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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길 봐요, 카델. 마법진이에요.”
하이론의 말을 따라 시선을 옮긴 카델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유충만 가득하던 바닥에 난데없이 등장한 마법진. 어두운 마기를 뿜어내는 마법진의 안쪽이 점점 투명해진다 싶더니, 이내 숲의 정경을 비췄다. 그 너머에서 라이돈의 얼굴을 발견한 카델이 한달음에 마법진 앞으로 달려갔다.
“라이돈이에요! 그 옆에는…….”
“바깥에서 봤던 고위 마족이네요. 라이돈이 잘 설득한 모양이에요.”
마법진 너머로 보이는 라이돈은 눈물범벅이 된 캐시에게 무어라 얘기를 건네고 있었다. 캐시는 어떤 것에도 붙들려 있지 않았으나, 순순히 마법진을 가동하고, 라이돈과 대화했다.
‘대체 뭘 어떻게 설득한 거지……?’
바깥의 상황이 전혀 짐작 가지 않았으나, 탈출의 문을 열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카델은 한껏 기특함이 묻어 나오는 미소와 함께 하이론을 돌아보았다.
“사람들을 불러올게요. 하이론 님은 이곳에서 마법진을 지켜봐 주세요.”
“뭐? 우리 편이 돼?”
열린 마법진을 통해 무사히 벌레의 배 속을 탈출한 뒤. 가장 먼저 라이돈을 찾아간 카델이 그 옆에 선 캐시를 바라보며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라이돈은 한껏 기막혀하는 얼굴에 대고 당당하게 말했다.
“얜 그 거대 벌레 없이는 무용지물의 쓰레기나 다름없는 데다, 자길 지켜 줄 형제들도 다 죽었대. 하지만 살고는 싶으니까, 인간들을 풀어 준 죄로 자길 죽일 게 분명한 마왕을 배신하고 우릴 따르겠다는 거야. 그렇지, 못난이?”
꾸밈없고 직설적인 설명에 캐시가 푹 고개를 수그렸다.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고위 마족인 네가 인간들 편에 붙겠다고?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네가 무용지물의 쓰레기가 됐다고 마족에서 인간으로 변하는 건 아니잖아.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를 배신해서 에밀리아의 자비를 구할지 어떻게 알아.”
“……아니야.”
“말만으로는 믿지 못해. 네 진심을 증명해 봐.”
캐시가 숙였던 고개를 들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이 드러났다. 억울함이 잔뜩 묻어난 데다 눈물에 콧물에, 온통 새빨개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더 몰아붙이기가 미안해질 지경이었으나. 어찌 됐든 캐시는 고위 마족이다. 배신을 택했다고 바로 받아들이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믿을 건데? 너희는 내 형제를 죽이고, 토토도 죽이고, 동족을 다시 봉인시키겠다고 해. 그런데도 난 살고 싶으니까 너흴 돕기로 했어. 이 자체로 증명 아니야? 살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거라고!”
“생존을 위해 네가 누려 왔던 모든 걸 배신하겠다고?”
“그래! 난 죽는 게 죽을 만큼 무섭단 말이야!”
“그럼 목숨을 걸어.”
“뭐……?”
카델이 팔을 들어 가볍게 손짓하자, 요젠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라면 남쪽 인원과 벌레 토벌을 진행하고 있어야 하지만, 캐시의 존재에 찜찜함을 느낀 카델이 그를 북쪽으로 합류시킨 것이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캐시의 앞에서, 카델이 싸늘하게 말했다.
“네 몸속에 언제든 널 터뜨려 죽일 수 있는 기운을 심을 거야. 네가 배신의 낌새를 보이거나, 잘못된 정보를 알렸다는 판단이 서는 즉시. 넌 죽어.”
“그, 그게 무슨…….”
“대신 네가 진심으로 인간들의 편에 서서 인간계의 승리에 기여한다면.”
겁을 집어먹고 뒷걸음질 치는 캐시에게 성큼 발을 뻗었다. 카델은 제 눈높이와 엇비슷한 그와 똑바로 눈을 맞췄다.
“내가 널 지켜 줄게. 약속해.”
계산과 속셈이 가득한 눈빛을 하고서, 그 누구보다 다정한 미소를 짓는다. 제 앞에 드리운 산뜻한 얼굴에 캐시는 상황에 맞지 않는 감정을 느끼며 볼을 붉혔다.
“마, 마음대로 해. 난 이미 결심했으니까.”
“아하하! 못난이, 왜 얼굴을 붉혀? 그렇게 카델이 취향이야? 안 되겠어, 그냥 죽여 버릴까 봐.”
“그러지 마, 라이돈. 우선은 우리 편인 거잖아. 친절하게 대해 줘야지.”
카델이 요젠의 팔을 가볍게 건드리며 신호를 주자, 요젠이 캐시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하얀 손끝에서부터 피어난 암기가 흐르는 물처럼 캐시의 머릿속에 스며들고. 기묘한 감각에 눈살을 찌푸리는 캐시의 귓가로, 요젠의 낮은 음성이 맴돌았다.
“만약 카델을 배신한다면 넌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고통, 그보다 더 큰 고통 속에서 죽게 될 거야.”
“배신 안 한다니까……!”
작업을 마친 요젠이 손을 떼자, 캐시가 진저리를 치며 물러났다. 카델은 그런 캐시를 불러 하이론과 나머지 단원들이 모인 장소로 이동했다.
“결국 고위 마족 한 마리를 달고 다녀야 하는 건가요?”
맨 뒤에서 주춤거리는 캐시를 일별한 반이 짜증스레 말했다. 카델은 그런 캐시의 등을 밀어 무리의 중앙에 세우곤, 가볍게 미소 지었다.
“만약 배신한대도 쓸모는 많을 거야. 좋은 도구가 되어 줄 테니까, 다들 심각하게 날을 세우진 말자고. 그리고 캐시.”
“응……?”
“네가 인간 편에 붙었다는 게 일찍 알려져서 좋을 건 없어. 그러니 내가 신호를 보내기 전까진 제대로 몸을 숨기고 있도록 해.”
카델은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캐시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하이론에게 시선을 옮겼다.
“지금쯤 남쪽 인원이 벌레의 약점을 찾았을 거예요. 서둘러 마법을 전개하죠.”
“좋아요. 라이돈, 너도 이리 오렴.”
“마법이 전개되면 적들이 몰려올 거야. 반이랑 요젠은 소린 경에게 붙어서 최대한 지휘를 따라. 마법에 집중하는 동안은 신경 써 주기 어려울 테니까.”
소린이라면 어떤 돌발 상황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기사들을 지휘할 것이다. 그에게는 반과 요젠을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그렇게 카델과 라이돈, 하이론은 미리 봐 두었던 자리에서 적들을 교란할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카델은 특기인 화염 마법으로 적들을 공격해요. 라이돈과 저는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마법을 준비하죠.”
“준비가 끝나는 타이밍에 공격을 시작할게요.”
카델이 선택한 마법은 [화마의 화살]. 복잡하게 뒤엉킨 전장을 정리하기에 가장 적합한 마법이자, 카델이 자신 있어 하는 마법이기도 했다.
어렴풋한 함성과 비명이 난무하는 숲의 중심부. 그 위치를 가늠하며 하늘 위로 마력을 펼친 그가 두 부자의 신호를 기다리고. 하이론은 라이돈의 어깨를 감싼 채 살갑게 말했다.
“지금부터 네게 존재만 알려 줬을 뿐, 어떤 시범도, 설명도 해 주지 않았던 마법을 전개할 거란다.”
“그게 뭔데요?”
“[눈꽃서리왕]. 내가 직접 붙인 이름이지.”
모든 요정 왕에게는 스스로 술식을 만들어 개발해 낸 비기가 있다. 그것을 후계자에게 전수해, 자신의 비기가 후대의 요정 왕들에게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눈꽃서리왕]은 아직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은 하이론만의 비기.
살짝 놀란 듯한 라이돈의 앞에서, 하이론은 한쪽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위로 마력을 불어넣자 촘촘한 얼음 결정이 떠오르며 작게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이젠 알려 줄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만들어 내는 술식의 모든 것을 머릿속 깊이 각인시키렴.”
하이론이 가볍게 손을 털어 내자 얼음 결정이 지면으로 넓게 흩어졌다. 이어서 새겨지는 거대한 술식에, 라이돈의 눈동자가 바삐 움직였다.
하이론만의 비기. 자신이 온전히 기억해야만 비로소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마법. 그다지 느껴 볼 일 없던 막중한 부담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하이론은 그런 라이돈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을 주어 뭉친 근육을 풀어 주었다.
“네가 좋아했으면 좋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