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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인적이 없는 성의 뒤편. 그곳에서 카델은 쿤라와 함께 마왕의 형제를 찾기 위한 방법을 논의하려 했다. 하지만.
“단서가 하나도 없어요. 그래도 성까지 가는 동안 뭐라도 건질 줄 알았는데……. 너무 희망적이었던 거죠.”
“조급하게 굴지 마라. 천천히 네가 왔던 길을 되짚어 봐.”
“되짚어 봐도 별게 없으니까 그러죠.”
성안까지 들어갔으나 지하 감옥에서 라이돈을 빼내느라 이렇다 할 정보를 얻지 못했다. 그렇다고 다른 단원들에게 마왕의 형제에 대해 뭔가 알아낸 것이 있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다. 깨끗한 순백의 뇌를 저주하며 머리를 쥐어뜯던 카델이 퍼뜩 고개를 들어 쿤라를 바라보았다.
“오는 길에 좀 독특한 석상을 보긴 했거든요. 거기 가 볼래요? 함정일 수도 있지만, 당신이 기운을 퍼뜨려서 감지해 봐요.”
“안타깝게도 지금 이 몸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네게 기운을 보충해 주는 정도가 최선이야.”
그는 하이론을 구하기 위해 후환을 알면서도 위험한 도박을 감행했다. 카델은 쿤라에게 농담으로라도 핀잔을 줄 수 없었다. 금세 입을 다물고 조용해진 카델의 옆에서, 쿤라는 아무렇지 않게 그의 등을 떠밀었다.
“안내해라. 함정의 유무 정도는 파악해 줄 수 있을 테니.”
빠른 걸음으로 성벽 앞까지 다다른 카델이 그 위를 더듬었다. 들어올 때와는 달리 성벽에는 입구가 뚫려 있지 않았다.
“그냥 부술게요. 인간군이 성까지 들어왔으니, 이런 비밀 통로가 뚫리는 것쯤은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성벽에서 몇 걸음 떨어진 카델이 연달아 화염구를 발사하자, 우렁찬 폭음과 함께 성벽이 흔들렸다. 금세 무너진 벽면을 따라 마법진이 해제되며, 그 안에 담겨 있던 마기가 원혼처럼 피어올랐다. 하지만 흩어진 기운은 카델과 쿤라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꽁꽁 숨겨 놓았던 것치곤 쉽게 부서지네요. 뭐라도 튀어나와서 공격할 줄 알았는데.”
“주변이 요란한 덕이지.”
이미 하늘까지 올라간 에밀리아가 고작 뒤쪽의 성벽이 무너졌다고 행동을 취하진 않을 것이다. 카델은 허물어진 성벽 너머로 넘어가 쿤라를 안내했다.
도착한 곳은 마왕의 형제들을 조각한 것으로 추정되는 석상의 무덤.
“여기예요! 조금 수상하지 않아요? 이렇게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쓰러져 있다고요. 그리고 이제 에밀리아의 얼굴도 알았으니까, 잘 보면 비슷하게 생긴 조각상을 찾을 수도…….”
열심히 말을 잇는 카델의 옆에서, 쿤라가 석상 앞으로 성큼 발을 뻗었다. 그에 놀란 카델이 조심하라며 쿤라의 팔을 잡아당겼으나.
“운이 좋구나, 반쪽이.”
“네?”
널브러진 석상을 가볍게 걷어찬 쿤라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동 마법진이다. 어디로 이어져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제법 느낌이 좋군.”
“이동 마법진……? 이 석상들 아래에 이동 마법진이 숨겨져 있단 말이에요?”
그것까진 예상하지 못했다. 카델은 목구멍 바깥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서둘러 석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 부지런한 행동력에 쿤라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지?”
“이걸 치워야 마법진이 드러날 거 아니에요. 그래야 발동시키기 편하죠. 빨리 당신도 도와요.”
“마법진이 드러난대도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마계의 이동 마법진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느냐?”
한심하다는 듯 자신을 내려 보는 쿤라와 눈을 맞추며, 멀뚱히 생각하던 카델의 표정이 굳어 갔다. 들고 있던 석상 조각을 툭 떨어뜨린 그가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마기로만 발동시킬 수 있구나…….”
어떻게 하면 마계의 이동 마법진을 발동시킬 수 있을까. 답도 없는 막막한 고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뜻밖의 해결책이 굴러들어왔다.
“단장님! 단장님, 잠깐만요!”
“가르엘……?”
언제부터 자신을 쫓아왔던 것인지. 다급하게 달려온 가르엘이 카델의 앞에서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푹 숙인 가르엘의 정수리를 바라보던 카델은, 느껴지는 시선을 따라 눈을 굴렸다.
쿤라. 그는 제법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가르엘을 훑어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겠네.’
참으로 적절한 때에 예상 밖의 돌파구가 생겼다는 점은 인정한다. 카델은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가르엘을 끌어당겼다.
“무슨 일이야. 지금 성에서 싸우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설마 내가 걱정된다고 따라온 건 아니지?”
“아뇨, 아뇨. 그런 걱정을 끼치는 건 반 경만으로도 충분하죠. ……이걸 찾았는데, 전달하는 걸 깜빡해서요.”
천천히 몸을 세운 가르엘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건…….”
“연구실로 추정되는 곳에서 가져왔어요. 사실 평화의 돌을 찾는 데엔 그다지 쓸모없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얇은 일지였다. 가르엘의 말대로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지만, 그의 수고를 생각해 일지를 펼쳤다.
“고마워. 그런데 가르엘, 여기서 갑자기 부탁하기엔 좀 생뚱맞지만…….”
“부탁이요? 어떤?”
“어…….”
그에게 마계 이동 마법진 발동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발동까지만 부탁하고, 가르엘은 다시 돌려보내야지. 이것저것 물어 오면 쿤라의 뜻이라고 둘러대면 된다.
그런 모든 생각들은, 일지에 적힌 내용을 인지하며 서서히 사라졌다. 짐짓 심각한 낯으로 일지를 살펴보는 카델의 앞에서, 가르엘은 물론 쿤라까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다가왔다.
“그 일지에 쓸 만한 거라도 적힌 건가?”
“그게…….”
입가를 쓸며 안절부절못하던 카델이 쿤라의 앞으로 일지를 내보였다.
“이 녀석들, 빈사 상태인 마왕의 형제들을 회복시킬 방법을 찾고 있었어요.”
“마왕의 형제들이요? 그놈들은 전부 죽은 거 아닌가요?”
쿤라에게 일지를 완전히 넘긴 카델이 놀란 가르엘을 향해 말했다.
“맞아. 적어도 인간계에는 그렇게 알려졌지. 지난 마계 전쟁에서 에밀리아를 제외한 마왕의 혈육은 전부 죽었다고. 하지만 네가 가져온 일지에는 전 마왕의 자식이자 현 마왕의 형제인……. 첫째와 넷째, 다섯째의 회복 진행도와 약물, 치료법에 따른 신체 변화들이 적혀 있었어.”
“첫째와 넷째, 다섯째……. 현 마왕을 제외하고도 그 혈육이 셋이나 살아 있다는 겁니까?”
“그래. 당장 활동할 순 없는 상태인 것 같지만, 이 연구가 완료된다면 부활할 가능성도 있어. 우린 지금 놈들의 연구 진척도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 만약 치료법이 거의 다 개발된 상태라면, 에밀리아를 죽이기 전에 큰 산을 몇 개는 더 넘어야 할 수도 있어.”
“설마 마왕의 형제들을 ‘떨거지’라고 칭하지는 않았을 테니……. 제가 갔던 연구소의 지하실. 그곳에서 생체 실험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실험을 바탕으로 마왕의 형제들을 살리려 했던 거죠.”
만약 살아 있는 형제가 있대도 놈이 전투 가능한 상태는 아닐 것이라고 예상했다. 사지가 멀쩡했다면 막내 공주였던 에밀리아가 왕위를 잇기는 어려웠을 테니. 하지만 살아 있는 형제가 셋이나 있고, 고위 마족이 그들의 치료법을 연구 중이라는 사실은 예상치 못했다.
만약 영영 이 사실을 몰랐다면, 오로지 에밀리아의 토벌만을 염두에 뒀다면. 이 끔찍한 전쟁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을 거라는,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
‘아마 전쟁 중에 놈들이 깨어나는 일은 없을 거야. 시스템이 바라는 건 마왕에게서 평화의 돌을 뺏어 마계를 봉인시키는 거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안해지는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서둘러야겠군.”
짧게 혀를 찬 쿤라가 일지를 한 손으로 구겼다. 손끝에서 피어난 불씨가 일지를 순식간에 불태우고. 카델과 가르엘의 당황한 시선이 닿았다.
“뭐예요? 그걸 왜 태워요?”
“꽤 중요한 정보 아니었나요……?”
쿤라는 그들의 당혹을 무시한 채 가르엘을 향해 물었다.
“이 정보를 알고 있는 건 여기 있는 셋뿐이겠지?”
위협적이기까지 한 태도에 가르엘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낮은 한숨을 내쉰 쿤라가 카델을 바라보았다.
[마왕의 형제가 살아 있다는 정확한 증거다. 인간계가 마계 부활에 대비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일종의 개연성이지.]
갑작스레 머리를 울리는 음성에 카델이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다. 슬쩍 가르엘의 눈치를 본 그가 다시 쿤라를 바라보자, 음성이 이어졌다.
[벌써부터 이 개연성을 따라 세계가 움직이도록 둬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이상을 눈치챈 시스템이 어떤 패악질을 부릴지 몰라. 뿐만 아니다. 우리가 이 정보를 알게 되었다는 걸 시스템은 곧 인지할 거다. 어떻게든 방해하려 할 거야. 그 전에 움직여야 한다.]
그 부분은 동감이었다. 가르엘이 건넨 것은 마계 전쟁 직후에라도 인간계가 마계 부활의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게 만드는 개연성. 끊임없이 전쟁을 되풀이할 셈인 시스템에게 있어, 대형 사고나 다름없었다.
별다른 단서도 없이 무작정 돌아다니며 마계를 헤집는 쪽과,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마계를 헤집는 쪽. 어느 쪽이 시스템의 경계심을 부추길지는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네 힘이 필요할 것 같군. 지금부터 우리는 마왕의 형제를 찾는다. 넌 당장 이 이동 마법진을 발동하는 것으로 함께하도록 해라.”
“뭐, 뭐라고요? 쿤라, 이건 예정에 없던……!”
갑작스러운 가르엘의 합류에 카델이 반발하려 했으나. 쿤라는 단호하게 일갈했다.
“설득할 수 있겠느냐?”
“설득이요……?”
“이 중대한 정보를 인간들에게 비밀로 해야 할 이유. 협동 공격을 준비한다고 해 놓고는 이동 마법진을 발동해 떠나 버리는 이유. 잘 설득해 이 마족 혼혈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냐는 거다.”
쿤라의 표정은 냉담했고, 말투는 차가웠다. 그리고 카델은, 가르엘의 시선 앞에서 어떠한 억지도 부릴 수 없었다. 그의 눈빛에 떠오른 불안과 염려를 다스릴 만한 어떠한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카델이 입을 다물자 가르엘의 시선이 쿤라를 향했다.
“쿤라 님이 필요하다고 말할 정도면, 제 존재가 마왕의 형제를 찾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거겠죠. ……하지만 단장님의 허락 없이 전장을 이탈하지는 않을 겁니다.”
설령 적룡의 명령이래도 따르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에 쿤라는 코웃음을 쳤고, 카델은 입술을 깨물었다.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어쩌면 시스템의 강한 간섭을 받을지도 모를, 이 전쟁보다 위험할지 모를 일. 시스템과 이 세계의 복잡한 이면을 알고 있어야만 의문 없이 행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이동 마법진을 발동하는 것까지만 도움을 받고, 가르엘을 다시 전장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시스템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그들의 힘이라면 충분히 이겨 낼 수 있는 시련 속으로.
하지만 그런 바람을 꿈꾸기에, 자신은 너무 아득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명해 주고 싶은 건 많지만, 시간이 없어. 따라와, 가르엘. 지금부터 우리는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해야 하니까.”
카델의 말에 가르엘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마법진의 위치를 알리는 쿤라를 뒤로한 채, 착잡한 표정의 카델에게 다가갔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거죠? 협동 공격은 변명에 불과하고, 처음부터 쿤라 님과 둘이 더 중요한 무언가를 해내려고 했던 거죠?”
“…….”
“비밀, 더 이상 만들지 말아 줘요.”
속삭임 같은 나직한 한 마디. 그 짧은 한마디에 심장이 바닥을 치고 내려갔다. 카델은 아무런 대답도 꺼내지 못한 채 입술을 달싹였고, 가르엘은 그를 지나쳐 쿤라의 곁으로 이동했다.
“마족 피가 도움 될 때가 다 오네요. 마기만 불어넣으면 되는 건가요? 쿤라 님.”
“그래. 상당한 양이 필요할 거다.”
“없어질 때까지 짜낸 데도 좋기만 할 겁니다.”
거리낌 없이 마기를 개방한 가르엘이 석상의 무덤을 내려 보았다. 그의 기운이 석상 아래를 파고들수록 점점 짙은 마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들어가지.”
쿤라의 말을 따라 마법진 안으로 걸음을 옮긴 그들의 시야가 어둡게 물들고. 일순 머리가 울릴 만큼 둔탁한 충격과 함께, 자욱하던 마기가 걷히며 새로운 풍경이 드러났다.
“여긴…….”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카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숨겨져 있던 석상 아래의 이동 마법진이다. 꽁꽁 숨겨 둔 만큼 그럴듯한 장소와 이어질 줄 알았건만.
생각해 보면 마왕의 형제에게 갈 수 있는 마법진에 그렇게까지 사용한 흔적이 없을 리 없다. 덩굴이 잔뜩 자랄 동안 방치되었던 거라면, 그만큼 쓸모가 없었단 거겠지.
“건물이란 건물은 싹 다 허물어졌네요. 사방이 폐허군요.”
그들이 도착한 장소는, 마왕의 형제는커녕 마족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유령 마을. 카델은 족히 100년은 방치되었을 법한 마을의 잔해를 둘러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돌겠네.”
마왕의 형제들이다. 심지어 마계는 그들의 부활을 꿈꾸는 중이니, 어떻게 대우하고 있을지 또한 쉽게 짐작이 가능했다.
“그러니 이런 유령 마을에 놈들이 있을 리 없어. 하……. 다시 돌아가자. 설치형 마법진이었으니까, 근처에 성으로 돌아가는 마법진도 있을 거야. 일단 그걸 찾아서…….”
완전히 허탕이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카델이 망설임 없이 돌아서려 했으나. 그의 시야 속으로 어느새 마을 깊숙이 발을 들인 쿤라의 모습이 들어찼다.
폐허나 다름없는 잿빛 배경 속에서 쿤라의 뒷모습은 유독 도드라졌다. 떡 벌어진 어깨와 넓은 흉곽, 조각처럼 쭉 뻗은 강인한 하체. 그저 서 있을 뿐임에도 형언할 수 없는 위엄과 기개가 느껴졌고, 바람을 따라 흩날리는 기다란 적발이 묘한 신비로움까지 더해 주었다.
하지만 카델은 그의 그림 같은 실루엣에 넋을 놓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거기서 뭐 해요? 산책할 시간 없거든요!”
“……너희는 성으로 돌아가는 이동 마법진이 없는지 찾아봐라. 이 몸은 조금 더 여길 살펴보도록 하지.”
“여길요? 뭐 볼 게 있다고……. 설마 이동 마법진 찾기 귀찮아서 떠넘기려는 건 아니죠?”
의심이 가득한 물음에 어이없는 표정이 돌아왔다.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돌린 카델은 척박한 대지에 마력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리 넓지 않으니 약간의 마력으로도 마법진의 유무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가르엘도 카델의 곁에서 부지런히 마기를 방출했다.
“적당히 하고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 쿤라의 기운이 돌아와서 여유가 생겼거든.”
“아뇨. 마계의 이동 마법진이니, 마기로 탐색하는 편이 훨씬 빠를 겁니다.”
그래도 기운을 아껴 두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물으려던 카델은, 가르엘의 표정을 살피곤 입을 다물었다. 평소완 달리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다. 여유도, 웃음기도 없는 삭막한 얼굴이 낯설었다.
짧은 침묵을 견디던 카델이 결국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말하기 어려운…… 아니, 말하는 게 불가능한 계획이었어. 너희의 도움은 일절 필요 없다는 판단이었고.”
“지금 이렇게 제 마기를 사용하고 있으면서요?”
한없이 냉랭한 대답이었다. 그에 서운함을 느낄 새는 없다. 카델은 이미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애초에 네 마기를 사용할 생각은 없었어. 내가 너희에게, 너에게 맡기고 싶었던 건 계획을 실행하는 동안 마왕과 수하들을 상대하는 거였으니까.”
“…….”
“가르엘.”
“마왕의 형제를 찾아 해치우는 건 분명 중요한 일이죠. 하지만 당장 코앞에 나타난 마왕을 상대하는 것보다 중요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고집스럽게 지면을 내려 보던 가르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엔 어렴풋한 실망감이 떠올라 있었다.
“단장님의 명령이니 따릅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제 눈앞에는 무력하게 쓰러지던 기사들의 모습이 생생해요. 어째서 단장님은 그 모든 기사를 뒤로한 채 마왕의 형제를 찾고 있는 건지……. 부활의 가능성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여전히 납득이 안 된단 말입니다.”
카델은 무언가를 억누르듯 답답한 표정이었다. 가르엘은 그런 카델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설명, 해 줄 건가요? 필요 없는 행위라고 판단한다면 저도 더는 캐묻지 않을 겁니다.”
모든 의문을 묻어 둔 채 단장의 명령만 따르겠다는, 지극히 기사다운 발언이었다. 차라리 계속 알려 달라 졸라 대기라도 했다면 나을 텐데. 자신의 명령이라면 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아무런 의문을 내뱉지 않을 녀석임을 알기에. 카델은 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라고 비밀을 만들고 싶은 게 아니야.’
하지만 당장 사실을 알려 봤자 가르엘이 떠안는 것은 거대한 혼란과 공포뿐이다. 자신의 마음이 가벼워지지도 않는다. 득 될 것 하나 없는 사실을 뭣 하러 알려야 한단 말인가.
“나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과거의 기억이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한번 살아 볼까요. 그대의 빛이 날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리라는…… 작은 기대감으로.”
“그러니까…….”
“비밀 없는 사이가 되고 싶은데.”
아무 의미 없는 짓이다. 이런 대화로 시간 낭비를 할 바에야 조용히 명령에 따르라 말한 뒤, 할 일을 끝마치는 편이 나았다.
“비밀, 더 이상 만들지 말아 줘요.”
하지만 더 이상 비밀을 만들지 말아 달라는 그의 부탁이. 그의 등불이 되기를 자진했던 과거의 약속이. 영영 자신의 저의를 알지 못할 가르엘이 느낄 후회와 원망, 그리고 그리움이. 카델을 옭아매고 있었다.
“……그래. 설명할게. 네가 준 일지를 읽기 전부터, 쿤라와 나는 마왕의 형제가 있으리란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어. 그래서 협동 공격을 핑계로 형제를 찾아 죽이려 했고.”
“알고…… 있었다고요? 어떻게요?”
“전부 알려 주기엔 너무 긴 이야기야. 하지만 네가 알아 둬야 할 건, 지금 우리가 하는 일. 마왕의 형제를 찾아 죽이는 일이, 이 전쟁만큼이나 세계의 존망과 크게 연관돼 있다는 거야.”
뜻밖의 사실에 가르엘은 불어넣던 마기까지 거둔 채 카델을 바라보았다. 그는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눈치였고, 카델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설명해야 하는지를 셈했다.
그러나 카델이 그 셈을 끝마치기도 전.
[너희 둘. 마을 안으로 들어와라. 이동 마법진은 나중에 찾도록 해.]
쿤라의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