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6화 (436/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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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친 미로를 벗어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기사들은 라이돈과 캐시의 안내를 따라 수월하게 미로의 길을 헤쳐 나갔고, 마력으로 바닥에 표식을 남겨 혹시 모를 동맹군의 방황에 대비했다. 막히는 것 하나 없는 순탄한 이동이었다.

그러나 가장 먼저 미로를 빠져나온 최전방의 기사들. 반, 루멘, 가르엘을 포함한 인간들의 표정은 싸늘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동료들이 갇힌 미로를 부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거나, 강력한 마법사 없이 전투를 이어 가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은 아니었다.

“……미치겠군.”

미로를 빠져나오자마자 펼쳐진 마왕 성의 정원. 그곳은 인간계의 정원과는 크게 달랐다. 메마른 덩굴에 짙은 보라색 장미가 만개했고, 앙상한 정원수는 기묘한 모양을 이루며 휘어졌다. 곳곳이 깨진 장식품과 먼지가 내려앉은 의자, 끝이 썩어 들어간 풀밭과 채도 낮은 꽃, 구석진 곳마다 어김없이 자리한 거미줄.

오로지 스산함만이 풍기는 정원이었다. 그리고 그 황량한 정원의 앞. 길게 늘어선 마족들이, 미로를 빠져나온 인간들을 맞이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못난이, 넌 알고 있었지?”

대지에는 마족과 마물이, 하늘에는 안개에 가려져 있던 고위 마족들이 빼곡히 포진해 있다. 라이돈은 캐시의 어깨에서 빠져나와 곧장 몸집을 늘렸다.

“알고 있었을 리가 없잖아…! 만약 알았다면 난 진즉에…….”

겁에 질린 캐시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허둥대다, 이내 몸을 돌려 도주하려 했다. 하지만 도망은 시도에 그쳤다. 라이돈이 그를 묶은 밧줄을 단단히 그러쥐었기 때문도 있으나.

“저거, 솔라비스 가문 막내 아니야? 이봐, 왜 거기 붙어 있는 거지?”

사슬처럼 뻗친 마기가 단숨에 캐시의 발목을 낚아챘다. 캐시는 마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으나, 그럴수록 인력은 강해질 뿐이었다.

“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

“뭐가 그런 게 아니라는 거야? 하하, 설마. 내가 상상하는 그런 일이 벌어진 건가? 고위 마족이 신의를 배반했단 거야?”

조금씩 집중되는 고위 마족들의 시선에, 캐시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에 묵묵히 캐시를 지켜보던 라이돈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 캐시. 뭐가 아니라는 거야. 우리한테 붙은 거 맞잖아?”

“뭐, 뭐라는 거야! 닥쳐, 이 요정아!”

“아하하! 방금 뭐라고 했어?”

궁지에 몰린 캐시는 제정신이 아니었으나, 라이돈에게 그의 정신 상태를 일일이 헤아려 줄 의무는 없었다. 금세 살기를 드러내는 라이돈의 행동에 캐시가 울상이 된 얼굴을 구기며 당혹감을 드러냈다.

지금 당장 고위 마족에게 붙는다고 저들이 전투력을 잃은 자신을 받아 줄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이대로 인간들에게 붙는다 해도 카델이 없지 않은가.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렇게 캐시가 자신의 안전을 위한 선택을 망설이던 때.

“네 작은 머리통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시끄러우니까 멍청한 머리 그만 굴려.”

마력을 방출한 라이돈이 캐시의 발목에 묶인 마기를 단숨에 끊어 냈다. 그는 고위 마족들이 뭔가의 행동을 취하기 전, 그대로 밧줄을 당겨 아래로 하강했다. 갑작스러운 힘에 무력하게 끌려간 캐시가 라이돈과 함께 지면으로 착지하고. 정원에 포진한 마족의 향연에, 캐시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당장 미로를 부숴야겠군. 조금이라도 동맹군의 합류를 앞당겨야 하오.”

지상과 상공의 적들을 훑어 내린 엑토가 무겁게 말했다. 그에 함께 적들의 수를 헤아리던 루멘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당장은 안 됩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죠.”

“……이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요?”

“조금만 시간을 준다면 대장과 요젠, 미로에 잡아먹혔던 기사들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 겁니다.”

“나 역시 카델 경의 귀환을 간절히 바라고 있소.”

대검을 빼 들은 엑토가 뒤편의 모리톨에게 눈짓했다. 합세할 테니 빠르게 미로를 부수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확신도 없는 귀환에 매달려 다 함께 죽음으로 내달릴 순 없지. 갇힌 이가 카델 경이 아니라 나였대도 똑같은 선택을 하라고 했을 거요. 평화의 돌만 얻을 수 있다면, 인간계의 무사를 위해서라면. 무엇을 버리든 작은 희생일 뿐이니.”

그러나 엑토가 미로 쪽으로 몸을 튼 순간.

“단장이 나올 때까지, 아무도 미로를 부술 수 없을 겁니다.”

위협적으로 나선 반이 엑토의 앞을 가로막았다. 둘 사이로 날 선 눈빛이 오갔으나, 신경전은 오래가지 않았다. 엑토의 표정이 돌변하며, 금방이라도 눈앞의 인간을 베어 낼 듯 흉흉한 살기를 내뿜은 것이다.

“눈앞에 적을 두고 실랑이를 부릴 여유는 없지. 방해한다면 무사하지 못할 거요.”

“해보시죠.”

언제든 돌격할 준비를 마친 적들이 코앞에 있는데도 무엇이 우선인지 판별하지 못한단 말인가. 이런 건 충심이 아니었다.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찬 엑토가 대검을 치켜들었다.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얘기는 농담이 아니었다.

반 역시 진심으로 엑토를 저지하겠다는 듯, 맞서 대검을 들고 오라를 개방했다. 갑작스러운 기사단의 충돌에 아군은 당황했고, 적군은 흥미를 보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쿠구구궁!

미로에서부터 울려 퍼진 폭음과 함께, 대지가 진동했다. 갑작스러운 진동에 정원에 모인 이들이 서둘러 중심을 잡고. 사태의 원흉을 찾던 한 고위 마족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미로가 무너졌어……?”

근방에 짙게 깔려 있던 안개가 걷히며, 도미노처럼 차례대로 허물어지는 미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미로 안에 서 있던 후방 인원은 서둘러 몸을 빼냈고, 그들에게 떠밀린 최전방의 기사들이 자연스럽게 적군과 충돌하는 그림이 만들어졌다.

참을성 없는 마물의 선공으로 시작된 전투. 그러나 상공을 차지한 고위 마족들은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제자리를 지켜 왔던 미로. 선왕의 기이한 취향을 반영해 제작된 미로의 배를 채우기 위해, 급 낮은 마족들은 항상 마음을 졸이며 저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야 했다.

물론 고위 마족들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 무너지는 미로를 보는 그들의 마음에 통쾌함이나 안도감은 일지 않는다. 오로지 충격만이 범람할 뿐이었다.

대체 무엇이 선왕조차 감당키 어려워 방치를 택한 저 괴물을 무너뜨린 것인가. 허둥대며 미로를 빠져나가는 인간 기사들은 아니다. 점점 걷혀 가는 안개 속에서, 그들은 어렵지 않게 이 사태의 원흉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인간에게선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한없이 음울한 기운. 그것은 인간의 걸음을 따라 악몽처럼 어지러이 흩어졌다.

“단장……?”

전투가 시작된 와중에도 혹여 엑토가 미로를 공격할까, 필사적으로 기사들을 밀치며 미로를 사수하려던 반이었다. 속절없이 무너지는 미로의 모습에 절망하던 그의 표정 위로, 감추지 못한 당혹감이 떠올랐다.

산산이 부서져 추락하는 미로의 파편 사이, 꼿꼿이 걸어 나오는 한 명의 사내. 그는 의심할 바 없는 카델 라이토스였다. 그러나.

“가까이 오지 마, 반. 내 주위로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해 줘.”

“네……?”

“위험할 거야.”

그의 어깨로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았다. 카델의 맑은 눈빛과 하얀 피부, 심지어는 입은 단복까지. 혼탁하게 질려 버린 색채에 이질감이 들었다. 그를 감싼 것은 요젠의 암기일까. 확신하기엔, 그 기운은 너무나 짙고 불안정했다. 꼭 망령의 저주를 뒤집어쓴 것처럼 보였다.

반은 카델이 위험에 처한 게 아닌지 의심하면서도, 순순히 단장의 말을 따랐다. 기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미로를 빠져나오는 카델을 피해 움직였다. 자연히 양옆으로 벌어진 아군의 중심. 어둠을 휘감은 카델이 느린 걸음을 옮겼다.

루멘과 가르엘, 라이돈 역시 카델의 이상을 눈치채곤 긴장감을 드러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요, 카델 경.”

“경이 미로를 무너뜨린 겁니까? 함께 먹힌 다른 기사들은…….”

엑토와 모리톨이 상황의 설명을 요구했으나, 카델은 짧은 눈짓만을 남긴 채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무리의 최전방. 카델은 마물과 뒤엉켜 싸우는 기사들에게 장막을 둘러 준 뒤, 그들에게 물러날 것을 명했다.

당황한 기사들이 조금씩 물러나자, 앞에는 카델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부하들은 그런 카델을 걱정하며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태세를 취했으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나머지 동맹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겠습니다. 지상의 적들을 상대할 테니, 여러분은 저 위쪽의 적들을 막아 주세요.”

무수한 적들의 앞에서 카델은 당당히 등을 보였다. 태연히 계획을 전달하는 모습에 아군은 경악했고, 적들은 도발당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열댓 마리의 마물이 망설임 없이 그의 등 뒤로 발톱을 휘갈겼으나.

푸슈슈슉!

그들의 공격은 카델에게 가 닿지도 못했다. 카델을 노리던 모든 손발톱, 심지어는 마기의 가닥까지. 전부 종잇장처럼 간단히 절단되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카델은 분명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다. 마력을 끌어모으는 낌새조차 없다. 그런데도 적군의 틈새로 비명이 흩어지며, 여기저기 공격당한 몸뚱이가 튀어 올랐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칼춤이라도 추고 있는 듯했다.

카델의 힘이 아니라고 하기엔, 그를 노리는 적들이 모조리 죽어 나가고 있었다. 카델을 공격하거나, 살기를 드러냈을 뿐인 적들까지 모두 동강 난다. 그의 주위로 정신없이 선혈이 튀었으나, 신기하게도 핏물은 카델을 적시지 못했다. 핏방울마저 유려하게 궤도를 틀어 그를 빗겨 나갔다.

이 기이한 현상을 일으키는 와중에도 침착하게 전술을 전달하며 가까이 오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었으니. 카델이 뭔가를 깨우친 것이리라.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체 어디에서 저런 힘이 나오는 것이란 말인가. 혼란스러워하는 단원들 사이, 루멘의 목소리가 빠져나왔다.

“아래를 봐. 대장의 그림자가…….”

루멘의 말을 따라 시선을 옮긴 가르엘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카델이 선 땅 위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 그것은 카델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길었고, 덩치가 컸으며, 팔다리의 움직임마저 따로 놀았다. 그 그림자의 형태를 더듬던 가르엘이 낮게 중얼거렸다.

“요젠 경의 그림자…….”

동료이기에 알 수 있다. 요젠의 모습을 한 그림자는 카델의 아래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카델을 둘러싼 검은 기운과 그를 보호하듯 난사하는 공격. 저 기함할 만한 힘은 전부 요젠의 것인 듯했다. 그러나 그가 평소처럼 은신하며 카델을 지키고 있는 것이라엔, 걸리는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렇게 해결하지 못한 의아함에 빠진 단원들을 뒤로한 채. 카델은 눈앞의 적이 아닌 하늘을 올려 보았다.

‘고위 마족이 아주 많네.’

언뜻 훑어도 스물이 넘는다. 저들 전원의 공략법을 알지는 못한다. 게임 속에서 직접 상대해본 고위 마족은 절반도 되지 못했으니. 나머지는 헬 모드에 추가된 적인 걸까? 어쩌면 컷신에 잠깐 등장하고 마는 고위 마족일 수도 있다.

정답이 무엇이든, 저들을 모두 쓰러뜨려야 마왕 성에 도달할 수 있음은 자명했다. 짧게 숨을 들이쉰 카델이 제 가슴께를 쓸며 속삭였다.

“힘들면 언제든 멈춰도 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카델은 요젠이 긍정의 답을 내놓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와 자신은, 한 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네가 날 위해 희생한대도 난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지 않아. 네 시체를 끌어안고 따라 죽을 거야.”

“……밖엔 네가 해야 할 많은 일이 있어.”

“그래. 하지만 네가 없으면 의미가 없어. 적린 기사단 중 누구 하나 빠져선 안 돼. 누구라도 쓰러져선 안 된다고. 그럼 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니까.”

대신 죽을 수 있게 해 달라는 요젠의 부탁을 무시했다. 마땅히 떠오르는 다른 방법이 없음에도 그랬다. 요젠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 수 있었지만, 그의 죽음만큼은 안 됐다.

그런 카델에게 요젠은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고, 카델은 답했다.

“몰라. 이대로라면 둘 다 죽겠지. 하지만 네 죽음을 딛고 탈출하는 것보다는 나아. 다른 사람들…… 특히 부하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어쩔 수 없잖아.”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를 살리자는 이야기는, ‘소수의 인원’에 단원들이 대입되는 순간 의미를 잃는다. 이기적이래도 괜찮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서 사랑하는 이들을 빼앗아 갈 수 없다.

참으로 무책임하고 한심한 대응이다. 요젠이 질려 한대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요젠의 반응은 카델의 예상을 빗나갔다.

“날 위해 전부 버리겠다는 거야? 나 하나만으로 만족한다고?”

“요젠……?”

습한 목소리와 조금씩 무게를 더해 가는 몸. 빠르게 크기를 키워 가는 웃음소리는, 묘하게 섬뜩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에게서 살기에 가까운 낯선 감정이 느껴졌다.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변화였다.

“요, 요젠. 잠깐만. 너무 무거워.”

단순히 요젠의 몸무게라기엔 카델을 짓누르는 압력이 과했다. 몸이 점점 반으로 접히며, 눌린 갈비뼈에서부터 극심한 통증이 번졌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카델이 힘겨워하며 여러 차례 도움을 구했으나, 요젠은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기뻐, 카델. 정말 기뻐…….”

대체 뭐가 그리 기쁘다는 것일까. 본인의 희생을 택하지 않은 게? 그런 선택을 할 바에야 같이 죽어 버리겠다는 객기가?

「기사 ‘요젠 바르딕타’의 호감도가 1 상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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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라도 난 것처럼 연달아 떠오르는 시스템 창에, 카델이 마른침을 삼켰다.

“사랑해, 카델. 나도야. 나도 너 하나만 있으면 돼. 내 세상에 너만 있으면 돼.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어.”

반복해서 차오르는 호감도가 징그러울 지경이었다. 끊임없이 눈앞을 메우는 시스템 창이 혼란스러웠고, 그러는 와중에도 몸을 덮친 무게감은 더욱 극심해졌다.

“요젠, 나 숨이……!”

짓눌린 몸뚱이가 끔찍한 고통을 호소했다. 일순 공포가 엄습해 오며, 부러진 갈비뼈가 내장을 꿰뚫는 듯한 아찔한 감각이 상체를 통과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기사 ‘요젠 바르딕타’ 한계 돌파 퀘스트 완료!」

「축하드립니다! 기사 ‘요젠 바르딕타’가 한계 돌파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최대 등급이 유지됩니다. 추가적인 능력치 상승 및 기술의 개수 제한이 해제됩니다.」

「기사 ‘요젠 바르딕타’가 운명의 궤도를 벗어납니다.」

「자체 수정 모드 진입. 정보 업데이트를 위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기사 ‘요젠 바르딕타’의 정보 열람이 일시적으로 제한됩니다.」

기대하지도 않던 시스템 창이 떠오름과 동시에, 조금 전까지 전신을 압박하던 무게감이 사라졌다. 밀린 숨을 다급히 몰아쉰 카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요젠! 하마터면……!”

진심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카델이 큰소리를 냈지만,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바로 그의 눈 앞에 펼쳐진 생경한 풍경 때문이었다.

“이게…….”

여전히 사위는 깜깜했으나,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저 어둡기만 하던 공간 속을 가득 메운 기운의 결. 이상할 정도로 선명한 스스로의 숨소리와 심장 고동. 제3의 눈이라도 뜨인 듯, 갑작스러운 변화에 카델이 입을 다물자.

[우린 하나가 된 거야. 내 목숨을 맡길게, 카델. 네가 날 받아들인다면, 나는 널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거야.]

익숙한 음성이 머릿속을 울리며, 공간을 채우던 기운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네가 살아 있는 한 나는 죽지 않아. 반대도 마찬가지지. 그러니까…… 우리는 영원히 살아가게 될 거야.]

요젠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제게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인지. 무엇 하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요젠이 제게 남긴 [불사의 맹언]은,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공간의 축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미로가 부서지며, 그 너머의 풍경이 들어찼을 때. 카델은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요젠이 보는 세상. 그가 맡긴 영혼은, 제게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비췄다.

‘밖에 나오니 더 어지럽네.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고.’

현재 자신의 모든 감각과 시선, 주위를 둘러싼 이들의 기척마저 요젠의 감시하에 있었다. 요젠은 선택한 대상의 그림자가 되어 모든 것을 지켜보았고, 그럼으로써 완벽하게 이어졌다.

그림자의 범위 내로 들어오는 이는 누가 됐든 카델 앞에 목숨을 내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아주 옅은 적의만 내보여도 요젠은 공격을 개시했다. 카델의 의지조차 끼어들지 못한다. 이것은 [불사의 맹언]을 지키기 위한 요젠의 본능이었으니.

때문에 [불사의 맹언]이 유지되는 동안, 카델은 모두와 떨어진 채 홀로 움직여야 했다. 오히려 그편이 편했다. 평소보다 10배는 예민해진 감각은 멀리 있는 생명체의 기척에도 섬세하게 반응했으니. 바로 옆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과민한 반응을 보이고 말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카델은 눈앞에 보이는 적과 그렇지 않은 적의 전투력까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녀석들이 가진 기운의 흐름과 활용법이 뻔하게 드러나니, 지금껏 요젠이 보였던 행동들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혼자 있기 좋아하는 습성이나, 적들의 등장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상대의 움직임을 누구보다 먼저 파악하는 능력. 이런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면, 둔감한 쪽이 더 이상했다.

‘지상의 적들은 별문제가 되지 않아. 이 정도라면 광역 마법으로 압도할 수 있을 테니까. 곧 도착할 동맹군에게 보조를 맡기면 돼. 결국 진짜 문제랄 건 두 가지 정도인데…….’

하나는 당연하게도 상공을 메운 고위 마족들. 그들은 여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채 부서진 미로와 붕괴의 범인인 카델의 힘을 주목하고 있다. 그 속에서 유독 익숙한 얼굴들을 훑어 낸 카델은 확신했다.

‘저 녀석들을 해치우면 마왕 성에 진입할 수 있어.’

게임 속 최종 스테이지에 진입하기 전. 플레이어는 모든 구간마다 고위 마족이 등장하는, 일명 ‘통곡의 벽’을 지나야 했다. 그 스테이지에선 잡졸마저 고위 마족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기사들의 능력치는 물론 장비와 아이템까지 최상의 상태를 갖춰야만 클리어가 가능했다.

물론 이건 스테이지가 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무리하게 공략을 시도하던 신여환 같은 이에게나 부합되는 조건이지만. 이후에도 웬만한 능력치론 절대 클리어할 수 없는, 최종 콘텐츠를 즐기기 위한 관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내 부하들의 능력치는 이미 최상이야. 한계 돌파도 완료했으니, 기사들의 능력은 문제가 될 게 없다. 황제를 꼬드겨 장비까지 최상으로 맞췄고, 가질 수 있는 아이템은 전부 얻었어. 변수라면 이 전투가 내가 겪었던 것보다 까다로운 헬 모드라는 점이지.’

사실 그 변수도 쿤라라는 존재의 개입으로 인해 위험성은 어느 정도 상쇄된다. 정말 큰 문제는 나머지 하나.

‘……15분 정도 남았나.’

미로를 부수는 동안 줄어든 카운트다운은 어느덧 15분 남짓이 남았을 뿐이다. 고작 15분 뒤에 하이론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이다.

‘쿤라는 카운트다운이 끝나는 즉시 하이론 님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라고 했어.’

미로가 무너지고, 코앞에는 적군이 벌 떼처럼 모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안전한 곳을 찾아야 할지 감은 잡히지 않았지만.

‘무조건 해내야 해.’

절대 하이론이 마계에서 숨을 거두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결심한 카델이 작게 속삭였다.

“15분 정도 시간이 필요해. 버틸 수 있겠어?”

[……버틸 수 있어.]

“좋아. 부탁할게, 요젠.”

요젠이 한계 돌파에 성공했다 한들, [불사의 맹언]은 그가 처음 시도하는 기술이다. 그 부작용이 어떠할지 가늠도 잡히지 않았으니. 무리하게 이어 가도록 놔둘 생각은 없었다.

‘그럼 나도 일단은…….’

요젠이 자신을 지켜 주는 동안, 선제공격을 개시해야 했다. 카델의 눈이 빠르게 움직이며, 상공의 한 점을 응시했다.

‘저 녀석부터 없애 볼까.’

길게 늘어진 흑발 사이사이 줄무늬처럼 뒤섞인 백발. 머리카락 색부터 눈에 띄는 저 고위 마족의 이름은 나비오라. 동족의 목숨을 치유술로 연명시키는 로렌스 하이웨일과는 달리, 그녀는 특수한 장막으로 동족을 보호하며 적들의 공격을 차단한다.

먼저 죽이지 못한다면, 아군의 공격은 저들에게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할 것이다. 나비오라와 시선이 마주쳤음을 느낀 카델이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게임 속에선 본인이 어떤 공격을 받아도 자기 동료에게 장막을 둘러 주는 게 우선이었지. 어디, 현실에서도 그런지 볼까?’

예고 없이 하늘을 뒤덮은 붉은 마법진. 일렁이는 술식 위로 [화마의 화살]이 장전되며, 고위 마족의 시선이 움직였다. 대량의 마력이 머리 위에서 움트고 있었으나, 그중 누구도 몸을 회피하려는 기색은 없었다.

이유야 뻔하다. 코웃음을 친 카델이 거침없이 불화살을 쏟아붓고. 날카로운 불꽃이 고위 마족들의 몸을 꿰뚫기 직전. 그들의 위로 피어난 마기의 덩어리가, 꽃잎처럼 전신을 감싸며 불꽃을 튕겨 냈다.

반투명한 마기가 무수한 불화살로부터 고위 마족들을 보호했다. 장막을 맞고 튕겨 나간 불화살들이 화려한 폭죽처럼 폭발했다.

카델의 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듯, 여유롭고 오만한 표정. 나비오라를 바라보던 카델이 아래로 손을 뻗었다.

‘너 때문에 여태 아껴 두고 있었어. 이걸 꺼내는 날이 오긴 하는구나.’

실로 오랜만에 [인벤토리]를 열어, 하나의 전리품을 꺼내 들었다. 곧 그의 손안으로 들어찬 한 송이의 꽃. 그것은 바로 ‘멘델 할리에프’를 무찌르고 얻은 [검은 꽃]이었다. 꽃잎에 닿은 모든 것을 분쇄하고 흡수하는 멘델의 능력이 담긴 아이템.

꽃을 든 카델이 꽃잎의 위로 가벼운 숨결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새까맣게 물든 꽃잎이 저항 없이 흩어지며, 바람 마력을 따라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나선형으로 솟아오른 꽃잎이 안착한 곳은 마족들을 감싼 장막 위.

후우우웅―

일순 낮은 울림이 번지며, 장막을 이루던 마기가 꽃잎 안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빠르게 부피가 줄어드는 장막에 고위 마족들이 동요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은 카델이 [화마의 화살]의 위력을 높였다.

깎여 나간 장막은 보수되지 못했고, 기운을 머금은 꽃잎은 더욱 맹렬하게 눈앞의 먹이를 흡수했다. 하나둘씩 어그러지는 장막의 틈새. 한층 강력해진 불화살이 마족들의 몸을 할퀴며 지나갔다.

공격이 통한 것을 확인한 카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나비오라를 향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을 보호할 기운까지 끌어모아 동족을 감싸려 할 것이다. 노리는 것은 바로 그때. 따로 준비 중인 [화련]을 쏘아 나비오라를 속박한 뒤, 제 앞으로 끌어 내려 한 방에 끝장낸다.

그것이 카델의 계획이었으나.

‘……뭐야. 왜 저래?’

나비오라는 동족을 보호하기는커녕, 완전히 넋이 나간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경악과 분노가 어지러이 뒤섞인 표정으로, 봐서는 안 될 것을 목격한 것처럼 파들파들 떨어 댔다.

취한 것처럼 몸을 흔들거리던 그녀가 이내 어딘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은 꽃잎. 망설임 없이 그것을 움켜쥔 나비오라가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멘델, 멘델, 나의 사랑……. 이 아름다운 꽃이 어째서…….”

카델은 영영 알지 못할 사실 하나. 멘델 할리에프와 나비오라는 일찍이 불멸의 사랑을 약속한 사이였다. 멘델이 인간계에 머무는 동안에도 나비오라는 한시도 그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제 반쪽의 운명을 깨닫고, 인간의 손에서 멘델의 유품이 사용되는 모습을 목격했다. 현재 나비오라의 심경이 어떠할지, 카델이 헤아릴 가능성은 없었다.

제 기운이 빨려 가는 것도 개의치 않고 꽃잎을 움켜쥔 그녀가 눈물 젖은 두 눈을 부릅떴다.

“저 인간입니다! 가장 먼저 저 인간을 죽여야 해요! 모두, 모두 저 인간을 공격하세요!”

정확히 카델을 가리킨 나비오라가 표독스럽게 외쳤다. 모든 고위 마족이 마왕도 아닌 그녀의 말을 따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카델의 힘을 의식하던 몇몇은, 그녀의 외침이 신호탄이라도 되듯 곧장 맹공을 쏟아부었다.

“자, 잠깐, 이렇게 공격이 몰리면……!”

나비오라를 공격하기 위해선 다른 고위 마족이 [화마의 화살]의 위력을 얕보고, 다른 쪽으로 주의를 분산해 주어야 했다. 그걸 위해 나비오라가 저들의 장막을 강화하길 기다린 것인데.

불화살 못지않게 쏟아지는 각종 마기와 무기, 마법의 향연에 카델이 황급히 장막을 둘렀다. 그 위를 덮은 암기가 몰아치는 공격을 모조리 튕겨 냈으나, 오랫동안 버틸 수는 없었다.

‘이런 식으로는 15분도 버티기 어려워. 대체 저 고위 마족은 왜 저러는 거야?’

스토리를 알지 못하는 카델로서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대장! 이쪽으로 넘어와!”

“단장, 위험해요!”

멀리서 대기하던 루멘과 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델은 제 명령을 따라 물러나 있던 아군을 흘기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외쳤다.

“놈들의 장막을 일시적으로 약화시켰어요! 이 틈에 고위 마족을 쳐야 합니다! 지상의 적들은 제게 맡기고, 전투에 집중하세요!”

당장 나비오라를 처리할 수 없다면, [검은 꽃]이 유지되는 동안만이라도 적의 수를 줄여야 했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카델의 선공으로 고위 마족까지 움직임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 이상, 15분이 지나기 전에 전세를 기울여야 했다.

이어지는 전투마다 이렇게 많은 적군이 몰려 있다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반에게는 그랬다. 잇따른 전투로 모아 놓은 피는 충분했고, 무리하게 일대일 전투에 돌입할 일도 없었으며, 가장 중요한 카델의 옆에는 아마도 요젠으로 추정되는 녀석이 붙어 있으니.

반은 거리낌 없이 오라를 개방했다. 그가 택한 기술은 [적색지대]. 느리게 떠오른 오라의 달이 어두운 마계의 하늘을 비추고. 거침없이 혈액을 흡수하는 인력에 적군이 당혹감을 드러냈다.

“이건 뭐지?”

“오라다……! 인간의 오라야!”

“광전사의 힘이라고……? 말도 안 돼, 광전사가 이 정도 오라를 다룰 순 없어! 뭔가 다른…….”

광전사를 처음 상대해 본 이도, 경험이 있는 이도. 다를 것 없는 혼란에 빠져 허둥댔다. 아군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맹렬한 공격이 하늘 위로 솟구치며, 장막이 무용해진 마족들은 서둘러 대응에 나섰다.

[적색지대]가 유지되는 동안 반의 움직임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를 향해 쏟아지는 공격은 오롯이 루멘과 라이돈이 감당해야 했다.

“내가 왜 여기서 반을 지켜 줘야 하는 거야? 내가 돕고 싶은 건 카델인데!”

“어차피 대장에게는 가까이 가지도 못하잖아. 잔말 말고 도와라.”

“날아서 가면 괜찮을지도 몰라. 가르엘, 네가 와서 반을 지켜. 난 그만 갈래.”

“그건 곤란합니다, 라이돈 경. 여러분 사이에 숨어서 은밀하게 치유술을 전개해야 하거든요. 좀 더 가까이 붙어서 절 가려 주시겠어요?”

“아아, 불쾌해! 짜증 나! 카델한테 가고 싶어!”

분리 불안의 강아지처럼 굴어 대는 라이돈의 투정 속에서도 전투는 이어졌다. 무수한 적과 아군이 뒤엉켜, 어느 공격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구분이 어려울 지경. 그들은 서로의 옆을 지키고, 쇄도하는 공격을 막아 내고, 가까운 적을 공격하는 것으로 전투를 이어 나갈 뿐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단원들의 시선은 틈틈이 카델을 향했으나.

“확실히, 요젠 경이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 능력이긴 하네요. 그 짧은 새에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요? 나중에 어떤 기술을 사용했던 건지 물어봐야겠어요.”

요젠의 것임이 분명한 그림자는 카델에게 접근하는 적들을 모조리 도륙하며, 효과적으로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공격 수단인 암기는 전혀 기척이 없었기에, 얼핏 카델의 주위로 원인 모를 유혈 사태가 벌어진 것처럼 비치기도 했다.

기사단 중에서도 가장 잠재력을 파악하기 어렵고, 알게 모르게 인정받는 강인한 단원이 카델의 곁을 지키고 있다. 그러니 나머지 단원들은 적을 공격하라는 카델의 명령에 충실할 의무가 있었다.

전투가 이어질수록 반의 오라, 루멘의 검기, 라이돈의 마력과 가르엘의 마기가 빛을 발했다. 당연한 수순이었으나, 그것은 좋지 못한 결과로 이어졌다. 몇 눈치 빠른 고위 마족이 적린 기사단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쯧.”

짧게 혀를 찬 루멘이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다. 그리고 다음 순간. 묵직한 덩어리가 지면을 내리찍으며, 우렁찬 울림을 퍼뜨렸다. 일순 뿌연 흙먼지가 시야를 가리고. 그 너머에 자리한 우람한 그림자가 느리게 상체를 세웠다.

“흥분되는구나……. 너희를 한 번에 찍어 누르면 얼마나 많은 피가 뿜어져 나올까? 상상만으로도 온몸이 찌릿찌릿하군!”

족히 그들의 2.5배는 되어 보이는 신장과 오우거와 다를 바 없는 체형. 걸레짝처럼 여기저기 뜯기고 구멍이 난 날개. 걸인처럼 추레한 꼴을 한 그의 손에는, 덩치와 꼭 맞는 한 쌍의 도끼가 들려 있었다.

장난처럼 휘두른 쌍도끼에서 마기가 실린 삭풍이 날아들었다. 그에 반사적으로 동료를 감싸는 장막을 둘러 준 라이돈이 인상을 구겼다.

“못생겼어.”

다행히 라이돈의 막말을 듣지 못한 듯, 패기롭게 도끼를 치켜든 그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빠르게 흡입한 공기가 폐부를 채우며, 고위 마족의 가슴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에 위험을 감지한 루멘이 모두에게 경고를 남기려 했으나.

후우우우우―

이어지는 힘찬 날숨이 어마어마한 강풍을 일으키며, 함께 내던진 도끼에 추진력을 보태 주었다. 교차한 쌍도끼가 눈앞의 단원들을 노리고. 가장 앞에 있던 루멘이 검기를 날려 도끼를 튕겨 내려 했으나.

“큿……!”

고위 마족의 날숨은 끊길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한계까지 가속이 붙은 도끼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검기를 뚫고 날아드는 도끼에 루멘이 검집을 들어 공격을 막아 냈다.

라이돈의 장막이 충격을 완화해 주었으나, 그럼에도 버거운 위력이었다. 버티는 건 불가능하다. 판단을 내린 루멘이 뒤를 돌아 피하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

가장 먼저 기술을 거두고 몸을 피해야 할 반. 그의 상태가 이상했다. 무식하게 끌어 올리던 오라가 힘없이 사그라지며, 탁하게 물든 눈빛이 허공을 응시했다. 옆에 있던 가르엘이 다급히 팔을 끌어당겨도 묵묵히 버틸 뿐. 자리에 못 박힌 반은 멍한 얼굴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의 끝을 따라간 루멘이 미간을 구겼다.

“하하, 너무 좋다. 역시 광전사들은 홀리기가 편하단 말이지. 자아, 잘생긴 인간. 내 목소리에 집중하렴.”

구불거리는 긴 흑발과 고혹적인 외모가 도드라지는 고위 마족. 그녀의 주위로 둥근 마기의 파동이 일자, 꿈쩍도 않던 반의 몸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움켜쥔 대검을 느리게 치켜들고, 뻣뻣한 고개를 돌렸다. 움직인 시선이 바라보는 이는 바로 옆에 선 가르엘.

“저 멍청한 녀석이……! 가르엘 경! 피하십쇼!”

루멘의 외침과 동시에, 반의 대검이 가르엘의 팔을 내리찍었다. 가까스로 공격을 피한 가르엘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고. 그들에게 잠시 한눈을 팔던 루멘은 한층 강해진 풍압을 버티지 못한 채 훅 떠밀렸다. 그런 와중에 간신히 빗겨 친 도끼가 단원들의 좌우로 처박히며 땅을 울렸다.

순식간에 와해된 기사단 사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흐으음, 전부 반반해. 너희들 모두 내 인형 컬렉션에 추가해야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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