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2화 (47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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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토 경의 옆엔 모들렌 경과 소린 경, 마밀 님, 요젠까지 붙어 있다. 우린 안심하고 마족을 죽이는 데 집중하면 돼.”

“이미 다 알고 있는 소릴 지껄일 시간에 그 고물이나 내다 버리지 그래.”

라이돈을 선두로 고위 마족에게 달려가는 길. 반의 핀잔을 들은 루멘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다른 검을 얻었으니 싸움엔 지장 없다.”

“흥, 멋이라도 부리려는 거냐? 쌍검술도 못 하는 도련님이 칼 두 자루는 어디다 쓰게?”

가르엘에게도 사용을 권해 봤으나, 마검은 여전히 뽑히지 않았다. 어쩌면 순수 혈통의 마족만이 뽑을 수 있는 검일지도 모른다. 혹은 전혀 예상 밖의 조건이 붙어 있을지도.

어찌 됐든 당장 사용할 수 없으니 버리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루멘은 검을 버리지 못했다. 제힘으로 이 마검을 뽑고 싶다는 오기가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을 설명한다면 비웃음을 살 것이 뻔했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루멘에 반이 먹잇감을 발견한 짐승처럼 눈을 빛냈으나.

“정말이지, 약할수록 말이 많다는 게 사실인가 봐. 그만 떠들고 전투 준비나 하지 그래?”

그들을 돌아본 라이돈이 혀를 찼다. 그의 눈빛에 담긴 한심함을 발견한 반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라이돈에게 옳은 지적을 당하는 것보다 치욕스러운 일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루멘은 그런 반을 향해 코웃음을 치고는, 멀쩡한 검을 움켜쥐었다.

“가까워졌군. 놈들은 여전히 움직임이 없어.”

“흐응, 자기들 앞까진 다가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나 보네. 내가 있는데도 저런 여유로운 꼴이라니. 같잖아서 화가 나잖아!”

엑토와의 거리도 충분히 벌어졌고, 고위 마족과의 거리는 좁혀졌다. 마족의 위치를 정확히 계산한 라이돈이 마력을 방출하고. 촘촘한 얼음 결정이 회오리처럼 휘몰아치며, 반과 루멘의 몸을 감쌌다.

“3분. 그동안 너희를 띄워 줄 테니까, 너무 높다고 울지 말고 제대로 싸워. 알겠지?”

그 말과 동시에 얼음 결정에 휩싸인 몸이 붕 떠올랐다. 당황하며 중심을 잡는 둘의 모습을 확인한 라이돈이 먼저 고위 마족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눈앞의 상대는 엘리나였다. 그녀의 가벼운 손짓에 둥글게 뭉친 마기의 덩어리가 쏘아지며 라이돈을 노렸다.

“아하하! 뭐야, 이건. 간지럽지도 않아!”

하지만 엘리나의 공격은 전부 라이돈의 장막에 가로막혔다. 비행을 따라 빠르게 좁혀지는 거리와 이어지는 무효타. 예상 밖의 흐름에 엘리나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에 무섭게 달려든 라이돈이 곧장 그녀를 향해 얼음창을 날렸으나.

순식간에 그녀의 앞을 막아선 루소가 창을 튕겨 냈다.

“……흐음.”

루소의 손에 들린 무기는 없다. 마기로 물든 두 팔로 직접 얼음 창을 튕겨 낸 듯했다. 그를 발견한 라이돈의 눈빛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누구랑 비슷한 타입인가 봐.”

강인한 육체도, 몸을 강화하는 마기도. 묘하게 셀레브를 떠오르게 했다. 간신히 기억 뒤편으로 밀어 둔 그 원수의 얼굴을.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주변 온도를 감지한 루소가 엘리나를 멀찍이 물렸다. 라이돈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에는 짙은 경계심이 떠올라 있었다.

“절대 틈을 보이지 마라, 엘리나. 이 녀석은…… 위험하다.”

“마족 같은 건 왜 태어나는 거야? 마계 같은 건 왜 있는 거야? 정말 궁금해서 그래. 대답해 줄 수 있어?”

미친 듯이 몰아치는 공격. 루소는 공백도 없이 날아드는 얼음 창을 빗겨 치며 미간을 좁혔다.

어마어마한 마력이다. 낯설지는 않다. 지하 감옥에서 요동치던 폭발의 기운과 똑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폭주를 겪은 몸으로 어떻게 이리 강한 마력을 끊임없이 사용한단 말인가?

루소는 이해할 수 없었다. 눈앞의 요정에게서 느껴지는 강자의 아우라. 그리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지독한 증오를.

“대답 못 하겠어? 응? 너무 과묵하네. 너처럼 심심하고 조용한 남자는 인기 없어. 잘 새겨 둬. 저승에서라도 살림을 꾸리려면 열심히 매력을 어필해야 할 테니까! 아하하!”

이 고위 마족은 셀레브가 아니다. 다루는 힘의 종류나 전투법은 비슷하나, 생김새부터 성격까지 뭐 하나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럼에도 라이돈은 조금씩 끓어오르는 흥분감을 감지할 수 있었다. 자제해야 한다. 침착하게 굴어야 한다. 연신 의식하려 해도 몸은 멋대로 움직였다.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 돌아온 덕인지, 라이돈은 제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의 총량이 훨씬 늘어났다는 것을 느꼈다. 마력의 흐름도, 몸의 움직임도 이전과는 다르다. 일시적인 각성 효과일 수도 있으니, 라이돈은 이 상태를 최대한 길게 이어 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니 체력을 최소한으로 소모하며 놈들을 상대하려 했는데.

“이 세계의 어떤 생명도 네 질문에 대답하지 못할 거다. 그러니 쓸데없는 의문은 넣어 두고 전력을 다해라.”

“아……. 그래?”

마기를 두른 단단한 팔이 제 공격을 튕겨 낼 때마다. 라이돈은 눈이 뒤집히는 분노를 느꼈다. 부글거리는 증오심은 아무리 노력해도 가라앉지 않았고, 그렇게 점차 난폭한 마법이 이어지던 때.

“이봐, 요정 놈! 날게 해 줄 거면 좀 더 안정적인 상태로 만들어야 할 거 아니야! 이렇게 흔들거리는 몸으로 대체 어떻게 싸우라는 거냐?”

“중심 잡기는 차치하더라도, 과하게 춥군. 3분의 비행시간은 이 추위에서 우리가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나?”

라이돈의 곁으로 반과 루멘이 다가왔다. 그들의 불만에 번뜩이던 살기가 주춤하며, 단숨에 마력을 다스린 라이돈이 인상을 구겼다.

“커다란 덩치로 애처럼 굴지 말아 줄래? 아니면, 날게 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그렇게 바보같이 하는 거야?”

“누가 누구더러……! 양심이 있는 거냐? 됐으니까, 우리 뒤로 와서 이 흔들거리는 몸이나 고정시켜.”

“명령하지 마! 루멘도 별로지만 반 명령은 더 별로야!”

“뭐야?”

“둘 다 시끄럽다. 적을 앞에 두고 뭐 하는 거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찬 루멘이 라이돈을 가볍게 당겨 제 뒤로 물렸다.

“포지션을 지켜라, 라이돈. 넌 마법사야. 같은 마법사인 대장이 어떤 식으로 진영을 유지했는지 떠올려.”

“…….”

“대장이 돌아올 때까지 아무도 죽지 않는 것. 그게 유일한 명령이었다. 독단 행동은 명령을 수행한 이후에나 해.”

확실히 라이돈에게선 이전보다 한층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힘을 마음껏 방출하기에, 가르엘의 응급 처치를 받았을 뿐인 몸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가 힘을 낭비하지 않도록 자신들이 조절해 주어야 했다.

라이돈 역시 루멘의 말뜻을 잘 이해했기에, 대거리를 이어 가는 대신 그들을 둘러싼 냉기의 방향과 강도를 조절했다. 지금은 그들에게 전투를 맡기고 뒤에서 보조하는 편이 나았다.

“그래, 이거지. 드디어 말귀를 알아먹었군.”

“인간은 여기서 떨어지면 죽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살짝 떨리는 시선을 옮긴 반이 전방의 적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라이돈의 공격이 멈춘 동안 태세를 가다듬는 루소와 뒤편에서 기회를 노리는 엘리나가 있었다. 빠르게 그들의 모습을 훑어낸 반이 대검을 빼 들며 말했다.

“앞에 남자 놈은 내가. 뒤에 여자 놈은 네가 맡아라.”

“조심해. 남자의 기운이 심상치 않다.”

“여자나 조심해. 저놈이 호계 기사단장의 몸뚱이에 꽃을 피운 녀석 같으니.”

각자 타깃을 정한 반과 루멘이 몸을 움직이자, 그들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 세찬 눈보라가 일었다. 그들의 움직임과 성향, 전투 방식을 꿰고 있어야만 가능한 마법. 그들은 라이돈의 섬세한 마력 속에서 자유롭게 하늘을 활보했다.

빠르게 날아든 루멘이 뒤편의 엘리나를 노리고. 그를 발견한 루소가 루멘을 막아서려 했으나.

“힘자랑하는 놈들은 질리게 상대해 봤거든. 네가 그놈들을 압도할 만큼 대단하진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드는군.”

뒤따라온 반의 대검이 그의 머리를 노렸다. 직격한다면 죽음뿐이다. 빠르게 몸을 돌린 루소가 양팔을 교차해 검격을 막아 냈다. 반은 그런 루소의 팔을 통째로 뜯어낼 듯 대검을 짓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널 빨리 죽이지 않으면 3분도 지나기 전에 낙사할 것 같거든. 우리 요정 놈이 심각하게 충동적인 편이라.”

대검의 압력에 밀려 잘게 떨리던 팔이 가까스로 공격을 튕겨 내고. 본격적으로 대립을 시작한 반과 루소의 뒤. 루멘은 기관총처럼 쏘아지는 마기를 피해 속력을 높였다.

“날개도 없는 게 제법이네? 하지만 널 띄워 준 마력이 언제까지 그 속도를 감당해 줄까?”

루멘이 지난 자리마다 얼음 결정이 잔상처럼 흩어져 궤적을 그렸다. 라이돈의 마력은 아슬아슬하게 루멘의 폭발적인 속도를 쫓고 있었다. 그걸 느끼고 있음에도 루멘은 조금의 속도 조절도 없이 마기를 피하고, 동시에 베어 냈다. 그렇게 단숨에 엘리나와의 거리를 좁힌 그가 고작 삼 보 앞에서 신형을 드러냈다.

“그 녀석 말로는 3분이랬거든. 그러니…… 적어도 10분은 감당해 줄 거다. 엄살이 심한 녀석이라.”

“건방진……!”

엘리나는 당당히 자신의 앞에 멈춰 선 루멘을 향해 마기를 쏘아 내려 했으나. 루멘이 반 뼘 빠져나온 검을 납검한 순간.

“아아악!”

마기가 모여들던 검지가 댕강 잘려 나갔다. 다급히 손을 부여잡은 엘리나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너도 고위 마족치곤 엄살이 심한 편이군. 안됐지만 네 애인은 도와주러 오지 못할 거다.”

그녀를 비웃은 루멘의 신형이 다시 한번 사라졌다. 그에 엘리나가 손가락을 재생하며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어디…… 어디 있지?’

상대가 얼마나 빠르든, 얼마나 강력하든. 딱 한 발. 한 발의 마기만 맞히면 된다. 자신의 마기가 적의 몸에서 꽃을 피우는 순간. 그들의 강함과는 관계없이 필연적인 죽음이 다가올 테니. 그러니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버틴다면…….

“의외로 빈틈이 적군. 흥분했을 줄 알았는데.”

“아악! 이 거지 같은……!”

하지만 그녀의 동체 시력으로 루멘의 움직임을 좇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녀의 어깨에 기다란 자상이 그어지며, 보라색 핏물이 튀어 올랐다. 반사적으로 상처를 움켜쥔 그녀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몸을 돌렸으나.

“그 침착함은 칭찬해 주지. 거만한 태도와는 달리 잘 방심하지 않는 편인가 봐? 아니면, 저 목석같은 고위 마족이 미리 일러뒀나?”

다시금 등을 노린 공격이 이어졌다. 공격용 마기를 거둬 몸을 보호하고 있었기에 치명상은 피했으나, 정신적 타격은 상당했다.

그녀는 섣불리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방어에 집중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유령의 속삭임 같았고, 주위를 맴도는 냉풍에 소름까지 끼쳐 왔다.

‘이깟 인간 놈들에게 긴장하긴 싫지만, 인정할게. 방심하고도 이길 수 있는 놈들은 아니야. 하지만 여전히 승산은 나에게 있다.’

날개 없는 종족이 오랫동안 활공할 수 있을 리 없다. 이 인간도 직접 말하지 않았는가. 길어 봤자 10분. 이 살벌한 속도로는 10분도 충분히 위협적이었지만, 자신의 재생력이라면 버텨 볼 만하다. 죽지만 않는다면 녀석의 목숨을 거두는 일은 간단했다.

“점점 빈틈이 적어지는데……. 이런 식이면 곤란해.”

“시끄…… 으윽!”

“계속 살점을 베어 낸다고 죽을 것 같지도 않고. 이럴 거면 그냥…… 저쪽 고위 마족을 상대하러 가는 게 나을 것 같군.”

“……뭐? 지금 누굴 앞에 두고 그딴 소리를!”

역정을 내며 히스테릭하게 눈을 부릅떴으나, 시선은 어쩔 수 없이 루소를 향했다. 그는 대검을 든 인간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놈 하나를 상대하는 것으로 충분히 버거워 보인다. 그런 전투에 이 재빠른 인간까지 합세한다면.

‘……나는 그동안 기운을 모아 루소를 도울 수 있어. 하지만 이 녀석은 쉽게 공격을 맞아 주지 않을 거고, 그 틈에 두 인간이 루소를 몰아붙인다면…….’

위험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둘을 제외하고도 적이 있지 않은가. 루소가 직접 위험하다 경고했던 요정. 엘리나는 아직도 자신을 향해 돌진하던 요정의 살기를 잊지 못했다. 만약 그 요정까지 힘을 합친다면, 아무리 루소래도 무사할 수 없다.

“그래, 마음대로 해. 가 봤자 네 손해일 테니까. 맞힐 목표물이 많아지면 나야 좋거든.”

엘리나는 부러 태연한 척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루멘은 그녀의 태연함이 연기임을 알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성질을 긁는다면, 치명상 입힐 기회가 생길 터. 다시 그녀의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가 마지막 쐐기를 박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하지만 루소는, 아무도 죽일 수 없어.”

재생을 마친 그녀가 엄지와 검지를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미리 기운을 모으고 있던 듯, 빠르게 장전된 마기가 하늘 높이 쏘아지고. 루멘은 조준 하나 없는 마구잡이식 난사의 의중을 파악하려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저런……! 반! 몸을 피해라!”

일직선으로 쏘아진 마기가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하기 시작했다. 무수한 마기의 총탄이 향하는 곳은 단 한 곳. 루멘의 외침을 따라 고개를 돌린 반의 시야 속으로, 자신을 노리는 마기의 총탄이 들어찼다.

모든 마기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은 자신이 피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빠르게 분별해 자리를 잡고, 넓은 대검의 면으로 내치듯 마기를 방어했다. 다행인 점이라면, 엘리나의 공격 범위 내에는 루소 역시 발을 들일 수 없다는 것. 방어에만 집중한다면 당하지 않는다.

그리 생각했으나.

“젠장……!”

기어이 빈틈을 파고든 한 덩이의 마기가, 왼쪽 어깻죽지를 관통했다.

“허어? 지금 뭐 하는 거야, 반? 그러게 내가 그 무식한 근육 좀 그만 키우랬잖아! 면적이 넓으니까 안 맞아도 될 것까지 맞는 거 아니야!”

멀리서 들려오는 요정의 깐족거림은 무시했다. 반은 상처를 움켜쥔 채 숨을 골랐다. 그 무수한 마기의 탄환 속에서 고작 한 발을 맞은 것이나, 도저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뜨겁다…….’

마기가 관통한 상처에서부터 용암 같은 열기가 번졌다. 단순히 다쳤기 때문이 아니다. 무언가 불덩이 같은 것이 상처를 헤집으며 움트고 있었고, 반은 그 감각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서둘러라, 루멘! 내 팔에 빌어먹을 꽃이 피기 전에 죽여!”

루멘은 곧장 엘리나와의 교전을 재개했으나, 단숨에 승부를 보기는 어려울 듯했다. 단 한 발만으로 이 같은 파괴력을 가진 공격이니. 아무리 루멘이래도 상대하기는 까다롭다.

짧게 혀를 찬 반이 대검의 손잡이를 강하게 그러쥐었다. 그를 지켜보던 루소가 반의 어깨를 턱짓했다.

“한쪽 팔을 잃는다면 그 무거운 대검을 휘두르기도 어렵겠지. 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안 남았을 거고. 순순히 물러나 지상으로 내려간다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

“꺼져. 마족 나부랭이에게 목숨을 구걸할 정도로 급하진 않아.”

“죽음을 앞에 두고도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는 건 나약한 자들의 특징이다.”

“허, 이젠 마족 놈한테 분석까지 당하네. 날 걱정할 시간에 네놈 짧은 명줄이나 원망해라.”

엘리나를 단숨에 해치울 수 없다면, 적어도 꽃이 완전히 피어나기 전. 눈앞의 적이라도 죽여 둬야 했다.

‘이 녀석, 전투력도 전투력이지만 몸의 내구성이 상당해. 시간 안에 처리하려면 큰 힘이 필요할 거다. ……뭘 걸어야 하지?’

지금까지 각성 상태에 진입하기 위해 여러 신체 부위를 담보로 걸어 본바. 힘은 신체의 급소에 가까울수록, 그리고 많은 부위를 내걸수록 강해졌다. 하지만 그만큼 대량의 피를 필요로 하기에, 일대일 교전에서 [적혈망매]를 사용하는 것은 리스크가 컸다. 피를 보충하지 못해 급사할 가능성이 늘어나니.

‘한쪽 팔 정도라면 감당할 수 있겠다만, 만약 도중에 왼팔에서 꽃이 피어난다면……. 젠장, 다리? 역시 다리인가? 내장은 너무 위험해. 가르엘 경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모들렌 경의 마력은 제한적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반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일순 도저히 참지 못할 신음이 튀어나오며, 왼쪽 어깨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끄으윽……!”

송곳처럼 날카롭게 혈관을 파고드는 뿌리와 살갗을 통째로 찢고 나온 줄기. 몇 갈래의 줄기가 얽히고설키며 몸집을 부풀렸다. 그 끝에 매달린 것은 거대하게 움튼 봉오리. 꿈틀거리며 약동하던 봉오리는, 기어이 반의 팔에 뿌리를 내린 채 만개했다.

실로 충격적인 고통에 반이 주춤한 사이. 틈을 놓치지 않은 루소가 그에게 달려들었으나.

“정말 귀찮게 하네. 제대로 하는 게 없어!”

마력을 조절한 라이돈이 임의로 그의 위치를 옮겼다. 냉기를 따라 몸이 멋대로 이동하고 있음에도 반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째서 엑토가 무릎까지 꿇으며 고통을 호소했는지 잘 알 것 같았다.

바득바득 이를 갈며 통증을 씹어 넘기자, 꽃을 향해 내달리는 혈액의 흐름이 느껴졌다. 소름 끼칠 만큼 빠른 속도로 피가 흡수당하고 있었다.

‘피를 빨아먹힌다는 건, 생각보다도 역겨운 기분이었군.’

왠지 지난날의 전투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반! 이대로 옮겨 줄 테니까 아래로 굴러가서 치유술이나 받아!”

라이돈의 외침에 가쁘게 숨을 헐떡이던 반이 다급히 대답했다.

“멈춰! 그럴 필요 없어!”

“뭐라는 거야? 지금 네 왼팔에 달린 꽃이 점점 커지고 있는 거 알아? 꽃과 반이라니, 징그럽거든!”

“입 다물고 저 마족 놈이랑 거리나 유지해 줘.”

“흐응, 언제 한 번 반의 혀를 뽑아서 소독해야겠어. 그러지 않으면 내 귀가 썩어 버릴 거야.”

라이돈은 의문을 품으면서도 순순히 반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루소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으나, 곧장 공격을 전개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엘리나의 꽃이 피어났으니, 반이 얼마 버티지 못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반의 생각은 달랐다.

‘피를 따라서 온몸의 기운이 왼팔에 몰리고 있다. 꽃을 떼어 내지 않는 이상 내 기운도, 피도 사라지지 않지. 그 말인즉슨…….’

이 왼팔 하나에 본래라면 전신이 나누어 썼어야 할 파괴력이 담겼다는 것.

‘팔에 맞은 게 오히려 운이 좋았군.’

부족한 힘을 끌어다 쓸 필요는 없어졌다. 반은 이가 갈릴 만큼 징그러운 고통을 견디며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럴수록 네 죽음이 가까워질 뿐이다, 인간. 물러나라.”

“그건 해 봐야 아는 일이지.”

붉은 오라가 전신으로 피어오르는 듯하더니, 이내 빠르게 경로를 틀어 왼팔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꽃의 인력을 따라 오라가 거대한 흐름을 그리며 소용돌이쳤다. 이 신선한 감각을 오래 음미할 시간은 없었다.

붉게 물든 눈을 번뜩인 그가 두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비켜, 루멘! 방해된다!”

쩌렁쩌렁한 외침에 공격을 피하던 루멘이 몸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거대한 꽃을 피운 반의 왼팔을 향하고. 왼팔을 중심으로 점점 불어나는 오라를 발견한 그가 빠르게 이동했다.

“뭐야……?”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 루멘에 엘리나의 미간이 구겨졌다. 마기를 장전한 그녀가 루멘을 찾아 바삐 눈을 굴렸다. 하지만.

“엇……! 루소?”

“도망가라, 엘리나.”

“그게 무슨……!”

반을 상대하고 있어야 할 루소가, 단숨에 날아와 엘리나를 감싸 안았다. 당황한 엘리나의 시선이 그의 어깨 너머를 향하고. 그녀의 눈 안으로, 횡을 그린 붉은색의 검기가 들어찼다.

마치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 빛을 보는 듯했다. 인간이 만들어 냈다고는 믿기지 않는, 한눈에 담기도 어려운 거대한 검기. 그것이 새빨간 오라를 두른 채 날아들고 있었다.

당장 날아오른대도 피할 수 없을 규모의 검기를 눈앞에 두고, 루소는 계속해서 도망가라는 소리를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끌어안은 팔을 놓지 않았다.

빠르게 드리운 붉은 그림자가 그녀의 하얀 얼굴을 뒤덮고. 엘리나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루소를 보호하기 위한 그녀의 공격이, 결국 둘 모두를 나락으로 끌어내렸다는 걸.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그녀가 루소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

축 늘어진 반의 팔 위로 시든 꽃잎이 잿가루처럼 떨어져 내렸다. 후드득 떨어지는 꽃잎이 바람을 따라 부드럽게 흩날렸다. 반은 자신을 당기는 냉기에 이끌려 계단 위로 착지했다.

“제법이군.”

함께 착지한 루멘의 칭찬에, 적들이 머물렀던 하늘을 일별한 반이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돌렸다.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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