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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 유령을 다룬다고? 엄청 재미있는 힘을 가졌잖아?”
넘실거리는 유령이 넓은 원을 만들었다. 그 중심에 두 요정을 가둔 채 포위한 유령들은, 전부 죽은 기사들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영혼, 카델이랑 같은 꿈을 꿨을 때 봤던 유령 같아. 신기해라.”
라이돈이 위기의식이라곤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부산스럽게 유령을 구경했다. 그는 꼭 유원지에 놀러 온 아이처럼 해맑았다. 그런 제 아들의 곁에서, 하이론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겐 별다른 의미 없는 이들이지만, 네겐 함께 싸워 온 동료가 아니니? 그렇게 신나 하며 말할 때는 아닐 텐데.”
“흐응, 동료 아니에요. 그다지 기억도 안 나는 인간들인데요.”
“망자에게 예의를 지키렴.”
“……알겠어요.”
금세 뾰로통해진 라이돈이 눈을 굴려 상황을 살폈다. 마구잡이로 방아쇠를 당긴 장총의 총구에선 수십의 영혼이 발사됐다. 그들은 전부 알렉시아가 직접 죽인 인간들인 듯했다.
‘죽인 인간을 이런 식으로 활용하는 건가? 그럼 그 모들렌이란 인간도 곧 만날 수 있겠네.’
자신이야 모들렌이 죽거나 말거나, 금세 흥미를 잃을 것이다. 그러나 카델과 가르엘은 분명히 슬퍼할 테지. 카델이 슬퍼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고, 가르엘이 슬퍼하는 것은 꼴 보기가 싫다.
‘빨리 해치우는 게 편하겠다. 뭐, 어차피 아버지가 싸울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못 하겠지만.’
하이론은 유령이 그들을 포위한 순간조차 라이돈의 개입을 저지했다. 그는 종종 제 아들이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요정 왕의 핏줄에게만 전수되는 비기를 알려 줄 때도, 되도록 사용을 삼가라며 연신 주의를 두었으니까.
어떤 이유에서일까. 이미 인간의 틈에서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러 온 라이돈에게, 하이론이 보였던 통제는 전부 쓸모없는 짓에 불과했다.
하지만 하이론의 생각은 달랐다.
‘라이돈은 많이 성장했지만, 아직 어려. 알렉시아 솔라비스는 강한 적이야. 아버지인 내가 지켜 줘야 해.’
하이론의 눈에 비친 라이돈은 언제나 말썽꾸러기 꼬마였다. 마법을 삼간다면 전투에 휩쓸릴 일도 적을 테니, 그는 라이돈이 최대한 힘을 숨긴 채 얌전히 살아가기를 바랐다. 아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조심스러운 부성애. 라이돈은 성가셔할지라도, 하이론은 뜻을 굽힐 마음이 없었다.
“별로 겁먹은 표정이 아니군. 이렇게 무서운 유령들에게 포위당했는데 말이야. 설마 아직도 내 기술을 간파하지 못했나? 멍청하긴.”
장총을 어깨에 걸친 알렉시아가 건들거리며 말했다. 부러 시비를 걸었음에도 하이론이 대꾸 없이 유령을 살피기만 하자, 물고 있던 나뭇가지를 뱉은 그가 가볍게 날아올랐다.
“모르면 보여 줘야지. 이게 얼마나 무서운 기술인지. 이것 참, 너무 친절해도 탈이라니까.”
알렉시아를 따라 비행하려던 하이론이 멈칫했다. 그들을 둘러싼 영혼이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형체가 뭉개질 만큼 빠른 속력은, 그들을 영혼이 아닌 하나의 회오리처럼 보이게 했다.
점점 높아지고, 점점 좁아진다. 두 요정을 조이듯 몰아치는 회오리의 위에는, 그들을 향해 총구를 겨눈 알렉시아가 있었다.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그가 하이론을 조준했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에 망설임은 없다. 그리고 다음 순간.
휘오오오!
회오리를 이루던 영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와 하이론에게 손을 뻗었다. 발포한 총탄처럼 육안으로의 식별이 어려운 속도였고, 그 숫자 또한 너무나 많았다.
“아버지……!”
튀어나온 영혼들이 모조리 하이론의 몸에 들러붙었다. 녹색의 손아귀가 우악스럽게 구부러지며, 하이론의 육신을 파먹듯 힘을 주었다. 그 악력을 버티지 못한 얼음 장막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그에 라이돈이 당황하며 마력을 끌어 올렸으나.
“가만히. 그곳에 얌전히 서서 숨을 죽이렴.”
도움을 거부한 하이론이 묵묵히 유령들의 공격을 감내했다. 그는 반격하지 않았고, 장막을 보강하지도 않았다. 다만 가만히 상공의 알렉시아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뭘 보는 거야, 응? 예쁘장하게 생긴 요정 왕님.”
요정 왕의 영혼은 얼마나 강력할까. 상상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별것 아닌 잡졸들의 영혼을 수십 개 모으는 것보다, 쓸 만한 영혼 하나를 수집하는 게 훨씬 만족스러웠다. 그랬기에 그 성기사를 집요하게 쫓았던 것인데.
“그 녀석처럼 눈치가 빠르면 곤란한데.”
어쨌든 그 성기사는 제 공격을 맞았으니, 영혼이 빨려 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동안 새로운 영혼을 맛보아야지.
히죽 웃은 알렉시아가 유령에게 포박당한 하이론을 바라보았다. 유령들은 기어이 얼음 장막을 깨부쉈고, 착실하게 하이론의 몸속을 파고들었다. 그들의 손아귀는 하이론을 상처 입히는 대신, 그의 몸속에서 진녹색의 기운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저것이 바로 요정 왕의 영혼.
“한번 떨쳐 내 보지 그래?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쑥쑥 빠질 텐데.”
알렉시아가 부러 소리 높여 경고했지만, 하이론은 그 알량한 조언을 따르지 않았다.
‘강제로 떨쳐 낸다면 이 유령이 움켜쥔 영혼의 일부……. 기운이 뜯겨 나갈 거야. 상대를 조금씩 약하게 만들어 서서히 죽이려는 거로구나.’
실로 마족다운 싸움 방식이었다. 그리고 하이론은, 처음부터 그가 꺼낸 인간들의 영혼을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 지금이라도…….”
꼼짝도 않고 당하기만 하는 하이론이 답답했는지, 라이돈이 참지 못하고 걸음을 뻗었다. 그에 차가운 시선이 라이돈을 다그치듯 훑어내리고. 한없이 냉랭한 눈빛에 라이돈은 일순 주춤하며 물러섰다.
하이론은 단순히 라이돈이 걱정되기에 단호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라이돈에게 이러한 하이론의 태도는 과거의 우울한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결국 나서기를 포기한 라이돈의 옆에서, 하이론이 무언가를 빠르게 중얼거렸다.
입술의 움직임은 바로 옆에 있는 라이돈에게나 보일 정도였으니, 한참 위에 떠오른 알렉시아의 시야에 들어올 리는 없었다. 곧 그 자그마한 중얼거림의 내용을 눈치챈 라이돈의 눈이 크게 벌어지고. 알렉시아를 일별한 그가 자연스럽게 제 몸에 장막을 둘렀다.
“마족 사이에 급이 있듯, 요정에게도 급이 있습니다.”
하이론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얼어붙었다. 번들거리는 얼음의 표면이 상공의 알렉시아를 비추고. 그를 붙들고 있던 유령들이 금방이라도 소멸할 듯 요란하게 흔들렸다.
“고작 고위 마족인 당신이, 요정 왕인 제 상대가 될 것 같나요? 또한 요정이라고 마족을 죽인 적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해한 마족을 잡아먹지 않은 것 역시, 마족보다 약하기 때문이 아니지요.”
눈동자에서부터 시작된 얼음은 그의 코와 뺨,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 곧 온몸을 뒤덮었다. 그러나 하이론의 움직임은 이전보다 자유로웠다. 영혼을 붙들던 유령마저 얼려 버린 하이론이 세찬 냉풍을 일으키며 단숨에 솟구쳤다.
눈 깜짝할 새 날아들어 제 목을 움켜쥔 하이론에 알렉시아가 눈을 부릅떴다.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배가 고파 죽을지언정, 당신들처럼 피와 살로 혀를 더럽히지 않아요.”
투명한 조각상처럼, 아름답게 얼어붙은 하이론에게선 기함할 수준의 양의 마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가 한 번 숨을 내쉴 때마다 그 한기로 일대가 하얗게 얼어붙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하이론이 코앞에서 낚아챈 알렉시아는.
“그러니 그따위 저급한 말로 왕을 상대하려 들지 마세요.”
공포와 충격에 물든 표정 그대로, 아무런 반격조차 하지 못한 채 단단히 얼어붙었다. 무감히 눈앞의 얼음덩이를 바라보던 그가 손에서 힘을 풀고. 거침없이 추락한 알렉시아의 몸뚱이가 지면에 추락하며, 산산이 조각났다.
“모들렌!”
“모들렌 경!”
엉켰던 매듭이 풀린 것처럼, 가르엘의 마기가 수월하게 모들렌의 육체를 순환했다. 빠르게 진행되는 치유술에 절반 이상 빠져나왔던 영혼이 제자리를 찾고. 모들렌의 눈꺼풀이 움찔거리는 것을 발견한 가르엘이 곧장 마기를 거뒀다.
위태로웠던 모들렌이 의식을 찾고 깨어났다. 그에 모두가 안도하며 그의 회복을 기뻐했으나. 딱 한 명, 모들렌이 아닌 허공을 응시한 채 표정을 굳힌 사람이 있었다.
‘이게 뭐야.’
카델. 그는 모들렌의 회복과 동시에 떠오른 시스템 창에 시선을 고정했다.
「경고! 허락되지 않은 힘이 과도한 개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변수를 최소화합니다.」
「제거까지 남은 시간: 4시간 59분 12초」
허락되지 않은 힘. 쿤라를 의미하는 것이라기엔, 그는 처음 마법진을 해제한 이후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쿤라 이외에 시스템이 경계할 만한 자는.
‘……하이론 님?’
그밖에는 없다. 게임에서 영입할 수 있는 기사 중, 하이론이라는 요정 왕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하지만 같은 조건인 쿤라가 힘을 발휘하는 것은 어느 정도 눈감아 주지 않았는가. 좀처럼 시스템의 기준을 가늠할 수 없었다.
‘봐주는 건 마계 진입 전까지였어? 그리고 이 제거라는 단어는……. 마계에서 추방한다는 뜻인가? 만약 단어가 가진 의미 그대로라면…….’
아찔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며,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하이론을 포함한 요정족의 개입은 전부 자신의 뜻이었다. 라이돈이 직접 불러왔다고는 해도, 자신의 부탁이 없었다면 염두에도 두지 않았을 일. 만약 그 결과가 끔찍한 절망이라면.
“안 돼…….”
“단장?”
소름 끼치는 상상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부유했다. 차갑게 굳어 있던 카델은 자신을 붙든 반의 손길에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하이론 님을 찾아와야겠어.”
“네? 하지만…….”
“위험할지도 몰라. 다녀올게, 반.”
“진정해요, 단장. 이미 돌아왔어요. 저길 봐요.”
반의 말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맞은편에서부터 여유롭게 날아오는 두 부자의 모습이 보였다. 라이돈은 멀리 있는 카델을 발견하자마자 속도를 높여 순식간에 그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익숙한 품이 그를 끌어안으며, 옆에 서 있던 반의 짜증이 들려왔다.
“자기, 저 앞에서 엄청 재미있는 마족을 봤어! 난 제대로 상대해 보지도 못했지만!”
자연스럽게 라이돈의 등에 손을 올리면서도, 시선은 어깨 너머의 하이론을 향했다. 하이론은 달라붙은 둘을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만약 단순히 마계에서 내쫓는다는 말을 저렇게 표현한 거라면, 제한 시간이 다 될 때까지 최대한 오랫동안 하이론 님을 붙들고 있어야 옳아. 그래야 조금이라도 승률이 높아질 테니까.’
하지만 말 그대로 그를 이 세계에서 ‘제거’한다는 뜻이라면.
“잠깐만, 라이돈. 나 하이론 님하고 할 얘기가 있어. 여기서 기다려.”
“응? 또 할 얘기가 있다고? 이참에 결혼을 허락받으려는 거라면, 신경 쓸 필요 없어. 허락 같은 거 안 받아도 마음대로 하면 되니까!”
“……잠깐이면 돼.”
반의 도움으로 간신히 라이돈을 떼어 놓은 그가 하이론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는 듯 카델을 바라보던 하이론은, 그의 표정이 심각한 것을 알아차리고는 인간들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착지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표정이 어두워요.”
“……하이론 님.”
“네, 카델.”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어떻게 설명해야 하이론이 순순히 마계를 떠나 숲으로 돌아갈까.
고작 다섯 시간 남짓한 시간. 하이론의 운명을 가를 시간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잠시 말을 고르던 카델이 짧은 들숨과 함께 말했다.
“지금 당장 숲으로 돌아가 주세요.”
“……네?”
“그래야 하이론 님이 살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곧……. 곧 굉장히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거예요.”
“카델…….”
이 짧은 시간 안에 그럴싸한 변명을 짜내 마계까지 내려온 그를 돌려보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떤 변명으로도 하이론은 납득하지 못할 테니. 차라리 본론부터 꺼내는 편이 나았다.
하이론은 창백하게 질린 카델의 얼굴을 응시하다, 이내 작게 미소 지었다.
“굉장히 안 좋은 일……. 그런 건 이미 각오하고 있어요. 마계에 내려오길 선택한 순간부터, 최악의 상황을 상정했으니까요.”
“최악의 사건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가능성이 걱정돼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분명히 일어날 일에 대비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죠. 이유를 제대로 설명해 드릴 순 없지만, 이곳에는 하이론 님을 해칠 거대한 힘이 존재해요.”
“…….”
“죽게 될 거예요. 그러니 지금 당장 떠나 주세요.”
카델의 목소리에선 감출 수 없는 초조함과 다급함이 간절하게 매달려 있었다. 도저히 연기라고 볼 수 없는 표정과 눈빛. 하이론은 그의 경고를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만약 그의 말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렇다면 더더욱 떠나지 말아야죠.”
“어째서…….”
“생의 마지막 순간 제가 보고 싶은 건, 질리도록 올려다본 숲의 하늘도, 슬퍼하는 동족의 얼굴도, 단조로운 방의 천장도 아니에요.”
“…….”
“사랑하는 아들의 곁에서, 아들을 위해 싸우다 죽을 수 있다면……. 그 죽음으로 제가 그 아이에게 줬던 무수한 상처와 짐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전 누구보다 기쁘게 눈을 감을 거예요.”
하이론은 끝끝내 마계에 남아 싸우기를 택했다. 그의 잔잔한 눈빛을 바라본 순간, 카델은 그에게 자신의 어떠한 설득도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에게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일절 비치지 않았다. 꼭 오랫동안 이 순간을 준비해 온 것처럼 담담했고, 어느 부분에선 기대감마저 비쳤다.
슬프게 일그러진 카델의 표정에, 하이론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라이돈에겐 비밀로 해 주세요. 요정족에게 자유를 선사하겠다고 해 놓곤 전쟁의 지원군으로 불러 놨으니.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죠?”
“……라이돈은 하이론 님의 죽음을 괴로워할 거예요.”
“당신이 있으니 괜찮아요.”
제가 죽더라도, 그 아이의 곁에 여전히 카델이 있다면. 라이돈은 결코 웃음과 행복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내심 서운하면서도 다행스러워, 하이론은 옅은 미소를 남긴 채 그를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