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6화 (446/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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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돈! 라이돈, 제발! 제발 그만해……!”

좌절하듯 주저앉은 몸, 치켜든 고개, 절규하며 벌어진 입, 완전히 초점을 잃은 두 눈. 그의 품에는 하얀 얼음으로 뒤덮인 하이론의 시체가 안겨 있다.

카델은 그 불행한 부자의 모습을 눈에 담은 채 어떻게든 눈보라에 밀려나지 않으려 용을 썼다. 하지만 쿤라의 힘이 사라진 그에게는 라이돈의 마력을 압도할 만한 기운이 없었다. 그의 가까이서 마력을 정면으로 감당하며, 죽지 않고 버티는 것이 최선.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기는 하는 걸까. 내내 부정하던 하이론의 죽음을 받아들인 순간, 라이돈의 내면은 산산이 부서졌다. 기나긴 세월 동안 알게 모르게 라이돈을 지탱하던 아버지였다. 그가 쓸쓸한 유언과 함께 영영 세상을 떠나자, 라이돈은 더 이상 이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원망할 만한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분노는 어디로도 표출되지 못한 채 스스로를 갉아먹었다.

라이돈의 마력 폭주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전의 그는 본인의 폭주를 억제하려 했다. 마력을 끊임없이 갈무리하며 후폭풍을 최대한 피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라이돈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아버지를 잃었다는 슬픔만이 가득했다. 끓어오르는 슬픔과 분노는 그의 기운을 한계까지 내몰고 있었다.

막지 못한다면 그의 몸은 버티지 못하고 터져 버리리라. 죽어도 그렇게는 둘 수 없었다. 개인적인 슬픔은 물론이고, 하이론에게도 면목이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라이돈은 내 말을 듣지 않아. 들을 만한 상태도 아니고. 라이돈의 마력을 무시하면서 접근하기엔 내 마력이 충분하지 않다. 쿤라의 힘도 모조리 사라져 버렸으니까.’

쿤라. 추락과 함께 사라진 그의 기운은, 카델의 마음에 얹어진 또 다른 짐이었다. 하이론의 죽음을 막으려던 그는 어떤 일을 당한 것일까. 무슨 일을 겪었길래 나눠 주었던 기운과 함께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일까.

혹시라도 그에게 감당 못 할 일이 벌어졌을까 두려웠다. 그런데도 그의 행방을 알아볼 방법도, 여유도 없다. 지금 제 앞에는 상실의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라이돈이 있었으니.

“라이돈! 정신 차리고 내 말 좀 들어 봐! 지금 당장 마력을 갈무리해! 그래야 네가 살 수 있어! 제발!”

하이론을 추모할 새도 없이 제 부하의 죽음을 맞닥뜨릴 생각은 없다. 카델은 힘겹게 발을 뻗으며, 어떻게든 라이돈에게 닿으려 했다. 그럴수록 눈보라에 파묻힌 울음이 선명해졌다.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라이돈의 끔찍한 절규.

‘거리를 좁힐수록 장막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져. 이러다가 나까지 얼어붙으면 큰일인데.’

마력은 쭉쭉 빠져나가는데 추위는 점점 심해진다. 이러다가 선 채로 죽어 버릴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전진을 멈추지 않는 것은, 라이돈이라면 자신을 봐 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자신이라면 라이돈을 위로하고, 그의 마음을 다독일 수 있으리라는 믿음.

지금 이곳에서 라이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이라고 확신했다.

“절대 의식을 놓지 마! 귀를 열고 내 말을 똑바로 들어, 라이돈! 네 옆에 내가 있어! 살아만 있다면 뭐든 해 줄게. 네가 원하는 걸 전부! 먹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전부 줄 테니까, 그러니까 정신 차려!”

소리를 낼 때마다 벌어진 입 안의 혀까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카델은 제 마력이 빠르게 바닥나는 중임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전투에서 사용했던 마법은 전부 쿤라의 기운이 함께 있음을 전제로 해 왔다. 최후의 결전까지 남아 있을 마력을 계산해 나름대로 조절해 온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쿤라의 기운이 사라져 버렸으니. 카델은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물러날 순 없어.’

이곳에서 벗어나 아군과 합류한다면, 그들의 장막으로 한기를 버티며 마력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라이돈은 적들에게 무방비하게 노출되고 만다. 이성을 잃은 그를 놔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카델은 꿋꿋하게 걸음을 이어 갔다. 장막이 점점 얇아지고, 기어이 뚫린 구멍 새로 살인적인 냉풍이 들이닥쳐도. 체온이 식고, 오장육부가 얼어붙는 듯한 한기에 몸서리가 쳐져도.

얼어 버린 바닥에 쭉쭉 미끄러지며, 몇 번이고 무릎을 찧었다. 바람에 밀려나 볼품없이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쉴 새 없이 건조한 기침이 튀어나왔고, 이가 딱딱 부딪혀 연신 혀를 깨물었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까진 상처에선 피조차 흐르지 않았다.

그렇게 힘겹게 라이돈의 곁에 도착했을 때. 카델에겐 한 움큼의 장막조차 남지 않았다. 파랗게 질린 피부는 산 사람의 것 같지도 않았다. 카델은 라이돈의 위로 쓰러지듯 주저앉아 그를 끌어안았다.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다는, 지극히 비유적인 감각이 실제로 느껴졌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는 없었다. 드디어 라이돈의 곁에 다다랐다는 안도감에 옅은 웃음이 튀어나올 뿐이었다. 카델은 라이돈을 꽉 끌어안고선,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입술을 달싹였다.

“나를 봐 줘, 라이돈. 여기에도 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여기에도 있다. 하이론처럼 너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그만큼이나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핏줄도 뭣도 연결돼 있지 않은, 종족마저 다른 인간임에도. 누구보다 널 사랑하는 내가, 어떻게든 네 곁에서 죽음을 몰아낼 거라고. 그러니 딱 한 번만 이쪽을 봐 달라고.

길게 얘기하지도 못한 채, 차갑게 굳어 가는 몸을 받아들였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슬픔을 모조리 끌어안고 싶었다. 모든 슬픔을 끌어안는 대신 라이돈이 웃음을 되찾을 수 있다면. 자신은 기꺼이 우울의 늪에 빠져들 수 있었다.

이 마음이 전해진다면, 라이돈은 분명 화답해 줄 텐데.

“라이돈. 나 여기 있어.”

마지막 중얼거림을 끝으로, 카델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아버지를 그리 사랑하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사랑을 주기에는 어렵고, 받기에는 엄한 남자였으니. 하지만 원망하지는 않았다. 일찍 철이 들어 버렸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의 습관 같은 미소 뒤에 숨겨진 끔찍한 고통을, 본의 아니게 엿보게 된 탓이었다.

“우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건 오직 죽음뿐이란다.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해방이야. 육체를 벗어나 영혼이 되면, 얼마나 먼 곳까지 날 수 있을까. 상상해 본 적이 있니?”

아마 하이론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어렸을 적, 그는 술에 지독히 취해 아들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라이돈이 한창 말을 듣지 않고 탈출을 꾀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잘못에 대한 잔소리를 쏟아 낼 줄 알았던 아버지는, 벌그스름하게 취한 얼굴로 아이처럼 눈을 빛냈다.

“그래서 나는 죽음이 기대된단다. 하루빨리 그날이 오기를 바라. 하지만 라이돈, 내 아들아. 네가 걸리는구나. 넌 아직 성장하지 못했지. 몸을 말하는 게 아니야. 이 숲은 네 성장을 더디게 만들고 있단다. 느껴지니? 하지만 그렇다 해도 숲을 벗어날 순 없어. 나 때문이다. 내가 널 이곳에 가둬 버렸거든. 그러니 나를 원망해도 좋다.”

술에 취한 하이론의 말은 온통 횡설수설이었다. 아들에게 할 말과 못 할 말을 구분하지 못했고, 우울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라이돈은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한 번 속을 드러내는 일이 없던 하이론의 내면이 이렇게나 곪아 있었단 말인가. 심지어 그는 죄처럼 여기던 자유를 동경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탈출하지 않고 속내를 감추고 있느냐 묻자, 하이론은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모두가 자유를 원하는 건 아니란다. 자유보다 안전한 생활이 중요하다 여기는 자들이 많지. 나는 그들의 왕이니, 사사로운 욕심에 눈이 멀어 모두를 위험에 끌어들일 순 없단다. 내가 왕으로 태어난 탓이야. 그런 주제에 어깨에 올라간 짐을 감당하지도 못하지. 대체 누가 내게 이런 삶을 점지해 준 걸까?”

큰 들숨을 따라 이어지는 기다란 한숨. 훅 풍기는 독한 술 냄새에 라이돈이 인상을 찌푸리자, 하이론은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크게 웃었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금발에 손을 올렸다.

“내내 삭막할 네 일생을 위해 한 가지 비법을 전수해 주마. 라이돈, 사랑을 하렴. 되도록 너와 오래도록 삶을 누릴 수 있는 존재와 마음을 나눠. 나는 네 어머니와 나누었던 찰나의 사랑을 여전히 기억한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돌아, 그때마다 살아갈 이유를 얻어. 살아야 그 웃음소리를 환청으로라도 들을 수 있을 테니.”

하이론은 단 한 번도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었다. 그녀에 대해 물으면, ‘네가 태어난 지 1년째 되는 날 죽었다’라고 건조하게 답할 뿐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라이돈은 용기를 내 어머니에 대해 물었다. 갑자기 술에서 깬 하이론이 정색하고 돌아간대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다행히도, 하이론의 취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너처럼 장난기가 많은 여자였어. 웃음소리가 독특했지. 끝으로 갈수록 음이 높아지는, 맑은소리였다. 또 너처럼 웃는 얼굴이 아주 사랑스러워서, 평생을 웃게만 해 주고 싶었지. 라일라. 그녀는…… 결국 마지막까지 웃으며 갔어. 어찌나 따라가고 싶던지. 그녀의 마지막 말이 아니었다면 난 네 엄마를 따라 목숨을 끊었을 거다.”

짧게 숨을 고른 그가 라이돈과 눈을 맞췄다. 그리운 시선은 라이돈이 아닌 먼 과거의 흔적을 쫓고 있었다.

“여기에도 당신이 사랑해야 할 존재가 있어요. 바로 여기에. 그러니 살아요. 사랑하는…… 나의 하이론.”

그 존재가 뭐였는지는, 너도 알겠지?

그 순간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따뜻한 눈빛, 진동하는 술 냄새와 내려앉은 어둠, 옅은 달빛, 불어오던 바람의 온도를 잊지 못한다.

그랬기에 제게 진정으로 사랑하는 존재가 생긴 순간. 라이돈은 하이론에 대한 모든 원망을 깡그리 지워 버릴 수 있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자유까지 잃어버린 그를. 모든 걸 움켜쥔 자신마저 미워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니 이 전쟁이 끝나면, 그와 함께 바다를 보고 싶었다.

“……있잖아, 카델.”

올려다본 하늘은 우울한 잿빛이었다. 아버지가 본 마지막 하늘. 이토록 어두운 하늘을 끝으로 세상을 떠났구나. 진물이 터진 것처럼 심장에 쓰라린 고통이 번졌다.

“나는 계속 살아갈 거야. 내가 사랑하는 네가 이곳에 있으니까. 네가 있는 한 내게 누굴 따라 죽는다느니,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거든.”

사방이 한기로 가득한데도, 오른쪽 옆구리만은 불에 달군 것처럼 뜨끈했다. 언제부터인지 제 옆에 바짝 붙어 누운 카델 덕이었다. 그는 정신을 잃은 듯 꼼짝하지 않았지만, 아이처럼 쌔근거리는 숨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하지만…….”

카델의 얼굴을 보지는 않았다. 그를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이 녹아 버려, 오로지 그의 곁을 지키겠다는 생각만 들 것 같았다. 라이돈은 애써 시선을 하늘에 고정한 채,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난 아버지가 어떻게 삶을 이어 왔는지 알고 있어. 죽도록 외롭고 답답해도, 꾸역꾸역 견뎌 온 삶이란 말이야. 그런데 이제 끝났어. 아버지의 삶은, 이 어둡고 우울한 지하 세계에서 끝나 버렸어.”

부드럽게 팔을 들어 카델을 떼어 내고, 차갑게 식은 몸을 일으켰다.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쉬자 머리가 한결 개운해졌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 그가 작게 입을 열었다.

“내 손으로 셀레브를 죽여야 해. 그 녀석을 죽이지 않고는, 어디도 갈 수 없어.”

알고 있다. 하이론은 셀레브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다. 전부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눈앞에 적이 있음에도 반응하지 못하고 굳어 버린 자신을 대신해, 아버지가 몸을 날린 것이다. 그러니 따지자면 잘못은 자신에게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기는 싫었다. 어떻게든 셀레브를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해치웠다고 말해야 했다. 그래야 살 수 있었다. 카델의 곁에서 그를 사랑하며 살기 위해선, 어설픈 면죄부라도 움켜쥐어야 하는 것이다.

“……다녀올게. 꼭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무언가를 기다리듯 멈춰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고. 힘찬 날갯짓과 함께 하늘로 날아오르자, 저 멀리서부터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 음성을 귀에 담은 라이돈이 빠르게 고도를 높여 카델의 곁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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