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7화 (447/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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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예상했던 풍경이 아니었다. 라이돈을 대신한 마밀의 얼굴에, 의식을 되찾은 카델이 작게 눈꺼풀을 떨었다.

“스승님……?”

“이제야 몸에 열이 도는 모양이군. 장막도 두르지 않고 뭘 하고 있던 거냐. 적진의 한복판에서 쓰러지다니, 목숨이 열 개는 있는 모양이지.”

짧게 혀를 찬 마밀이 물러나자, 그제야 너머의 풍경이 들어찼다. 이곳은 정원이었다. 곳곳에 마물과 마족의 시체가 낭자한 전장의 한복판.

적들의 시체를 한데 쌓아 둔 기사들은 미로의 파편을 등받이 삼아 휴식하고 있었다. 정원에 포진해 있던 적을 몰살한 덕이었다. 앞쪽에선 비교적 팔팔한 기사들이 정찰하며 적들의 접근을 주시했고, 뒤쪽에선 동맹군의 단장들이 모여 전략을 논하고 있었다.

“요정 왕의 시체는 불태웠다.”

“……네?”

마밀의 말에 천천히 몸을 일으키던 카델이 멈칫했다. 마밀은 굳은 표정의 카델을 일별하곤 손수건으로 더러워진 손을 닦으며 말했다.

“당장 시체를 밖으로 빼돌릴 수도 없는 데다, 방치했다간 놈들에게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싸우는 내내 들고 다닐 수도 없지 않느냐. 뼛가루는 따로 남겨 뒀으니, 받아라. 네 부하가 돌아오면 넘겨주도록 해.”

마밀에게 받은 유리병 안에는 잿빛이 감도는 뼛가루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멍하니 그것을 움켜쥔 카델이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돌아온다면, 이라뇨……? 설마 라이돈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부하들이 그러더구나. 쓰러진 네 곁엔 요정 왕과 임시로 동맹을 맺은 고위 마족의 시체뿐이었다고. 몇몇이 남아 수색을 해 본 듯한데, 얻은 것 없이 돌아왔다. 네 반응을 보니 어디 납치당한 건 아닌 것 같고. 제 볼일을 보러 떠난 거겠군.”

마밀은 덤덤히 말하면서도 슬쩍 카델의 안색을 살폈다. 그의 설명을 듣는 카델의 얼굴은 시시각각 변화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경악이 떠오르고, 걱정과 두려움, 심지어는 황당함마저 스쳤다. 혼란함에 어찌할 바 모르고 입만 벙긋거리던 카델은,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부하들을 만나야겠어요. 어디에 있나요?”

공포에 질린 하얀 얼굴을 응시하던 마밀이 그의 뒤편을 턱짓했다.

“네 뒤에 있지 않느냐.”

곧장 뒤를 돌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요젠의 모습이 보였다. 카델이 다급하게 팔을 움켜쥐자, 요젠은 그런 카델의 손등을 감싸며 말했다.

“라이돈의 흔적을 쫓다가 새로운 길을 발견했어. 마왕 성으로 이어지는 뒷길인 것 같아. 너무 멀리 갈 순 없어서 돌아오긴 했지만, 서두르면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쫓을 수 있을 거야. 성으로 가자, 카델. 그곳에 라이돈이 있어.”

셀레브를 해치우러 떠난 것이다. 요젠의 말을 들은 순간, 카델은 라이돈의 실종이 가진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면 충분히 납득 가능한 선택이다. 그게 잘못되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왜 말도 없이 혼자 훌쩍 떠나 버린 걸까. 라이돈이 원한다면, 자신은 뭐든 제쳐 두고 함께 셀레브를 상대하러 떠날 수 있었다.

‘대체 왜 혼자 떠나 버린 거야, 라이돈.’

이성을 잃은 라이돈이 섣부른 판단으로 위기에 처할까 봐. 카델은 도무지 걱정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폭주의 문턱까지 갔던 그가 무슨 수로 안정을 되찾았는지는 몰라도, 기운도 정돈하지 못한 몸으로 전투에 돌입했다간 분명 무리하게 될 것이다.

그를 찾아야 했다. 찾아서 함께 셀레브와 싸우든, 치유술부터 받게 하든. 일단은 라이돈을 제 옆에 둬야 했고, 마침 그에게는 적당한 변명거리도 생긴 참이었다.

“제 부하가 확인해본바, 성으로 이어지는 뒷길은 면적이 좁다고 합니다. 대여섯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로요. 숲의 샛길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겠군요. 기사들이 떼거리로 이동할 수 있을 만큼 넓지 않으니, 소수의 인원만 흩어져 허를 찌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카델은 곧장 단장들과 합류해 요젠이 얻은 정보를 알렸다. 성으로 향하는 새로운 길의 존재는 인간군에게도 좋은 소식이었다. 아무래도 성의 정문은 호락호락하게 뚫리지 않을 테니. 침입할 방법은 많을수록 좋았다.

문제랄 것은, 뒷길이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적다는 점. 그리고 그 소수 인원이 뒷길을 지나 성에 잠입했을 때, 마주친 적을 상대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었다.

정문으로 정정당당하게 들어가는 아군보다는 뒷길로 은밀하게 들어가는 쪽이 훨씬 침입이 빠를 테다. 그 말인즉슨, 그들은 나머지 아군이 합류할 때까지 적진의 한가운데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는 얘기였으니.

뒷길을 어떤 식으로 활용해야 좋을지 의논하는 단장들 사이에서, 카델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적린 기사단이 이동하겠습니다. 성으로 잠입해 안쪽에서 정문을 뚫을 방법을 찾아보죠. 이왕이면 평화의 돌도 확보해 보고요.”

“……확실히. 적린 기사단이라면 소수 정예인 데다 실력도 믿을 만하니, 성에서 적을 마주친대도 생존율은 높겠군. 하지만 매우 위험한 작업이 될 거요. 괜찮겠소?”

염려하며 묻는 엑토에게, 카델이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결심을 마친 눈빛이었다. 그런 그를 응시하던 엑토가 낮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이곳에 오는 동안 너무 많은 목숨을 잃었소.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해 평화의 돌을 되찾아야 할 것이오.”

동감이었다. 지금까지 목숨 바쳐 칼을 휘둘러 온 기사들을 위해. 그리고 기억에도 남지 못한 전쟁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온 이 세계의 생명을 위해.

“네. 우리는 기필코 이 전쟁을 끝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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