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3화 (473/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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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가 끝나면 말해라. 그리 오랜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는 것만 알아 둬.]

천장이 뻥 뚫린 폐허 안에서, 카델은 비장한 표정으로 눈앞의 벽을 노려보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눈대중으로 두 개의 벽을 추려 낼 수 있었으나, 추린 벽들의 높이는 같았다.

줄자라도 가져와 두 벽의 높이가 똑같음을 증명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자신이 가는 곳마다 이런 벽이 있는 건지, 가르엘은 어떻게 그리 쉽게 올바른 선택지를 고르는 건지. 억울하고 의아하기만 했으나, 모든 불평은 가슴속에 삼켰다.

“이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끝이야. ……전부 끝.”

지금까지의 수고가 모두 물거품이 된다. 그 절망스러운 생각에 파묻혀 결국 가르엘에게 제 진짜 정체를 밝히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그럼에도 후련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카델은 무사히 마왕의 형제를 죽이고, 가르엘에게 보다 자세한 설명을 들려주고 싶었다. 비밀을 만들지 말아 달라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고작 벽이다. 고작 높이를 구분하는 일이다. 뚫어져라 벽을 응시하던 카델이 신경질적으로 눈을 감았다. 손끝을 세워 눈꺼풀을 긁어내듯 쓸어내리고,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정신 차려.”

손톱에 긁힌 피부에서 얼얼한 감각이 번졌다. 크게 숨을 내쉰 카델이 다시 눈을 부릅떴다.

“생각하자. 억울하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보이는 높이는 똑같지만, 결국 다르기 때문에 실패와 성공이 갈리는 게 아니겠는가. 높이가 다르다면 어떻게든 알아낼 방법이 있을 것이다. 죽일 듯 벽을 노려보던 카델의 눈빛에 일순 이채가 스쳤다.

“그래!”

빠르게 마력을 끌어 올린 그가 두 개의 벽 위로 불꽃을 피워 냈다. 불꽃은 껍질처럼 벽을 통째로 감쌌고, 비는 부분 하나 없이 꼼꼼하게 불을 붙인 그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달라. 벽을 감싼 마력의 양이 달라!”

육안으로 알아볼 수 없다면, 기운으로 알아보면 되는 것이다. 두 벽을 감싼 마력의 양은 아주 미세한 차이였으나, 카델의 수준이라면 문제없이 차이를 가늠할 수 있었다.

확신에 찬 얼굴로 오른쪽 벽을 바라본 그가 펜던트를 움켜쥐며 외쳤다.

“찾았어요, 쿤라! 신호를 줘요!”

마력으로 벽을 감싸고, 벽에 담긴 마력의 양을 측정해 높이와 너비를 가늠한다. 그 계산을 기준으로 더 높은 벽을 골라내는 것이 카델이 선택한 방식이었다. 그가 찾아낸 돌파구는 수월하게 장치를 작동시켰고, 그 결과.

[……수고했다, 반쪽이.]

대지의 울림이 느껴졌다. 다급히 건물을 빠져나오자,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가르엘의 모습이 보였다. 마주친 그들은 찰나의 시간 동안 서로를 응시하며 머뭇거렸다. 오가는 시선 속에 담긴 것은 각기 다른 망설임, 호기심, 그리고 약간의 어색함.

먼저 행동에 나선 이는 가르엘이었다. 그는 과거의 기억을 잊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꾸며 냈다.

“단장님, 이쪽으로!”

그들이 달려간 곳은 마을의 중심부였다. 그곳에 도착하자, 여유롭게 선 쿤라의 발아래로 원형의 발판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발광하는 것이 보였다.

“이건……. 거기 서 있어도 되는 거예요, 쿤라?”

“별걸 다 걱정하는군. 너희도 이 안으로 들어와라. 이곳에 올라야 이동할 수 있어.”

상당히 께름칙한 제안이었으나, 카델은 캐묻는 것을 관두고 원 위에 발을 들였다. 가르엘도 금세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세 명의 사내가 원 안으로 들어선 순간.

쿠구구구구―

그들이 선 원형의 발판이 땅속으로 꺼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추락하는 지면에 비틀거리던 카델이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원형의 발판은 조금씩 추락의 속도를 높였다.

“어어어……! 쿤라!”

“괜찮대도.”

“쿤라 님만 괜찮은 거 아닌가요? 저희도 괜찮은 게 맞나요?”

“네 몸이라면 더더욱 괜찮을 테니 안심해라.”

가르엘은 카델을 바짝 끌어당겨 안았고, 카델은 가르엘의 품에 달라붙은 채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본 쿤라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땅속 깊은 곳으로 파고드는 그들의 시야는 온통 깜깜했다. 차고 습한 바람이 머리칼을 어지럽게 헤집었고, 곧 쿰쿰한 흙냄새가 났다. 카델은 심장이 덜렁거리는 듯한 불쾌한 감각을 느끼며 질끈 눈을 감았다. 추락하는 지면은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까지 내려가는 거야, 토할 것 같다고!’

치미는 구역질에 입술을 깨문 카델이 가르엘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필사적으로 매달려 오는 무게감에 가르엘이 잠시 주춤했으나, 곧 굳은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영원할 것 같던 추락도 끝이 났다. 발판이 움직임을 멈추며, 그 반동을 따라 크게 덜컹거렸다.

“……도착, 한 것 같네요.”

살짝 떨리는 숨소리가 귓가를 울리자 내내 불안하게 떨리던 심장은 곧 흥분으로 널뛰었다. 가르엘의 품에서 벗어난 카델이 고개를 들고 앞을 살폈다.

발판의 앞에는 기다랗게 이어진 굴이 있었다. 그 끝에는 출구가 있었고, 그곳에서부터 환한 빛이 새어 나왔다. 굴 자체도 어둡지 않았다. 출구 바깥에서 새어 나오는 빛 때문이 아닌, 굴 곳곳에 자리한 박쥐 덕이었다. 보랏빛으로 발광하는 박쥐 떼가 앞을 밝혀 주고 있었다. 잠시 그 박쥐들을 살피던 카델은 그것이 생물이 아닌 조형물임을 깨달았다.

“저 너머에 마왕의 형제들이 있을까요?”

두리번거리며 굴을 살피던 카델이 묻자, 말없이 출구 너머를 응시하던 쿤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턴 시간 싸움이 될 거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든, 망설이지 말고 파괴해라.”

시스템은 이미 낌새를 느꼈다. 그의 가벼운 저지에도 카델이 기어코 길을 열었으니. 본격적으로 간섭을 시작할 것이다. 카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 마른침을 삼킨 그가 서둘러 출구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가르엘과 쿤라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굴을 가로지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빠르게 도착한 출구의 앞. 너머의 풍경을 담아낸 카델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마왕의 형제들이야.”

온통 새하얗게 물든 순백의 공간. 그곳에 축 늘어진 세 고위 마족이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저곳에만 중력이 없기라도 한 것인지, 환자나 다름없을 이들을 왜 공중에 띄워 놓은 것인지. 떠오르는 여러 의문은, 출구 너머로 발을 디딤과 동시에 사라졌다.

“악!”

“단장님!”

분명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건만. 당당히 발을 뻗은 그는 투명한 벽에 얼굴을 박고 튕겨졌다. 제법 둔탁한 충격에 카델이 비명을 지르자, 가르엘이 다가와 그를 끌어당겼다.

“으으……. 아파…….”

“손 치워 봐요. 치료해 줄게요.”

“괘, 괜찮…….”

“안 괜찮아요. 예쁜 이마가 이렇게 부었는데.”

가르엘은 금세 벌겋게 부어오른 카델의 이마를 문지르며 마기를 개방했다. 그리고 그런 둘의 뒤에서, 느긋하게 걸어오던 쿤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출구가 막혀 있군. 장치가 심어진 건가?”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존재하지 않던 것이다. 출구 앞까지 걸어간 쿤라가 손을 뻗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투명한 장막이 흔들거렸다.

가볍게 기운을 풀어 장막을 더듬던 쿤라가 한숨을 내쉬고는, 대체 저 장막은 뭐냐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카델에게 말했다.

“함정이다. 그 어려운 장치를 풀고 왔는데도 함정까지 조심해야 하다니. 경계심이 여간 강한 게 아니군.”

“함정이요? 그럼 이제 저흰 어떻게 장막을 넘어요?”

“장막을 넘는 건 큰 문제가 아니다. 곧 이곳에 도착할 놈이 문제지.”

곧 이곳에 도착할 놈. 쿤라의 짜증스러운 대꾸에, 카델과 가르엘의 시선이 마주쳤다. 마왕의 형제들이 잠들어 있는 이 비밀스러운 공간을 찾아올 마족이라면, 분명 심상치 않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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