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1화 (44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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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신시를 만나 싸우면 안 된다는 거니?”

하이론의 작은 목소리에도 카델은 화들짝 놀라며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무너진 미로의 벽 너머로 슬쩍 고개를 빼 든 그는,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쿤라의 기술이 끝날 때까진 섣불리 움직이면 안 돼요. 그렇게 약속했거든요. 그러니까 우린 여기서 조용히 기다리자고요.”

한참을 달린 끝에 그들은 무너진 미로의 입구까지 도착했다. 전장과도 멀리 떨어져 있고, 미로의 벽이 겹겹이 쌓인 덕에 몸을 숨기기도 편했다. 여기라면 쿤라의 작업이 끝날 동안 버틸 수 있겠지. 슬쩍 하늘을 살핀 카델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정원을 통째로 뒤엎을 작정이구나. 하이론 님의 공격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저곳에 있는 고위 마족들을 한꺼번에 해치울 셈이야.’

이렇게나 떨어져 있음에도 열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분명 기사들을 지키는 장막을 따로 만들어 뒀을 테니, 저곳에 있을 부하들은 걱정되지 않지만.

‘이 망가진 시스템 창이 본래대로 돌아왔을 때가 걱정이야.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시스템 창에 이상이 생긴 것은, 쿤라가 움직임을 시작한 순간이었다.

「??까? 남은 ?간: ?시간 ??분 ??초」

「?수? 통? 합니?」

「실? 시, ??티 발?」

부분부분 텍스트가 깨진 시스템 창은 불안정하게 시야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쿤라가 작업을 끝내면 이 시스템 창도 고쳐질까. 뭐가 됐든 하이론을 위협하던 힘은 사라져야 했다.

‘지금은 쿤라 말대로 최대한 몸을 사리는 수밖엔 없지. 쿤라의 결정을 무의미하게 만들 순 없으니까.’

숨소리조차 조심하며, 가능한 만큼 몸을 경직시켰다. 하이론은 여전히 카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의 부탁을 무시하진 않았다. 하이론의 협조가 있는 한 이 위기를 넘기는 일도 불가능이 아니었다.

그리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카델! 어디 있어?”

들려서는 안 될 익숙한 목소리가, 무너진 미로를 울렸다.

“라이돈……?”

분명 전장으로 합류하라고 했건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틀림없는 라이돈의 것이었고, 하이론은 카델보다도 먼저 그 목소리에 반응했다.

“라이돈! 저리 가렴,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아버지……?”

카델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간신히 삼키며 벌떡 일어난 하이론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이론 님, 큰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이미 틀렸어요. 이쪽을 찾는 데 혈안이 됐을 신시가 라이돈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죠. 공격당하기 전에 라이돈을 대피시켜야 해요.”

왜 하필 이런 중요한 순간에 말을 듣지 않는 것인가. 미치겠다는 듯 머리를 헝클인 카델이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라이돈은 벽 너머로 머리를 내민 카델을 발견하곤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라이돈, 이쪽으로 오지 마! 근처에 고위 마족이 있어! 우리가 지상에서 상대했던 녀석이야. 위치를 모르니까 빨리 날아서 쿤라가 있는 정원으로…….”

“뭐라고, 카델? 잘 안 들려!”

다급한 만류에도 라이돈은 기어코 걸음을 옮겼다. 점점 좁혀지는 거리에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하이론은 당장이라도 제 아들을 지키려 뛰쳐나갈 기색이었다. 그런 참극이 벌어지도록 놔둘 순 없다.

“하이론 님은 여기 계세요. 제가 라이돈을 만나서 돌아가라고 말할게요. 날아서 떠난다면 신시를 마주칠 확률도 낮겠죠.”

“하지만…….”

“제발요, 하이론 님. 제 말을 따라 주세요.”

“……알겠어요.”

카델의 간절한 눈빛에 하이론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벽 뒤로 몸을 숨겼다. 그를 확인한 카델이 곧장 라이돈에게로 달려갔다.

‘이미 하이론 님 주변에 마법진을 설치해 뒀어. 만약 내가 라이돈을 상대하는 동안 신시가 접근한대도 함정이 발동될 테니까 괜찮아. 애초에 발각당하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만…….’

지금만큼은 라이돈이 그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아무리 제멋대로인 요정이라지만 이런 중요한 때까지 날뛰진 않았건만. 도대체 이게 무슨 쓸데없는 변덕이란 말인가.

헐떡대며 달려간 카델이 빠르게 라이돈의 팔을 낚아챘다. 라이돈은 순순히 끌려가면서도, 집요하게 카델을 훑어보며 새로운 상처를 찾기 바빴다.

“계속 기다리는데도 안 와서 걱정했잖아. 아버지랑 둘이 여기서 뭐 하고 있던 거야? 캐시는 아직도 못 찾았어? 캐시 따위는 그냥 놔둬! 정 필요하면 내가…….”

“잘 들어, 라이돈.”

카델은 라이돈의 말을 끊고 그의 뺨을 감쌌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담아내는 눈빛은 단호했으나, 그 너머로는 숨기지 못한 불안감이 일렁이고 있었다.

“신시가 살아 있어.”

“신시라면…… 바깥에서 봤던 그 고위 마족?”

“그래. 그 녀석이 캐시를 풀어 줬어. 그리고 지금은 하이론 님의 목숨을 노리고 있지.”

“아버지의?”

라이돈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신시가 살아 돌아온 것도 충분히 놀라운데, 녀석이 아버지를 노리고 있다니. 영 현실감이 없었다. 카델은 반사적으로 하이론을 바라보려는 라이돈의 얼굴을 강하게 붙들었다.

“제대로 설명해 줄 순 없지만, 신시는 어떻게든 하이론 님을 죽이려 들 거야. 하지만 위협이 오래가진 못해. 정원에서 쿤라가 날뛰는 모습을 봤지?”

“……응.”

“쿤라가 난동을 멈출 때까지, 딱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 그럼 하이론 님은 안전해질 수 있어.”

“도마뱀이 난동을 부리는 거랑 아버지의 안전이 무슨 상관인데? 아니, 처음부터 신시를 죽여 버리면 되는 거 아니야?”

“죽여도 내가 죽여. 하이론 님도 너도 절대 힘을 쓰면 안 돼.”

“나는 왜?”

“네가 합류하면 하이론 님은 무조건 널 지키려고 하실 테니까. 그러니 날 믿고 지금은 돌아가, 라이돈.”

라이돈은 카델의 말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기색이었다. 카델 본인이 생각해도 순순히 납득할 만한 설명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카델은 라이돈을 믿었다. 그와 자신의 사이에는 깊은 유대가 있고, 신뢰가 있다. 이해가 없대도 무작정 상대의 뜻을 따라 줄 만큼의 믿음이. 그러니 라이돈은 이곳을 떠나 쿤라의 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 생각했으나.

“아니. 난 여기 남을 거야.”

“뭐? 남으면 안 된다니까? 네가 있으면 하이론 님이 더 위험해진다고! 납득이 어렵다는 건 알지만, 지금은…….”

“같이 있어야 될 것 같아. 그런 기분이 들어.”

“기분이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빨리 여길……!”

말이 통하지 않았다. 정녕 이런 때까지 기분 따라 행동하고 싶단 말인가. 차오르는 답답함에 목소리를 높이던 카델이 멈칫하며 표정을 굳혔다. 묵묵히 고집을 부리던 라이돈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지독한 두통이라도 느끼듯, 머리를 감싼 그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카델, 말을…… 듣고 싶은데……. 지금은 여기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찡그린 얼굴 위로 코피가 흘렀다. 황급히 손을 뻗어 피를 닦아 주던 카델이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지금 라이돈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하이론 님은 내 옆에서 안전하게 몸을 숨기고 있었을 거야. 쿤라의 등장 때문에 신시가 우리의 기척을 감지하기도 힘들었을 거고. 그동안 쿤라의 영향력은 점점 늘어날 테니, 시스템은 하이론 님에게 두었던 관심을 돌릴 수밖에 없어. 하지만 여기서 라이돈이 잠시 들르는 것만으로도…….’

쿤라의 영향력이 커지기도 전에, 하이론과 신시가 충돌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그런 일이 벌어져 좋을 존재라곤 시스템, 이세계의 신뿐이다. 만약 그가 완벽한 시나리오를 위해 억지로 사건을 꿰맞추려 하는 것이라면.

소름 끼치는 가설이었으나, 시스템은 그런 식으로 몇 번이고 이 세계의 비극을 반복해 왔을 것이다. 완전히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란 소리.

‘아무리 그래도 누군가의 의지까지 꺾어 버린다고? 전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거야?’

아니다. 아무리 시스템이래도 카델 라이토스의 기사까지 제 꼭두각시처럼 부릴 수는 없다. 쿤라도 말하지 않았는가. 시스템은 아무런 인과 관계도 없이 이곳의 생명을 급사하게 만들 수는 없다고. 그렇기 때문에 신시와의 충돌이라는 사건을 만들어 내려는 게 아니던가.

그러니 만약 시스템이 라이돈의 의지를 조종하고 있다면, 필시 무리를 하는 것이다. 쿤라의 등장에 마음이 급해져 억지로 하이론을 없애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막아야 해. 이건 쿤라의 계획이 통하고 있다는 증거다. 시스템에게 무너지게 두지 않아.’

시스템은 절대 라이돈을 조종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기사이고, 이 세계의 독립적인 영혼이다. 카델은 고통스러워하는 라이돈의 얼굴을 끌어당겨 억지로 눈을 맞췄다.

“여길 떠나, 라이돈. 그러지 않으면 후회할 일이 생길 거야. 네가 절대 겪어선 안 될,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라고.”

“몸이 이상해…….”

“대답해!”

난데없이 코피를 쏟고, 끔찍한 두통을 겪고 있음에도. 카델은 걱정은커녕 어서 여길 떠나라며 윽박을 질러 댔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와중에도 서러움이 밀려들었으나, 라이돈은 언쟁 대신 수긍을 택했다. 그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 카델의 표정으로 안도감이 스쳤다.

“돌아가서도 두통이 여전하다면 가르엘을 찾아가. 쿤라가 움직이는 동안은 적들도 맥을 못 출 테니까.”

“이 정도는 별거 아냐.”

“좋아. 기특하다. 어서 돌아가, 라이돈. 우리도 금방 따라갈게.”

“……아버지도 무사해야 해.”

“당연하지. 걱정하지 마.”

라이돈은 여전히 이곳에 남고 싶어 했으나, 끝까지 카델의 명령을 거스르진 않았다. 드디어 등을 돌린 라이돈이 묵직한 몸을 공중에 띄우고. 곧장 카델의 곁을 떠나려던 순간.

쾅! 콰과광!

카델의 뒤편에서부터, 요란한 폭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함정!”

반사적으로 뒤를 돌자, 시야를 가린 뿌연 연기와 연기를 뚫고 솟구치는 무언가가 보였다. 신시였다. 함정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 한쪽 팔이 사라진 어깨에서부터 마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이론 님! 괜찮아요?”

카델은 공중에서 멈춘 라이돈을 뒤로한 채 하이론에게로 달려갔다. 바람을 일으켜 연기를 걷어 내자, 얼음 장막을 두른 하이론의 모습이 드러났다.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마법진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네요.”

인간계라면 몰라도, 이곳은 마계다. 온통 마기투성이인 세계에서 특정 마족의 기운을 감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카델은 하이론의 위로 바람 장막을 덧씌운 뒤, 신시를 찾아 시선을 옮겼다. 저 멀리 떠오른 신시에게선 짙은 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하이론 님은 본인을 보호하는 데 집중해 주세요. 신시를 상대하는 건 제 몫입니다.”

“함께 상대하면 훨씬 빠르게 해치울 수 있을 텐데요. ……신시인가요? 카델이 말했던, ‘거대한 힘’이란 건.”

카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하이론도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자신만을 위협하는 것이라면 카델은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다. 그에게는 한 요정의 안위보다 훨씬 중요한 일들이 많았으니. 그런데도 굳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서 준다면.

“……최대한 따라 볼게요. 카델도 조심해요.”

“네. 부탁드릴게요.”

신시의 몸에서 피어나던 마기는 사라진 한쪽 팔을 수복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이 조금씩 흩어지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카델이 여전히 공중에 멈춰 있는 라이돈을 향해 외쳤다.

“돌아가서 캐시를 찾아, 라이돈!”

신시의 살의가 하이론을 향해서는 곤란하다. 이런 난잡한 전장에서 캐시 한 명을 찾는 일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일 테지만, 그럼에도 카델은 큰 소리로 명령했다.

그에 신시가 기다렸다는 듯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는 두지 않아…….”

충혈된 눈이 굴러가며, 하이론이 아닌 라이돈을 응시했다. 흩어진 마기의 흐름이 경로를 비틀기 시작했다. 그녀가 라이돈을 노리고 있음을 깨달은 하이론이 반사적으로 마력을 끌어 올리려 했으나.

“걱정 마세요. 저도 라이돈이 다치게 두진 않아요.”

어느새 신시의 머리 위로 떠오른 마법진이, 새빨갛게 발광했다.

총탄처럼 빠르게 추락한 불꽃들이 신시의 몸을 관통했다. 곳곳에 구멍이 뚫린 몸뚱이는 피를 흘리는 대신 연기처럼 흩어졌다. 허공에서 일렁이던 마기가 익숙한 직선을 형성하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여기엔 널 지켜 줄 형제들이 없거든. 일대일로 상대한다면, 그렇게 암담한 녀석도 아니란 말이지.’

쭉 뻗은 카델의 손끝에서부터 강렬한 화염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불꽃은 방황하는 마기를 집요하게 추격했다. 기술을 완성하지 못한 채 사방팔방 흩어진 마기는 그녀의 육체나 다름이 없다. 방어하지 않는다면 큰 부상을 허락하게 될 터.

결국 신시는 라이돈을 쫓는 대신 눈앞의 적을 상대해야 했다.

‘안전하게 숨어 있는 건 이미 불가능해졌어. 다음은 녀석이 하이론 님에게 주의를 돌리지 못하게 내 쪽에서 맹공을 쏟아붓는 거다.’

어차피 해치워야 할 적. 카델 라이토스가 직접 나선다면 시스템도 강한 제재를 가하진 못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신시를 죽여 불행을 씨앗을 통째로 도려내리라.

‘라이돈은 캐시를 찾지 못할 거야. 신시가 수를 써 뒀을 테니, 웬만해선 발견하기 어려운 곳에 숨어 있겠지. 하지만 신시는 내내 캐시가 발각당할 가능성을 생각해야 할 거다. 불안은 허점을 만들어 낼 거고, 지금은 그것만으로 충분해.’

신시의 살의가 하이론에게 집중되지 않는 것. 그녀의 주의를 분산시켜 혼란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이 위기만 넘기면 돼. 쿤라를 믿고 버티자.’

추격을 멈춘 신시는 빠르게 육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카델이 다시금 마력을 끌어 올려 신시를 겨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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