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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어두웠다. 어떠한 소리도, 냄새도, 촉감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마저 잘 실감이 나지 않아, 처음 이곳에 들어선 요젠은 자신의 죽음을 의심했었다. 하지만 몇 분의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깨달았다.
모든 감각이 흐려진, 공허하기 짝이 없는 공간. 이곳이 벽 너머의 장소였다. 탈출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이 아득한 암흑이 두렵느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반대였다.
‘편안해.’
요젠은 이곳에서 깊은 안정감을 얻었다. 일평생을 자신을 둘러싼 자극에 반응하며,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받아들여 온 그였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었고, 그것이 삶의 방식이 된 지도 오래.
그랬기에 그를 둘러싼 이 환경이 너무도 평온하게 느껴졌다. 날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는 지극히 고요한 공간. 금방이라도 단잠에 빠져들 것처럼 요젠의 몸과 마음이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바닥도, 천장도 없는 공간에 누워 그저 존재했다. 주변의 어느 것에도 신경 쓰지 않고, 이 순간의 적막을 즐겼다.
이상하게도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뭔가를 잊고 있다는 의식의 자국만이 어렴풋하게 흔적을 남겼을 뿐.
요젠은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이곳에 머물러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의 고통은 모조리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 여기던 순간이었다.
“…….”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달갑지 않은 기척이 느껴졌다. 아주 작은 기운이 아른거렸으나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 것을 일일이 구분하고 있기에, 요젠은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무뎌져 있었다.
무시하고 이 평화를 즐기자. 가만히 두면 언젠간 사라질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누워 있으려 해도, 작고 미약한 기운이 계속해서 요젠의 신경을 거슬렀다.
결국 요젠은 편안히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온통 어두운 공간이었으나, 어둠은 요젠에게서 아무것도 앗아 갈 수 없었다.
조금씩 걸음을 옮기는 그에게선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저 거슬리는 기운을 없애고, 다시 좀 전의 평화를 차지하겠다는 옅은 의욕만이 아른거릴 뿐.
그렇게 나아간 곳에 자리한 것은.
“이건…….”
‘그것’의 존재를 느낀 순간,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던 머릿속에 희미한 섬광이 번뜩였다. 천천히 몸을 구부린 요젠이 아래에 쓰러진 ‘그것’의 위에 손을 올렸다.
안쓰럽게 웅크린 몸에는 힘이 없었고, 고른 숨을 따라 가슴팍이 작게 오르내렸다. 잠시 ‘그것’을 어루만지던 요젠은 계속해서 신경을 거스르던 기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기운의 주인은 ‘그것’이 아니었다.
목걸이. ‘그것’이 매달고 있던 목걸이의 펜던트에서부터 작은 불덩이처럼 뜨거운 기운이 아른거렸다. 요젠은 거슬리는 기운을 처단하려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요, 젠…….”
‘그것’이 꿍얼거리며 제 이름을 부르자, 거침없던 손길이 멎었다. 별것 아닌 목소리였다. 그저 이름을 부를 뿐인, 의식도 채 돌아오지 않은 자의 중얼거림. 그런데도 일순,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만큼 요란스럽게 심장이 뛰었다.
그 감정은 공포에 가까웠다. 살짝 움츠러든 손끝이 펜던트에서 멀어지며, 다시 ‘그것’을 더듬었다. 부드러운 피부 위를 거닐며 조심스럽게 윤곽을 그려 냈다.
‘그것’의 윤곽은 요젠의 머릿속에 온기를 남긴 채 차근차근 그려졌다. 자그마한 얼굴에 꼭꼭 들어찬 이목구비, 얇고 기다란 목, 곧게 뻗은 쇄골, 둥근 어깨뼈, 얇고 단단한 팔과 군살 없는 허리, 폭이 좁고 기다란 다리, 가느다란 발목.
짧았던 음성과 머릿속의 윤곽이 어우러지며, 하나의 존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여전히 움직임 없이 쓰러져 있었으나, 아주 간단히 요젠의 마음을 닦아 냈다. 평온함을 걷어 내고, 평화를 깨부수고, 건조하고 덤덤한 감정에 파문을 일게 했다.
‘그것’을 그려 내면 그려 낼수록, 요젠은 동요했다. 이내 짧게 숨을 들이쉰 그가 완전히 몸을 낮춰 ‘그것’을 끌어안았다. 조심스럽게 ‘그것’의 어깨를 끌어안아 제 가슴팍에 기대게 한 요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여기 있어, 카델. 어쩌다 여기 와 버린 거야…….”
이제껏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 이상할 만큼, 카델의 존재는 요젠의 감정을 사정없이 요동치게 만들었다. 축 늘어진 몸을 단단히 끌어안은 요젠이 그의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규칙적인 박동을 몇 번이고 확인한 그가 그대로 몸을 일으켜 카델을 안아 들었다. 이곳에 평생을 머물러도 좋다는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카델이 있는 한, 자신은 이 고요한 어둠 속에 머무를 수 없었으므로.
“단장님!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제발, 카델, 안 돼……!”
절망하는 가르엘의 얼굴이 어둠에 흐려지고, 벽 안쪽으로 완전히 스며든 순간. 카델이 느낀 감정은 공포나 두려움 따위가 아니었다. 미약한 당혹감과 짙은 기대감. 이 너머에 요젠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고, 그를 찾아 함께 탈출하겠다는 포부가 피어났다.
30분. 그 안에 벽을 부수고 나가겠노라.
「제거까지 남은 시간: 0시간 45분 24초」
기억보다 10분은 줄어든 시간.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시스템 창에, 카델은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몇 차례 눈을 깜빡이며 너머의 풍경을 담아내던 그가 작게 미간을 좁혔다.
이곳은 꼭 시스템이 만들어 낸 ‘무의 공간’을 연상케 했다. 그랬기에 사방이 새까만 암흑임에도 별다른 두려움 없이 적응할 수 있었다.
더듬더듬 어둠을 짚고 상체를 일으키자,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어?”
“요젠? 어, 어디…….”
바로 코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옴에도, 시야 속에 담기는 것은 없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걸까. 그리 생각하며 먼 곳을 내다보았으나, 암흑 속에선 단순한 거리감마저 헤아릴 수 없었다.
당황한 카델이 팔을 허우적대자 무언가가 그의 손에 부드럽게 감겨 왔다.
“여기 있어.”
손을 꽉 움켜쥐는 악력이 익숙했다. 여전히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카델은 제 손을 맞잡은 이가 요젠임을 확신했다.
“조금 더 가까이 와 봐. 아무것도 안 보여.”
카델의 말에 곧장 다가온 온기가 그를 한 품 가득 안아 왔다. 더듬더듬 손을 뻗어 요젠의 등을 감싸니 귓가로 낮은 웃음소리가 간지럽게 번졌다.
“이렇게 가까이 있어도 안 보이는 걸 보면, 뭘 해도 안 보이나 보다.”
“불편해?”
“조금. 네 앞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난 아무렇지 않아.”
꽉 끌어안아 답답할 만할 텐데도, 카델은 묵묵히 요젠의 품에서 그의 온기를 느꼈다. 불안한 어둠 속에서 그의 존재가 유일한 안정이었다. 잠시 요젠에게 안긴 채 의식을 정돈하던 카델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여기가 미로의 벽 안쪽인 것 같지?”
“응. 그런 것 같아.”
“난 아무것도 안 보인다 치고. 넌 뭔가 찾은 게 있어? 길이라든가, 출구라든가. 나보다 먼저 들어왔잖아.”
“이곳에 길은 없어.”
장담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 길뿐만이 아니다. 차원의 개념조차 희미해지는 암흑 속에서, 의미 있는 것은 없었다.
요젠의 단언에 카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럼 어떻게 나가지?”
“잘 모르겠어.”
그 말밖엔 할 수 없었다. 쓰러진 카델을 안고 하염없이 걸어 나갔을 때부터, 결국 포기하고 그를 제 옆에 눕혔을 때까지. 끊임없이 탈출 방법을 고민해 보았지만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단검을 휘둘러 봤자 허공을 할퀼 뿐이다. 암기를 퍼뜨린다 해도 이 암흑의 막연함을 실감할 뿐이다.
도통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공간 속에서, 놀랍게도 요젠은 별다른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이대로 카델을 끌어안고 평생을 누워만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카델은 그것을 원치 않을 테지만.
“우릴 기다리고 있을까?”
요젠의 물음에 카델이 고개를 움직였다. 이쯤에 있을 요젠의 얼굴을 가늠하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어루만졌다. 엇나간 손길이 뺨이 아닌 눈가를 쓸었다. 눈꺼풀에 난 기다란 흉터를 따라 쭉 내려가자, 가볍게 다물린 입술의 굴곡이 느껴졌다.
“가르엘에겐 네 수색은 내가 맡을 테니 동맹군과 함께 미로를 탈출하라고 했어. 잘 따라 줄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에서 벽에 빨려 들어갔거든. 놀랐을 거야.”
요젠은 입술의 표피를 간질이는 손길을 느끼다, 작게 입을 벌려 손끝을 가볍게 깨물었다. 그에 카델의 입에서 상황에 맞지 않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공간은 이상했다. 아득하게 펼쳐진 어둠이 어지러우면서도, 동시에 편안했다. 어쩌면 공간이 아닌 함께 있는 사람의 영향일지도 몰랐다.
“뭐가 됐든 어서 나가야겠네. 그렇지?”
“응. 미로를 벗어나면 성의 정원이 나올 거야. 바로 정원을 가로지르려면 서둘러야 해. ……일어나자. 길이 없어도 여기 가만히 누워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요젠의 품에서 한참을 꾸물거리던 카델이 살짝 몸을 떼어 냈다. 먼저 일어난 요젠이 카델의 팔을 잡고 그를 직접 일으켜 주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출구가 갑자기 생겨날 리는 없을 테지만, 카델의 뜻이라면 굳이 딴지를 걸고 싶지 않았다.
“기분 이상하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감고 있는 것 같아.”
요젠의 손을 단단히 그러쥔 채 조심스럽게 발을 뻗었다. ‘무의 공간’ 역시 사방이 어둠으로 가득했지만, 그곳엔 환한 시스템 창이 있다.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도 있고. 이곳처럼 한 걸음 떼기가 망설여질 만큼 불확실한 면은 없었다.
카델은 생경한 감각 속을 헤매며 허우적거리듯 발을 뻗었다.
“넌 항상 이렇게 생활하는 거야? 대단하네.”
“익숙해. 이전과 특별히 다른 점도 느끼지 못하겠고.”
“후회한 적은 없어?”
평소라면 섣불리 꺼내지 못했을 말이, 지금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쉽게 흘러나왔다. 한 박자 늦게 멈칫한 카델이 질문을 철회하려 했으나, 그보다 요젠의 대답이 더 빨랐다.
“없었어. 널 만나기 전까지는, 내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
힘을 준 손끝이 손등을 문질렀다. 카델은 보이지 않음에도 시선을 옮겨 요젠을 바라보려 했고, 요젠은 그런 카델에게 화답하듯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뾰족한 코끝이 카델의 뺨과 관자놀이 언저리를 간지럽히듯 맴돌고. 나직한 속삭임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네 모습을 보고 싶어. 네가 웃는 얼굴, 그 너머의 풍경을 전부. 네 작은 행동 하나에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게 바뀌는지, 그 반짝임을 내 눈으로 담아내고 싶어.”
“…….”
“그래서 지금은, 살짝 후회해. 한쪽 눈 정도는 남겨 둘걸, 하고.”
말끝에서 바스러지는 옅은 웃음기에, 카델이 맞잡은 손을 비틀어 빼냈다. 그러고는 멀어지려는 요젠의 얼굴을 붙들어, 아무렇게나 입술을 가져갔다. 완전히 다른 곳에 안착한 입술이 사랑스럽다는 듯, 작게 웃은 그가 한 손으로 카델의 얼굴을 쥐고 제자리를 찾아 주었다.
가벼운 입맞춤은 오로지 원초적인 이끌림을 따라 한 단계씩 뜨겁게 달아올랐다. 카델은 제가 어딜 만지는지도 알지 못한 채 함부로 손을 뻗었고, 요젠은 그 당돌한 손짓을 모두 받아들이며 다정하게 카델을 쓰다듬었다.
마계의 미로 속에 갇힌 주제에, 카델이 제 세계에 방문한 것 같다는 속 편한 감상을 남겼다. 자신의 세상에 들어온 카델은 아주 서툴고, 솔직했으며, 건조한 어둠조차 황홀한 색채로 물들였다.
네가 등불이라면 난 언제까지고 행복한 여행을 할 수 있을 텐데. 꿈같은 상상을 하며, 달뜬 호흡 속을 파고들었다. 카델이 현실을 잊을 수 있다면, 자신은 언제까지고 이 순간을 이어 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