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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들렌 단장님! 무사하셨군요!”
“피에르, 도넌! 다친 곳은 없나?”
“후방에서 치유술을 전개하고 있어요. 부상자들은 치유가 완료되는 대로 다시 전투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장님의 뒤쪽에는……. 역시! 제국군이 도착했군요!”
토토가 감싼 전장의 중심부. 북쪽의 인원이 효과적으로 적들의 주의를 끌며, 절반 이상의 적군이 빠져나갔다. 그 덕에 동맹군들은 뒤늦게 부상자들을 빼내 후퇴할 수 있었다.
토토의 급소를 베고 빠져나온 탓에 숲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으나, 토토의 몸체가 아닌 중심부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제국군은 서둘러 남은 부상자를 후방으로 옮기거나, 곧장 전투에 합세해 적군의 수를 줄여 가기 시작했다.
“기회를 놓치지 마라! 적군의 뒤를 잡아! 놈들을 몰아세우는 거다!”
엑토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제국군이 무서운 기세로 적들의 틈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기사는 단연 루멘. 그는 제 옆에서 나란히 달리는 드레프를 일별하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제 실력에 압도당해 검술에 힘이 빠지진 않았나, 살짝 걱정되는군요.”
“웃기지 마……! 고작 알 몇 개 더 베어 냈다고 네 실력이 월등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아뇨, 그보다는…….”
마치 놀리기 쉬운 친척 동생이 생긴 것처럼, 빠르게 검기를 날린 루멘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슬슬 언행에 무게를 싣지 그래. 나보다 나이도 어린 데다, 실력도 부족한 것 같은데. 난 의외로 예의에 민감하거든.”
“뭣……!”
“싫으면 나보다 강해지든가.”
경악하는 드레프를 훌쩍 앞서간 루멘의 신형이 사라지고. 뒤이어 새겨지는 무수한 섬광에, 드레프가 분하다는 듯 이를 드러냈다.
“원래 저렇게 재수 없는 인간이었나?”
넓은 전장에 흩어져 있던 고위 마족이 숲속으로 속속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만큼 궁지에 몰렸던 동맹군에겐 여유가 생겼으나, 북쪽 인원에겐 버거운 공세가 쏟아졌다.
카델은 [화마의 화살]의 양을 늘렸고, 기사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마법사들을 지켰다. 기사들의 틈에는 소린과 반, 요젠, 라이돈까지 있다. 남쪽 인원과 동맹군이 적들의 뒤를 칠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놈들의 진영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일 터.
굳이 문제를 찾자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고위 마족의 존재였으나.
‘케키, 욘드, 마일러스……. 전부 상당한 실력의 고위 마족이야. 마계에서 만나는 적인 만큼 공략도 말도 안 되게 까다로운 녀석들이고. 그런데…….’
그들의 공세를 걱정할 틈은 없었다.
“이런, 젠장! 저 얼음 동상은 대체 뭐야?”
“얼음 동상이고 뭐고, 저길 봐. 요정이야. 그것도 그냥 평범한 요정이 아니라고.”
“제기랄, 막아! 아니, 부숴! 아니, 일단 저것 좀 막아 봐!”
[눈꽃서리왕]은 상공의 적들을 너무나 효과적으로 견제했다. 견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착실하게 그들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고위 마족이 쓰러지는 속도가 황당할 정도로 빨라, 지켜보는 카델의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이래도 괜찮은 거야……?’
호기롭게 [눈꽃서리왕]의 목을 노리던 고위 마족은 그대로 거대한 손아귀에 붙들려 얼어붙었다. 동족의 죽음에 흥분한 마족 하나가 원거리 공격을 실행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기다란 숨결 한 방에 놈의 몸은 물론, 쏟아지던 마기까지 그대로 조각되었다.
그들이 무슨 공격을 하고, 어떤 반응을 보여도. [눈꽃서리왕]은 조금도 무너지지 않으며 적을 압도했다.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다. 아군 사이에 이토록 든든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개인으로서도 단체로서도. 기쁘게 받아들일 일이었다.
그런데도 [눈꽃서리왕]을 바라보는 카델의 시선은 불안하기만 했다. 하이론이 마계의 적들을 몰아붙일수록 극심한 실력의 격차가 느껴졌다. 그의 끝 모를 한계가 카델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결국.
[저 요정을 멈춰라, 반쪽이.]
머릿속에서 쿤라의 음성이 번졌다. 이유를 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의 목소리와 동시에 연달아 떠오르는 시스템 창.
「제거까지 남은 시간: 3시간 30분 44초」
「제거까지 남은 시간: 3시간 11분 35초」
「제거까지 남은 시간: 2시간 53분 11초」
하이론을 위협하던 시스템의 카운트다운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한 번 눈을 깜빡일 때마다 수십 분이 사라진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다급히 몸을 돌린 카델이 하이론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쿠구구구구구―
토토의 죽음이 목전으로 다가오며, 최후의 발악을 하듯 숲의 땅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눈앞에 잔상이 비칠 만큼 극심한 진동에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결국 중심을 잃은 카델이 바닥에 엎어지고.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 보려 했으나, 흔들리는 몸은 속수무책이었다.
“하이론 님! 하이론……!”
간절한 외침조차 요란한 울림에 파묻혔다. 사색이 된 카델의 눈앞으로 끊임없이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그 숫자마저 제대로 읽히지 않으니, 그야말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씨발, 좀……!”
주체할 수 없는 속도로 줄어드는 시간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바닥에 달라붙어 흔들거리는 것뿐이다. 무력감과 끔찍한 공포, 두려움이 카델의 몸을 바짝 조였다. 조금씩 팔다리를 뻗어 엉금엉금 기어 나갔으나, 하이론과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렇게 거대한 절망감이 그의 등을 덮친 순간.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라.]
붉은 기운이 시야를 뒤덮으며, 힘없이 흔들리던 몸이 붕 떠올랐다. 진동의 여운으로 몸은 여전히 흔들리는 듯한 기분이었으나, 어지럽던 시야는 순식간에 또렷해졌다. 눈 안 가득 칙칙한 하늘을 담아낸 카델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쿤라……!”
[네가 저 요정을 막기 전에 시스템이 먼저 선수를 치겠군. 적절한 때에 등장하려고 했다만, 기다릴 틈을 안 주니.]
“그게 무슨……. 지금 뭘 하려는 거예요?”
카델을 등에 업고 날아오른 쿤라는, 발아래에 [눈꽃서리왕]이 자리할 만큼 고도를 높였다. 내려다본 지상에선 숲이 마구잡이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발작하듯 떨려 대는 숲은 그제야 하나의 생명체처럼 비쳤다. 그 거대 벌레는 착실하게 죽어 가고 있다.
문득 고개를 치켜들자, 덩그러니 떠오른 캐시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죽어 가는 토토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미안, 미안해, 토토…….”
가엾고 안쓰러운 모습이다. 하지만 그에게 동정의 마음을 나눠 줄 만큼 카델은 여유롭지 못했다. 쿤라의 비늘을 꽉 움켜쥔 그가 다시 고개를 내리고.
[마계에 내려오면 시스템이 이 몸에게 거는 제약의 힘이 크게 덜어진다. 이 몸이 네게 나눠 준 힘을 양껏 사용해도 지장이 없을 만큼 위험한 싸움이 벌어지기 때문이지.]
“그런 건 이미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이 전쟁에 초대받지 못한 자들까지 마음껏 활보해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큼직한 날갯짓이 훈풍을 일으키고, 살짝 벌린 입새로 뜨거운 화염이 이글거렸다. 쿤라는 허공을 맴돌듯 반 바퀴를 회전하더니, 이내 완전히 몸을 눕혀 직각으로 추락했다.
“으아아……!”
빠른 하강에 카델이 비늘 위로 바짝 몸을 붙이고. 쿤라의 숨결이 내리꽂듯 지상을 강타했다. 지상과 가까워질수록 화염의 세기가 거세졌고, 범위는 넓어졌다. [눈꽃서리왕]마저 집어삼킨 화마는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았다.
그에 당황한 카델이 기사들의 위로 장막을 두르려 했으나.
[아무것도 하지 마라, 반쪽이.]
“아니, 지금 당신이 인간들한테 불을 뿜고 있……!”
황당한 항변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쿤라는 숨결을 뱉어 전장을 어지럽히는 동시에, 아군의 위로 비늘 갑옷을 둘렀다. 그러고는 한계까지 낮춘 고도에서 휙 몸을 뒤집어, 대지와 배가 닿을 만큼 아슬아슬한 높이로 비행했다.
맨땅에 뜨거운 화염을 흩뿌리고, 한데 뭉친 지상의 마물에겐 발톱을 휘둘렀다. 예고에 없던 적룡의 폭주에 하이론은 [눈꽃서리왕]의 유지를 포기했다. 카델은 정신없이 적들을 도륙하는 쿤라의 위에서 소멸하는 [눈꽃서리왕]을 지켜보았다.
“쿤라, 하이론 님이 마법을 거뒀어요. 이제 그만하고…….”
[저 요정은 이 전쟁에 과도하게 개입했어. 이 세계의 신도, 수호자도, 뭣도 아닌 일개 요정 왕에 불과하다. 시스템이 놈의 건방을 참고 엄벌의 강도를 조절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북쪽에 몰려 있던 적들은 쿤라의 맹공을 버티지 못했다. 단숨에 허물어진 진영을 가차 없이 내버린 쿤라가 다시 고도를 높이고. 다음 타깃은 당황한 와중에도 적룡의 빈틈을 노리려 하는 고위 마족이었다.
[그러니 저 요정이 시스템에게 ‘제거’ 당하기 전. 요정의 공격이 비교적 약해 보이도록 꾸며야 한다. 쉽게 말해 시스템의 주의를 끌 또 다른 존재가 필요하단 거지.]
“그럼……. 잠깐만요, 쿤라.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그럼 당신이 위험해지는 거잖아요!”
[시스템이 요정에게 남은 시간을 알려 준다고 했지. 지금은 얼마나 남았지?]
쿤라의 물음에 그제야 다시 시간을 확인한 카델이 작게 인상을 구겼다. 남은 시간은 확연히 줄어들었지만, 더 이상 시간이 삭제되지는 않았다. 평범한 카운트다운으로 돌아온 시스템 창을 노려보던 카델이 입을 열었다.
“한 시간 정도요.”
[얼마 남지 않았군. 잘 들어라, 반쪽이. 난 한 시간이 지나기 전에 요정의 존재를 압도할 기술을 사용할 거다. 시스템이 제지하지 않고는 버티지 못할 기술이야. 그사이 너는 요정을 데리고 되도록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라.]
“안전한 곳이요……?”
[아무리 이세계의 신이라 한들,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고 이곳의 생명을 급사시킬 순 없어. 분명히 요정의 목숨이 위험해질 만한 상황이 벌어질 거다. 그 위험으로부터 요정을 지켜라. 그동안 난 시스템의 영향력을 내 쪽으로 집중시킬 테니.]
그것이 바로 쿤라가 하이론을 지킬 유일한 방법이었다. 시스템의 주의가 쿤라에게로 기운다면 그에게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이곳에서 카델 다음으로 시스템의 강한 통제를 받는 자를 찾는다면, 그건 바로 쿤라였으니까.
“……너무 위험해요. 만약 시스템이 당신을 다치게 하기라도 한다면…….”
[걱정하지 마라. 반쪽이, 네게 걱정을 받으면 영 기분이 나쁘거든.]
“뭐라고요?”
[비록 패배했으나, 한때는 이 세계의 유일무이한 수호신이었다. 네 결말도 지켜보지 못한 채로 쓰러지진 않아.]
그러니 넌 뒤돌아보지 말고 나아가라. 그리 말한 쿤라가 제게 달려는 고위 마족을 향해 거침없는 화마를 쏟아 냈다.
일순 하이론의 [눈꽃서리왕]이 완전히 잊힐 만큼, 힘 조절을 그만둔 쿤라의 위력은 대단했다. 순식간에 쑥대밭이 된 전장과 죽음을 맞이한 토토의 몸체. 까맣게 타들어 간 적들의 시체를 밟으며, 기사들은 자연스럽게 북쪽으로 모여들었다.
“다친 기사들은 이쪽으로! 부상이 심각한 자는 황혼 기사단이 유지 중인 ‘징벌의 문’을 타고 바깥으로 이동하십시오!”
부하들을 대동한 모들렌은 부상자를 치유하는 데 한창이었다. 하지만 가르엘은 그들을 돕지 않았다. 엑토와 모리톨에게는 이미 정체가 밝혀졌으나, 그렇다고 다른 이들의 앞에서까지 마기를 개방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그는 황혼 기사단의 곁에서 간단한 응급 처치를 도맡았다.
반과 루멘, 요젠은 근방을 돌며 살아남은 적이나 접근 중인 적들의 기척을 살폈다. 라이돈은 상당한 마력을 소모한 하이론의 옆에서 그가 기운을 갈무리하는 것을 도왔고, 엑토와 모리톨은 동맹군의 기사단장과 만나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했다.
마계로 내려오기 전, 지상에서 사투를 벌였던 또 다른 동맹군. 청혈 기사단, 암철 기사단과는 미리 연락을 취해 정비가 끝나는 대로 이동할 것을 약속받았으니. 그들과의 합류도 서둘러야 했다.
그렇게 모두가 간신히 되찾은 짧은 평화 속에서 재정비에 한창일 무렵. 카델은 까맣게 죽어 버린 숲속에서 쿤라를 붙들었다.
“왜 치유술을 받지 않겠다는 건데요!”
“이건 내 본체가 아니야. 기운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 기운이 입은 타격이 실체처럼 비칠 뿐이지, 내 본체는 멀쩡해. 대체 어디에 치유술을 받으란 말이지?”
“일단 어디라도 치유술을 받으면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이렇게 피가 많이 나는데…….”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앙상한 나무 기둥에 기대앉은 쿤라. 그의 얼굴은 흐르는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꼭 시스템의 본질을 파악하려다 피를 쏟은 채 힘없이 기절했던 카델의 모습처럼.
쿤라는 제 앞에 쭈그려 앉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카델을 응시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에 수심이 가득하니, 꼭 제가 못 할 짓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애초에 이런 무모한 선택을 한 이유가 카델의 불안을 덜어 주기 위함이었음에도.
무의식적으로 뻗은 손이 카델의 뺨 언저리를 맴돌았다. 카델은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고 걱정 담긴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맞췄다. 그 시선을 응시하는 대신, 그을린 뺨과 꾹 힘을 준 입술, 헝클어진 머리칼 따위를 훑어보았다. 무엇도 함부로 만지지 않고, 근방을 배회하던 손끝이 이내 카델의 미간을 지그시 눌러 가볍게 밀쳐 냈다.
“아, 뭐예요!”
“저 마족을 들이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만, 방심은 금물이다.”
“네? 갑자기 무슨…….”
생뚱맞은 소리와 함께 쿤라의 육체가 흩어지며, 붉은 기운이 펜던트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에 당황한 카델이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이제는 내려와도 되는 거지……?”
내내 싸움을 방관하던 캐시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