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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적들을 모조리 처치했으므로, 동맹군은 수월하게 성의 정문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성으로 향하는 동안 마주친 적은 없었고,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전군! 들어라!”
마기에 휩싸인 드높은 성벽을 올려보며, 전방에 선 엑토가 외쳤다.
“지치는가?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은가? 동료의 죽음이 슬프고, 앞으로의 전투가 두렵고, 패배의 상상이 그대들을 좀먹는가? 그렇다면 생각하라! 우리의 죽음은 곧 인간계의 죽음! 가족의, 사랑하는 연인과 아름다운 하늘, 맑은 공기,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모든 것들이 공포의 비명으로 물드는 순간을 떠올려라! 그 모습을 보는 것보다 죽음이 두렵다고 여긴다면, 좋다! 당장 뒤돌아 이곳을 떠나라.”
높은 성벽의 꼭대기에는, 이제까지 상대해 왔던 적들보다 한층 강력한 기운을 뿜어 대는 고위 마족이 줄지어 있었다. 정원에서처럼 지면을 가득 메운 마물과 마족은 없었으나, 성벽에 걸터앉은 그들은 존재만으로 충분한 위압감을 풍겼다.
“하지만! 떠나지 않는다면 그대들의 죽음에 영광이 있을 것이오, 명예와 희망이 머물 것이니!”
그럼에도 기사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단 한 명도 진영을 벗어나지 않은 채, 극도의 긴장 속에서 최후의 전투를 예감했다.
“싸워라! 그대들의 목숨으로 성벽을 뚫고, 적들이 숨겨 둔 평화를 찾아 돌아가자!”
우렁찬 외침과 함께 엑토가 대검을 빼 들자, 낮은 함성이 쩌렁쩌렁하게 대기를 울렸다. 삽시간에 달궈진 공기 속에서 인간들의 견고한 의지가 넘실거렸다.
단장들의 진군 명령을 따라 기사들이 돌격하고, 마법사들은 영창을 시작했다. 전방에 선 호계 기사단은 마법사들의 장막을 믿고 견고하게 닫힌 정문을 향해 기운을 쏟아 냈다.
“주춤거리지 마! 마법사들이 우릴 보호한다! 멈추지 말고 검기를 날려!”
그중 빠른 속도로 무리의 앞을 선점한 드레프와 그의 대대가 거침없이 검기를 날렸다. 그들의 검기는 정문을 감싼 마기에 모조리 잡아먹혔으나, 그럼에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견고한 방어막이라도 언젠가는 흠집이 난다. 모두의 힘을 모은다면 무너뜨릴 수 있다. 그리 생각하며 기세를 올린 순간이었다.
“……!”
기척을 느낀 드레프가 빠르게 몸을 물리고. 착지한 그의 발끝을 따라, 일직선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깃털. 제 앞에 선을 긋듯 꽂힌 검은 깃털들을 일별한 드레프가 반사적으로 시선을 올렸다. 그러자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고위 마족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이 얼마 만의 싸움인가요? 기다리고 기다렸답니다, 여러분이 성 앞에 당도하는 이 순간을! 제 기대에 부응해 주세요. 마음껏 날뛰어 주세요, 우매한 인간들이여.”
얼굴의 반을 가린 채 살랑살랑 흔들어 대는 부채. 허리까지 늘어진 결 좋은 흑발과 새까만 눈동자, 시퍼런 핏줄이 도드라지는 하얀 피부. 중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에게선 지금까지 드레프가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압도적인 기운의 마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틀라스 몽스텔. 본래라면, 그의 상대는 카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카델은 라이돈을 찾기 위해 갈 일 없던 성의 뒷길로 향했다. 그의 행보에 변수가 생겼기에, 카델이 공략해야 했을 적이 타 기사들의 몫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기사들이 알 리 없었고, 알았다 해도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었다.
“뭔 놈의 마족들이 공장에서 찍은 것처럼 하는 말이 똑같은지. 기다리는 동안 열심히 생각한 대산가 본데, 식상하다고!”
검기를 응축시키며 소리치는 드레프에게, 아틀라스가 환한 미소로 응수했다.
“그런 도발 또한 아주 좋습니다. 앙칼지게 굴수록 죽이는 맛이 있거든요.”
거침없이 날아드는 검기. 일순 아틀라스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그는 가볍게 몸을 틀어 간단히 검기를 회피하고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부채를 휘둘렀다. 그 궤적을 따라 무수한 깃털이 쏟아지고. 드레프가 깃털을 피해 빠르게 몸을 굴린 순간이었다.
꺄아아아아아아―
뇌를 강타하는 아찔한 비명이, 온 대기를 울리며 진동했다.
갑작스러운 음파에 카델이 급히 귀를 틀어막았다. 메아리처럼 연속된 음파는 여자의 비명을 닮아 있었다. 반사적으로 장막을 두르자, 귀가 찢어질 듯하던 고통이 잠잠해졌다.
“대체 이 소리는 뭐죠? 근처에 적은 보이지 않는데…….”
천천히 귀에서 손을 떼어 낸 가르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소리는 여전히 들려옴에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보통 음파가 아니었다. 마기가 섞인 음파는 상대의 고막을 물리적으로 공격했다. 그러니 장막을 둘러 마기를 차단하면 평범한 소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종의 광범위 공격이었다.
“시끄, 러워…….”
하지만 감각에 예민한 요젠에게는 그 소리조차 고역인 듯했다. 카델은 귀를 틀어막은 채 고개를 수그린 요젠의 위로 더 강한 장막을 둘러 주며 말했다.
“정문 쪽에 있는 고위 마족인 것 같아. 벌써 충돌한 모양이네.”
“정문과는 거리가 꽤 될 텐데. 여기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라고?”
“소리로 공격하는 녀석이니까. 들었다시피 목청도 크고.”
잠깐이라도 장막이 뚫렸다간 바로 데미지를 입을 것이다. 마족의 호흡이 부족해질 때까지 이어질 이 소음은, 일종의 도트 데미지처럼 계속해서 인간군의 체력을 깎을 테지.
‘원래라면 내가 상대했어야 할 적이야. 하지만 내가 부하들을 끌고 라이돈을 쫓아온 탓에…….’
미리 공략법이라도 일러두었어야 했던 걸까. 당장 라이돈을 쫓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미처 알리지 못했다. 알려야 할 적들이 너무 많기도 했고. 과연 인간군이 본래 주인공이 상대했어야 할 적을 처치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했던 하이론 님은 결국 시스템에 의해 죽었어. 만약 인간군이 고위 마족을 무난히 처리할 수 있대도 그리 기쁜 상황만은 아닐 것 같군.’
적어도 주요 고위 마족의 토벌에는 자신이 가담해 주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또 어떤 비극이 벌어질지 모른다. 짜증스럽게 혀를 찬 카델이 겨우 평정을 되찾은 요젠의 등을 쓸었다.
“서두르자. 라이돈을 찾는 것도 문제지만, 어서 정문을 열어야 해.”
그들은 시끄러운 비명 속에서도 꿋꿋이 걸음을 이어 갔다. 그리고 얼마 후.
“이 석상이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것 같네요.”
풍화된 곳 하나 없이 멀끔한 석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덩굴이 뒤덮여 있지도 않았고, 쌓인 먼지도 없다.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솟은 성벽도 보였으니. 이 석상이 현 마왕, 에밀리아의 것임은 확실해 보였다.
“……이게 에밀리아.”
모난 곳 없이 매끈한 석상은 마왕의 얼굴을 완벽하게 재현해 두었다. 이끌리듯 손을 뻗은 카델이 석상의 얼굴을 쓸었다. 딱딱한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카델은 이 석상에서 그녀의 의지를 느꼈다.
‘나의, 카델 라이토스의 적. 넌 네가 이세계의 유흥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걸 모르겠지.’
그녀의 투지는 무엇도 낳을 수 없다. 그녀가 승리한다면 이 세계는 리셋될 것이고, 패배한다면 마계는 다시 한번 절망에 빠질 테지.
여기까지 와서 동정심을 품을 생각은 없다. 당연히 그녀를 응원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그녀의 모든 의지와 노력이 헛수고에 불과하리란 사실은, 카델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앞선 마왕들에 비하면 약해 보이긴 하네요. 몸집이 작아서 그런가. 얼굴을 몰랐다면 코앞에서 마주쳤어도 바로 알아채지 못했을 거예요.”
“……잘 기억해 두자.”
손을 뗀 카델이 고개를 돌렸다. 마왕의 얼굴도 알아냈으니, 어서 라이돈을 되찾아 성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러나.
“……카델.”
기사단이 석상에 한눈이 팔린 사이, 묵묵히 라이돈의 흔적을 찾던 요젠이 불길한 목소리를 냈다.
“왜 그래? 뭐 문제라도 생겼어?”
“근처에서 피 냄새가 나.”
“피 냄새?”
마왕 성의 뒷길에서 피 냄새를 남길 만한 존재는 몇 없다. 순식간에 사색이 된 카델은 누가 막을 새도 없이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갑작스러운 질주에 부하들 역시 다급히 그를 뒤쫓고. 손쉽게 카델을 추월한 부하들이 먼저 피 냄새의 근원지를 발견했다.
앞에 멈춰 선 부하들의 등을 보며 필사적으로 속력을 높인 카델이 그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섰다. 그러나 카델이 너머의 광경을 보기도 전.
“무슨……!”
누군가 카델의 팔을 강하게 끌어당겨, 제 품속에 가뒀다. 카델의 머리를 감싼 채 짓누르듯 끌어안은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잠깐만, 대장.”
“……뭐야. 뭔데 그래. 이거 놔.”
“라이돈은 괜찮을 거야.”
“놔 보라고!”
격한 뜀박질 때문인지, 아니면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기 때문인지. 미친 듯이 뛰어 대는 심장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카델은 자신을 끌어안은 루멘을 거칠게 밀치곤, 빠르게 눈앞의 광경을 훑어 냈다.
“아…….”
그들이 발견한 것은, 길목을 가득 채운 피바다. 흥건한 핏물이 흙모래와 뒤섞여 탁한 웅덩이를 만들었다. 카델이 한 걸음을 뻗자 철벅, 하는 질척한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마족의 피는 붉은색이 아니다. 그들은 보라색 피를 흘렸다. 그를 증명하듯, 새빨간 피바다 군데군데 보라색 핏물이 흩뿌려진 것이 보였다. 하지만 붉은 피에 비하면 별것 아닌 양이었다.
“피가 왜 이렇게…… 왜 이렇게 많이…….”
말을 끝맺기가 어려웠다. 이 정도 양의 피를 흘리고 살아 있을 수 있는 건가? 치유술도 사용하지 못하고, 재생력도 없는데.
패닉에 빠진 카델이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넓게 퍼진 웅덩이는 곧 끝이 났지만, 그 앞으로는 기다란 핏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피투성이의 누군가를 질질 끌고 간 것처럼 기다랗고 잔인하게.
그 앞에는 경고한 성벽이 자리하고 있다. 핏자국은 성벽에 난 작은 구멍 너머까지 이어졌다. 차마 그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한 채 성벽 앞에서 멈춰 섰다. 온몸이 벌벌 떨렸다. 그것이 분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장.”
“……아니야. 그렇지?”
“단장, 나 좀 봐요.”
“아닐 거잖아. 라이돈 피가 아니야. 누군가, 라이돈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해서……. 누구지? 누굴까? 우리보다, 라이돈보다 먼저 여길 찾아 들어갈 만한…….”
“여환아, 날 보라니까.”
나지막한 부름에 카델이 퍼뜩 입을 다물었다. 불안한 시선을 옮기자, 반이 그의 뺨을 감싸들었다. 차갑게 식은 살갗에 뜨거운 체온이 얹어졌다. 태양을 닮은 황금색 눈동자는, 강철같이 단단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단장이 상상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아요. 날 봐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 있잖아요. 전부 단장 옆에 있기 위해서였어요. 그리고…… 그건 라이돈도 똑같아요. 그 녀석은 절대 단장을 놔두고 먼저 죽지 않아요. 얼마나 질투가 심한 놈인지 알잖아요.”
“…….”
“무너지지 말고, 계속 찾아봐요.”
반은 라이돈의 생존을 믿고 있었다. 단장인 자신보다도 굳게. 그것은 함께 전장을 헤쳐 온 동료이자 전사. 그리고 단장인 카델을 사랑하는 사내로서의 믿음이었다.
그 확고함에 카델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심란함에 뿌옇게 흐려졌던 머릿속이 또렷해지며, 조금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래. 만약 라이돈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면 시스템이 먼저 알려 줬을 거야. 라이돈은 여전히 내 기사야. 죽지 않았어.’
라이돈은 죽지 않았다. 죽지 않고 살아서, 이 성벽 너머에 자리하고 있다. 꾸역꾸역 절망을 밀어 넣은 그가 성벽을 올려 보았다.
“……마법진이 설치돼 있어. 덫이라기보단…… 이 출입구를 봉쇄하는 데 쓰이는 것 같아. 어떤 이유에서인진 몰라도 지금은 마법진이 발동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입구가 사라지기 전에 들어가는 게 좋겠어.”
말을 마친 카델이 잠시 숨을 고르고는, 다시 반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반. 이런 약한 모습을 보여 주려고 널 다시 데려온 건 아니었지만……. 난 역시 네가 필요해.”
“알아요. 그래서 돌아온 거고요.”
작게 웃은 반이 카델의 등을 쓸며 그를 앞으로 보내곤, 뒤편의 단원들을 돌아보았다. 카델을 대할 때와는 달리 무겁게 내려앉은 표정에, 천천히 다가오던 그들의 얼굴에도 그늘이 졌다.
위험했다. 라이돈이 그리 간단히 목숨을 잃었을 리는 없지만, 이 정도의 출혈이라면. 게다가 성으로 이어진 핏자국은 그가 의식을 잃은 채 끌려갔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라이돈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의 죽음은 현실이 될 것이다.
“부탁합니다, 요젠 경.”
“기척을 파악하는 데 집중해 줘. 나머지는 우리가 처리할 테니.”
두 동료의 말에 요젠이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라이돈과 어떤 관계를 이루어 왔는지는 중요치 않다. 절대 그가 이 어두운 지하 세계에서 명을 다하도록 두진 않을 것이었다. 그것이 함께 싸워 온 동료의 도리였으니.
그렇게 기사단이 성벽을 통과한 지 약 3분 후. 성벽의 마법진이 발동되며, 출입구가 자취를 감췄다.
“내가 원한 건 적룡을 불러낸 인간이었을 텐데. 셀레브. 말을 못 알아듣는 아이는 아니잖아.”
“…….”
“그 인간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는데 너는……. 마계에 들어온 두 요정의 목숨을 줬네. 이 정도면 네 실패를 무마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
어둡고 습한 마계의 성. 그중에서도 가장 암울한 지하 감옥에 라이돈이 있다. 서늘한 벽면에 사지가 결박된 채 매달린 그는, 몸을 축 늘어뜨리고 희미한 호흡을 이어 갔다.
그런 라이돈이 어서 죽어 박제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앞에 선 에밀리아는 냉담한 표정이었다. 그에 셀레브는 차마 재생도 하지 못한 채 곤죽이 된 몸에 바짝 힘을 주었다.
뚝. 뚝. 감옥 안에서 끊임없이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벽에 매달린 라이돈과 그를 이곳까지 데려온 셀레브의 피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에밀리아는 잠시 그 맑은 소리에 집중하다,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죽여 버렸을 텐데. 마왕답지 않은 판단을 내리게 됐네. ……용서할게, 셀레브. 확실히 그 요정은 위험했고, 이 요정도 거슬렸으니까.”
“고마워, 에밀리아. 아, 아니. 폐하.”
“바보 같긴.”
부드럽게 눈을 휜 에밀리아의 시선이 셀레브를 향했다. 그녀는 피 칠갑이 된 몸을 잘게 떠는 셀레브를 가볍게 훑어보고는, 다시 라이돈을 살폈다.
“마력이 아주 불안정해. 아마 폭주 비슷한 증상을 겪었던 모양인데. 그런 상태로도 널 반 죽여놓은 걸 보면, 제법 뛰어난 요정이야.”
에밀리아의 말에 셀레브는 분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다. 자신은 라이돈을 쓰러뜨리고 성까지 끌고 오는 데 성공했지만, 그건 라이돈의 상태가 매우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요동치는 기운과 분노에 사로잡힌 몸짓은, 이성적인 셀레브의 판단력을 뛰어넘지 못했다.
“이것 봐. 금세 깨어났잖아.”
재미있는 장난감을 다루듯, 얇은 웃음소리를 낸 에밀리아가 라이돈의 뺨을 움켜쥐었다. 살짝 힘을 주어 고개를 들자, 피떡이 된 눈꺼풀 아래로 구르는 탁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자신의 앞에 있는 이들은 누구인지를 알아내려 무뎌진 머리를 굴리는 모양새였다.
“안녕? 예쁜 아이네. 얘긴 들었어. 네가 카델 라이토스의 부하라며? 예쁨받았니? 생긴 대로 굴었다면 제법 아껴 주었을 텐데. 내 예상이 맞길 바라.”
“카, 델을… 부르지… 마…….”
안쓰러울 정도로 쩍쩍 갈라진 목소리가 더듬더듬 새어 나왔다. 눈앞의 이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무작정 카델의 이름에 반응한다. 에밀리아는 라이돈이 쓸 만한 미끼가 되어 주리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그녀가 피를 닦아 내듯 움켜쥔 뺨을 강하게 문질렀다.
“널 이용해서 카델을 불러내야겠어. 그 인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잘된 일이지. 괜찮은 판단이었네, 셀레브.”
라이돈은 찢어진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말을 더하려 했으나,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차오른 핏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온 힘을 다해도 겨우 움찔거리는 것이 전부였고, 그제야 제 사지가 결박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온몸이 엉망이었다. 간단한 지혈도 하지 못한 탓에 정신은 점점 몽롱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라이돈은 멍하니 한 가지 생각을 반복했다.
‘카델이 여기 오면 안 돼.’
눈앞의 고위 마족은 자신을 이용해 카델을 불러낸다고 했다. 자신이 카델을 위험에 빠뜨릴 미끼가 되는 것이다. 이러려고 그를 두고 혼자 복수하러 떠난 것이 아니다. 셀레브를 해치우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그 후에 카델에게 돌아가 이 지독한 전쟁을 끝마치려 했는데.
‘나 때문에 카델이 다치게 둘 순 없어. 막아야 해. 이 녀석들을 죽여야 해.’
생각이 이어질수록 눈앞의 마족을 향한 살기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뚜렷한 목적이 흐리던 의식을 흔들어 깨웠다. 그러나 넝마가 된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하하……. 상황 파악이 좀 됐니? 살기를 드러내는 걸 보면 이곳이 어디인지는 눈치챈 모양이네. 건방져라. 원래라면 당장 널 죽여 버렸겠지만, 지금은 쓰임이 있으니 봐줄게. 하지만 건방의 대가는 곧 치르게 될 거야. 네 주인인 카델 라이토스의 시체 정도면 되겠지.”
몸을 묶은 사슬이 미세하게 덜그럭거렸으나, 그뿐이었다. 눈앞의 요정이 제게 보일 수 있는 반항은. 조소를 머금은 에밀리아가 등을 돌렸다. 사뿐사뿐 감옥의 문을 빠져나온 그녀는, 옆으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코다, 잘 가지고 놀고 있어. 당연한 얘기지만, 쓰임이 있으니 죽이진 말고.”
“예, 폐하.”
짧은 명령과 함께 걸음을 옮기는 에밀리아를 쫓으며, 셀레브가 슬쩍 시선을 옮겼다. 어두운 감옥의 그림자 너머, 느리게 모습을 드러내는 인형 하나. 꼿꼿하게 몸을 세운 단정한 실루엣을 발견한 그녀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음침한 녀석. 저 변태 같은 녀석이 자신이 잡은 사냥감을 요리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최대한 에밀리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짧게 혀를 찬 그녀가 휙 고개를 돌려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