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2화 (42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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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젠의 안내를 따라 기다란 몸체를 한참 내달린 결과. 적린 기사단은 엑토와 모리톨, 그리고 하이론을 한데 모을 수 있었다.

“만약 라이돈이 바깥에서 탈출 방법을 알아낸대도, 나가는 건 북쪽 인원만이에요. 남쪽 인원은 이곳에 남아 벌레를 해치운 뒤, 곧장 전장에 합류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도 하이론과 같은 의견이오. 숲을 가장한 이 거대한 벌레……. 당장은 전장에 접근하는 생물을 먹어 치우며 배를 불리고 있지만, 언제 전장을 조여들어 통째로 뒤엎을지 모르오. 위험 가능성을 남겨 둘 필요는 없지.”

“오랜만에 엑토 경과 뜻을 같이하는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북쪽의 인원은 첫 계획대로 진행하십쇼. 다 함께 벌레를 격퇴한다면 시간이야 단축되겠지만, 이 거대한 벌레의 죽음이 잠잠하게 진행될 리 없잖습니까. 어떻게든 적들이 낌새를 눈치채게 될 테니, 그전에 북쪽 인원이 시선을 끌어 줘야 합니다.”

북쪽 인원이 적을 교란하는 동안, 남쪽 인원은 거대 벌레를 격퇴. 그 뒤 탈출하여 당황하는 적의 허점을 노린다는 것이 그들의 새로운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 또한 탈출이 가능해야 실행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그럼 하이론 님. 저희는 따로 탈출법을 강구해 볼까요?”

남쪽 인원이 흩어진 아군을 모아 벌레의 토벌을 준비하는 동안, 북쪽 인원은 라이돈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다른 탈출법을 찾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하이론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라이돈을 믿고 기다려 보죠.”

“예? 하지만…….”

“라이돈은 의외로 설득에 능해요. 그러니 핀하이족을 인간들의 전장까지 끌고 온 게 아니겠어요?”

“…….”

“그 아이 나름의 요령이 있을 거랍니다. 그러니 저희도 흩어진 기사들을 모으고, 그들을 보호하는 데 주력하도록 해요. 여기서 인원이 더 줄어든다면 절망적이니까요.”

하이론은 찝찝해 보이는 카델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카델은 저와 함께 움직여요.”

이왕 기사들을 찾아 보호하기로 했다면, 마법사인 자신과 하이론은 흩어져 움직이는 편이 낫지 않은가. 그리 생각하면서도 카델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가 라이돈의 아버지이고, 도움을 받은 핀하이족의 왕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제거까지 남은 시간: 4시간 10분 7초」

‘약 네 시간 남았어. 저 시간 안에 쿤라가 하이론 님을 지킬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카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이론은 그런 카델을 끌고 어두운 벌레의 배 속을 나아갔다.

하이론은 카델을 만나 자초지종을 들은 즉시 [환언]을 통해 기사들에게 ‘불꽃으로 모이라’는 내용을 전달했다. 덕분에 둘은 불꽃의 방향으로 달려오는 기사들을 상당수 발견할 수 있었다.

발견한 기사들에게 장막을 두르고, 붙은 벌레를 떼어 주었다. 그렇게 차근차근 아군을 도우며, 하이론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대부분은 라이돈에 관한 이야기였다.

“라이돈은 어렸을 때부터 말을 잘 듣는 아이는 아니었어요. 고집도 셌고요. 그런데도 카델의 말은 순순히 듣더군요. 비결이 뭔가요?”

“음, 비결……이라고 할 만한 건 없어요. 사실 라이돈이 제 말이라고 전부 따르는 건 아니라서요.”

지금껏 라이돈이 말을 듣지 않아 일어난 해프닝이 몇 개던가. 헛웃음과 함께 말하자, 하이론이 이해한다는 듯 작게 웃었다.

“변명 같겠지만, 라이돈을 제멋대로 키운 적은 없어요. 오히려 엄하게 키웠죠.”

“그런데도 그렇게 자유분방한 성격인 걸 보면, 타고난 천성인가 봐요. 그런 모습이 라이돈하고 잘 어울리기도 하고요.”

“그런가요?”

“네. 애교도 많고, 장난도 잘 치고. 허구한 날 동료들을 괴롭히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제법 아껴요. 저도 처음엔 라이돈이 그런 면을 가지고 있을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지만요.”

애교도 많고, 장난도 잘 치고, 동료들을 아끼는 라이돈이라. 하이론은 한 번도 그런 라이돈의 모습을 본 적 없었다. 그가 보아 온 아들은 도가 지나친 장난을 일삼고, 상대의 기분은 생각하지 않는 농담을 폭력처럼 휘둘렀다. 농담으로도 성격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오랜 감금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분출하는 삐뚤어진 방식이라는 걸 알았기에. 어떤 때는 무시했고, 어떤 때는 따끔하게 혼을 냈다. 만약 자신도 카델처럼 라이돈을 사랑으로 보듬었다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가진 특별한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잠시 생각하던 하이론은 쓴웃음을 지었다. 카델이었기에 라이돈에게서 사랑을 끌어낸 것이다. 아들을 가둬 두기밖에 할 수 없던 자신은 영영 해내지 못했을 일.

“그날, 숲에 들어온 게 카델이라 다행이에요.”

“……네?”

“이 말은 해 둬야겠어요. 라이돈을 데리고 나갈 결심을 해 줘서 고마워요, 카델. 그 아이에게 자유를 안겨 주고, 이 무거운 운명을 함께 짊어져 줘서. 정말 고마워요.”

하이론은 자신을 바라보는 카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당황하던 카델이 이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잊지 마세요. 제가 라이돈을 데리고 나갈 수 있던 건, 전부 하이론 님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란 걸.”

진지한 목소리에 하이론의 눈이 살짝 벌어졌다. 결 좋은 머리칼에서 천천히 손을 떼어 낸 그가 꼭 라이돈을 닮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이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군요. 카델은.”

“흐어어엉! 흐어엉!”

“시끄러워! 한 번만 더 우는 소릴 내면 그냥 죽여 버릴 거야.”

“후읍……!”

현재, 캐시는 라이돈에게 뒷덜미를 붙들린 채 마법진 앞에 꿇어앉은 상태였다. 오직 자신의 마법으로만 토토의 배 속에 갇힌 인간들을 꺼내 올 수 있다는 정보를 넘긴 탓이었다. 당연하게도 라이돈은 정보를 얻은 후로도 캐시를 놔주지 않았고, 그는 강제로 인간들을 안전하게 꺼내 와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누나아아! 혀어어엉! 보고 싶어! 나 좀 도와줘!”

“지옥에 가면 볼 수 있을 텐데. 지금 보내 줄까?”

“흐아아아앙!”

“시끄럽다니까!”

마음 같아서는 이 요란스러운 고위 마족을 단박에 처치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탈출의 열쇠가 그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아 버린 이상, 일단은 참아 보는 수밖에 없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카델이 갇혀 있었으니.

때문에 라이돈은 극한의 인내력을 발휘해 제 방식대로 캐시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냥 풀어 주기만 해. 카델을 풀어 주면 넌 해치지 않고 놔줄게.”

“거짓마아알! 흐어어엉!”

“내가 왜 거짓말을 해?”

“날 죽일 거잖아! 날 죽이고 토토도 죽일 거잖아! 아니, 애초에 인간들을 풀어 주면 내가 마왕님에게 죽게 될 거야! 난 뭘 해도 죽어! 마계가 해방돼도 아무것도 누리지 못할 거야!”

캐시의 곡소리에 머리가 댕댕 울릴 지경이었다. 라이돈은 금방이라도 그를 터뜨려 죽일 듯 살벌하게 노려보다, 간신히 마음을 고쳐먹었다. 뒷덜미를 움켜쥔 손에서 느슨하게 힘을 푼 그가 캐시의 옆에 나란히 쭈그려 앉았다.

“그래, 솔직히 말할게. 다른 인간들이 이 숲이 거대 벌레라는 걸 알아챈다면, 분명 죽여 버리려고 할 거야. 카델이라고 의견이 다르진 않을 테니, 난 그걸 막을 수 없어.”

“흐아아앙! 토토! 내 사랑스러운 아기 벌레!”

“토토가 없는 넌 무용지물의 쓰레기나 다름없지? 날개만 달린…… 그러니까, 유독 못생긴 나방 정도의 입지가 되는 거잖아.”

“크흡…….”

신랄한 막말에도 캐시는 부정하지 않고 코를 훌쩍였다. 라이돈은 말의 내용과는 상반되는 산뜻하고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그와 눈을 맞췄다.

“그럼 굳이 죽일 필요가 없지. 사역마를 잃은 약해 빠진 고위 마족은 제거 순위 목록에도 오르지 못할 거야.”

“……내가 약해지면 죽이지 않겠다는 거야?”

“넌 지금도 약해.”

“그 뜻이 아니잖아!”

“맞아. 네가 인간들을 풀어 주고, 그 인간들이 거대 벌레를 죽인다면……. 내가 널 살려 줄게.”

캐시는 흐르는 콧물을 라이돈의 옷자락으로 훔쳐 내려다, 느껴지는 냉기에 멈칫하며 손등을 들었다. 잠시 곰곰이 득실을 셈하는 듯하던 그가 의기소침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살려 줘도 소용없어. 마계가 해방되면 내가 인간들을 풀어 줬다는 사실을 안 마왕님이 날 바로 죽여 버릴 테니까. 어쩌면 솔라비스 가문까지 숙청하려 드실지 몰라. 전부 내 탓이야!”

“마계는 해방되지 않아.”

“넌 그렇게 믿고 싶겠지. 하지만…….”

“해방되지 않아.”

단호하게 일갈한 라이돈이 캐시의 뒷덜미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에 겁을 먹으면서도, 캐시는 미약한 반발심이 담긴 눈으로 라이돈을 노려보았다.

“이곳에 내려온 인간들은 완전히 고립됐어. 토토가 감싼 전장에선 인간들의 피 냄새가 진동해. 너흰 전부 죽게 될 거고, 머지않아 마계는 해방될 거야.”

“카델이 있는 한 마계는 무사하지 못해.”

“아니, 대체 그 카델이라는 인간이 뭐길래 계속 그러는 거야?”

“내가 사랑하는 인간.”

눈웃음을 동반한 간결한 대답에 캐시가 진저리를 치며 어깨를 떨었다. 그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던 라이돈은, 이내 뭔가 떠올랐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생각해 보니 넌 고위 마족이잖아. 그렇지?”

“당연하지. 왜 갑자기 새삼스러운 소리를…….”

“고위 마족이면 마왕하고도 제법 가까운 사이 아니야?”

“가, 가깝다기보다는 뭐랄까……. 그래도 나름 최측근에서 마왕님을 모실 수 있다고 해야 하나. 사실 그것도 가문들의 권력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솔라비스 가문은 어떤데? 마왕이랑 가까워?”

라이돈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던 캐시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오래된 권력가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제법 신임을 얻고 있다고 생각해. 나, 나는 아니어도 누나랑 형들은 마왕님을 직접 뵙기도 했고.”

“그래?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그럼 평화의 돌이 어디 숨어 있는지도 알겠네?”

제 가문을 추켜세우려던 캐시가 일순 입을 다물었다. 그는 경악에 가까운 감정을 드러내며 라이돈의 곁에서 떨어지려 했지만, 그를 붙든 손아귀는 단단하기만 했다.

“내가 그걸 알려 줄 것 같아? 난 배신자가 아니야!”

“하지만 네 말대로 마계가 해방되면 넌 죽은 목숨이잖아. 차라리 인간들한테 위치를 알려 주고, 목숨을 보장받는 쪽이 낫지 않겠어? 네가 돌의 위치를 알려 준다면 마계 해방도 한 걸음 멀어질 테니까, 네 목숨줄도 길어지게 될 거야.”

라이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캐시에게 동족을 배반할 것을 권했다. 그에 캐시는 역정을 내며 거절의 말을 외치려 했으나.

“네 누나랑 형들, 꽤 죽었어.”

“……뭐?”

“인간계에 올라왔던 고위 마족 세 명. 이름은 모르지만, 몸을 마기로 바꿀 수 있는 녀석이랑, 기운을 흡수하는 녀석이랑, 비정상적으로 단단한 몸에 방패를 사용하던 녀석. 전부 솔라비스 가문이라고 들었거든. 아! 여기로 오는 길에 총으로 영혼을 쏴 대는 놈도 하나 죽였다.”

“그건…….”

“전부 죽여 버렸어. 네 가문에 몇 명이 있는지는 몰라도, 형제가 넷이나 죽은 거면 별 가망이 없지 않아? 게다가 남은 형제 중 한 명은 너처럼 무능력한데.”

“……그럴 리 없어.”

“흐응, 믿고 싶지 않겠지. 나도 여기서 바로 확인시켜 줄 방법은 없어.”

캐시의 눈빛이 크게 떨리며, 웅크린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럴 리 없어. 죽었을 리가 없는데…….”

신시와 아르파, 로딘과 알렉시아. 그들은 캐시의 유일한 가족이자, 그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었다. 사역마를 다루는 것 빼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던 자신을 언제나 사랑으로 보듬어 주었던 가족들.

그들을 전부 죽였다고?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진 자신의 형제들을 전부?

충격과 분노, 슬픔이 몰아치며 가슴 깊숙한 곳을 헤집었다. 심장이 오만 갈래로 찢기는 듯한 절절한 고통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이 쓸고 지나간 자리. 쓰라린 고통 위에 남겨진 것은, 다름 아닌 공포였다.

자신의 형제들을, 이번 전쟁을 끝마치면 마왕 에밀리아의 곁에서 마계를 호령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강력한 형제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기어이 마계로 들어온 인간들. 그들이 진정으로 마계의 해방을 저지할까 봐. 또다시 마계를 봉인하고, 마족을 학살할까 봐. 그것이 무엇보다 거대한 공포로 다가왔다.

“나, 나는…….”

캐시는 고위 마족이었으나, 힘의 근원과 한계가 명확한 만큼 항상 다른 고위 마족보다는 뒤떨어졌다. 그에게선 다른 마족 같은 끝없는 오만함이나 자신감이 존재하지 않았다. 제 뒤를 지켜 줄 존재가 있을 때라면 몰라도, 형제들마저 몰살당했다는 것을 알아 버린 순간. 죽음에 대한 공포는 놀라울 만큼 간단하게 캐시의 의지를 꺾었다.

“난 죽고 싶지 않아…….”

덜덜 떨리는 몸을 끌어안은 그가 고개를 수그렸다. 가족을 잃었다는 슬픔은 다음 차례가 자신일지 모른다는 공포에 잡아먹혔다. 그는 다른 모든 마족처럼 마계의 해방을 바랐으나, 자신이 없는 마계의 해방은 원치 않았다.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에밀리아의 뜻을 따르려던 형제들과는 달랐다. 캐시는 능력의 문제로 인간계에 올라가는 역할에서 제외되었을 때부터, 아쉬움보다는 안도감을 느꼈었다.

라이돈은 그런 캐시를 바라보며 간결히 말했다.

“그럼 벌레의 배 속에서 인간들을 꺼내고, 평화의 돌의 위치를 말해. 그렇게만 해 주면 네 목숨은 보장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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