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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불리 접근하지 말고, 침착하게 주위를 포위하세요.”
상체만 덜렁 뜬 채 전사들에게 포위당한 고위 마족. 그것은 카델에게 전해 들은 것처럼 신체를 재생하지도 않았고, 그저 몸통이 절반만 남은 상태로 멍하니 지면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하이론은 방심하지 않았다. 눈앞의 마족에게서 느껴지는 지독할 만큼 역겨운 기운. 호락호락하게 볼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전사들에게 거리를 유지할 것을 명령한 하이론이 마족에게 접근했다. 우려의 말을 제쳐 두며 다가가자, 마족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멀리서는 꼭 아무런 감정도 없는 인형처럼 보였던 얼굴. 무미건조하기만 하던 그 얼굴에선, 투명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분명한 슬픔을 감지한 하이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 울고 있나요?”
하이론의 물음에 마족의 시선이 움직였다. 어두운 보랏빛 눈동자가 하이론을 담아내고. 한 번도 움직인 적 없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나의 가족이 죽었으니까.”
가느다랗고 높은, 금방이라도 깨져 버릴 것처럼 위태로운 목소리. 눈썹 한번 움찔하지 않는 주제에, 그녀의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럼에도 표정에선 여전히 변화가 없어, 그녀의 눈물은 묘하게 섬뜩한 분위기를 띠었다.
“로딘도, 아르파도. 모두 솔라비스 가문의 영광을 위해 싸웠어. 그리고 죽었지. 나는…… 그들을 지키지 못했어.”
“……솔라비스. 처음 듣는 가문이군요. 당신의 이름은 뭐죠?”
“신시. 솔라비스 가문의 장녀. 당신은?”
“하이론입니다. 핀하이족의 요정 왕이죠.”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하이론은 끊임없이 신시라는 이름의 마족을 살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기를 모으거나 재생하려는 낌새가 보인다면. 망설이지 않고 공격할 심산이었다.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 죽일 수 없을 것처럼 연약한 인상이었으나, 품고 있는 힘은 결코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다.
신시는 하이론의 이름을 몇 번 중얼거리더니, 이내 그를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하이론. 나는 마계의 해방을 바라. 오직 해방을 위해 우리를 억압해 온 인간을 죽이려는 거야. 요정족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 않아?”
“…….”
“인간은 마족인 우리에게서도, 요정인 너희에게서도 자유를 앗아 갔어. 그런 인간을 왜 돕는 거야? 만약 여기서 나와 손을 잡고 인간들을 격멸한다면, 우린 좋은 동맹이 될 수 있을지 몰라. 하지만 인간들을 돕는다고 너희가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죠? 인간은 물론 마족 역시 우리 요정을 핍박했어요. 요정을 잔인하게 사냥해 잡아먹은 역겨운 종족이 동맹을 운운하는 건가요?”
“한 종족을 지하 세계에 통째로 봉인해 감금할 힘을 가진 종족이, 과연 다른 종족의 자유를 인정해 줄까? 너희가 조금만 시끄럽게 소란을 일으켜도, 또 다른 봉인석을 구해 격리할지도 모르지.”
신시의 목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마치 자신의 주장을 세뇌하듯, 속삭임 같던 말들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당신들이 봉인당한 이유는 무분별한 학살 때문이죠. 조금 시끄럽게 소란을 일으킨 정도가 아니었잖아요. 모든 종족을 깔보고, 도륙하고, 심지어는 잡아먹는 종족을 누가 반길 거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너희는 아니었잖아.”
신시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비틀렸다. 마치 웃는 법을 모르는 아이가 어색하게 미소를 흉내 내는 것처럼.
“너희는 존재했을 뿐이잖아. 한 쌍의 날개를 달고, 대정령의 가호를 등에 업고, 그저 존재했을 뿐이지. 그런데도 인간들은 너희를 학살했어. 그런 수모를 겪고도 인간의 편에 서는 거야? 어째서? 난 전혀 이해할 수 없어.”
곧장 신시의 말을 반박하려던 하이론의 표정이 굳었다. 입을 다문 그가 뒤를 돌아 눈을 굴렸다.
“자유를 원한다면 인간을 없애야지. 너희의 힘만으론 부족하다면, 마족의 힘을 이용해서라도 없애면 되는 거 아니야? 지금이 적당한 기회잖아. 너희가 인간을 상대한다면, 우린 여기서 물러날게. 어차피 마계로 들어온 인간들은 죽음을 면치 못할 테니까.”
신시는 하이론이 곧장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목소리의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거리를 벌린 채 그녀를 포위하고 있던 전사들에게 제 목소리가 닿을 만큼 커다랗게.
신시의 유혹은 어느새 전사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요정들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숲을 빠져나왔다는 설렘과 마족을 소탕하며 얻은 흥분, 만족감이 빠르게 옅어졌다.
그들의 표정에서 갈등을 읽은 하이론이 낮은 한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또다시 입을 열려는 신시보다 먼저, 훨씬 또렷하고 커다란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요. 자유를 억압당한 채 살아왔다는 데서 마족과 요정족은 공통점을 가졌을지 모르죠. 하지만 당신들 중 그 누구도, 자유를 잃은 요정족을 위해 나서 주겠다는 이는 없었어요.”
“…….”
“그러니 우리는 당신을 위해 싸우지 않을 겁니다. 또한 우리가 인간의 편에서 싸우는 것은, 인간을 좋아하기 때문도, 그들을 돕기 위함도 아니에요. 우리를 위해섭니다.”
짧게 숨을 고른 하이론의 시선이 지상의 어딘가를 향했다. 바삐 이동하는 무수한 점 중, 하나의 점을 찾아낸 그가 말을 이었다.
“새장 속 새처럼, 자유를 잃은 채 살아왔던 우리를 위해 투쟁하겠다는 자. 한 마리의 새를 해방해 약속의 무게를 증명한 자. 그자의 곁에서 요정의 해방을 위해 싸우겠노라 결심했을 뿐이죠.”
안전한 숲속에 숨어, 요정도 아닌 인간의 승패에 종족의 운명이 좌우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돌아온 라이돈이 무릎을 꿇고 호소하던 날. 그날, 하이론은 또 한 번 자신의 나약함을 절감했다.
끝없는 자유를 경험하고, 그 자유를 내어 준 한 명의 인간을 위해 모든 걸 바치겠노라 외치는 라이돈에게서는, 아버지인 제게는 없는 굳은 의지와 용기가 보였다. 그 뜨거운 열정이 누구에게서부터 비롯되었는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싸워야 했다.
“그자에게 스스로 자유를 쟁취했노라 당당히 말할 수 있도록, 우리는 투쟁할 겁니다. 그 발판에는 당신들, 마족의 시체가 있을 거예요.”
하이론의 말을 듣던 신시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의 발언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은밀하게 그녀의 머리를 감싼 얼음 조각. 가시 월계관처럼 날카롭게 머리를 두른 얼음 조각이, 거침없이 조여들기 시작했다.
“아, 아아…….”
머리를 감싼 그녀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크게 벌어진 눈동자가 잘게 떨리며, 덜렁 떠오른 상체가 고통스럽게 비틀렸다. 하지만 신시는 자신을 공격한 하이론도, 사방을 포위한 요정 전사들도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가족의 시체가 버려진 지상만을 응시했다. 점점 조여드는 월계관 아래는 흘러내린 핏물로 흥건해졌다. 하이론은 별다른 반항도 없이 무력하게 고통스러워하는 신시를 지켜보았다.
그는 신시가 마지막 발악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카델이 경고한 고위 마족인 만큼, 범상치 않은 일을 벌이리라고.
“슬프구나…….”
그러나 신시는 반격하지 않았다. 다만 제 얼굴을 감싼 채 음울하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
그녀의 몸이 묽은 액체가 되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핏물과 뒤섞인 짙은 자주색의 액체가 물방울이 되어 지면으로 낙하했다. 혹시 몸을 변형시킨 또 다른 기술인가. 주의하며 지켜보았으나, 흘러내린 액체는 그대로 지면을 적시며 아래로 스며들 뿐이었다.
부활의 기미도, 공격의 낌새도 없다. 요정들은 순식간에 녹아내린 신시의 흔적을 살피며 오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였다.
하이론은 동요하는 요정들을 향해 단호히 외쳤다.
“남은 마물을 소탕하세요. 지금 우리의 분노가 향해야 할 곳은 명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