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7화 (437/521)

⚔️

“내게 붙어도 해 줄 수 있는 건 없단다.”

인간들의 위로 장막을 두르며, 하이론이 덤덤히 말했다. 그에 하이론의 옆에서 몸을 웅숭그리고 있던 캐시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약속했잖아! 성까지 안내하는 조건으로 살려 준다고. 그런데 카델이란 인간한텐 가까이 갈 수도 없고, 저 요정은 날 아예 팽개쳐 뒀어. 이런 상황에서 내가 동족들에게 붙들려 하늘을 날기라도 해 봐! 구해 줄 수 있을 만한 존재는 너밖에 없잖아.”

“으음, 만약 네가 끌려간대도 성의껏 구하진 않을 텐데 말이야. 다른 곳에 숨어 있는 게 더 낫지 않겠니?”

“사방이 트였는데 어디에 숨어! 게다가 난 이미 동족들에게 배신을 들켰어. 이상한 곳에 숨었다가 발견당하면 그대로 죽음이라고.”

괜히 인간을 도왔다. 차라리 처음부터 죽을힘을 다해 도망칠걸. 도망쳐서 다른 고위 마족에게 저들의 위치와 정보를 알렸다면, 지금쯤 든든한 동족의 보호를 받고 있었을 텐데. 언제까지 이런 수모를 견뎌야 하는 것인가.

한껏 움츠러든 캐시의 위로 장막을 둘러 준 하이론이 가볍게 날아올랐다. 캐시의 비명 같은 부름을 무시한 채 아래를 내려 보자, 단원들의 틈에서 고위 마족을 상대하는 라이돈의 모습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이 위험한 싸움터에서 그를 빼내 오고 싶었다. 하지만 만약 그런데도 라이돈은 다시 돌아갈 테다. 어차피 치러야 할 전투라면, 조금이라도 라이돈에게 가는 부담이 덜어지도록. 자신이 힘을 내야 했다.

결정한 하이론의 시선이 움직인 곳은, 카델이 처음 노렸던 적. 나비오라가 있는 하늘이었다.

‘저 검은 꽃잎이 소멸한다면, 가장 성가셔질 고위 마족은 바로 저 아이겠구나. 카델은 한창 바쁠 테니, 내가 처리해 두는 편이 낫겠어.’

나비오라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외치며 미친 듯이 마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그녀가 힘을 모으도록 놔둬선 안 된다. 하이론의 마력이 차갑게 얼어붙으며, 나지막한 영창을 시작한 그가 술식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의 마법이 나비오라를 향하기도 전.

“라이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동료들 틈에 섞여 있던 라이돈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 일순 당혹감을 드러내던 하이론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 갔다.

“너…….”

제 앞으로 날아든 아들의 눈은, 영혼을 빼앗긴 것처럼 탁하게 빛을 잃었다. 표정에는 생기가 없었고, 동작도 무언가에 조종당하듯 어설프기 짝이 없다. 금세 라이돈의 변화를 눈치챈 하이론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누구니? 네게 이런 짓을 한 녀석은.”

파우르. 상대를 매혹해 정신을 교란하고, 아군을 공격하게 만드는 마계 마법사. 나비오라를 무사히 처리했다면 다음 타깃은 그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델은 파우르를 조금도 견제하지 못했다. 그를 둘러싼 폭격과도 같은 공세 때문이었다. 시야를 가린 무수한 공격에 집중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빈틈이 생겼다간, 아차 하는 사이 자신은 물론 요젠까지 크게 다치게 될 테니.

그 탓에 카델은 파우르가 이미 자신의 단원들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라이돈, 정신 차리렴. 고작 마족 하나에 홀려서야, 곤란한 일이구나.”

하이론은 난무하는 얼음 창을 유연하게 회피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라이돈의 타깃이 자신이라는 점은 나쁘지 않았다. 아들의 공격력이야 이미 파악을 마친 상태였고, 다루는 힘의 종류마저 자신과 같았으니. 상대하기는 오히려 무난했다.

하지만 반 헤르도스. 라이돈과 함께 매혹당한 광전사는 아니었다. 그가 가진 폭발적인 오라가 대지를 휩쓸고, 적들을 압박하던 붉은 달은 소멸했다. 범람하는 오라에 인간들이 주춤하는 사이, 묶여있던 고위 마족들의 움직임은 자유로워졌으니.

‘전장의 흐름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구나. 누굴 조종해야 인간 측 진영을 효과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지, 이 짧은 시간 안에 정확히 통찰했어. 대체 어떤 고위 마족이…….’

온몸에 장막을 두른 하이론이 라이돈에게 날아들어 그의 양 손목을 붙들었다. 정면으로 맞부딪힌 마력에 라이돈이 반격을 꾀했으나, 하이론은 모든 공격을 튕겨 내며 눈을 부릅떴다.

“라이돈! 네가 스스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난 너를 묶어 두고 널 이렇게 만든 고위 마족을 찾아갈 수밖에 없단다. 네겐 꽤 치욕적인 처사겠지.”

아무런 의욕도 일지 않는 표정을 하고선 안간힘을 다해 마력을 뽑아내고 있다. 제 아들이 한낱 마족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이 하이론을 더없이 불쾌하게 만들었다. 점점 분노에 잠식되어 가는 하이론에게 대답을 내놓은 이는 다름 아닌 캐시였다.

“파우르야! 쟬 저렇게 만든 녀석은 파우르가 틀림없어!”

“파우르……?”

하이론이 라이돈을 완전히 압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어느새 그에게 달라붙은 캐시가 하늘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여자야. 파우르가 들고 있는 작은 구슬이 보여? 저걸 노려야 해. 파우르가 가진 기운의 정수. 구슬을 깨뜨리면, 정신 나간 녀석들도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그게 정말이니?”

“내가 왜 여기서 거짓말을 하겠어? 어차피 배신자로 낙인찍힌 몸, 태도를 확실히 해야지. 그리고 난 파우르를 예전부터 싫어했어. 우리 가문을 은근히 얕보면서, 신시 누나를 홀리려고도 했었지. 그리고…….”

“쉿. 그 정도면 충분해.”

하이론은 캐시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끊어 냈다. 이 겁 많은 고위 마족은 소심한 듯하면서도 은근히 떠들어 대기를 좋아했다.

‘……정말 구슬을 들고 있네. 저 구슬에서 강력한 기운이 느껴져.’

파우르라는 마족은 길게 늘어뜨린 흑발을 살랑거리며 야릇한 미소를 매달고 있었다. 전장을 내려 보며 구슬을 매만지는 그녀는 언뜻 이 전투를 방관하고 있는 듯 보였다.

“캐시.”

“으, 응?”

“지금부터 넌 라이돈의 타깃이 될 거란다.”

“뭐라고?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파우르를 해치우는 때가 곧 네 도주 시간이겠지. 그러니 내 승리를 기도해 주렴.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아니, 아니, 아니! 무슨 속셈인진 몰라도 안 돼! 내가 왜!”

라이돈을 구속하는 동시에 파우르를 상대하는 건 까다로운 일이다. 그녀가 가진 기운의 정수가 만만치 않으니, 분산시키는 힘이 적을수록 좋았다. 때문에 하이론은 라이돈에게 환혹술을 걸기로 결정했다. 마족의 정신 교란에 또 다른 교란술을 덧씌우는 것이다. 라이돈은 곧 자신을 캐시로, 캐시를 자신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라이돈을 마주 본 하이론의 눈동자 위로 선명한 마법진이 새겨지고. 주춤거리며 물러나려는 캐시에게로, 하이론이 말했다.

“행운을 빌어 주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