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8화 (438/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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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투쾅!

그가 쌍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온몸이 댕댕 울렸다. 충격파를 견디지 못하고 밀려난 몸의 중심이 흔들리며, 루멘의 입 밖으로 한 움큼 피가 뿜어졌다. 축축해진 턱을 대충 손등으로 닦아 낸 그가 눈앞의 마족을 노려보았다.

“그 연약한 몸으로 제법 오래 버티는군. 보통이라면 진즉에 뼈마디가 무너져 흘러내렸을 텐데. 보통 인간과는 신체 구조가 다른 건가? 어디, 죽여서 갈라 보면 알게 되겠지!”

폭풍 같은 숨결과 쌍도끼, 우람한 덩치를 활용한 어마어마한 근력. 그는 스스로를 도벤토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다. 평소라면 적의 이름 따위, 알아도 몰라도 그만이었겠지만. 이렇게 무수한 고위 마족이 포진한 전장에선 적의 이름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 또한 중요했다.

‘상성이 너무 안 맞아. 나 혼자서 막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다고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푸른 눈동자가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라이돈은 고위 마족에게 홀려 하이론을 공격하러 떠났고, 함께 홀린 반은 마구잡이로 아군을 공격해 대고 있었으며, 가르엘은 그런 반으로부터 기사들을 보호하기에 바빴다. 카델과 요젠은 아예 처음부터 논외로 두었으니.

다른 기사들 역시 새로운 고위 마족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다. 이 상태에서 카델이 물러나게 된다면, 전장이 쑥대밭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굴 도와주긴커녕 열세에 몰렸다는 건가. ……부끄럽군.’

성의 정원까지 이동하는 동안 너무나 많은 전투를 치렀다.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치유술로 급한 상처를 틀어막았을 뿐. 완전히 회복하지도 못한 몸을 계속해서 혹사한 것이다. 루멘은 물론, 다른 기사들 역시. 최악의 컨디션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어디 또 그 거슬리는 검기를 사용해 보지 그래! 칼을 뽑기도 전에 날려 버려 주지.”

도벤토의 빈정거림에 루멘의 눈빛으로 짜증이 스쳤다. 놈은 저 거대한 덩치에 걸맞는 근력을 갖췄으면서, 동체 시력마저 뛰어났다. 루멘에 비할 바는 못 되었으나,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진 지금 상태에선 엇비슷한 수준은 되었다.

도벤토는 루멘이 발도술의 낌새를 보이는 즉시. 강한 바람을 불어 그의 자세를 흩뜨렸다. 발도술 직전에 중심이 흔들려 버리니, 기세를 이어 유효타를 남기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놈의 바람은 기운도 뭣도 아닌 순수한 호흡. 입이라도 틀어막지 않는 한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렇다고 발도술을 멈추면 기다렸다는 듯이 저 무식한 쌍도끼가 날아든다. 계속 방어만 하고 있을 순 없어.’

아무리 상성이 맞지 않는 극악한 적이라도, 어떻게든 붙들고 있어야 아군의 피해가 줄어든다. 이 무식한 고위 마족이 진영을 파고들었다간 어떤 비극이 벌어질지는 안 봐도 뻔했으니.

루멘은 자연스럽게 도벤토를 아군과 떨어뜨리며, 검집에 손을 올렸다. 그 모습을 발견한 도벤토가 곧장 두툼한 입매를 휘었다.

‘속도를 더 높여야겠군.’

긴 들숨을 따라 도벤토의 가슴이 빵빵하게 부풀고. 동시에, 루멘의 신형이 사라졌다. 빠르게 굴러가던 도벤토의 눈동자가 정지하며, 벌어진 입새로 매서운 돌풍이 몰아쳤다. 루멘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루멘은 곧장 검을 빼 들지 않았다. 드러난 신형이 바람의 범위를 피해 몸을 돌리곤, 안전한 곳에 착지함과 동시에 도벤토를 향해 달려갔다.

한 번 뱉어 낸 숨결은 단박에 끊을 수도, 순식간에 방향을 틀 수도 없다. 루멘은 자신을 따라 조금씩 각도를 바꾸는 돌풍을 교묘하게 회피해 사정거리 안쪽까지 들어섰다. 그에 쌍도끼를 움켜쥔 도벤토가 루멘을 공격하려 했으나.

그대로 땅을 박찬 루멘이 가속하며, 아슬아슬하게 도끼의 궤적을 피해 도벤토의 코앞까지 거리를 좁혔다. 일순 시야를 가득 채운 루멘의 얼굴에 도벤토의 눈이 크게 벌어지고.

“그 입. 계속 거슬렸단 말이지.”

반 뼘 빠져나온 검을 납검한 루멘이 도벤토의 뒤에 몸을 세웠다. 경지에 다다른 속도를 활용해 도벤토의 빈틈을 노린 공격. 새겨진 섬광이 사라지며, 한 박자 늦게 기이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제 뒤에 선 루멘을 돌아본 도벤토가 무어라 성난 외침을 퍼부었으나. 갈라진 뺨 사이로 빠져나간 소리는 제대로 된 문장을 완성할 수 없었다. 반으로 갈라진 하관이 떡 벌어지며, 내려앉은 턱을 양손으로 들어 올린 도벤토가 흉흉한 눈을 부라렸다. 억지로 붙인 절단면의 틈새로 마기가 피어오르자 조금씩 상처가 수복되기 시작했다.

“쯧. 이래서 고위 마족이 성가시단 말이지.”

상처가 완전히 아물기 전에 결착을 내야 했다. 다시 검집에 손을 올린 루멘이 기동 자세를 취하고. 날개를 펄럭이는 도벤토의 도주를 막으려던 순간이었다.

화르륵!

쩍쩍 갈라진 대지 위로, 형형색색의 화염이 들꽃처럼 피어올랐다.

“동맹군이 도착했다! 청혈 기사단과 암철 기사단이야!”

격양된 아군의 외침과 함께, 바닥을 덮은 불길이 더욱 강렬해졌다. 불꽃은 지상의 적을 불태움과 동시에 불길에 닿은 아군의 몸에는 장막을 둘렀다. 그리고 그 불꽃을 발견한 순간, 카델은 단번에 시전자를 알아챌 수 있었다.

“스승님……!”

거센 불길에 적들이 밀려나며, 틈을 놓치지 않은 요젠의 암기가 보호 범위를 넓혔다. 간신히 시야를 확보한 카델의 눈이 바삐 움직이고. 무너진 미로를 헤치며 진군하는 동맹군 사이, 하나의 인형을 발견했다.

“마밀 님이 드디어!”

그의 합류를 어찌나 간절히 바랐는지. 모습을 드러낸 마밀은 오는 동안 제법 많은 체력을 소모한 듯 지친 기색이었으나. 그럼에도 대마법사의 위용은 꺾이지 않고 빛을 발했다.

점점 강렬해지는 불꽃이 대지를 집어삼키며, 잠시 내려왔던 고위 마족까지 줄행랑치듯 날아올랐다. 카델은 그들의 움직임을 좇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검은 꽃]의 유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 전에 나비오라를 해치워야 해.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것은 아이템의 유지 시간뿐만이 아니다.

「제거까지 남은 시간: 0시간 11분 38초」

쿤라에게 남은 시간을 알린 뒤, 하이론의 위치를 파악해야 했다. 그렇게 카델이 펜던트를 움켜쥔 순간. 요젠의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미안해, 카델. 기술이 곧 풀릴 것 같아.]

“곧이라면 얼마나?”

[3분 정도가 최대야.]

예상보다 촉박한 시간에 카델이 입술을 깨물었다. 예상치 못한 폭격을 받은 데다, 하필 처음으로 기술을 전개한 곳이 마계다. 이곳에선 요젠의 암기가 비교적 자유롭지 못했으니. 무리해서 기술을 유지했다간 요젠의 몸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었다.

“미안할 건 없어. 남은 3분 안에 나비오라를 해치우면 되니까.”

카델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여전히 꽃잎을 움켜쥔 채 흐느끼는 나비오라. 멘델 할리에프의 죽음을 추모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태도였으나, 고위 마족의 심경을 헤아릴 필요는 없었다.

‘나머지 동맹군이 합류한 덕분에 이쪽에 몰려 있던 관심이 줄어들었어. 완벽한 타이밍이야.’

나비오라는 언뜻 슬픔에 잠식된 채 전투를 등진 모양새였지만, 실상은 반대다. 그녀는 꽃잎을 몸에 지닌 채 검은 꽃이 소멸하고, 자신의 기술이 먹힐 정확한 때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분노와 뒤섞인 슬픔은 원망이 되어, 멘델을 죽인 인간을 찢어 버리겠다는 복수심으로 뒤바뀌었다. 나비오라의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벼려졌을 터.

“날 도와줘, 요젠.”

[응. 뭐든 해 줄 테니 원하는 걸 말해, 카델.]

나지막한 속삭임에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잠시 어색한 감정을 몰아내듯 눈을 깜빡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비오라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용하게 공격하고 싶은데. 이 상태로 가능할까?”

[가능해. 마력을 준비해 둬.]

곧장 돌아오는 대답에 카델이 마력을 끌어 올리고. 그의 발밑에 자리한 요젠의 그림자가 기묘하게 휘어지기 시작했다.

[불사의 맹언]이 유지되는 동안, 요젠은 카델이 받는 모든 공격을 대신 감당하게 된다. 대상자를 보호하는 살아 있는 장막이라고 이해하면 됐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선, 카델의 기운과 요젠의 기운이 완벽하게 섞여 한 몸처럼 유지되어야 했다.

그 말인즉슨. 요젠은 카델을 보호함과 동시에 그의 몸을 일정 수준까지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따라 그림자가 움직이는지, 그림자를 따라 사람이 움직이는지. 그것은 어느 쪽이 조금 더 강력한 의지를 가졌냐에 따라 달라진다.

[몸에 힘을 풀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동요하지 마. 널 내 의지에 온전히 맡겨.]

순순히 요젠의 말을 따른 카델이 몸에 힘을 풀고. 다음 순간, 그의 육체가 녹아내리듯 지면으로 흘러들었다.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카델에 그를 둘러싸던 적들이 당혹감을 드러냈다. 마물과 마족은 사라진 카델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이내 카델을 대신할 적을 찾아 나섰다.

최전방을 막던 장벽이 사라진 셈이었다. 우르르 몰려든 적군이 기사들의 진영을 파고들고. 짧은 혼란이 찾아왔으나, 인간들은 결코 밀려나지 않았다.

마밀의 불꽃은 착실하게 지상의 적을 불태웠으며, 불꽃의 힘을 등에 업은 기사들은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수가 늘어난 아군은 상공에서 쏟아지는 고위 마족의 공격에도 꿋꿋하게 대응하며 전세를 이어 갔다.

“……조금만 기다려 줘, 멘델. 절대 너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아. 나의 사랑, 나의 멘델.”

검은 꽃잎의 수명이 다하고 있다. 이 작은 꽃잎 안에서 흐려지는 멘델의 기운이 느껴졌다. 꽃잎이 소멸하면, 멘델의 흔적은 이 세상 어디에도 남지 않으리라. 촉촉해진 눈가를 문지른 나비오라의 시선이 움직였다.

‘사라졌어.’

빠르게 눈을 굴려도, 더 먼 곳을 내다보아도. 멘델의 원수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도망간 것인가? 다루고 있던 기묘한 힘으로 모습을 감춘 것일까?

사라진 카델의 흔적을 쫓던 나비오라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곧 동족을 보호할 장막을 생성할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의기양양해진 인간들의 진영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마계는 해방의 기쁨에 가까워질 터. 하지만.

‘그 녀석만큼은 내 손으로 죽여야 해. 내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 죽여, 그 살가죽을 씹어 먹어야 한다.’

멘델의 원수가 무사히 도주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가장 앞에서 마물들의 공세를 버티더니, 이제야 힘이 다한 모양이지. 안됐지만 뒤에서 숨을 고를 시간은 주지 않아.’

카델의 부재를 도주로 여긴 나비오라가 날개를 움직였다. 녀석이 도망갔다면 아군의 틈으로 파고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검은 꽃잎의 기운이 희미해질수록, 나비오라의 분노는 강렬해졌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뜯어진 카델의 머리통을 들고 전장을 활보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어디, 어디에 있는 거냐?”

촉박한 호흡이 귓가를 울렸다. 꽃잎을 쥔 주먹이 떨릴 만큼 힘이 들어가며, 부릅뜬 눈이 충혈됐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다급하고 살벌하게 카델의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기어이 꽃잎의 기운이 소멸할 때까지. 그녀는 카델을 찾지 못했다. 허공에 덩그러니 떠오른 그녀가 빠득, 이를 갈았다. 쥐고 있던 손을 펼치자, 바스러진 꽃잎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쥐새끼 같은 게…….”

험악하게 중얼거린 그녀가 짧게 숨을 뱉었다. 카델을 잡아 죽이는 것은 분명 그녀의 생애를 걸 만큼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야 했다. 이곳은 마왕 에밀리아의 거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성의 정원이 뚫리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 모든 인간을 해치우고, 인간계를 침략해 놈들을 지하 세계에 가둬야 했으니.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리는 것 또한 안 됐다. 같은 상황이었다면, 멘델 역시 사적인 감정을 접어 뒀을 테니.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가 조금씩 마기를 끌어 올렸다. 기세 좋은 인간들의 공격에 밀려난 고위 마족들의 위로, 영원히 깨지지 않을 방패를.

하지만 그녀의 마기가 방출되기 직전.

톡. 톡.

그녀의 머리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

물방울이라니. 마계엔 비가 내리지 않는다. 영원의 가뭄에 땅이 메마른 지가 언제인데. 이상을 느낀 나비오라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고.

“뭣……!”

그녀의 눈 안 가득, 넓게 펼쳐진 암기의 웅덩이가 들어찼다. 후드득, 치켜든 얼굴 위로 암기가 흘러내리고. 얼룩진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호수처럼 잠잠하던 웅덩이 아래로, 누군가 빠져나오고 있었다. 길게 뻗은 손과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 차례차례 빠져나오는 육체 위로는 검붉은 화염이 뒤덮였다. 주위를 후끈하게 달구며 조금씩 가까워지는 몸뚱이. 잠시 뒤, 나비오라는 눈앞의 몸뚱이가 바로 멘델의 원수, 카델의 것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그녀가 제 몸 위로 장막을 두르려 했으나.

“으아……. 아아악!”

미끄러지듯 훅 빠져나온 카델이 그대로 추락하며, 아래에 자리한 나비오라를 끌어안았다. 뜨거운 불꽃이 마찰한 살을 따라 옮겨붙었다. 나비오라는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몸을 털었으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카델은 떨어지지 않았다. 같은 불꽃을 두르고 있음에도 나비오라의 육신만이 검게 그을었다.

코앞에 드리운 원수의 얼굴은 암흑처럼 까맣고, 악마의 그림자처럼 소름 끼쳤다. 이렇게 홀로 불타 죽을 수는 없다. 발악하듯 마기를 끌어 올린 그녀가 카델의 머리를 조준하고. 몸이 불타는 와중에도 카델을 황천길의 동무로 삼으려 했으나.

카델의 머리를 노린 마기는 허공을 가로질렀다. 화마에 휩싸인 그녀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카델은 나비오라를 놓친 채 추락하고 있었다. 공격을 피해 떨어지는 것인가. 그렇다면 날개 없는 저 허약한 몸뚱이는 필시 터져 죽을 터. 살가죽이 오그라든 나비오라의 입꼬리가 기이한 곡선을 그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안, 돼…….”

카델의 몸은 바닥에 처박히는 대신, 그대로 지면을 통과했다. 일순 사라진 몸은 이내 튕겨지듯 솟구치며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상처 하나 없는, 암기도 불꽃도 두르지 않은 본래의 모습. 꼿꼿하게 두 발을 딛고 선 카델이 상공의 나비오라를 올려 보고.

“제일 성가신 녀석은 해치웠네.”

이어지는 우렁찬 폭음 속에서, 나비오라의 처절한 비명이 뒤섞였다.

“아아악! 와악! 그만, 그만! 그만 쫓아오란 말이야, 이 멍청한 요정아! 난 네 아빠가 아니라고!”

눈물을 매단 캐시가 억울한 비명을 내질렀다. 제 꽁무니를 바짝 쫓는 라이돈은 끊임없이 얼음 창을 날려 댔고, 금방이라도 날개를 얼릴 듯 세차게 들이닥치는 냉풍은 끔찍한 기억을 상기시켰다.

대체 왜 자신은 매번 요정들에게 당하기만 하는 걸까. 하이론의 환혹술로 라이돈의 타깃이 되어 버린 캐시는, 죽을힘을 다해 하이론을 원망하며 비행했다.

라이돈의 혼탁한 눈빛은 오로지 하이론을 위장한 캐시만을 향했다. 그런데도 라이돈에게선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 입력된 타깃을 향해 기계적으로 마법을 날릴 뿐. 아무런 감정도, 의지도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캐시는 그런 라이돈을 힐끔거리며 미치겠다는 듯 머리를 헝클였다.

‘파우르 그 자식,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고! 결국 이렇게 그 여자한테 당하게 되는 거야? 고작 그따위 요사스러운 술법에……. 안 돼, 안 돼! 절대 순순히 당해 줄 순 없어. 솔라비스의 드높은 이름에 이 이상 흠집이 나게 두지 않을 거야!’

비록 제 공격력은 0에 수렴했으나, 도주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다. 여태껏 얼마나 많은 안전지대를 찾아 목숨을 연명해 왔는가. 그다지 자랑거리도 아닌 것을 자신하며, 캐시가 비행의 속도를 높였다.

‘저 빌어먹을 요정한테 거리를 내어 주면 안 돼. 그때처럼 날 얼어붙여서 추락하게 만들 거야. 파우르한테 넘어간 녀석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두 번이나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진 않는다. 아슬아슬하게 얼음 창을 회피한 그가 빠르게 고도를 낮췄다. 높은 고도는 위험하다. 차라리 장애물이 많고, 추락해도 다칠 가능성이 낮은 높이를 고수하는 쪽이 나았다.

무너진 미로 사이를 파고든 캐시의 입 밖으로 욕설 같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캐시보다 높은 고도를 선점한 라이돈이 그의 위로 우박 같은 얼음덩이를 퍼부었기 때문이다.

주먹만 한 얼음덩이는 바닥에 부딪힘과 동시에 폭발하더니, 사방으로 날카로운 파편을 튀겨 댔다.

모조리 피하는 것은 불가능한 공격이다. 최소한의 피해를 노린 위치를 찾아가는 것조차 캐시의 육체 능력으로는 어려웠으니. 허둥거리며 날아가는 몸뚱이 위로 무수한 생채기가 새겨졌다. 팔을 들어 어떻게든 공격을 막아 보려는 몸짓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그마아안! 멈춰!”

아무리 울부짖어도 소용없음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캐시는 목이 아프도록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럴수록 라이돈의 공격은 더욱 매서워졌다. 무너진 미로의 벽 위로 하얀 성에가 끼며, 캐시가 지나간 자리가 투명하게 얼어붙었다.

조금만 속력을 늦췄다간 꼼짝없이 얼어붙으리라. 끔찍한 최후를 예감한 캐시가 필사적으로 날개를 펄럭였다.

여기까지 와서 이토록 허무하게 죽을 순 없다. 이런 최후를 맞자고 인간들에게 그 많은 수모를 겪은 줄 아는가.

피어나던 오기는 발끝을 얼린 냉기에 금세 꺾여 버렸다.

줄줄 눈물을 흘리며, 캐시는 누구의 도움도 바랄 수 없음을 통탄했다. 이렇게는 안 된다. 이렇게는 죽을 수 없다. 계속 되뇌면서도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은 떠오르지 않으니. 한 단계 거세진 냉풍이 그의 등을 덮치고. 캐시가 자신의 초라한 최후를 직감한 순간이었다.

“……!”

불시에 나타난 무언가가, 그를 아래로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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