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4화 (46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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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고요의 산맥에서 수련하던 재미없고 힘겨운 나날 중 하루였다. 요젠과 반을 제외한 단원들은 쿤라와 떠난 카델을 기다리며 간단한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식사는 루멘과 가르엘이 준비했고, 라이돈은 그 옆에서 불을 쬐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만약에.”

멍하니 불길을 응시하던 라이돈이 운을 떼자, 루멘이 질린다는 듯 혀를 찼다.

“심심하면 이 야채 껍질이나 벗기고 있지 그래.”

“그런 건 칼질 담당인 루멘이 해. 어쨌든 말이야, 만약에. 전쟁이 끝나고 기사단이 필요하지 않게 되면, 너흰 뭘 할 거야?”

한숨과 함께 묵묵히 감자 껍질을 벗기는 루멘과는 달리, 가르엘은 작게 웃으며 대꾸했다.

“전쟁이 끝나도 기사단은 필요할걸요? 한동안은 엉망이 된 국가를 복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예요.”

“하아…….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했잖아, 만약! 멍청해. 상종을 못 하겠네!”

“이런, 틀린 답이었나요?”

현실적인 대답에 라이돈이 역정을 내자, 시끄러운 대화의 흐름을 끊기 위해 루멘이 입을 열었다.

“기사단이 필요 없어진다면 각자 할 일을 찾아 흩어지겠지. 공통의 목표가 없는데도 뭉쳐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그 덤덤한 대답을 들었을 때, 자신은 무슨 생각을 했더라. 고작 한 움큼이 남았을 뿐인 흐릿한 의식 속에서, 라이돈은 과거의 기억을 필사적으로 더듬었다.

“미안, 늦었지? 나도 저녁 준비 돕고 싶었는데…….”

“괜찮아요, 단장님.”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돼.”

뒤늦게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카델이 서둘러 달려왔다. 연신 자신이 도울 것은 없는지 물어보던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대답에 멋쩍은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무언가를 찾듯 부산스럽게 고개를 돌리는 그에게 나무 위에서부터 반응이 돌아왔다.

“내 몫은 필요 없어.”

요젠이었다. 내내 모습을 감추고 있던 그는 카델이 도착하고서야 은신을 풀었다. 카델은 그의 손에 들린 사과를 발견하곤 그런 걸로 밥을 때울 셈이냐며 역정을 냈지만, 요젠은 고집스럽게 식사를 거부했다.

그러는 동안 저녁이 완성됐다. 고기와 야채를 넣은 풍성한 스튜. 카델이 주기적으로 마을에 내려가 재료를 조달해 오기 때문에, 그럴듯한 요리도 흉내 낼 수 있었다.

루멘이 그릇에 스튜를 나누어 담자, 가르엘이 꽉 찬 그릇을 각자에게 배분했다. 결국 카델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요젠의 몫도 있었다.

스튜를 한 입 떠먹은 카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진짜 맛있다! 어떻게 이런 맛을 내지? 이번엔 내가 깜빡해서 향신료도 없었을 거잖아.”

“재능이지. 솜씨 좋은 요리사를 뒀으니, 앞으로 요리는 계속 내가…….”

“그럴 수는 없지. 다음엔 나도 늦지 않고 꼭 식사 준비에 참여할게.”

이 정도면 알고서 즐기는 것이 아닐까. 급격히 침울해진 루멘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카델은 즐겁게 식사를 이어 갔다. 고되었던 훈련을 증명하듯 스튜가 끝도 없이 들어갔다. 그릇째로 스튜를 들이켜던 카델은, 문득 이상을 느끼곤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라이돈.”

“응?”

낮은 부름에 묵묵히 스튜를 떠먹던 라이돈이 슬쩍 눈을 굴렸다. 태연하고 평온한 표정. 잠시 라이돈의 안색을 살피던 카델이 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해. 오늘은 나한테 해 줄 얘기 없어? 숲의 정령들이 해 준 재밌는 얘기라든가, 단원들 훈련을 방해한 얘기라든가.”

“흐음……. 별로. 그런 거 없어.”

라이돈은 정말 특별할 게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스튜로 관심을 돌렸다. 게슴츠레 눈을 뜬 카델의 의심스러운 시선에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렇게 별 대화 없이 모두의 식사가 끝나 갈 무렵.

“그릇은 내가 닦아올게. 다 먹었으면 이리 줘.”

“제가 닦을게요, 단장님. 아직 물이 차요. 그 보드라운 손이 빨갛게 얼기라도 하면 제 마음도 차갑게…….”

“물은 항상 차. 됐고, 빨리 내놔.”

갖은 만류에도 카델은 설거지를 도맡겠다며 고집스럽게 빈 그릇을 수거했다. 마지막으로 라이돈의 그릇을 받아 간 카델은, 부른 배를 문지르는 그를 향해 말했다.

“너도 같이 가, 라이돈.”

“귀찮은데……. 그냥 가르엘한테 시키자.”

“너 이번에도 저녁 준비하는 동안 딴짓하면서 놀았을 거 아니야. 설거지라도 하라고.”

“그건 요젠도 마찬가지 아냐? 왜 나만!”

“요젠이랑 너는 달라. 빨리 일어나.”

억울함이 담긴 칭얼거림에도 카델은 단호하기만 했다.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킨 그가 온몸으로 귀찮음을 표현해 봤으나, 겹겹이 쌓인 그릇을 건네받게 될 뿐이었다.

둘은 점점 어두워지는 숲을 가로질러 근방에 있는 계곡으로 향했다.

“설거지하면 손 시려서 싫은데.”

“넌 추위에 강하잖아. 괜히 엄살은.”

“엄살이라니? 내 고운 손이 탱탱 불어 터져도 좋다는 거야, 자기?”

“나도 나눠서 할 거니까 걱정 마.”

“무슨 소리야! 자기는 저기 뒤에 앉아서 쉬기나 해. 손을 잘 데워 뒀다가, 설거지가 끝나면 온몸으로 날 녹여 주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카델에게 설거지를 시킬 생각은 없는지, 라이돈은 그릇을 끌어안은 채 계곡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에 짧은 웃음을 터뜨린 카델이 라이돈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물 튀기니까 저기 뒤로 가라니까.”

“라이돈.”

“응.”

“왜 기분이 안 좋아. 나한테도 말 못 할 이유야?”

“……집요하네, 자기.”

“내가 원래 좀 집요한 구석이 있잖아.”

흐르는 계곡물에 나무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는 제법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분위기를 방패 삼아 한참 침묵을 지키던 라이돈은, 이내 자그맣게 웅얼거렸다.

“잘 모르겠어. 내 기분이 왜 안 좋은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왜일까…….”

“나도 궁금해. 그냥, 가슴이 답답해.”

“흠……. 밖에 못 돌아다닌 지 오래돼서 그런가? 다음엔 나랑 같이 마을로 내려가 볼래? 네가 좋아하는 간식도 살 겸.”

“좋아! 초콜릿 먹을래.”

거기에 사탕과 젤리, 과일 조림, 타르트까지. 수련하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제한하게 된 각종 디저트를 나열하는 라이돈의 기분은 한층 들떠 보였다. 즐겁게 마을 나들이를 계획하다 보니 순식간에 설거지가 끝났다. 야무지게 그릇의 물기까지 털어 낸 그가 먼저 몸을 일으키는 카델을 향해 물었다.

“전쟁이 끝나고 기사단이 해체되면, 카델은 뭘 할 거야?”

“응?”

뜻밖의 물음에 카델이 눈을 깜빡이자, 느긋하게 일어선 라이돈이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저녁 준비할 때 심심해서 물어봤거든. 그랬더니 가르엘은 바보처럼 맥락을 못 잡고 헛소리나 했고, 루멘은……. 전부 흩어지게 될 거래. 목표가 없으니까.”

“…….”

“카델 생각이 궁금해졌어.”

라이돈의 손에 끌려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며, 카델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라이돈은 걸음의 속도를 늦춰 가며 카델의 답을 기다렸다. 왠지 모르게 심장이 떨렸다. 대단한 답을 기대한 것도 아니고, 그 대답으로 미래가 바뀌는 것도 아닌데.

카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내내 라이돈을 괴롭히던 갑갑함 역시 몸집을 불렸다.

“됐어. 그냥 생각나서 물어본 거야. 역시 대답 같은 건…….”

“전쟁이 끝나면 난 영웅이 될 테니까, 분명 넓고 좋은 영지를 받을 거야.”

“영지?”

“그곳에서 살자. 다 같이.”

미처 말리지 못한 그릇이 셔츠를 축축하게 적셨다. 그럼에도 라이돈은 그릇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라이돈, 너는 요정 왕의 후계자니까 계속 함께 있긴 어렵겠지. 그래도 하이론 님이 살아 계실 동안엔 자주 바깥을 오갈 수 있을 거야. 어쩌면 근처에 새로운 핀하이족의 터를 마련해 볼 수도 있고.”

“…….”

“싸우지 않더라도 함께하고 싶어. 너도 그렇지?”

심장이 널뛰었다.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콩닥거리며 가슴을 울리는 이 감정은, 부정할 수 없는 설렘. 라이돈은 카델의 확신에 찬 꿈에 설렘을 느꼈다. 카델의 생각이 그렇다면, 나머지 단원들도 그의 뜻을 따를 것이다.

“뭐……. 하지만 루멘은 같이 살 생각이 없는 것 같던걸? 빼놓고 살자.”

“하하, 루멘 대답이 속상했던 거야?”

“속상하다니? 내가 왜?”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물어 오는 라이돈에게, 카델은 환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야, 넌 동료들을 좋아하잖아.”

아주 격렬하게 반발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건 카델뿐이라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다만, 그 마음만큼이나 변하지 않는 마음이 또 한 가지 있다.

‘내 손으로 너희를 죽이고 싶지 않아.’

그들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함께하고 싶었다. 카델과 함께하는 미래에 그들 역시 함께하기를 바랐다. 지난했던 과거의 추억을 나누며, 카델의 애정을 차지하려 애쓰고, 기뻐하고, 가끔은 다투며 살고 싶었다. 그런 삶을 원했다. 카델과 함께 세계를 누비고 싶었고, 그 근처 어딘가에. 귀찮기 짝이 없는 동료들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죽이지 않을 거야.’

잊고 있던 그 마음이 떠오른 순간. 얄팍한 의식의 틈새로 그의 몸을 두드리는 옅은 열기와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구하러 왔다, 라이돈! 기운을 다스려!”

“빌어먹을, 장난은 적당히 하라고 매번 말했을 텐데! 이러다 얼어 죽겠다고!”

환청 같은 외침은 점점 더 사납게 몸집을 불려 갔다. 아지랑이 같은 의식에 가느다란 갈피가 잡히며, 찢어질 듯한 고통 역시 조금씩 생생해졌다.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선, 그야말로 환청일 수밖에 없는 음성 하나.

“구해 줄게. 꼭 구해 줄게, 라이돈. 그러니까 절대 죽지 마.”

눈을 뜨고 확인하고 싶었다. 환각이라도 좋으니 심장을 잃고 쓰러진 카델이 아닌, 살아 있는 카델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라이돈의 의지에 보답하듯, 몸 위를 타고 오르는 은은한 열기가 온도를 높여 갔다.

‘카델의 온기…….’

몽롱한 의식은 무엇이 가짜이고 진짜인지 분별해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라이돈은 카델의 기운을 감지했다. 어떻게도 헷갈릴 수 없는, 이 세상의 무엇보다 사랑하는 존재의 기운이었으니.

본능적으로 기운을 받아들이려는 몸이 움찔 떨렸다. 이 기운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면, 얼어붙은 눈을 뜨고 살아 있는 카델을 볼 수 있으리라. 산산이 부서졌던 희망의 조각이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눈을 떠, 망할 요정 놈! 널 위해 단장을 데려왔단 말이다!”

거친 외침이 머릿속을 찌르고.

“의식을 놓지 마! 사탕이든 초콜릿이든, 먹고 싶은 건 전부 줄 테니까!”

간절한 염원이 심장을 때리고.

“내가 여기 있어, 라이돈.”

뜨거운 사랑이 온몸을 끌어안으니. 모든 것을 가리던 절망이 걷히며, 단 하나의 소망이 너울거렸다. 그가 진정으로 바라던 것은 과거를 깨부술 힘이 아니다.

사랑과 희망, 추억을 지킬 힘이었다.

진심으로 라이돈을 죽이려 했다. 그가 시스템이 경계하는 잠재력을 가졌다든가, 카델 라이토스의 기사라든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 주요 인물 중 하나라든가. 그런 것들은 전부 상관없었다.

그로 인해 카델이 죽음을 택해선 안 됐다. 그 하나를 살리기 위해 카델이 전쟁을, 세계를 포기하게 둬선 안 됐다. 이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 맹세를 나눈 자가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꼴을, 대체 어떻게 지켜본단 말인가.

“…….”

하지만 쿤라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을 튕겨나도 몇 번을 달려드는 처절한 몸짓을. 목숨을 걸고 얼음을 녹여 내는 불꽃을. 착실히 죽어 가는 와중에도 결코 꺼지지 않는 희망, 간절한 외침, 바람, 유대를.

쩍쩍 갈라지는 얼음 고치와 강렬한 기운에 떠밀려 무너지는 지하 감옥. 그들은 재앙의 핵을 앞에 둔 채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단장을 닮아 지독히도 미련한 두 부하 역시 끊임없이 얼음을 두들기며 라이돈의 이름을 불렀다.

가만히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쿤라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태풍처럼 요란한 기운의 흐름 속에서 잠잠히 머물렀다.

‘……그래. 이래서 너인가. 이런 너라서 모두를 끌어안고, 지독한 절망의 연쇄를 끊어 내겠노라 약속할 수 있던 건가.’

이 끔찍한 전쟁 속에서도 단 한 명의 부하를 포기하지 못해 아득바득 몸을 던지는 카델이라서. 이렇게나 이 세계의 삶을, 이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지독한 사랑을 끝끝내 버리지 못하는 너니까.

그러니 만약 네 사랑이 죽음으로밖에 보답받지 못한다면. 이 세계가 네게 그것밖에 해 주지 못한다면.

‘종말을 맞이한대도 별수 없겠구나.’

쿤라의 육체가 흩어지며, 그의 기운이 카델의 부서진 펜던트 안으로 스며들었다. 미래의 계획이야 어찌 됐든, 지금 당장 카델을 살리지 못한다면 자신에겐 수호신의 자격이 없었다. 그가 지키는 것은 한 명의 인간이 아닌, 세계의 유일한 희망이었으므로.

“쿤라…….”

다시금 들어차는 쿤라의 기운에 카델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다. 세계를 구하자고 해 놓고는 간단히 목숨을 내다 버리려는 인간이 얼마나 어이없고 화가 났을지. 그럼에도 결국 자신에게 손을 뻗는 그에게선, 시스템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따뜻함이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모두의 따뜻함이 라이돈에게 손을 뻗고 있으니. 라이돈은 일어날 것이다.

“라이돈! 눈을 떠!”

잔뜩 쉬어 버린 외침과 동시에. 얼음 고치를 가로지르던 균열이 쩍쩍 벌어지며, 무언가가 깊은 틈새를 깨부수고 나왔다. 그것은 손이었다. 쫙 뻗은 팔과 활짝 펼쳐진 상처투성이의 손. 그것을 발견한 카델이 황급히 손을 움켜쥐고.

거대한 충격파가 그들이 선 지하를 휩쓸며,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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