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8화 (448/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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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론의 죽음은 나머지 부하들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동료인 라이돈의 아버지이자, 인간들을 위해 나서 준 유일한 요정 왕이었으니. 요젠의 안내를 따라 뒷길로 이동하는 내내, 기사단 사이로는 침묵이 흘렀다.

그러면서도 단원들은 맨 뒤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카델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표정은 우울했고, 낯빛은 어두웠으며, 걸음에는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것처럼 예민해진 분위기에 함부로 말을 걸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실제로, 카델은 모든 감각에 날을 세우고 있었다.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모든 변수가 그의 머릿속을 갉아먹고 있었으니.

‘쿤라와 연락할 방법이 없어. 이대로라면 마왕의 혈육을 찾는 일에도 차질이 생길 텐데. 무슨 수가 없나?’

금이 간 펜던트는 색이 바랬다. 그 안에선 더 이상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쓰레기나 다름없어진 목걸이었으나, 카델은 버리지 않고 버릇처럼 펜던트를 매만졌다.

시스템에게서 하이론은 지키지 못했지만, 쿤라만큼은. 그만큼은 위험 속에서 안전히 빠져나왔으리라 믿고 싶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젠 정말 희망 따윈 없는 거라고. 암담한 생각만 들어찼다.

‘라이돈은 어디까지 간 걸까. 라이돈의 흔적이 마왕 성의 뒷길과 이어져 있는 걸 보면, 셀레브가 먼저 마왕 성으로 이동했던 모양인데. 설마 벌써 안으로 들어간 건 아니겠지?’

인간계라면 몰라도, 온통 마족뿐인 공간에서 요정은 그 특유의 체취만으로도 발각당하기 십상이다. 그가 아무리 작게 변한다 해도 금세 들켜 표적이 될 터.

‘요젠이 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걸 보면 거리가 꽤 벌어졌다는 말이야. ……곤란해.’

무슨 생각으로 혼자 떠난 것인지는 몰라도, 그가 위험해지기 전에 찾아내야 했다. 라이돈을 찾고, 그의 안전을 확보하는 동안 쿤라가 돌아오는 것. 그것이 지금으로선 카델이 그릴 수 있는 가장 희망적인 시나리오다.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쉰 카델이 모래주머니라도 매단 듯 느리던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치켜든 얼굴에선 숨기지 못한 조급함이 드러나 있었다. 금세 가장 앞에 있는 요젠의 옆까지 이동한 그가 말을 걸었다.

“아직도 라이돈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아?”

“응. 그래도 흔적은 놓치지 않았어. 올바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건 확실해.”

“……근방에서 느껴지는 적의 기운도 없고?”

“내 능력을 벗어난 수준의 은신을 구사하고 있는 거라면 몰라도, 최소 10미터 내에 적은 없어.”

요젠이 감지하지 못하는 적이 있을 리 없으니, 뒷길은 생각보다 안전한 상태인 듯했다. 어쩌면 고위 마족 중에서도 이 길을 아는 녀석들은 얼마 없을지 모른다.

‘바위 사이에 난 좁은 틈이 유일한 입구였으니까. 그것도 미로가 무너지면서 겨우 드러난 거야. 숨겨진 비상 통로였나?’

그런 통로를 라이돈 덕에 찾았으니,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카델은 양옆을 가로막은 메마른 가시덤불과 쩍쩍 갈라진 지면, 안개처럼 일렁이는 짙은 마기를 훑어보았다. 인적이 드문 만큼 고요한 길목에선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것 봐요, 단장. 덤불 사이에 조각상이 있어요.”

“조각상……?”

가볍게 시선을 옮기자, 좌측 덤불 사이를 유심히 살피는 반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옆에서 덤불 속을 들여다본 카델의 미간이 서서히 구겨졌다.

“그렇네. 석상이야.”

덤불에 덮여 잘 보이진 않았으나, 그것은 어느 인물을 조각한 듯했다. 혹시 갑자기 석상이 깨지며 안쪽에서 고위 마족이 등장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연출로 등장한 적은 없었던 것 같지만, 헬 모드이니만큼 새로운 적의 존재도 경계해야 한다. 곧바로 적개심을 드러내는 카델에게 가르엘이 말했다.

“석상이 하나가 아닌데요? 일정 간격을 두고 진열해 둔 것 같은데……. 잘 봐요. 전부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어요.”

가르엘은 좌측의 덤불을 쭉 훑어보며 신기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의 말대로 석상은 하나가 아닌 듯했으나, 덤불이 무성해 제대로 살펴보기가 어려웠다. 잠시 고민하던 카델이 불꽃을 피워 덤불을 태우기 시작했다.

‘여기서 시간 낭비할 생각은 없지만, 그냥 넘기기엔 찝찝해.’

카델의 불꽃은 빠르게 덤불을 태워 갔다. 왠지 모르게 이 석상들을 그냥 지나쳐선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친김에 우측의 덤불까지 모조리 태워 버리자, 비좁던 길목이 탁 트였다. 그리고 함께 드러난 것은.

“허…….”

“……뭘까요, 이건.”

좌측에는 종렬로 배치된 석상들이 길을 따라 쭉 이어져 있다. 그들의 머리에는 왕관이 쓰여 있었고, 하나같이 공들인 티가 나는 섬세한 조각이었다. 얼굴과 체형, 성별, 옷의 디자인까지 제각각. 성에 가까워질수록 석상에선 세월의 흔적이 옅어졌다.

아마도 역대 마왕들을 조각한 석상들일 것이라고, 카델은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별생각 없이 태웠던 우측 덤불의 안쪽이었다.

그곳에는 또 다른 석상들이 있었다. 그것 역시 인물을 조각한 석상이었는데, 그들의 머리에는 왕관이 없었고, 대체로 체격이 작았으며, 쓰레기처럼 아무렇게나 엎어진 채였다. 바닥에 깔린 조약돌처럼 널브러진 석상은 여기저기 깨지고 부러져 본래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석상을 조사하고 있어도 되는 건가 싶긴 하지만…….”

함께 석상들을 살펴보던 루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오른쪽 석상들 말이야. 마왕의 형제들을 조각해 둔 것 같은데. 대장 생각은 어때?”

“형제들?”

함정이 설치돼 있을 수도 있다. 경계하며 직접 만져 보진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에서도 석상을 살피는 데엔 무리가 없었다. 루멘은 제 옆으로 다가온 카델을 일별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조각된 옷들이 꽤 격식 있어 보여. 표정도 근엄하고. 생김새까지 일일이 따져 봤자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없겠지만, 마왕들의 석상 건너편에 있는 만큼 제법 높은 위치에 있지 않았을까 싶네.”

“흠……. 그럼 다른 고위 마족일 가능성도 있지 않아? 마왕들을 모셨던 충신이라든지.”

“그렇다기엔 다들 어려 보여서 말이야. 뭐, 마족들이야 외견으로 나이를 유추하는 건 요정만큼이나 의미가 없겠지만.”

루멘의 말대로 마왕의 형제들을 조각한 석상이라면, 이중 어딘가에 자신과 쿤라가 찾는 마족의 석상이 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 해도 손상되지 않은 걸 찾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야. 유의미한 수확은 기대하기 어렵겠는걸.’

게다가 단서를 찾아내려면, 현 마왕인 에밀리아의 얼굴부터 알아야 했다.

‘에밀리아의 석상은 성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거야. 거기까지 갔다가 다시 여기로 돌아오기엔 시간이 빠듯하지. ……일단 위치는 기억해 둘까.’

마왕의 핏줄이 있을 법한 장소는 단서조차 전무하다. 이런 조각난 석상이라도 알아 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런데…….”

한참 석상을 들여다보던 카델이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성까지 늘어진 마왕의 석상과는 달리, 이 석상들은 넓은 원형의 범위를 아우르며 널브러져 있었다. 이것이 마왕의 형제들을 조각해 둔 것이라면, 왜 이렇게 쓰레기처럼 한곳에 모아 쌓아 둔 것일까.

떠오르는 의심에 본능적으로 허리를 굽힌 카델이 석상에 손을 대려던 순간이었다.

“카델.”

요젠이 다가와 그를 불렀다.

“라이돈의 흔적이 옅어지고 있어.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따라잡기 어려워질 거야.”

“아……. 응. 미안, 서두르자.”

“미안할 건 없어.”

이런 돌덩이는 나중에라도 찾아올 수 있다. 단숨에 호기심을 떨쳐 낸 카델이 요젠을 따라 걸음을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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