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5화 (475/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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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야라면 어느 정도 시간을 끌 수 있겠지.”

싸늘하게 식은 에밀리아의 눈빛이 바로 앞의 수정 구슬을 향했다. 마법진이 새겨진 구슬 안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등장한 세 명의 침입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빤히 응시하다, 발작처럼 구슬을 움켜쥔 에밀리아가 분노에 찬 숨을 씨근덕거렸다.

“어떻게 내 형제들의 침소에까지……? 대체 어떻게?”

금방이라도 구슬을 내던질 듯 격한 분노를 드러내는 에밀리아의 뒤편. 셀레브는 큰 결심을 한 듯 비장하게 눈을 빛내며 한 걸음 다가섰다.

“내가 해치울게, 폐하. 걱정할 것 없어.”

“……적룡이 있어, 셀레브. 적룡의 힘을 가진 카델 라이토스, 로렌스의 조카까지.”

“나라면 놈들을 제압할 수 있을 거야. 날 믿어 줘.”

“……아니. 아니야, 셀레브.”

구슬을 움켜쥔 채 바들거리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크게 숨을 들이쉬어 분노를 가라앉힌 에밀리아가 뒤를 돌고는, 웃음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제압은 필요 없어. 형제들만 데려오면 돼.”

“마왕이 오는 일은 없을 거야. 지금의 에밀리아에게 인간군을 상대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어. 그러니 성안에서 평화의 돌을 지키려 하겠지.”

“내 생각도 마찬가지다. 녀석이 대신 보낼 마족이 몇일지 모르겠지만, 신뢰하는 부하이니만큼 실력은 무시 못 하겠지.”

마왕의 형제를 찾는 동안 적과의 충돌이 일어나리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다. 이렇게나 위험한 일에 전투가 동반되지 않을 리 없으니까. 카델은 여전히 투명한 장막에 가로막힌 출구 너머를 바라보았다.

세 명의 형제는 두 남자와 한 여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방문에도 아무런 반응 없이 부유했다.

“왜 저렇게 띄워 둔 걸까?”

“육안으로 보이진 않지만, 저 너머에서 미세한 마기가 느껴져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죠. 저렇게 공중에 띄워 온몸에 마기를 묻히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식으로 육체의 노화를 늦추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흠…….”

마족은 외형만으로 나이를 유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노인처럼 보이는 자가 실제로는 청년일 수 있고, 아이처럼 보이는 자가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햇수를 살아왔을 수 있다.

그 모든 것은 전부 ‘마기’라는 특수한 기운이 그들의 노화를 제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마기를 다룰 수 없는 상태의 마족은, 시간이 흐르는 대로 착실하게 노화될 수밖에 없다.

제법 타당한 주장에 카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제대로 맞혔네. 역시, 마족의 피가 섞여서인가?”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기운으로 스며든 쿤라가 사라진 자리. 가리는 것 없이 비치는 반대편으로, 짙은 마기를 두른 셀레브의 모습이 드러났다.

“셀레브.”

“이봐, 카델 라이토스. 넌 지금 열심히 얼음 계단을 달리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여기서 헛짓거리를 해서 에밀리아의 심기를 거슬러?”

“마왕의 형제를 없애 마계 부활의 싹을 뽑는 일이 어떻게 헛짓거리일 수가 있겠어?”

“뭐라고?”

“잘 들어, 가르엘!”

카델은 가르엘을 제 뒤로 물리며 외쳤다. 그에 셀레브를 경계하던 가르엘의 시선이 카델의 뒷모습을 향했다.

“지금 여기서 마왕의 형제를 없애지 못한다면, 우리가 당장 마계를 봉인한대도 몇 번이고 같은 전쟁이 벌어질 거야. 짐작 같은 게 아니야. 말했지? 나는 이세계에서 왔다고.”

쿤라의 기운과 함께 마력을 끌어 올린 그의 손끝으로 불씨가 튀어 올랐다.

“그래서 확신하는 거야. 이 지독한 전쟁을 완벽하게 끝마치고, 너희 세계에 영원한 평화가 찾아오길 바란다면…….”

한순간에 생성된 수십 개의 화염구가 셀레브를 향해 날아들었다. 카델은 공격을 쳐 내는 셀레브를 응시하며 더욱 강력한 마력을 개방했다.

“의심 없이 내 말을 따라. 우린 셀레브를 쓰러뜨리고, 지하에 갇히는 한이 있더라도 마왕의 형제를 죽인다. 내 말 알아들었어?”

“……네. 단장님.”

“좋아. 질문은 나중으로 미뤄 둬.”

사실, 가르엘은 카델이 했던 말들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다. 이세계에서 온 빙의자라느니, 진짜 이름이 ‘신여환’이라느니……. 그가 겪어 왔던 카델은 누구보다 카델다운, 올바른 길을 걸어가는 등불 같은 존재였으니. 영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이 진짜이든 아니든. 그것이 갑자기 카델을 멀리하거나, 그의 명령을 불복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의 정체가 이세계의 이방인이든, 침략자든 상관없었다. 가르엘은 생의 끝까지 카델을 따르기로 마음먹었으니.

게다가 이 사실은 단원들조차 모르는 카델의 커다란 비밀이 아니던가. 묘한 우월감마저 느껴졌다.

호쾌하게 검을 뽑아 든 가르엘이 안대를 끌어 내리며 마기를 개방했다.

“기운을 아껴 두세요, 단장님.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저희 요정 왕자님의 원수잖아요?”

화염구가 일으킨 뿌연 흙먼지 너머. 굳건하게 선 실루엣을 발견한 가르엘이 빠른 속도로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여기서 죽여 두면, 한동안 냄새난다는 구박은 안 들어도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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