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4화 (41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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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난리군.”

허리에 묶은 붕대의 매듭을 조인 루멘이 짧게 혀를 찼다. 하이론과 전사들의 대립이 예상보다도 길어지고 있었다. 하이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계로 내려가겠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멜피스도 어느샌가 하이론의 편에 섰다.

하지만 요정족 전사들은 어떻게든 하이론을 숲으로 복귀시키고자 했다. 그런 동족을 달래기 위해 하이론이 무언가 말하는 듯했지만, 언제쯤 저들의 고집이 꺾일지는 알 수 없었다.

“이봐, 도련님. 치유사들은 대체 언제 도착한대? 상처가 말라비틀어지겠어.”

요정족을 바라보던 루멘의 시선이 움직였다. 반은 뭉개진 마족의 시체 위에 앉아 상처를 대충 지혈하고 있었다. 전투 후반부에 격렬한 싸움이 이어졌던 탓인지, 치유술을 받지 못한 상처가 한가득이었다.

너덜너덜한 반의 모습을 대충 훑어 낸 그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치유사가 도착하는 것보다 마계로 내려가는 게 더 빠를 거다. 괜히 센 척하면서 버티지 말고 가르엘 경한테 간단한 응급 처치라도 받아.”

“저 꼴을 보고도 응급 처치를 받으라는 말이 나오냐?”

코웃음을 친 반이 어딘가를 가볍게 턱짓했다. 그곳에는 [울로]를 움켜쥔 채 계속해서 통신을 시도하는 가르엘이 있었다. 이마를 짚고, 거칠게 얼굴을 문지르는 그의 모습에선 터질 듯한 갑갑함이 느껴졌다.

함께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멘이 어깨를 으쓱하며 반을 따라 마물 시체 위에 걸터앉았다.

“그럼 투덜거리지 말고 그냥 참아. 그깟 상처로 징징거릴 기운이 있으면 내 검에 묻은 피나 닦아 주든가.”

“꺼져.”

“네가 꺼져라.”

숨 쉬듯 서로에게 시비를 거는 두 남자의 곁. 요젠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하듯 말없이 멈춰 있었다. 언뜻 홀로 상념에 젖어 있는 듯했지만, 사실 그는 가르엘의 기척에 신경을 집중하는 중이었다.

“젠장, 모들렌! 아직도 들리지 않는 거야? 살아 있는 거겠지? 부하들도 다치지 않은 거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 무조건 침착하게 행동해. 최대한 방어에 집중하고, 치유술을 위한 힘을 아껴. 부상자들을 데리고 후방에서 버티고 있으라고.”

가르엘은 제대로 된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 통신에 매달려 연신 똑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어떻게든 자신의 목소리가 황혼 기사단에게 닿기를 바라며.

평소였다면 가르엘의 기분 따위, 그다지 신경 쓸 필요도 없으니 깔끔하게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전달되는 가르엘의 감정은 거슬릴 만큼 큰 동요를 품었다. 이대로 다시 전장에 투입된다면 싸움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었다.

치유사인 그의 실수는 기사단 전체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길게 본다면 지금 가르엘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는 편이 나았다.

“……귀찮아.”

작게 중얼거린 그가 가르엘에게로 다가갔다. 기척 없이 접근한 요젠이 가볍게 어깨를 건드리자, 흠칫 놀란 가르엘이 휙 고개를 돌렸다.

“요젠 경?”

“카델이 쉬면서 기운을 다스리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끊임없이 떠들어 대면 회복이 더뎌질 거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마계에선 제 옛 부하들이 궁지에 몰려 있을 거예요. 당장 도우러 가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

“그걸 요젠 경이 어떻게……!”

욱하며 언성을 높이려던 가르엘이 멈칫했다. 크게 벌어진 눈은 자신의 맞은편, 요젠이 만들어 낸 그림자 분신을 담고 있었다.

“이건…….”

“예전에 암기를 묻혀 놨었어. 카델이랑 친한 것 같길래, 신경 쓰여서.”

그것은 모들렌의 그림자 분신이었다. 분신은 검을 치켜들며 뭔가를 공격하기도, 크게 입을 벌려 뭔가를 외치기도 했다. 상당히 다급해 보이긴 했으나, 쉽게 쓰러질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분신은 1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녹아내리듯 허물어졌다. 가르엘은 분신이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며 눈을 깜빡였다.

“마계에 있어선지 분신을 오래 유지하기 힘들어. 무사하단 걸 확인하고 싶었던 거잖아. 이 정도로 만족해.”

“…….”

“네가 이상하게 행동하면 카델의 기분도 안 좋아져. 그래서 보여 준 거야.”

이 정도면 가르엘도 마음을 다스릴 수 있으리라. 요젠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가르엘을 떠나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제 일 순위는 언제나 단장님입니다.”

가르엘의 음성이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요젠이 우뚝 멈춰 서자, 떨리는 숨을 고른 가르엘이 말을 이었다.

“그다음은 여러분이에요. 이런저런 일이 많았지만…… 항상 가족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뭘 말하고 싶은 거야?”

“황혼 기사단에겐 아직도 단장이었던 때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서, 여러분이 걱정할 만큼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 줬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제 개인적인 감정으로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일은 없을 겁니다.”

요젠은 끝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으나, 가르엘은 마지막까지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그러니까……. 반 경에게 참지 말고 치료받으러 오라고 전해 주시겠어요?”

그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잠시 자리를 지키던 요젠이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귀찮아. 네가 직접 찾아가.”

요정족 전사들의 무수한 원성에도 하이론은 기어이 뜻을 거두지 않았다. 더불어 멜피스까지 하이론을 지지했기에, 전사들은 피눈물을 머금은 채 물러서기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을 잘 인도해 줘요, 멜피스. 숲의 원로들에게도 최대한 부드럽게 얘기를 전달해 주고요.”

하이론은 착잡한 표정의 멜피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제가 숲으로 복귀하면 모두 모여 앞으로의 행보를 논의해 봐요. 요정 왕이 자유를 찾았으니, 핀하이족의 자유도 머지않았어요.”

멜피스는 홀가분해 보이는 하이론을 묵묵히 응시하다, 이내 한숨과 함께 말했다.

“무사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물론이죠. 라이돈과 함께 돌아갈게요.”

하이론의 환한 미소를 끝으로, 멜피스는 준비된 이동 마법진으로 전사들을 데려갔다. 처음부터 배웅은 필요 없다고 못 박아 뒀기에, 인간들은 멀리서나마 감사를 표하며 그들의 퇴장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순식간에 지원군이 퇴장하고. 홀로 남은 하이론은 세 기사단장의 앞에 섰다.

“잘 부탁드려요. 라이돈의 아버지입니다.”

본인을 요정 왕이 아닌 라이돈의 아버지로 소개한 그가 뿌듯한 얼굴로 기사단장들을 돌아보았다. 여러모로 라이돈과는 딴판인 요정이었으나, 셋 중 누구도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모리톨은 하이론이 합류하기로 했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한 듯, 이전보다 누그러진 태도로 말했다.

“치유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저희는 부상자들을 나눠 보도록 하죠. 카델 경과 요정 왕…….”

“라이돈의 아버지요.”

“……예. 두 분은 동맹군과 합류할 때까지 전투의 주축이 되어 버텨 줘야 하니, 먼저 신호를 맞춰 두세요. 두 분의 전술에 따라 최대한 엄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없는 시간을 쪼개 합을 맞춰야 하는 만큼, 카델과 하이론에겐 둘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때문에 모리톨은 곧장 자리를 비켜 주려 했으나, 엑토는 아니었다. 그는 코앞에 선 요정 왕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부상자를 나누는 건 소린이 알아서 하겠지. 난 여기서 함께 전술을 생각해 보겠소.”

“엑토 경. 경은 저와 엄호에 집중하는 걸로 충분합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오, 모리톨 경. 경은 가끔 시야가 좁아질 때가 있단 말이지.”

“이런 때까지 호기심에 지배되지 말란 말입니다.”

모리톨이 짜증스레 엑토를 끌어내려 했지만, 엑토는 요지부동이었다. 믿는 구석이었던 소린조차 일찌감치 엑토를 포기한 채 부단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으니. 결국 모리톨은 카델에게 알아서 하라는 눈빛을 보낸 뒤, 먼저 자리를 떴다.

“요정 왕께선 어떤 마법을 선호하시오? 전투 당시에 보니 얼음 마법이 아주 화려하던데. 마력은 괜찮은 거요?”

“선호한다고 할 만한 마법은 없어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춘 공격을 하는 편이죠. 그리고 요정 왕이 아니라 라이돈의 아버지예요.”

“내게도 아들이 있소. 이곳에서 함께 싸우고 있지. 마치 라이돈 경과 요정 왕……. 그러고 보니 아직도 왕님의 이름을 모르는군. 이름을 알려 주겠소?”

“하이론이에요.”

“라이돈의 아버지라는 칭호는 너무 길어 부르기 불편하니, 요정 왕이 싫다면 하이론으로 부르겠소. 괜찮소?”

“물론이죠.”

“크하하! 생긴 것관 달리 아주 시원스럽군. 내 이름은 엑토요. 엑토 엔티.”

당장 하이론과 맞춰 봐야 할 마법이 한두 개가 아니건만. 엑토는 하이론을 독점하다시피 하며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 갔다. 하이론 또한 처음 보는 유형의 인간인 엑토가 신기했는지, 그와의 대화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하이론 님은 처음 봤을 때부터 말이 많았지. 엑토 경과 아주 잘 맞겠어.’

다른 때였다면 인간과 거리낌 없이 대화하는 하이론을 보며 안도감을 느꼈을 테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카델은 지독한 수다쟁이들의 사이에서 대화를 끊어 낼 기회만 호시탐탐 노렸다.

하지만 둘은 적어도 10년은 함께한 친우처럼 대화에 공백이란 것이 없었고, 그에 카델이 곤란함을 넘어 지겨움까지 느낄 무렵.

“카델한테 집중해요.”

잠시 동료들과 시간을 보내던 라이돈이 돌아왔다. 그의 등장에 하이론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카델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라이돈을 바라보고는,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엑토와의 대화가 즐거워 잠시 잊고 있었네요. 미안합니다, 카델.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죠.”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하이론과는 달리, 엑토는 계속 대화를 이어 가고 싶은 기색이었다. 하지만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던 드레프가 선수를 쳤다. 그는 눈치 없는 자신의 아버지를 억지로 끌고 가며, 카델에게 사과를 대신한 눈짓을 보냈다.

카델은 드디어 찾아온 평화 속에서 하이론을 마주했다.

“시간이 없으니 간단하게 말하죠. 마계에 진입한 직후부터 동맹군과 합류할 때까지. 아군이 최소한의 피해로 이동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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