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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떡하지.”
아무리 걸어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화염구를 띄워도 빛은 비치지 않고, 저 멀리 던져도 어딘가에 맞는 소리 하나 없이 그대로 소멸할 뿐이었다.
출구가 없다. 꼭 어둡고 드넓은 우주 속을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제 손을 맞잡은 온기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진즉에 미쳐 버렸을지도 몰랐다.
“나도 이런 곳은 처음이네. 공간의 윤곽을 잡는 게 너무 어려워. 꼭…… 사후 세계 같아.”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아득한 어둠. 요젠에게 있어, 이곳은 죽음의 경계선과 다를 게 없었다. 죽음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 같았다. 두렵지는 않다. 그는 언제나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아왔으니. 그저, 카델의 상태가 걱정될 뿐이었다.
“카델.”
“응?”
“힘들어? 조금 앉아서 쉴까?”
“아니야, 괜찮아. 쉴 틈이 어딨어. 어서 나가지 않으면 다음 전투에 합류하지 못할 텐데.”
씩씩하게 말은 하지만, 카델의 걸음 속도는 처음보다 현저히 느려졌다. 호흡도 희미해지고, 목소리에도 힘이 빠졌다. 심장의 고동마저 둔탁하다.
카델은 조금씩 의식을 잃어 가고 있었다.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차근차근. 요젠이 그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카델이 불안해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알아챈다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계속 여기에 머문다면 카델은 다시 쓰러질 거야. 그리고 어쩌면…… 영영 일어날 수 없을지도 모르지.’
이 공간은 특수했다. 어둠에 싸여 있다는 점뿐만이 아니었다. 사람의 신경을 둔감하게 만들어 정신을 몽롱하게 흩뜨리고, 의식의 불꽃을 하나둘씩 꺼뜨린다. 그렇게 모든 감각을 차단해 쓰러지게 만든 뒤엔.
‘결국 죽게 될 거야.’
벽 속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요젠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공간의 모든 요소가 죽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보통의 인간이 죽음과 밀접해져 좋을 것은 하등 없다. 서둘러 카델을 이곳에서 빼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근데 진짜 이상하다.”
“……어떤 게?”
“급한 상황이잖아. 조금 절망적이기도 하고. 그런데…… 마음이 편안해. 네가 곁에 있어선가?”
아마 아닐 것이다. 죽음과 밀접해질수록, 그 죽음이 기척 없이 은밀하게 다가올수록. 생의 끝은 되레 편안함을 안긴다. 길고 혹독했던 여정의 끝이 다가온다는 생각에 기쁨마저 느끼는 것이다.
요젠은 카델의 손을 강하게 그러쥐며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지만, 가슴은 전에 없이 촉박하게 조여들고 있었다.
“잠깐만, 카델. 멈춰 봐.”
“응? 왜?”
“여기서 잠깐만 쉬었다가 가자.”
요젠의 말에 카델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한시가 아까운 상황에서 휴식은 사치라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휴식을 취해야 할 만큼 피곤하지도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카델은 이내 알았다며 걸음을 멈췄다. 평소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는 요젠의 제안인 만큼, 그에게 잠시라도 시간을 주고 싶었다.
자리에 멈춘 둘은 자연스럽게 맞잡던 손을 놓고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전혀 피곤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걷기를 멈추니 몸이 뻐근해진 것이 느껴졌다.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이동하자. 어딘가에 분명 탈출의 단서가 있을 거야.”
뭉친 어깨를 주무르던 카델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도 스토리에 포함된 사건일까. 오롯이 자신의 실수로 벽 속에 빨려든 것이니, 어쩌면 게임 속에선 일반 기사들이 당하는 식으로 미로의 정체를 알렸을지도 모르겠다. 이러나저러나, 자신은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을 테지만.
“가까이 와 봐, 요젠. 너도 어깨 주물러 줄게.”
어느 정도 몸을 푼 카델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기다려도 손끝에 닿아 오는 것은 없었다.
“요젠?”
그의 이름을 불러도, 다시금 기다려 봐도. 반응은 돌아오지 않는다. 순식간에 오한이 들며, 등줄기로 소름이 끼쳤다. 더듬더듬 자리에서 일어난 카델이 큰 소리로 요젠의 이름을 외쳤다. 하지만.
“요젠! 어디에 있는 거야……?”
깊은 어둠 속에서, 요젠은 자취를 감췄다.
자신은 어디까지 카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사랑이 과연 다른 이들과 견주었을 때 부족함이 없을까. 막연히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은 다른 동료들보다 카델과 알고 지낸 시간이 짧다. 또한 카델이 동료들을 대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를 향한 동료들의 감정을 훔쳐볼 때마다. 자신은 카델의 첫 번째가 될 수 없음을 직감했다.
넓은 의미로 본다면 자신도 그의 첫 번째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유일한 첫 번째는 될 수 없었다. 지독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었다. 요젠은 카델의 유일한 사랑이 되고 싶었다. 독점욕은 나날이 몸집을 불렸다.
그 어두운 감정을 표출하지 않은 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저와 어깨를 나란히 한 동료들을 모조리 처치하면서까지 카델의 유일함이 되고 싶지는 않은 마음. 또 하나는, 자신의 집착을 깨달았을 때 보일 카델의 반응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요젠은 카델에 대한 마음을 억지로 통제하곤 했다. 그의 옆에 있는 모든 순간이 그저 벅차게 느껴질 때도. 달콤한 입맞춤에 버거운 황홀함이 차오를 때도. 정확히 절반의 감정을 떼어 무의식의 아래로 흘려보냈다.
켜켜이 쌓인 감정들을 영원히 꺼내 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있었는지조차 모르게, 은밀하게 숨겨 둘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 요젠은 제 모든 것을 뒤엎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마주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천 번을 죽어야 한대도, 카델을 위해서라면. 그의 미소 한 번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 카델을 위한 죽음은 그 상상만으로도 되레 기쁨이 샘솟는 일이었다. 소름 끼치는 감정이었고, 이것이 정상적인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았다.
그의 손짓 한 번에 자신은 기꺼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질 수 있다. 눈짓 한 번에 수천 명의 목숨을 덤덤히 앗아 갈 수 있다. 징그러웠다. 이 혐오스러운 감정을 카델이 알 리는 없었고, 결국 영원히 알 수 없을 테지.
‘이런 구조였구나.’
카델을 떠난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암기를 방출했다. 이 공간의 윤곽을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제 능력 내의,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암기를 방출했을 때의 이야기.
요젠은 공간의 윤곽을 파악하고, 탈출의 실마리를 찾을 때까지. 제 몸 안의 기운을 모조리 끄집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 말인즉슨, 공간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목숨을 걸겠다는 소리였다.
죽음의 각오는 때때로 막연한 절망에 한 줄기 빛을 내린다. 요젠은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암기를 아무리 방출해도 공간의 끝에 닿을 수 없었던 이유는, 이곳이 무한의 차원이라서가 아니다. 그의 기운은 아주 교묘히 궤도를 틀어, 똑같은 곳을 끊임없이 배회하고 있었다.
피를 쏟아 내는 것처럼 무식하게 기운을 방출하지 않았더라면, 그 기운의 주인이 요젠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미세한 힘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뭔가가 내 기운이 뻗어 나가는 걸 막고 있어. 만약 이 힘을 거스를 수만 있다면…….’
같은 곳을 배회하던 암기의 양을 폭발적으로 늘려, 정체불명의 힘을 거스르고 제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다면. 요젠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는 좀 전보다도 무분별하게 암기를 쏟아 냈다. 제 몸의 한계, 사지가 찢길 듯 흉포한 고통, 모든 요소를 무시한 채 공간을 지배한 힘을 깨부수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래야 카델이 살 수 있을 테니까.
“…….”
부릅뜬 눈꺼풀 너머로 새까만 암기의 구체가 번들거렸다. 새하얀 피부 위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암기가 기이한 분위기를 풍겼다.
몸을 타고 흐르는 기운이 늘어날수록, 미동 없던 육체에 떨림이 더해졌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토록 많은 양의 암기를 토해 내듯 뱉어 본 적은 없었다. 그의 기술은 언제나 세세한 계산 아래 이루어졌다. 그 어느 순간에도 최소한의 이성을 남겨 두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그랬기에 더더욱, 지금의 고통이 생경했다. 입 안에서 피비린내가 맴돌고, 두꺼운 핏줄기가 턱 아래를 타고 흐르는 감각이 생생했다.
한없이 괴롭다. 하지만 제 몸이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 요젠은 전에 없던 쾌락을 느꼈다. 제 죽음으로서 카델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이 역설적이고도 잔인한 상황이 되레 즐거웠다.
이 선택으로 자신은 카델의 영원한 첫 번째가 되리라. 그의 가슴속 깊이 흉터처럼 새겨진 채 영영 사라지지 않으리라.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고통을 참으려 꾹 다물린 입술이 미소를 따라 하듯 기이하게 비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