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5화 (465/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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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떠오른 성의 상층부와 지상을 휩쓰는 냉기. 인간들은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날개가 없는 그들은 날아가는 성을 쫓을 수도, 냉기를 피할 수도 없었으니. 하지만 그들이 상대하는 고위 마족이라고 상황이 다르진 않았다.

성벽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그들에겐, 마왕이 자리한 상층부에 발을 디딜 ‘자격’이 필요했다.

“인간들을 모조리 도륙한다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찾아올 거다! 서두르자고, 이런 곳에서 얼어 죽을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 많네. 그렇게 떠들어 댈 시간에 한 마리라도 더 죽이란 말이야!”

라이돈의 자폭이 불러온 여파는 고위 마족도 감당이 어려웠다. 그들은 스스로 장막을 두르거나, 즉시 재생하며 무식한 냉기를 버텼다. 이 불안정한 기운이 지하를 뚫고 나오는 순간. 무엇도 얻지 못한 채 도주해야 할 미래가 그려졌다. 그러니 그 전에 인간군을 죽여야 했다.

그리고 그런 고위 마족들의 살기 앞에서. 인간군은 마법사들의 장막과 가르엘의 회복술로 간신히 두 발을 붙이고 섰다.

“이대로는 인간군이 너무 불리하오. 지하의 기운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이니…….”

적들의 공격을 튕겨 내던 엑토의 뺨으로 기다란 절상이 새겨졌다. 냉기로 몸이 둔해진 탓이었다. 세찬 바람에 시야 확보가 어려워진 것도 그 이유였다. 성의 분리가 원인인지, 처음 정문을 뚫었을 때보다 훨씬 격렬해진 고위 마족들의 맹공이 버거워졌다.

그의 옆에 선 모리톨은 넝마가 된 손으로 시위를 당겼다.

“적린 기사단에게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어떤 이유로 요정이 폭주했는지는 몰라도, 막지 못하면 이 이상 나아갈 수 없어요.”

“방어가 최선이란 말이오?”

“방어라도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다행이란 소립니다. 마법사들의 장막이 점점 얇아지고 있어요. 이런 상태라면 질리엇의 음파 공격만으로도 인간군은 괴멸입니다.”

마기가 섞인 음파로 끈질기게 인간군의 체력을 갉아먹는 고위 마족. 질리엇의 주위로는 강한 장막이 둘렸고, 동료들의 틈새에서 소리를 지르기 때문에 그녀를 따로 노리기도 어려웠다. 여건이 되지 않아 일찌감치 해치웠어야 할 녀석을 여태 살려 두고 있었다.

“질리엇만 해치운다면 마법사들의 마력을 크게 아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해치울 수 있겠는가. 지금은 이 끔찍한 냉기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최선이다. 그리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드레프! 뭐 하는 거냐, 진영을 지켜!”

엑토의 경악에 찬 외침과 함께, 성의 벽을 타고 내달리는 드레프의 모습이 들어찼다. 최전방에서 정문을 노렸고, 그 이후로도 가르엘의 광역 치유술에 의지해 전투를 이어 갔다. 드레프의 몸은 이미 몸이 아닌 걸레짝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드레프는 혼신의 힘을 끌어 벽을 내달렸다. 하늘에 떠오른 고위 마족에게 더욱 강한 일격을 먹이기 위함이었다.

아들의 무모한 행동에 엑토가 서둘러 앞으로 나섰으나.

“기를 쓰고 올라오려 하는군요. 그래 봤자 인간. 하늘에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드레프의 공격을 예견한 아틀라스가 가차 없이 부채를 휘둘렀다. 동시에 날아든 검기가 깃털과 맞부딪히며, 충격파에 떠밀린 드레프의 몸이 버티지 못하고 추락했다.

“드레프!”

상당한 높이에서 추락했으나, 드레프는 죽지 않았다. 그를 발견한 가르엘의 도움 덕이었다. 그의 치유술로 다시 일어선 드레프는, 멀리서 들려오는 엑토의 역정에 이를 갈며 외쳤다.

“뭣들 하는 겁니까!”

피를 토해 내는 격한 외침. 그의 목소리는 세찬 냉풍을 거스르며 쩌렁쩌렁하게 전장을 울렸다. 갑작스러운 외침이 만들어 낸 찰나의 정적 속에서, 드레프는 목을 쥐어짰다.

“목숨 걸고 싸우자 하지 않았습니까! 목숨 걸고 평화를 되찾자 했잖습니까! 그런데 왜! 왜 아무도 죽을 각오로 달려들지 않는 겁니까!”

인간군은 충분히 처절했고, 사지에서 필사적으로 싸움을 이어 갔다. 그들의 전투에 물러남은 없었다. 모두가 그리 생각했으나.

드레프는 아니었다. 그는 고위 마족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고 있음을 느끼면서도, 차오르는 억울함을 뱉어 내길 멈추지 않았다.

“대체 뭘 기다리는 겁니까? 뭘 그렇게 기다리길래 끊임없이 장막을 둘러 가면서 버티는 거냔 말입니다! 저 안에 있는 적린 기사단? 그들이 성을 빠져나와서, 이 많은 고위 마족을 해치워 주길 기다리는 겁니까? 왜? 매번 그랬으니까? 적린 기사단은 매번 말도 안 되는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는 도저히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함께 싸우는 기사들에게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

적린 기사단과, 카델과 자신이 뭐가 그리 다르단 말인가. 같은 기사였고, 제국을 지키겠다는 명목하에 수많은 전투를 치러 왔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 자신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희망을 걸고 무릎을 꺾은 적이 없었다.

“적린 기사단이 나타나면 뭐라도 해 줄 테니까! 적룡이라도 불러서 이 상황을 반전시킬 테니까! 일단 버텨 보자는, 밀리지만 말자는 그딴 안일한 마음이! 그딴 게 기사의 의지일 리가 없는데! 그딴 마음으로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왜!”

마계에 입성한 것도, 성을 찾아온 것도, 심지어는 정문 하나를 여는 것까지. 전부 적린 기사단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너무하지 않은가. 인간계를 수호하는 이 많은 기사가, 고작 기사단 하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머저리처럼 보이지 않는가.

자신은 그런, 주인공의 후광을 위한 별 볼 일 없는 단역으로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이 진절머리 나는 기대감을 떨쳐 내겠다고, 드레프는 다짐했다.

“내가 믿는 건 적린 기사단이 지하의 기운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 정돕니다. 그 사람들이 성을 빠져나와 전력으로 고위 마족을 상대할 수 있다는 기대 따윈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제 몫을 다하고 나왔을 때! 우리도 뭔가를 해냈다고 당당하게 말할 거라고요, 아버지!”

날카롭게 엑토를 부르짖은 그가 후들거리는 몸에 힘을 주었다. 혼잡한 전장 속에서, 두 부자의 시선이 정확하게 마주쳤다. 만신창이가 된 얼굴에서 오로지 그의 눈빛만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 순간, 엑토는 처음으로 제 아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제가 죽을 곳은 바로 이곳입니다.”

그의 의지는 무언가 달랐다.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듯 반항적이며, 도발적이기까지 한 의지. 그 마음을 꺾어 가면서까지 아들을 안전한 울타리 안에 가둬 두기엔, 자신은 그리 무른 아비가 아니었다.

“……그래. 그렇군.”

허락 같은 중얼거림과 함께, 뒤편에서 모리톨의 외침이 들려왔다.

“질리엇의 공격이 시작된다! 대비하라!”

저 어린 대대장의 객기 가득한 외침에 전장의 흐름이 바뀐다고? 그런 꿈같은 기대를 하기에, 모리톨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 온 사내였다. 여전히 인간군의 입지는 절망적이고, 승리의 미래는 아득하기만 하다. 한 단계를 나아갈 때마다 절반씩 죽어 나가는 아군에 두려움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드레프의 의지는, 모리톨 한 사람의 마음만큼은 제대로 움직였다.

‘제국의 기사단장으로서, 누군가의 힘에 의지해 싸웠노라 말할 수는 없다. 그리 한심한 유언을 남길 만큼 구차하게 살아오지는 않았어.’

질리엇의 음파는 대략 3분 정도 이어진다. 그동안 다른 고위 마족의 공격이 멈추는 것도 아니었으니. 마법사들의 마력은 이 3분 동안 상당한 속도로 소모될 터.

‘마법사들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 그들이 최후의 결전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질리엇을 해치워야 해.’

눈을 감고, 크게 숨을 골랐다. 숙였던 고개를 치켜든 그가 천천히 활시위를 당겼다.

“날 보호하는 장막을 거둬라. 명령이다.”

가까이서 그를 보호하던 마법사에게 명령하자, 마법사가 당황한 소리를 냈다.

“하, 하지만 단장님…….”

“두 번 말하지는 않겠다.”

동족들의 뒤에 숨어 공격을 이어 가는 놈을 처치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일격이 필요했다. 다음 기회는 없다. 한 번이라도 공격이 빗나간다면 질리엇은 완전히 몸을 숨겨 버릴 테니.

필요한 것은 오로지 질리엇에게 다다를 한 방. 그걸 위해서는 발사 시점에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야 했다. 그것이 자신을 보호할 장막이래도 마찬가지다.

모리톨의 매서운 눈빛이 저 멀리 떠오른 질리엇을 향했다. 여러 갈래로 머리를 땋은 까무잡잡한 피부의 고위 마족. 그녀의 큰 들숨과 함께, 드높은 음파가 대기를 울렸다.

“큿…….”

고막을 때리는 소름 돋는 충격. 절로 몸이 비틀리는 아찔한 고통 속에서, 모리톨은 시위를 당긴 손을 놓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평정을 유지하며 잘게 떨리는 화살촉 위로 끊임없이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의 기운을 따라 화살촉으로 환한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넓게 퍼지던 공명음이 잦아들며, 기운의 파동 역시 고요하리만치 잠잠하게 응축됐다.

모리톨의 성정을 닮은 예민하고 침착한 기운. 음파에 보호받지 못한 얼굴에선 피눈물이 흘렀고, 코와 귀, 꾹 다물린 입술 틈새까지 비집으며 진한 핏자국을 만들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굵은 핏대가 솟아올랐다.

당장 귀를 틀어막고 싶다. 장막을 둘러 달라 소리 지르고 싶다. 이대로면 모든 감각을 잃고 전투 능력까지 소실할 것이다.

그런 끔찍한 상상을 하면서도 모리톨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귀를 막지도 않았다. 한계, 그 이상을 끌어모은 기운을 단 한 발의 화살에 담아낼 뿐이었다.

“단장님, 너무 위험합니다! 지금이라도 장막을……!”

그리고 다음 순간. 아득하게 흐려지는 시야 너머, 단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았던 타깃. 질리엇을 조준한 그가 시위를 놓았다.

완벽하게 응축된 기운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밋밋하기만 했다. 매끄러운 화살은 그 무형의 기운을 두른 채 쾌속으로 쏘아졌다.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마기가 섞인 음파를 퍼뜨리던 질리엇. 그녀는 모리톨의 화살이 자신을 노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앞에는 공격을 막아 줄 동족들이 가득했으니.

그리고 그녀의 믿음대로, 화살을 발견한 고위 마족들이 질리엇의 앞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살은 그들에게 가 닿지 않았다.

“뭐야? 허술하긴!”

“크핫! 힘이 다 빠진 건가?”

전방으로 질주하던 화살은 고위 마족의 바로 앞에서 훅 꺾였고, 그대로 힘없이 낙하하는 듯했다. 하지만 방심한 고위 마족이 등을 돌린 순간.

“……!”

마치 누군가 끌어 올리기라도 하듯, 훅 솟구친 화살이 고위 마족의 틈새를 가로지르며 질주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잔상일 뿐. 정확한 위치를 짐작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속도였다. 공중에서 마음대로 궤도를 바꾸는 비현실적인 움직임까지.

뒤늦게 그 모습을 발견한 질리엇이 경악하며 입을 다물었다. 음파를 사용하는 중에는 자리를 옮기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궤적을 멋대로 바꾼다 해도, 결국 처음부터 한 지점을 노린 공격일 터. 높게 날아오른다면 화살은 자신을 찌르지 못한다. 공격을 포기한 질리엇은 날개를 움직여 힘껏 날아올랐다. 본래의 지점에서 높이만 높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모리톨이 원하던바. 화살은 질리엇의 뒤를 쫓아 높이, 더 높이 올라갔다. 절반의 기운이 궤도를 바꾸는 데 사용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지금. 질리엇을 쫓아 추진력을 얻는 데 사용된다. 높게 상승할수록 화살은 강력해졌고, 또한 빨라졌다. 질리엇이 그 사실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커헉……!”

그녀가 발아래까지 다다른 화살을 내려본 순간. 폭발적인 힘이 화살을 끌어 올리며, 그녀의 몸을 완벽하게 관통했다. 순식간에 정중앙이 뚫린 육체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경직된 몸이 짧게 경련하는가 싶더니, 이내 맥없이 추락했다. 그렇게 그녀의 시체가 바닥에 처박히는 모습까지 지켜본 뒤에야. 끝까지 자리를 지키던 모리톨이 크게 비틀거리며, 그의 몸이 기울어졌다. 그의 부하가 급히 모리톨의 몸을 받쳐 들고는 성기사를 불렀다.

모리톨은 그런 부하의 부축을 만류한 채 칠공에서 피를 흘리는, 섬뜩한 얼굴로 외쳤다.

“마법사들은 장막을 거두고 맹공을 개시해라! 성을 지키는 마족을 격멸하는 거다!”

최후의 발악을 닮은 외침이었다. 또한 실제로 모리톨은 내장을 짜내는 외침 직후. 시끄럽게 귀를 울리던 진동 소리가 사라진 것을 느꼈다.

‘결국 청력을 잃은 건가.’

일순 그런 생각을 할 만큼 진동은 갑작스럽게 멎었다. 그러나.

“다, 단장님.”

너무도 선명한 부하의 부름과 동시에.

“저건…….”

모리톨의 시야 속으로, 성을 타고 오르는 투명한 얼음이 들어찼다. 성을 새롭게 조각하겠다는 듯 외벽을 감싸고, 내부를 얼린다. 면적을 넓히는 얼음을 따라 하프를 닮은 맑은 소리가 울리며, 찬란한 빛 가루가 번졌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성을 뒤덮은 얼음은, 붕 떠올라 상공을 가로질렀다. 그 현란한 움직임을 따라 나선형의 계단이 생성되었다.

계단이 향하는 곳은 바로 성의 꼭대기. 완전히 분리된 성의 상하체를 잇고, 인간들을 마왕에게 데려다줄 유일한 길이 되었다.

계단을 손상시키게 놔둬선 안 된다. 마법사들은 인간군을 보호하던 장막을 거두고, 공중 공격으로부터 계단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고위 마족들의 무수한 공격이 장막에 튕겨 나가며, 계단은 착실하게 뻗어 나갔다.

그리고 계단이 성의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이건…….”

“……눈이다.”

새하얀 함박눈이, 절망 가득한 하늘을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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