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드드드득.
마기 줄기가 단단한 얼음을 후벼 파며 깨부수려 했으나, 그럴수록 얼음은 더한 냉기를 내뿜을 뿐이었다. 하늘과 땅 사이, 겹겹이 떠오른 원형의 마법진. 마법진은 지면과 가까워질수록 점점 크기가 작아졌고, 가장 아래에 자리한 장막을 강화하며 발광했다.
장막이 보호하는 이는 단 한 명.
“……카델.”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요정의 등장에, 그를 올려 보는 카델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약속, 지켰어.”
자신을 향해 조금도 달라진 것 없는, 한결같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에게. 어떤 표정으로 화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카델은 떨리는 손으로 라이돈의 뺨을 쓸었다.
“고마워.”
진심을 담은 한 마디에 라이돈이 짧은 들숨과 함께 카델을 끌어안았다. 피가 엉긴 카델의 관자놀이에 뺨을 기댄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꼭 승리해 줘.”
라이돈은 숲속에서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던 동족을 피의 전장으로 끌고 왔다. 오로지 단장인 카델 라이토스를 위해서. 제 운명을 짊어지기로 약속한 한 명의 인간을 위해서. 그 사랑과 믿음에 어찌 보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라이돈의 품에서 떨어진 카델이 그의 어깨를 짚고 똑바로 눈을 마주 보았다. 간절함과 염려, 뜨거운 사랑이 뒤섞인 붉은 눈동자. 이 안에 담길 것은 즐거움과 행복만으로 충분하다.
“네 선택이 옳았다고, 모두를 데려와서 다행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될 거야.”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고, 다시금 하늘을 올려 보았다. 그곳에는 사라진 마기 줄기와 한 겹씩 소멸하는 마법진의 잔상이 있었다. 이윽고 모든 마법진이 사라지자 보이는 것은.
“……야.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냐?”
하늘을 눈부시게 메운 요정 군단. 인간형의 모습으로 날아오른 그들의 몸에는 얼음 갑옷이 둘렸고, 손에는 창과 검, 활이 들렸다. 투명한 날개에 태양의 빛이 투과되며, 피로 물든 전장에 등장한 그들을 성스러운 신의 사자처럼 보이게 했다.
그 군단의 최전방에 자리한 요정. 그를 발견한 카델이 옆에서 넋을 잃은 드레프를 향해 말했다.
“우리의 마지막 지원군이야. 여기서 끝내지 못한다면, 남은 건 패배뿐이다.”
⚔️
한 번의 날갯짓, 열 번의 전율. 아무리 먼 곳을 내다봐도, 끊임없이 날개를 펄럭여도, 막히는 곳은 없다. 끝없이 나아갈 수 있었고, 날갯짓이 이어질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풍경에 가슴이 벅찼다.
내내 차오르는 감정을 무어라 표현해야 하는 것인지. 시끄러운 함성도 자신의 심장 고동 소리에 비하면 고요하기만 했다.
하이론은 폐부 가득 바깥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하이론 님, 내려가시죠.”
멜피스의 목소리에 하이론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가 만들어 낸 마법진이 한 겹씩 벗겨지며, 아래에 자리한 인간의 모습이 드러났다. 멀리서도 그와 눈이 마주쳤음을 알 수 있었다.
하이론은 뒤편의 전사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인간들을 보호하고, 마족을 죽이세요. 해야 할 일은 그뿐입니다.”
단호히 지시를 마친 그가 거침없이 고도를 낮췄다. 사방에서 마족과 마물의 공격이 날아들었으나, 하이론의 인지 범위 안에 들어선 순간. 놈들은 전부 빳빳한 얼음덩이로 변모했다. 그의 비행 궤도를 따라 찬란한 얼음 길이 생겨났다.
빠르게 주변을 얼어 붙인 그가 카델의 앞에서 비행을 멈췄다. 느슨하게 묵은 황금색 머리칼이 차분하게 늘어지며, 유순한 얼굴에 묘한 흥분이 어렸다. 하이론은 카델을 향해 작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에요, 카델. 이런 식으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라이돈이 많이 변했던데요. 신기한 힘도 가지게 됐고요. 정말 내 아들이 맞는지, 몇 번이나 의심했답니다.”
카델로서는 하이론에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핀하이족의 지원을 결정한 하이론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죄책감을 가졌다.
하이론은 그런 카델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가볍게 악수를 청했다. 카델이 그 손을 맞잡자, 따스한 온기가 힘을 주었다.
“인간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에요. 저희는 핀하이족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겁니다. 그러니 카델은 저희의 전투를 최대한 활용해 보세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카델이 하이론에게 유의해야 할 적의 정보를 알렸다. 단숨에 정보를 숙지한 하이론이 전사들을 통솔하기 위해 다시 하늘을 날고. 짧게 숨을 고른 카델이 라이돈을 돌아보았다.
“먼저 처리해 줘야 할 녀석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