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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칼은……. 그 칼을 왜 네가 가지고 있는 거야?”
거의 반평생을 사용해 온 검이 그리 간단히 부러질 줄은 몰랐다. 상실감을 느끼는 것마저 사치인 상황 속에서, 루멘은 별생각 없이 무기고에서 챙겨 온 여분의 검을 뽑아 들었으나.
“내놓지 그래. 어차피 넌 그 검을 사용하지 못해.”
에밀리아의 말대로, 루멘은 검을 사용하지 못했다.
‘왜 뽑히지 않지?’
검집에서 검이 빠지질 않았다. 단순히 녹이 슬었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묵직한 사슬이 검을 결박하고 있는 것처럼, 강력함 힘이 검을 가둬 두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마족만 다룰 수 있는 마검인가? 그런 거라면 나에겐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가르엘에게 넘긴다면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겠다만. 지금은 태평하게 동료에게 줄 선물이나 고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루멘은 날아드는 공격을 검집으로나마 막아 내며 계속해서 몸을 물렸다. 에밀리아 분신의 공격이 점점 거세지는 탓에 틈을 노리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특기인 발도술도 사용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으니.
그렇게 궁지에 몰린 루멘이 어떻게든 탈출법을 강구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던 때였다.
“……루멘.”
루멘의 어깨에서 축 늘어져 있던 요젠이 입을 열었다.
“좋은 수라도 떠오른 건가? 제발 그런 거였으면 좋겠는데.”
진심으로 바란다는 듯 간절한 목소리에,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을 흘린 요젠이 작게 속삭이고. 그의 얘기를 들은 루멘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주 못된 녀석이군.”
“어떻게든 살아서 돌아가야지. 카델의 곁으로.”
“동감이다. 그때까지 버텨 보지.”
점점 날쌔지는 분신의 검격은 막아 내는 것이 고작. 게다가 바닥을 부수는 에밀리아의 마기 역시 속력을 높이고 있었다. 도망과 방어. 둘 중 한 가지라도 어긋났다간 전부 무사하지 못한다. 에밀리아에게 빈틈을 보이는 순간, 이곳이 그들의 묫자리가 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루멘은 호흡까지 아끼며 속도를 유지했다. 그리고 요젠. 그는 바삐 움직이는 루멘에게 몸을 맡긴 채 청각에 집중했다. 무너지는 바닥과 맞부딪히는 검, 루멘의 거친 숨소리, 에밀리아의 말소리, 그 모든 것을 제쳐 두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의 기척. 조금씩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였다.
처음 루멘을 발견했을 때처럼, 그 발소리에 집중한 채 기운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발소리가 그들이 선 복도의 바로 옆방까지 다다른 순간.
“지금이야.”
요젠의 암기가 옆방의 벽을 부수며, 힘을 모아 두었던 루멘이 뒤편을 향해 크게 도약했다. 그와 동시에 몸의 방향을 튼 그가 검집으로 성의 외벽을 내리찍고. 어느새 그의 어깨 위에서 사라진 요젠이 누군가를 끌고 루멘과 분신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렇게 요젠의 손아귀에 붙들려 분신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이는.
“뭐, 뭡니까?”
“한 대만 맞아.”
“예? 잠……!”
가르엘. 동료들을 찾다 난데없는 굉음의 근원을 쫓아온 그는, 요젠의 힘에 끌려 마왕의 분신을 상대하게 되었다. 갑작스레 눈앞을 가득 채우는 분신의 공격에 가르엘이 반사적으로 검을 빼 들었으나.
“무슨 힘이……!”
일검을 맞댄 것만으로 전신에 전류 같은 충격이 번지며, 몸이 훅 떠밀렸다. 완전히 넘어간 중심을 바로잡을 필요는 없었다.
“이쪽으로!”
가르엘이 분신의 일격을 감당한 찰나. 루멘이 성의 외벽을 부쉈다. 요젠은 여전히 상황 판단이 덜 된 가르엘을 끌고 루멘과 함께 아래로 몸을 던졌다.
“어어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요? 예?”
“다행히 뼈가 부러져도 고쳐 줄 사람이 생겼군.”
“쓸모가 있었어.”
추락과 동시에 안도하는 두 남자와는 달리, 가르엘의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추락의 고통을 상쇄할지가 가득했지만. 그의 걱정은 쉽게 해결되었다.
“장막을 깔아라! 적린 기사단이다!”
마침 성을 향해 돌격하던 마법사들이 그들을 발견한 것이다. 부드러운 장막 위에 착지한 루멘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들이 떨어진 구멍을 살폈다. 그곳에는 검을 내린 채 아래를 바라보는 마왕의 분신이 서 있었다.
저것이 내려온다면 진영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될 터. 긴장하며 지켜봤지만, 분신은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연기처럼 흩어졌다. 마왕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없었다.
‘……안에서 기다리겠다는 건가.’
저 마왕을 어떻게 저지해야 하는가. 일순 가슴이 답답하게 막혀 왔지만.
“대장은 아직 성안에 있나 보군.”
“어쩌면 라이돈 경을 찾은 걸지도 모릅니다.”
카델과 라이돈.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그들의 합류가 무엇보다 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