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9화 (429/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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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시의 말대로, 10여 분가량을 나아가자 거대한 미로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캐시의 언질이 없었다면 미로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카델은 눈앞에 드리운 칙칙한 벽을 올려 보며 작게 입을 벌렸다. 그 높이도, 너비도 쉬이 짐작할 수 없다. 미로의 벽은 아득한 크기를 자랑하며 성벽처럼 솟아 있었다. 캐시가 안내한 미로의 입구 또한 황당할 정도로 웅장했다.

“거대한 마물이나 마족이 드나들기 위해 이렇게 커다란 입구를 뚫은 걸까요?”

나지막이 감탄한 가르엘이 손끝으로 미로의 벽면을 쓸었다. 잠시 촉감을 음미하듯 벽을 만졌던 손끝을 문지른 그가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희미하게 마기가 느껴져요. 염려했던 대로 평범한 미로는 아닌 것 같군요.”

“……출입자의 기운을 감지하기라도 하면 성가셔지는데 말이지.”

마기로 이루어진 미로라면, 뭔가의 장치가 설치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카델이 짧게 혀를 차자 옆에 있던 캐시가 어색하게 끼어들었다.

“아마 그런 기능은 없을 거야. 이 미로는 그러니까, 성에 발을 들여도 좋은 정도의 마족을 구분해 내기 위한 일종의 관문…….”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증명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렇게나 지껄이지 마라, 마족.”

반의 날카로운 대꾸에 캐시가 뻘쭘하게 입을 다물었다. 카델은 힘없이 물러나는 캐시를 무감하게 지켜보다, 꾸며 낸 미소와 함께 말했다.

“캐시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게 사실이겠지. 마계의 일은 우리보다 훨씬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믿고 들어가 보자.”

다정한 목소리에 주눅 들었던 캐시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카델은 캐시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리곤,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 가르엘과 모들렌에게 속삭였다.

“암흑 마력으로 가려 줄 테니, 미로에 진입하는 즉시 마력을 퍼뜨려요. 마계 마법진이나 특수한 함정이 없는지 확인해야겠어요.”

미로의 내부는 꼭 어두운 황천의 길목 같았다. 빛 한 점 없는 새까만 시야에 짙은 안개까지 끼어 한 발을 내딛기조차 망설여졌고, 어디선가 울음소리를 닮은 기이한 바람이 불어왔다.

카델은 작은 불덩이를 띄운 채 밧줄의 당김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감지되는 함정이 없어요, 단장님. 저 마족의 말이 사실이었나 본데요.”

“……모들렌 경도 같은 의견인가요?”

“네. 걸리는 게 없어요. 최대한 적은 양의 마력을 뿌렸다는 걸 감안해도……. 위험한 함정이 숨겨져 있는 것 같진 않네요.”

“잠깐만요, 단장님. 지금 제 말만으로는 확신을 못 하겠다는 건가요? 이거 서운한데요. 저만큼 신뢰를 줄 만한 인물이 어디 있다고요.”

섭섭함을 표출하는 가르엘의 목소리에도 카델의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캐시가 정말 사실을 말했다고?’

그에게 라이돈을 맡기고, 밧줄에 의지해 미로를 통과하고 있으면서도. 카델은 캐시를 믿을 수 없었다.

죽는 게 무섭다고 동족을 배신하는 고위 마족이라니. 지금껏 카델이 겪어 온 고위 마족은 마계의 해방을 위해서라면 스스로 혀를 깨무는 것도 개의치 않아 할 녀석들이었다.

‘게다가 캐시는 헬 모드에서 새로 추가된 적이잖아.’

게임의 스토리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인간의 편이 된 마족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다. 그런 마족이 있었다면 매출에 미친 회사가 녀석을 카드로 만들어 팔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만약 헬 모드에서 새로운 스토리가 파생되고, 그 각본에 등장한 캐시가 최초의 마족 기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캐시가 마왕 성 진입을 돕는 걸 시스템이 가만 놔둘 리 없어.’

마족을 불변의 적으로 두어 전쟁을 반복시켜야 하는 이세계 신에게, 인간과 마족의 통합은 가능성의 씨앗조차 있어선 안 되는 일. 때문에 카델은 캐시를 의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분명히 배신할 거야. 문제는 그 배신의 타이밍이 언제냐인데…….’

당장 미로를 무사히 빠져나간다 해도, 그것이 캐시를 완전히 믿을 만한 이유는 되지 못한다. 오히려 미로를 탈출한 후에 결정적인 한 방을 먹일 가능성이 컸다.

“……일단 탐색은 계속 진행해 주세요. 가르엘, 너도.”

“이런 서운한 마음을 안고 말인가요?”

과장된 섭섭함에 그제야 카델의 시선이 움직였다. 카델은 부러 속상한 티를 내는 가르엘의 얼굴로 손을 뻗고는, 살짝 삐뚤어진 가면을 고쳐 주었다.

“서운해할 이유가 없는데. 내 마음은 네가 가장 잘 알잖아.”

“……비겁하네요.”

“조금만 봐줘. 이 칙칙한 미로에서 한시라도 빨리, 무사하게 벗어나고 싶어서 그래.”

카델의 옅은 미소에 가르엘의 입꼬리도 자연스럽게 말려 올라갔다.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 두 남자를 힐끔거리던 모들렌은, 슬쩍 입을 가린 채 미간을 좁혔다. 자신의 옛 단장이 사랑에 빠져 투정을 부려 대는 모습이라니. 영 속이 메스꺼웠다.

“카델, 근처에서 기척이 느껴져.”

한편, 뒤편에서 신중하게 걸음을 옮기던 요젠. 그가 단숨에 카델의 옆으로 이동해 경고했다. 그에 곧장 전진을 멈춘 카델이 목소리를 낮췄다.

“기척? 몇 명이나?”

“하나.”

“위험해 보여?”

“위험하다기보단…… 이상해.”

“어떤 점이?”

“암기를 퍼뜨리는 데 한계가 있어서 상대의 형태까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어. 하지만 분명 계속 움직이고 있거든. 그런데도 위치가 바뀌지 않아.”

“제자리 뛰기라도 하고 있다는 말이야?”

“……어쩌면 그럴지도.”

이 음습하고 좁다란 미로 속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는 적이라니.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가만히 있다면 굳이 건드릴 필요는 없지. 여긴 마물과 마족도 다니는 곳이니까. 서로 길이 엇갈릴 수도 있어. 일단 내 옆에서 같이 걷자, 요젠.”

카델은 그새 팽팽해진 밧줄을 따라 걸음을 재개했다. 요젠은 그의 옆에서 자신이 발견한 적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그것은 여전히 움직임이 소란했고, 얼핏 공포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저 너머에 있는 것은 마계의 존재가 확실하다. 지금이라면 인간의 존재도 눈치채지 못했을 텐데. 놈이 내뿜는 불안의 감정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요젠의 의아함이 커지는 동안, 너머의 기척 또한 점점 선명해졌다.

“……근처에 있어.”

“성가셔지겠네.”

앞에 놓인 길은 일직선이다. 적과의 대면을 피할 구석이 없었다. 짧게 혀를 찬 카델이 마력을 끌어 올렸다. 적이 인간을 발견하고 뭔가의 신호를 보내기 전, 단박에 해치워야 했다.

하지만 요젠은 공격을 준비하는 카델의 앞에 팔을 뻗어 그를 저지했다.

“내가 조용히 처리할게. 여기서 기다려.”

“……괜찮겠어?”

“응.”

적이 강할지도 모른다느니, 그래도 동료를 데리고 가라느니 따위의 걱정은 쓸모없었다. 카델은 군말 없이 요젠을 앞세워 보낸 뒤, 밧줄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이동을 멈춰 달라는 신호였다.

‘위치는 여전히 그대로야.’

열 걸음 앞에 암기를 흩뿌리며, 함정이나 은신의 가능성을 셈했다. 하지만 요젠이 놈의 코앞까지 당도한 순간에도. 녀석은 여전히 위치를 옮기지 않았다. 아니, 옮길 수 없었다.

“…….”

요젠의 암기가 앞에 자리한 적의 형태를 더듬었다. 그것은 마족의 하반신이었다. 상반신이 벽에 꽂힌 마족은 두 다리만 덜렁 내놓은 채 미친 듯이 바둥거리고 있었다. 그 짤막한 두 다리가 조금씩 벽 안쪽으로 빨려 가는 것이 느껴졌다.

요젠은 벽의 위로 암기를 덧대었다. 마족을 더 많이 집어삼킬수록, 벽에서 느껴지는 마기의 농도가 미세하게 높아졌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요젠이 단검을 꺼내 들었다. 날카로운 검날이 노리는 것은 마족의 하반신이 아니다.

미로의 벽. 웬만한 공격으로는 흠집조차 나지 않는다는 벽의 위로, 단검이 말끔히 처박혔다. 일말의 균열도 생기지 않고, 마치 빵을 가르듯 부드럽게. 벽의 위로 단검을 밀어 넣던 요젠이 서서히 미간을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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