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3화 (413/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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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는 말을 이미 여섯 번은 반복한 것 같다만.”

“여섯 번? 내가 느낀 고통을 고작 여섯 번의 사과로 무마할 수 있을 것 같아?”

루멘은 얼굴까지 시뻘게진 채 소리를 질러 대는 에이든을 보며 낮은 한숨을 쉬었다. 한 번 목숨을 구해 줬으니 과거의 앙금을 풀어 보고자 접근한 것인데. 한쪽 날개를 잘라 버린 것이 이토록 성가신 업보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에이든은 루멘이 더 이상 사과하지 않는 것에 또 한 번 분개하며 씩씩거렸다.

“이래서 인간은 도와줄 필요가 없는 건데! 지금 당장 모두에게 인간들을 공격하자고 설득해야겠어!”

“하……. 이 정도면 내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니지 않나? 내가 뭘 해 주길 원하는 거지? 말해 봐.”

“무릎 꿇어! 울면서 싹싹 빌라고! 아니면 너도 똑같이 다리 한쪽을 내놓든지!”

무릎을 꿇는 것쯤이야 요정족과의 불화를 막기 위해서라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과연 에이든이 무릎 꿇는 것만으로 만족할지는 알 수 없었다. 가장 마지막에 요구한 다리 자르기 정도는 되어야 화를 거두지 않을까 싶었으나, 그 요구는 들어줄 수 없었다.

그렇게 루멘이 시끄러운 에이든의 악다구니 속에서 고민하고 있을 무렵.

“아하하! 징징거리는 버릇은 여전하네, 에이든!”

“뭐야, 라이돈! 넌 빠져.”

라이돈이 루멘의 곁으로 날아왔다. 그는 에이든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무시하며 그의 얼음 날개를 툭툭 건드렸다.

“흐응, 짝짝이 날개 주제에 꽤 괜찮은 걸 달았잖아.”

“짝짝이 날개라고 하지 마!”

“짝짝이가 싫어? 그럼 나머지도 떼어서 둘 다 얼음 날개로 만들어 버리자!”

라이돈은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하며 에이든의 진짜 날개를 잡아당겼다. 그에 기겁한 에이든이 라이돈의 손길을 뿌리치며 뒷걸음질 쳤다.

“너……! 왜 내가 사과받는 걸 방해하는 거야? 그새 인간한테 정이라도 든 거야? 원래라면 나랑 같이 인간의 다리를 잘라 내려고 했을 텐데!”

“흐응, 에이든. 정이 든 게 아니라 철이 든 거지.”

“뭐? 철이 들어?”

“그래. 지금 상황을 봐. 이렇게 위험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루멘처럼 잔소리 심하고 멜피스 할아버지를 닮은 주제에 실력은 쓸 만한 인간의 다리를 자르자니. 너무 앞일을 생각하지 않은 발언이잖아?”

에이든은 라이돈의 말에 설득당했다기보다는, 스스로 철이 들었다 말하는 그의 뻔뻔함에 당황한 듯했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고르던 그가 잔뜩 성난 얼굴로 휙 뒤를 돌았다.

“인간도 싫고, 인간 편을 드는 너도 싫어!”

매몰차게 외친 에이든이 성큼성큼 떠나가고. 루멘은 제 옆에서 멀어지는 에이든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라이돈에게 말했다.

“고맙군. 어디까지 맞춰 줘야 하나 곤란하던 참이었는데.”

“날개는 요정의 생명이야.”

시선을 옮긴 라이돈이 루멘을 바라보았다. 라이돈의 눈빛에선 평소엔 느낄 수 없던 진중함이 떠올라 있었다.

“자유를 잃은 종족이 유일하게 자유를 꿈꿀 수 있게 만드는 소중한 날개. 넌 그걸 없앤 거야.”

“…….”

“하지만 에이든은 카델을 괴롭혔었고, 또 너는 멜피스 할아버지를 닮았으니까.”

“할아버지라니…….”

“한 번은 봐줄게!”

단번에 표정을 바꾼 라이돈이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터뜨리며 하늘을 날았다. 루멘의 곁에서 벗어난 그가 빠르게 지면을 훑고는, 어느 한 지점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카델과 하이론, 그리고 멜피스가 모여 있었다.

“날 빼놓고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 거야?”

아무도 라이돈을 부르지 않았지만, 라이돈은 그 사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셋에게로 하강했다. 그렇게 안전한 착지를 마침과 동시에. 멜피스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은 만족이란 걸 모르는 건가?”

붉은 눈동자가 도로록 굴러가며, 익숙한 얼굴들을 훑었다. 멜피스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사나웠으나, 오늘은 유독 더 거칠어 보였다. 하이론은 되도록 감정을 숨기려는 듯했지만, 짙은 심란함을 감추지는 못했다. 그리고 카델은.

“만족하기엔 너무 위험한 전투를 앞두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들이 무너진다면, 마계는 결국 완전히 부활해 세상을 집어삼킬 거예요.”

죄책감과 간절함, 조급함이 뒤섞인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박자 늦게 라이돈을 발견한 카델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라이돈이 자연스럽게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섰다.

“마침 잘 왔구나, 라이돈. 네 인간이 우리에게 무슨 부탁을 했는지 들었느냐?”

“흐음, 마계로 들어가 함께 싸워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온 우리에게 보답을 약속하진 못할망정, 아예 목숨을 내다 버리라고 하고 있구나.”

조소 가득한 멜피스의 비난에 카델의 고개가 내려갔다. 라이돈은 그런 카델의 어깨를 감싸며 인상을 썼다.

“왜 카델을 구박해요? 좋게 말할 수 있잖아요!”

“너 지금……!”

“그만두세요, 멜피스. 라이돈, 너도 마찬가지다. 넌 인간의 기사로서 이곳에 섰지만, 우리는 아니야. 카델의 제안이 곤란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

하이론은 멜피스와 라이돈을 물리며 카델에게 손을 뻗었다. 가볍게 그의 턱끝을 들어 자신과 마주 보게 한 하이론이 묘한 안타까움이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말했다시피 요정족의 절반은 아직 환혹의 숲에 남아 있어요. 원로 중엔 오직 멜피스만이 절 따라와 줬죠. 절반을 설득하지 못했고, 따라온 절반마저 자신의 싸움에 확신을 품지 못하고 있답니다.”

“…….”

“전 요정 왕이에요. 싸울 의지가 없는 동족을 사지로 몰아넣는 일은 할 수 없어요.”

카델의 턱에서 손을 떼어 낸 그가 낙담한 눈빛을 들여다보았다. 그 잿빛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겠다는 듯, 하이론의 시선은 집요했다. 그렇게 빤히 눈을 맞추다, 참다못한 라이돈이 무언가 불만을 토로하려던 때. 하이론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가 직접 싸울 수는 있죠. 핀하이족의 요정들을 대신해, 라이돈과 제가 마계로 들어가겠어요.”

“그건 미친 짓입니다, 하이론 님!”

하이론의 결정은 멜피스와 요정족 전사들은 물론, 카델을 포함한 인간들에게도 충격에 가까운 놀라움을 안겼다.

카델은 잔뜩 흥분한 채 하이론을 뜯어말리는 멜피스를 바라보며 낮은 한숨을 집어삼켰다.

‘하이론이 전쟁에 합류한다면 이 악조건 속에서도 어떻게든 희망을 만들어 볼 수 있다. 그건 확실해.’

라이돈의 힘으로 봉인이 풀린 하이론은, 환혹의 숲 바깥에서도 숲 내부에 있을 때와 비슷한 수준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해 라이돈보다 뛰어난 실력의 마법사가 투입되는 것이었으니. 인간들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환호성을 내지를 만큼 희망적인 소식이다.

하지만 소식을 들은 기사 중 누구도 섣불리 기쁨을 내비치지 못했다.

“우리가 왜 인간들을 위해……. 그래요. 라이돈을 위해 한 번은 인간을 도울 수 있다고 칩시다. 하지만 두 번은, 그것도 하이론 님이 직접 마계로 내려가 싸워야 하는 위험한 전투는 안 됩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입니다!”

왜 자신들의 왕이 원수나 다름없는 인간을 위해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는 마계로 향해야 하는가. 지금껏 인간들은 요정을 핍박하기만 했고, 숲에 갇힌 이유조차 인간에게 있었건만.

잠잠한 공간을 뒤흔드는 요정들의 분노에, 인간들은 말문을 잃었다. 그들에게 발언권이란 없었다.

하이론은 자신의 결정을 번복시키려는 동족들의 아우성을 묵묵히 경청했다. 하지만 그들을 둘러보는 눈빛에는 단호한 결의가 엿보이고 있었다.

“하이론 님!”

“네, 멜피스. 목소리를 낮추는 게 어떨까요? 모두의 혼란을 부추기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말이에요.”

“마계로 내려가시면 안 됩니다. 지금 숲에는 여전히 왕의 귀환을 믿고 기다리는 동족들이 있습니다!”

“멜피스. 흥분을 가라앉히고, 날 똑바로 봐요.”

하이론은 멜피스의 투박한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자연스럽게 전사들과의 거리를 벌린 그가 멜피스에게만 들릴 만큼 작고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생각했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 거고요.”

“그건……! 지금 그런 게 무슨 상관입니까.”

“환혹의 숲으로 돌아온 라이돈을 대면했을 때, 전 느꼈어요. 그 아이가 요정 왕이 될 준비를 마쳐 가고 있다는걸. 무척 성장했죠. 숲 안에만 있었다면 그렇게 단기간에 성장할 수 없었을 거예요.”

하이론의 조심스러운 시선이 멜피스의 너머, 카델의 옆에 우두커니 선 라이돈을 향했다. 라이돈은 하이론과 멜피스를 번갈아 보며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눈에 봐선 그가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기 힘들 테지만, 하이론은 알 수 있었다. 라이돈은 지금 자신을 염려하고 있다.

“전 라이돈을 믿습니다. 그 아이는 모든 일을 끝마친 후, 요정 왕이 되어 핀하이족을 이끌 거예요.”

“…….”

“그러니 전 라이돈의 아버지로서, 저 아이가 다치지 않고 무사히 마계를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울 거고요.”

“하이론 님. 당신은…….”

하이론은 잔뜩 일그러진 멜피스의 얼굴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라이돈이 태어난 후로, 이렇다 할 아버지 노릇을 해 줘 본 적이 없어요. 항상 매섭게 몰아붙이기만 했죠. 한 번쯤은…… 저 아이에게 든든한 아버지가 되어 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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