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6화 (416/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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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마계로 들어가게 되다니.’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지체됐고, 예상도 못 한 피해를 떠안게 됐다. 카델은 조금씩 암흑 마력을 피워 내는 징벌의 문 앞에서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마계로 내려간다면 쿤라를 호출하는 데 제약이 덜해진다. 그의 도움을 받는다면 황혼 기사단과의 합류가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었다.

암흑 마력의 양이 늘어나고, 시야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카델은 제 뒤편에 선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마력에 가려져 정확한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들이 전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은 느껴졌다.

“우린 할 수 있어. 그렇지?”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확신. 모두가 함께라면 이 역경을 이겨 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었고, 그랬기에 단원들은 단호한 끄덕임과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징벌의 문이 열렸다! 전원, 마계로 이동!”

엑토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미련 없이 고개를 돌린 카델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계.

하늘이 빛을 잃고, 대지는 생명을 피워 내지 못하며, 걸음걸음마다 죽음의 그림자가 새겨지는 지하 세계.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것은 비명과 쇳소리. 이곳에선 누군가의 웃음마저 기괴하게 비틀렸고, 숨을 쉴 때마다 맑은 공기를 대신한 텁텁한 먼지가 폐부를 찝찝하게 채웠다.

마계에 들어선 전원이 일순 말문을 잃었을 만큼. 마계가 풍기는 짙은 절망과 우울의 악취는 상상을 초월했다.

‘멀쩡한 사람도 여기 일주일만 가둬 두면 정신이 나가겠어.’

쩍쩍 갈라진 지면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버석거리는 소리를 냈다. 카델은 지면의 틈새로 비치는 마기를 힐끔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선두에 선 적린 기사단을 따라 마계를 돌아보는 기사들의 표정은 대부분 비슷했다. 그들은 적당히 경악했고, 적당히 긴장했으며, 또한 적당히 동요했다. 마계의 분위기는 끔찍했으나, 이곳의 풍경까지 낯설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과하게 어둡고 컴컴하다는 걸 제외하면, 인간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네요.”

가르엘의 말대로였다. 그들이 내려온 마계에는 마족이 사는 것으로 추정되는 집들과 건물, 심지어는 우물까지 있었다. 막연히 상상했던 가죽이 벗겨진 인간을 꽂은 꼬챙이나, 음산한 묘지, 시체의 산은 보이지 않았다.

징벌의 문을 통해 전원이 내려온 것을 확인한 카델이 걸음을 멈추고 한 손을 들었다. 그의 손짓에 진군하던 기사들이 정지하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뚫고 카델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흩어져서 건물을 뒤져 보죠.”

이곳은 변명할 여지 없는 마족의 터전이었다. 그러나 기사단이 마계로 내려온 뒤에도, 마을 안쪽까지 침범한 뒤에도. 그들을 습격하는 마족은 보이지 않았다. 느껴지는 기척조차 없었으니.

탐색을 제안한 카델은 다른 부하들을 전부 제쳐 둔 채 홀로 나섰다.

마을의 외곽까지 이동한 그가 정체불명의 시꺼먼 벽돌로 지어진 주택 앞에 섰다. 숨까지 참은 채 굳게 닫힌 문 위에 귀를 대곤, 언제든 발사할 수 있도록 화염구를 장전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려. ……정말 비어 있는 건가?’

조금 더 소리에 집중하던 카델이 거칠게 문을 걷어찼다. 잠겨 있으리라 예상했으나, 발길질 한 번에 문은 허무하리만치 간단히 열렸다.

카델은 집 안으로 거침없이 화염구를 발사하며 들려오는 비명이나 반격은 없는지 주시했다.

“……진짜 비었잖아?”

검은 연기를 헤치며 안쪽으로 들어서자, 텅 빈 내부가 드러났다. 마구잡이 공격으로 반대쪽 벽이 뚫리고, 가구랄 것은 몽땅 허물어져 잔해만 남았으나.

“그냥 흉내만 낸 집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네.”

바닥에 떨어진 그릇 파편을 신코로 툭 건드린 그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단층집이니 올라가 숨어 있을 다락방도 없고. 지하로 연결된 문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정말 텅 비어 있었다.

“뭐, 일단은 놔두자고.”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카델이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안으로 마력을 불어넣으며 쿤라를 부르자, 펜던트 바깥으로 빠져나온 붉은 기운이 순식간에 형체를 갖췄다.

“드디어 내려온 모양이군.”

쿤라는 주변을 살피지 않고도 카델이 마계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카델은 그가 모습을 갖추자마자 마력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마을 같은 곳에 도착했는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요. 이곳에 살던 마족이 전부 인간계로 넘어간 걸까요? 아니면 잠복?”

“적응할 틈을 안 주는구나.”

“적응은 무슨. 여기까지 내려오는 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하죠.”

날카로운 대꾸에 한숨을 내쉰 그가 찬찬히 사위를 돌아보았다. 낮게 가라앉은 눈빛이 대수롭지 않은 것을 살피듯 집 안을 훑어 내는가 싶더니, 이내 흥미롭다는 목소리를 냈다.

“잠복은 아니다. 이곳엔 아무도 없는 게 맞아.”

“그럼 역시 이곳에 살던 마족들은 이미…….”

“이걸 보거라.”

가볍게 손을 펼친 쿤라가 허공의 무언가를 쓸어 내듯 팔을 움직였다. 그러자 일순 눈앞이 크게 흔들리며, 여태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났다.

“이게 뭐야……?”

“마법진이다.”

“그런 건 말 안 해도 알거든요!”

사방을 둘러싼 마법진. 어두운 보랏빛 마기로 이루어진 술식이 그들이 선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쿤라가 아니었다면 존재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술식의 모양.

“시계 모양이에요. 숫자도 쓰여 있고.”

시계의 모양을 따라 했으나, 존재하는 것은 숫자와 시침뿐이다. 게다가 실제 시간을 따라 움직이지도 않았다. 시침은 실제 시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마법진에 카델이 미간을 좁혔다.

“모양만 흉내 낸 건가? 그렇다기엔 다른 마법진의 시침도 전부 똑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데……. 이게 대체 뭘까요?”

3시를 가리키던 시침은 어느덧 6시를 지나 7시를 향하고 있었다. 카델은 빠르게 움직이는 시침을 흘기며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주춤거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은 그가 마법진 위로 손을 올렸다.

“일단은 마법진을 해제하는 게…….”

그러나 그가 마력을 주입하기도 전.

“읏……!”

아무 말 없이 마법진을 응시하던 쿤라가, 그대로 카델의 망토를 낚아채 바깥으로 끌어냈다. 거의 날아가다시피 집 밖으로 쫓겨난 카델이 목을 움켜쥐며 캑캑거렸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당혹감과 짜증스러움을 느끼며 곧장 항의하려던 카델의 머릿속으로, 쿤라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전부 집 안에서 벗어나라.]

음성과 동시에 몸을 감싸는 비늘 갑옷. 카델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고, 바로 다음 순간.

쾅! 콰광!

우렁찬 폭음과 함께, 강한 압력을 동반한 열기가 정면을 덮쳤다. 쿤라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린 카델을 감싸 안아 자신의 품에 가뒀다.

“쿤라……!”

“시한폭탄이다. 마법진으로 이런 함정을 만들다니, 제법이군.”

그의 눈이 빠르게 허물어지는 집과 무너지는 자재 사이로 비치는 마법진을 담아냈다. 시계 모양을 본뜬 마법진은, 침입자의 존재를 인지하며 시작되는 시한폭탄이었다. 시침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12시를 가리키는 즉시 폭발. 집과 불청객을 통째로 날려 버리는 것이다.

이런 위험한 마법진에 은신 마법까지 더해져, 쿤라가 아니었다면 카델 역시 손쓸 틈도 없이 폭발에 휩쓸렸을 것이었다.

“……쯧.”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시끄러운 폭음에 쿤라가 카델의 귀를 막아 주었다. 카델은 제 귀를 가린 쿤라의 손등을 더듬거리며 몸에 바짝 힘을 주었다.

‘설마 이 마을 전체가 덫이었던 거야……? 쿤라가 아니었다면 나는 물론 아군까지 몰살이었어.’

이곳은 적진의 한가운데. 놈들의 본거지였다. 그걸 알고 있다면 섣불리 마을을 헤집어선 안 됐는데. 자신의 그릇된 판단에 아군이 다쳤을 수 있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요란하던 폭발이 잠잠해지고. 비틀비틀 쿤라의 품에서 벗어난 카델이 숨을 몰아쉬었다.

“부하들을 확인해야 해요.”

비늘 갑옷을 두르고, 쿤라의 품에 안겨 있었음에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런 와중에도 카델은 부하들이 폭발을 피하지 못했을 것을 염려해 그들을 찾아가려 했다.

“기다려라.”

“놔요!”

쿤라는 카델에게 전쟁의 진척도에 관한 아무런 정보도 듣지 못했다. 시스템을 의식해 카델이 부르기 전까진 그의 상황을 살피지 않았으니. 대충 어떤 상황인지는 알아야 적절한 행동을 취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카델에겐 무엇보다 부하들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쿤라도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결국 설명 듣기를 미뤄 두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때에 설명을 요구해 봤자 제대로 된 정보도 얻지 못할 게 뻔했다.

“그 짧은 다리로 서둘러 봤자일 텐데. 안아서 데려가 주랴?”

“짧지 않거든요!”

쿤라는 다급히 걸어 나가는 카델을 설렁설렁 뒤따랐다. 혹시 제 음성을 따르지 않은 인간들이 다치진 않았을까, 따위의 걱정은 전혀 비치지 않았다. 그들의 안위에 무관심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젠장, 이 장막이 없었다면 완전히 죽은 목숨이었어.”

“아직도 귀가 얼얼하군.”

“요정의 장막인가? 몇 번이나 목숨을 빚지네.”

자신이 음성을 퍼뜨림과 동시에 근방을 감싸던 마력. 그 방대한 마력은 자신과 함께 있던 카델을 제외한 모든 인간을 보호했으니.

“얼음 장막……. 하이론 님인가?”

바삐 걸음을 옮기던 카델 역시 기사들을 감싼 얼음 장막을 발견하곤 조금씩 속도를 늦췄다. 쿤라는 그런 카델의 보폭을 금세 따라잡아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과잉보호는 자기 자신에게나 하거라. 지금 여기서 너보다 중요한 존재는 없어.”

“그런 소리 하지 마요. 나보다 중요한 것투성이니까 아직까지 싸울 수 있는 거예요.”

쿤라의 충고를 짜증스레 받아친 카델이 시선을 움직였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폐허가 된 마을 사이, 아직도 멀쩡히 솟아 있는 집 한 채. 그리고 그 앞에 우두커니 선 가르엘의 뒷모습이었다.

카델은 상황 파악에 한창인 기사들의 눈치를 살피며 가르엘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가르엘은 상처 하나 없이 멀끔한 모습이었다. 그는 제 위에 둘러진 얼음 장막을 떨쳐 내며 굳은 얼굴로 집 안을 바라보았다.

“가르엘!”

“……단장님.”

느리게 고개를 움직인 가르엘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카델은 그런 그의 팔을 당겨 집에서 멀리 떨어뜨렸다.

“집 안에 보이지 않는 마법진이 설치돼 있었어. 하이론 님의 장막이 아니었다면 모두 크게 다쳤을 거야. 네가 있던 집은 멀쩡한 걸 보니까, 이쪽에만 함정이 없었나 봐. 무슨 차이지?”

“아뇨. 이곳에도 마법진은 있어요.”

“뭐? 그럼……. 넌 아예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어? 인간의 존재를 감지하면 발동되는 마법진이래. 아직 마법진 발동 전이라면 신중하게 해제 작업을…….”

“들어갔어요. 쿤라 님의 목소리를 듣고도 조금 더 머물렀었죠.”

그럼 대체 왜 가르엘이 들어간 집만 멀쩡하게 남아 있단 말인가. 카델의 의아한 눈빛을 마주 보던 가르엘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카델을 두고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 하는 거야, 가르엘! 위험하니까 나와!”

“쫓아오지 말고, 거기서 지켜보세요.”

카델은 경악하며 그를 말리려 했으나, 가르엘의 태도는 그저 덤덤했다. 들어가면 폭발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왜 저런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인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무작정 뜯어말릴 수도 없었다.

그렇게 가르엘이 집 안으로 들어서고. 그는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카델을 돌아보며 말했다.

“제가 들어가도 마법진은 발동되지 않아요. 단장님의 말대로, 이건 인간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발동되는 마법진이니까요.”

“그게 무슨…….”

“절 마족으로 판단한 모양이에요.”

쓴웃음을 머금은 가르엘이 태연한 척 가면을 고쳐 썼다.

“저만 들어와 있는 한 집은 폭발하지 않아요.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혼자 마법진을 해제해 볼게요. 겸사겸사 다른 함정은 없는지도 살펴보고요.”

카델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가르엘에게선 어떠한 동요나 분노, 황당함, 억울함조차도 비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걸 체념한 듯,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묵묵히 받아들이려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꼭 모든 아픔에 무뎌진 것처럼 덤덤한 저 모습이. 불쑥 충동에 사로잡힌 그가 거침없이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 단장님?”

“마법진에 대해선 이미 쿤라가 전부 파악했어. 여기서 시간을 쏟아 봤자 아무 의미 없어. 그냥 폭발시키자.”

“하지만…….”

“형편없는 마법진이야. 버려도 돼.”

대체 누가 마족이란 말인가. 가르엘은 오만한 마족과의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가 가진 눈부신 신념은, 어떤 것으로도 깎아내릴 수 없었다.

카델은 신경질적으로 가르엘을 끌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큰 소리로 폭발을 예고한 카델이 근방의 기사들을 대피시킨 뒤, 자신과 가르엘의 위로 이중 장막을 둘렀다.

그리고 여전히 얼떨떨하게 굳어 있는 가르엘을 향해 말했다.

“여긴 네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야. 빼앗긴 걸 찾으러 잠깐 들른 것뿐이지.”

“…….”

“그러니까 억지로 고향에 끌려온 것 같은 표정 짓지 마.”

가르엘의 자리는 드높은 하늘과 맑은 공기, 생명과 빛이 넘쳐나는 지상이다. 마족의 피는 그를 강하게 만들 순 있어도,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잠시 카델의 단호한 눈빛을 마주 보던 가르엘은, 이내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가면을 쓰고 있는데도 그런 게 느껴지나요?”

“잘 모르나 본데, 너 은근히 겉으로 다 드러나. 근처에만 가도 나 씁쓸해요, 하는 분위기를 폴폴 풍긴다고.”

“그런 소린 처음 듣는데.”

단장님은 절 정말 많이 좋아하나 봐요. 능글맞은 뒷말은 이어지는 폭음에 파묻혔다. 가르엘은 반사적으로 움츠러든 카델을 끌어안고, 그의 머리에 입술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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