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1화 (47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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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님이었군요, 범인은.”

낭패라는 듯 눈을 가린 가르엘이 숨을 헐떡였다. 그 옆에는 굳은 얼굴로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카델이 있었다. 얼굴을 쓸어내린 가르엘이 그런 카델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고는, 실망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하면 그 벽이 더 높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겁니까……? 누가 봐도 반대쪽이었잖아요?”

“……미안.”

남쪽의 장치를 올바르게 작동시키는 데에 무려 열두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다. 한 번 틀린 장치는 계속해서 위치를 바꾸는 탓이었다. 그 열두 번 동안 가르엘은 박쥐들이 튀어나오는 이유를 어떻게든 자신에게 돌리려 했다. 완전히 말을 잃어버린 쿤라도, 매번 죄지은 얼굴로 달려오던 카델도. 전부 자신 때문이겠거니, 넘기려 했다.

하지만 겨우 동쪽으로 이동한 그들이 또다시 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자. 가르엘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단장님……. 키가 작아서 높이를 가늠하기가 더 어려운 걸까요? 그런 슬픈 이유가 있는 거라면 제가 이해해 보도록 할게요.”

“나 그렇게 안 작아. 네가 큰 거지.”

“그럼 왜…….”

“아니, 내가 가는 곳마다 벽들 높이가 비슷했다니까? 네 쪽은 어떤지 몰라도, 내 쪽은 진짜 비슷했다고! 운에 기댈 수밖에 없을 정도라 기대 봤는데, 그때마다 틀리는 걸 어떡해!”

“하지만 좀 전에 제가 직접 가서 확인해 봤을 땐…….”

“작동 전까지만 해도 똑같았단 말이야!”

카델로서는 억울할 따름이었다. 자신이라고 계속 틀리고 싶겠는가. 머릿속으로 쿤라의 한숨이 들려왔을 땐, 억울한 마음에 눈물까지 고였다. 이딴 장치를 매번 어떻게 작동해 들어갔던 건지. 고위 마족들에 대한 원망만 깊어졌다.

순식간에 울상이 된 카델의 모습에, 가르엘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세기의 구원자처럼 후광이 비치던 사내가 이런 허점을 드러내니, 사실 황당함보다는 사랑스러움이 컸다. 그걸 표현했다간 카델의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아 참을 뿐이었다.

가르엘은 카델을 더 놀리고 싶은 것을 참고 벽 바깥으로 고개를 빼 너머를 살폈다. 그곳에는 족히 10미터는 돼 보임 직한 석상 세 개가 도끼와 검을 치켜든 채 마을을 활보하고 있었다. 날개가 달린 것으로 보아 고위 마족의 석상인 듯했으나, 가면을 쓰고 있어 정체를 특정할 순 없었다.

“석상을 부수는 덴 너무 많은 힘이 소모돼요. 녀석들이 탐색을 포기할 때까지 숨어 있도록 하죠.”

관찰해 본바, 석상들은 일정 시간 동안 발견되는 것이 없으면 탐색을 멈추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러니 굳이 힘을 들여 부수는 것보단 돌려보내는 편이 나았다.

카델의 생각도 그런 듯했지만, 여유를 가지지는 못했다. 벽에 등을 기댄 그가 마른세수를 하며 괴롭게 중얼거렸다.

“시간이 얼마 없는데…….”

그런 카델을 말없이 응시하던 가르엘이 조용히 그의 어깨를 감싸 옆으로 끌어당겼다.

“조바심 내지 마요. 할 수 있어요. 동료들도 잘 버텨 줄 거고요.”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런 것밖에 없다. 진심으로 도움이 될 만한 말을 건넬 수 있을 만큼 아는 것이 많진 않았으니. 때문에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카델을 다독였다. 그와 모든 비밀을 공유할 순 없더라도, 그가 일어설 힘 정도는 되어 주고 싶었다.

카델의 반복된 실패는 유령 마을에 끊임없이 괴물을 불러들였다. 전부 상대하진 않았대도 도주만으로 충분히 체력 소모가 막심했다. 그럼에도 가르엘은 끝까지 카델을 탓하지 않았으나, 카델은 들어차는 자괴감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명령을 내리던 쿤라. 그는 실패를 거듭하는 카델에게 약간의 면박을 주기는 했으나, 진심으로 그를 한심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물론 사랑 넘치는 가르엘과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이 정도로 눈썰미 없는 녀석이었다면 이곳까지 살아오지도 못했다.’

카델이 단순히 벽의 높이를 구분하지 못해 헤매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건 빙의자의 한계였다. 접근해선 안 될 정보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몸이 본능적으로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예정되지 않은 일종의 ‘반격’에 카델 라이토스의 육체는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시스템이 생각보다 빠르게 눈치를 채고 있다. 여기서 더 꾸물거렸다간 놈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최악의 경우, 이 전쟁이 필패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장치는 각 방위에서 서로 마주 보는 같은 모양의 벽을 동시에 밀어야만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걸 위해선 최소 두 명의 인원이 필요하니, 카델이 하지 못한다면 자신이라도 투입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절대적으로 힘을 아껴야 한다. 최소한의 정보를 알림으로써 개입을 줄이고, 보이는 영향력을 없애야 해. ……그래야 마지막에 힘을 쓸 수 있을 테니.’

상당한 행운으로 가르엘이 합류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인원은 부족하다. 이곳에서 다른 인간을 데려오기도 불가능했으니. 잠시 고민하던 쿤라가 눈을 감은 채 깊게 숨을 골랐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위치를 바꿨다.

“쿠, 쿤라?”

벽 뒤에 몸을 숨긴 채 자색의 벌 떼를 피하고 있던 카델과 가르엘의 앞. 카델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쿤라를 보며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답답한 건 알겠는데, 되도록 그냥 말로 해 줘요…….”

폭격 같은 잔소리를 예상한 카델이 효력도 없을 변명을 중얼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쿤라는 그를 탓하지도, 한숨을 내쉬지도 않았다. 다만 진지한 눈으로 말할 뿐이었다.

“남은 기회는 두 번이다, 반쪽이.”

“네……? 남은 기회라뇨?”

“만약 네가 두 번을 더 실패한다면, 장치는 작동을 멈추고 마왕에게 신호를 보낼 거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알겠지. 우리에겐 더 이상 마왕의 형제를 찾을 방법이 없어지고, 그대로 끝인 거다.”

“……뭐, 뭐라고요?”

재앙이나 다름없는 사실에 카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은 그가 당혹스럽게 눈을 굴리고. 가르엘 역시 심란한 표정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쿤라는 그런 그들에게 쐐기를 박았다.

“밀어야 할 벽은 넘치도록 남았다. 만약 네가 다음 시도까지 실패한다면, 이만 포기하고 돌아가지. 마왕에게 위치가 발각되어 봤자 더 큰 위험이 닥칠 뿐이니까.”

사실, 남은 기회 따윈 없었다. 장치의 작동이 잘못되면 계속해서 괴물이 등장할 뿐이고, 그것만으로도 유령 마을은 도둑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 그럼에도 쿤라는 거짓을 꾸며 내 카델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네 가능성을 믿겠다.’

그는 이미 빙의자에 한계에 다다른 카델 라이토스의 육신 대신, 그 한계를 뛰어넘을 신여환의 의지를 믿어 보기로 했다. 그의 견고한 의지가 찰나라도 좋으니 빛을 보기를 바랐다. 그것 이외의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말을 마친 쿤라는 혼란스러워하는 카델을 응시하다, 이내 신형을 흩뜨려 다시 마을의 중심부로 돌아갔다.

그렇게 쿤라가 떠난 자리. 시끄러운 벌 소리가 귓가를 때리는 허물어진 벽 뒤에서, 카델은 절망스럽게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어떡하지……? 가르엘, 나 이제 어떡해?”

조심스럽게 눈을 든 카델이 가르엘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물어봤자 정답은 자신에게 있다. 자신이 제대로 벽을 고르면 쉽게 끝날 문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카델은 매달리듯 가르엘에게 답을 구했다. 그에 심각하게 표정을 굳힌 가르엘이 입을 열었다.

“바람 마력으로 몸을 띄워 보죠. 시야를 높이면 맞는 벽을 찾기가 쉬워지지 않을까요?”

“키의 문제가 아니라니까!”

“단장님, 이런 때까지 자존심을 부리다뇨. 물론 그런 앙칼진 면도 귀엽기는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성질 긁지 마!”

카델이 씩씩거리며 성을 내자, 가르엘도 표정을 풀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긴장으로 굳은 카델의 어깨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말했다.

“단장님은 절대 기회를 놓치지 않는 남자죠. 할 수 있어요. 단장님이 해내지 못할 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

“이 글러 먹은 사내까지 옳은 길로 인도해 준 사람이니, 자신감을 가져도 좋답니다.”

따뜻함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말이었다. 다정한 온기가 뭉친 근육을 섬세하게 어루만지니, 절로 긴장감이 사그라졌다. 그의 믿음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포근한 담요처럼 몸을 감싸 주는 듯했다.

카델은 제 어깨에 올라온 손등을 감싸곤, 깊은 호흡을 이어 갔다. 그리고 잠시 뒤. 힘을 주어 가르엘의 손을 떼어 낸 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모 아니면 도야. 이번에 실패하면, 우리는 전부 죽을 거야.”

“음…… 죽기까지 할까요? 너무 극단적인 생각이에요, 단장님.”

“그러니까 지금 말할게. 가르엘, 비밀 없는 사이가 되고 싶댔지?”

자신의 실패로 세계가 리셋되고, 새로운 카델 라이토스가 생겨난다면. 더 이상 가르엘에게 진실을 말할 기회는 없다. 영영 기회를 잃는 것이다. 그 씁쓸한 현실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그는 옅은 당혹감과 기대감이 어린 자색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렇게 시끄럽게 귀를 울리던 벌소리가 잠잠해지고, 완전한 고요가 찾아든 순간.

“난 다른 세계에서 온 빙의자야. 카델 라이토스의 몸을 빌린 이방인. 진짜 이름은…… 신여환.”

이제껏 아득바득 숨겨 온 비밀치고는 상당히 담백한 말투였다. 표정에는 어렴풋한 미소까지 번져 있다. 그러나 힘을 준 주먹은 보잘것없이 떨리고 있었다.

가르엘은 그런 카델의 모습을 멍하니 눈에 담았다. 눈빛의 떨림, 살짝 가빠진 호흡, 애써 끌어 올린 입꼬리. 농담의 기색이라곤 하나도 비치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둘 사이로 지독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서로의 숨소리만이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어떤 식으로 이 침묵을 깨야 할지. 카델도 가르엘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두 남자에게 숨통을 뚫어 주듯, 쿤라의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마주한 시선 속으로 짧은 망설임이 뒤섞였으나, 길지는 않았다. 카델은 기다렸다는 듯 등을 돌려 자리를 떴고, 가르엘은 카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뻣뻣한 몸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가르엘은 터뜨리듯 숨을 뱉었다. 대체 언제부터 숨을 참고 있었는지 알아낼 도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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