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7화 (477/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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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가방이다. 발 디딜 곳 없이 설치된 덫은, 누야가 멘 가방에서부터 나오고 있었다. 녀석이 가방을 열고 덫을 움켜쥔 순간. 자동으로 덫이 설치되는 것이다. 대체 어떤 원리로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것은 누야가 이 이상 덫을 설치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빠, 빠르다아……. 엄청 빠른 인간이네에…….”

바닥이 열리고, 폭발하고, 창이 솟고, 전기가 통하고, 족쇄가 입을 벌린다. 무수한 덫이 종류별로 발동되며 사방에서 요란한 소음이 울렸으나. 그의 덫은 아무것도 잡아채지 못했다.

맹하게 풀린 눈에 당혹감이 떠오르며, 신기루처럼 흩어지는 잔상을 좇았다. 루멘. 가방을 없애는 것이 일 순위라는 마밀의 판단을 따라, 그는 빠르게 누야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볼 때마다 믿기지 않는 속도로군.”

소린이 말하자 옆에 있던 반이 짧게 혀를 찼다. 루멘의 활약은 언제 봐도 짜증스러웠다.

“이봐, 도련님! 덫 좀 그만 밟고 슬슬 놈을 죽여! 단장의 스승님이 마력을 낭비하고 계시잖냐!”

루멘이 덫을 밟으며 만들어 낸 공격의 여파는 전부 마밀의 장막이 튕겨 내는 중이었다. 직접 방어하겠답시고 함부로 움직였다간 엑토와 모들렌 같은 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나름 이미지 쇄신을 위한 발언이었으나, 마밀은 그런 반을 일별하고 다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네 시끄러운 목청 때문에 귀가 더 피로하실 것 같다만. 보채지 마라.”

누야의 뒤편으로 모습을 드러낸 루멘이 반 뼘 빠져나온 검을 납검했다.

“어, 어어어……?”

동시에 누야의 어깨를 누르던 가방끈이 잘려 나가며, 묵직한 가방이 추락했다. 그에 당황한 누야가 굼뜬 동작으로 가방을 주워 들려 했으나.

“내, 내 가바앙……!”

그 위로 수십 개의 섬광이 새겨지며, 부스러기처럼 쪼개진 가방 조각이 처참하게 흩날렸다. 바닥에 웅크린 누야가 허겁지겁 가방을 끌어모았으나, 그런다고 찢긴 가방이 돌아오진 않았다.

루멘은 자연스럽게 누야의 뒷덜미를 잡아 쑥 들어 올렸다. 누야는 새끼 거북이처럼 느린 몸짓으로 바둥거리며 나름의 반항심을 표출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남은 덫이 설치된 곳을 알려 주거나, 덫을 해제해. 그렇게 하면 목숨은 살려 주지.”

“이, 인간에게 받는 자비는 필요 없어어…….”

“아하하! 그럼 죽어!”

마지막 말은 루멘의 것이 아니었다. 묘한 짜증이 담긴 웃음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누야의 몸이 얼어붙었다. 루멘은 제 손바닥에 달라붙은 얼음덩이를 떼어 내고는 라이돈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네 멋대로 죽이면 어쩌자는 거지? 위험한 덫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건 요젠한테 처리하라고 하면 되잖아? 힘들어 죽겠으니까, 미적거리지 말고 올라가. 이 짐 덩이들도 데려가고!”

엑토와 모들렌을 바닥에 던져 버린 라이돈이 씩씩거리며 손을 털었다. 그에 빠르게 달려온 소린이 미간을 좁혔다.

“언행에 주의하시오.”

“흐응, 그러고 보니 아직 감사 인사를 못 받았네. 바닥에 엎드려서 살려 줘서 고맙다고 말해.”

“라이돈 경!”

“왜? 호계 기사단의 단장은 은혜도 모르는 무뢰한이야? 그런 거야?”

정작 엑토는 겪을 대로 겪은 라이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그의 심술을 무시했으나. 소린은 제 단장이 모욕받는 것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욱하며 나섰다. 금방이라도 충돌할 것처럼 날카로운 두 남자의 사이. 이곳의 그 누구보다 지치고 불만스러워 보이는 마밀이 입을 열었다.

“더 떠들 거면 버리고 가겠네. 카델이 돌아오면 둘이 길 안내나 해 주면 되겠군.”

마기와 마기가 맞부딪히며 굴의 천장이 흔들렸다. 주먹과 칼의 전투였으나, 들리는 소리는 철과 철의 마찰처럼 날카롭기만 했다.

마기로 만들어진 한쪽 날개가 가르엘을 보호하고, 셀레브의 시야를 교란했다. 가르엘은 날개가 만들어 낸 틈마다 기운을 끌어 올리며 숨을 골랐다.

‘이렇게 강한 녀석이었나?’

셀레브의 존재는 알고 있었으나, 그녀와 직접 싸워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방심하진 않았다. 그녀는 제국의 관문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고위 마족이자, 라이돈을 사지로 몰고 간 강자였으니. 그러나 가르엘의 짐작보다도 셀레브는 강했다. 그냥 강한 정도가 아니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 만큼 과도하게 강했다.

그리고 실제로, 현재 셀레브의 힘은 본래 그녀가 가진 힘보다 세 배가량 강력했다.

‘에밀리아가 준 이 팔찌, 미친 듯이 내 기운을 잡아먹고 있어. ……그만큼 강력해졌지만!’

셀레브를 보내기 전, 에밀리아는 그녀에게 한 쌍의 팔찌를 선물했다. 일시적으로 착용자의 기운을 끌어모아 육체를 강화하는 마도구. 본래 가지고 있던 기운을 폭발적으로 끌어 올리는 만큼, 지속 시간은 길지 않다.

에밀리아는 팔찌를 ‘정말 위험한 순간’에 사용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셀레브는 그녀의 선물을 전투의 시작부터 사용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눈앞의 적들을 해치우고, 에밀리아의 형제들을 데려가 그녀를 기쁘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걸리적거리지 말고 꺼져! 넌 내 상대가 못 되거든!”

“그건 끝까지 겨뤄 봐야 알 수 있는 사실 아닐까? 그렇게 격차가 심한 것 같지도 않은데.”

“자만하지 마, 더러운 피가 흐르는 가짜 마족 따위가!”

“이런, 상처받으라고 한 말이었다면, 그건 아군에게도 자주 듣는 말이라서. 별 감흥이 없네.”

가르엘은 부러 빈정거리며 여유를 꾸며 냈다.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을 알아챈다면, 셀레브는 공격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그래선 곤란했다. 뒤에 있는 카델이 장막을 뚫을 방법을 알아낼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벌어 주어야 했다.

“……가르엘, 괜찮을까요?”

[우리가 빠르게 장막을 뚫고 놈들을 죽인다면 금방 괜찮아지겠지. 집중해라, 반쪽이.]

가르엘을 믿었기에 굳이 습격을 경계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델은 굴을 울리는 진동과 날카로운 타격음 속에서 가르엘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을 거야. 가르엘에겐 재생 능력이 있어. 그 능력과 무력이라면, 셀레브를 충분히 붙들어 둘 수 있다. 녀석은 이미 라이돈을 상대하면서 체력을 많이 소모했을 테니까.’

상당히 지친 상태일 셀레브를 여기까지 보낸 것으로 보아, 에밀리아도 어지간히 그녀를 신뢰하는 듯했다.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마음을 가다듬은 카델이 장막에 올린 손에 힘을 주었다. 쿤라는 여전히 기운을 아껴야 하는 상태라고 했으므로, 그의 힘을 극소량 퍼뜨려 장막의 약점을 찾아야 했다. 나머지 파괴는 전부 자신의 몫.

[이곳이다. 여기에 집중적으로 마력을 불어넣어. 꽤 많은 양이 필요할 테니, 조절에 유의해라.]

장막에 붉은 점 하나가 새겨졌다. 카델은 그 위로 손을 옮기며 본격적으로 마력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콰앙!

깜짝 놀랄 만큼 거대한 소음과 함께, 굴이 크게 흔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카델이 소음의 근원지를 찾고. 그의 시야 속으로 두 남녀의 모습이 들어찼다.

“가르엘!”

가르엘은 셀레브에게 목을 졸린 채 굴의 윗벽에 처박혀 있었다. 셀레브는 가르엘을 강하게 밀어붙이며 숨통을 옥죄였고, 가르엘은 그녀의 팔을 움켜쥔 채 헐떡였다. 급박한 상황에 카델이 곧장 그를 구하려 했으나.

“가, 가르엘…….”

떨리는 손으로 검을 치켜든 그가 카델을 가리켰다. 벌게진 얼굴이 미약하게 움직이며, 자색의 역안이 카델을 응시했다. 목이 졸린 상태로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으나, 다가오지 말라는 그의 의지만큼은 선명하게 전해졌다.

[버틸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주의를 흩뜨리지 마라. 산만하게 굴면서 부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장막이 아니야.]

“…….”

[카델.]

“……알겠어요.”

쿤라의 말대로다. 지금 가르엘을 도울 방법은 전투에 끼어드는 것이 아닌, 장막을 부수고 마왕의 형제를 죽이는 것. 지그시 입술을 깨문 그가 다시 등을 돌려 장막 위로 마력을 불어넣었다.

지금은 가르엘을 믿어야 했다. 하지만 실상, 가르엘은 이 위기를 수월하게 넘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힘이야……!’

아무리 마족이래도 이게 가능한 악력이란 말인가? 목을 조르는 힘은 황당함이 느껴질 만큼 과격했다. 숨통을 조인다면 제아무리 자신이라도 살아남기 어려울 터였다.

셀레브는 느릿느릿 날개를 펄럭이며 일그러진 가르엘을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좀 상황 파악이 돼? 내가 급해서 말이야. 빨리 뒈져 줬으면 좋겠어.”

팔찌의 지속 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그 전에 가르엘을 해치우고, 적룡의 힘을 얻은 카델을 떨쳐 내 에밀리아의 형제들을 구해 내야 했다. 촉박한 마음에 셀레브의 손아귀에 더욱 강한 힘이 들어갔다. 가르엘은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한 가지 돌파구를 떠올렸다.

‘되도록 사용할 일이 없길 바랐다만…….’

여기서 쓰러져 카델을 위험하게 만드는 것보단 나았다. 가르엘은 셀레브의 팔을 밀어 내던 손을 내려 제 품속을 더듬었다.

“무슨 수작을 부려도 소용없으니까……!”

짜증스럽게 가르엘을 협박하던 셀레브가 멈칫하며 인상을 구겼다. 가르엘은 품 안에서 꺼낸 자그마한 병을 코밑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너, 그거…….”

거리가 벌어져 있어 냄새를 맡을 순 없었으나. 셀레브는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저것은 마계에서 연구 중인 각성제. 에밀리아의 형제들을 치료하기 위함이 아닌, 치료를 마친 그들이 본래의 힘을 꺼내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진 약물이었다. 그것이 왜 이 혼혈 마족의 손에 들려 있단 말인가.

당황한 셀레브가 반사적으로 병을 빼앗으려 했으나.

“크윽……!”

그 손짓을 피한 가르엘이 셀레브의 팔을 강하게 비틀었다. 악력을 따라 기괴하게 꺾인 팔에 셀레브의 손에서 힘이 빠지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빠져나온 가르엘이 약병을 다시 품에 넣으며 코끝을 문질렀다.

“이게 정확히 어떤 효과를 가진 건지 파악해 봐야겠거든. 잘 부탁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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