닥을 가로지르던 암기는 회전하는 마족의 발끝에 닿자마자 사납게 튕겨 났다. 몇 번의 시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또다시 발사된 마족들이 층을 가로질렀다.
“이런……! 너무 위협적이군요. 무슨 규칙이라도 있다면 좋을 텐데.”
바로 머리 위를 스친 마족이 일으킨 바람에 모들렌이 거칠게 몸을 털었다. 그에 몸을 두른 장막을 강화한 마밀이 앓는 소리를 냈다.
“방금 공격으로 한 가지는 알아냈지.”
“예? 벌써 규칙을 알아내셨단 말입니까?”
“느끼지 못했나? 높이가 낮아졌네. 놈들의 비행…… 아니, 발사 고도가 낮아졌단 말일세.”
흐르는 정적 사이로 편안하게 누운 라이돈의 콧노래가 흘러들었다. 만약 마밀의 말대로 마족의 발사 고도가 계속해서 낮아진다면. 그들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나, 누구도 절망감을 표하진 않았다. 게슴츠레 눈을 뜬 엑토가 벽처럼 까맣게 드리운 마족의 모습을 주시했다. 어찌나 속도가 빠른지, 사물의 면처럼 늘어지는 잔상에선 본래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휙휙 돌아가는 마족을 집요하게 노려보던 엑토가 이내 입을 열었다.
“두 자리만 비어도 빈틈이 생길 것 같소. 안전지대를 확보하는 게 우선이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가 반을 턱짓했다.
“한 마리씩 잡아 보지. 힘 좀 보태 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