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혹의 탑 꼭대기. 아무도 없는 그곳에, 하이론만이 홀로 앉아 멍하니 수정 구슬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엔 생기가 없었고, 눈빛은 탁하게 흐려졌다.
수정 구슬에 담긴 것은 그의 유일한 아들. 모두가 떠나간 정원에 홀로 남아 무릎을 꿇고 있는 라이돈의 모습이었다.
“……당신은 날 속였어요, 카델.”
자그마한 중얼거림에는 어떠한 원망도, 분노도 담기지 않았다. 잔뜩 메말라 모든 감정이 바스러질 듯 위태롭기만 했다.
라이돈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만약 그가 다시 숲으로 돌아온다면, 눈물 대신 미소를. 서글픈 부탁 대신 신나는 무용담을 꺼내 놓을 줄로만 알았다.
최악의 경우, 카델에게 호되게 당해 상처받은 마음을 안고 다시는 숲 밖으로 나가지 않겠노라, 다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간을 위해 싸워 달라니.’
라이돈 한 명을 내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결심이 필요했다. 결정은 오로지 자신의 아집이었고, 그로 인해 핀하이족은 내내 불안에 떨어야 했다. 두 번은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괴롭게 눈을 감은 하이론의 귓가로, 라이돈과의 대화가 맴돌았다.
“만약 네 말을 따라 모두가 숲을 나선다 해도, 요정 왕인 나는 동족을 지켜 줄 수 없어. 봉인이 걸려 있으니 말이야. 동족을 사지로 몰아넣고 홀로 아무도 없는 숲을 지키란 말이니?”
“……제가 풀 수 있어요. 아버지의 봉인.”
“배짱을 부리는구나.”
“헤소니아라는, 이제는 사라진 토펨족의 요정 왕. 처음으로 봉인의 힘을 다뤘던 그 요정의 힘이 저에게 있어요. ……아버지도 이 숲을 나갈 수 있다고요.”
‘헤소니아…….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구나.’
요정 왕의 후계자로서 살아가던 시절. 요정들은 그 긴 수명이 부질없을 만큼 쉽고 빠르게 죽어 나갔고, 그의 아버지 역시 숲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하루하루를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런 그들에게 거래를 제안한 이가 바로 헤소니아. 하이론은 아버지의 옆에서 아버지의, 자신의, 그리고 미래의 자식에게서 영원의 자유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헤소니아 덕에 요정들은 훨씬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으니.
‘……꼭 운명 같지.’
라이돈은 헤소니아에게서 해방의 힘을 부여받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은 당장에라도 숲을 빠져나가 드높은 하늘을 마음껏 활보할 수 있으리라.
지독한 유혹이었고, 음울한 갈등이었다. 천천히 들어 올린 눈꺼풀 너머, 괴로운 갈등이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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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돌아오지 말았어야지.”
어느새 하늘에선 비가 내렸다. 이 초라한 아이를 더욱 안쓰럽게 비추기 위해서인가. 사나운 말을 내뱉으면서도, 수그린 금발 머리를 바라보는 눈빛에선 숨기지 못한 안타까움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멜피스 할아버지.”
“일어나라. 일어나서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겨. 부탁했던 일은 잊고, 평소처럼 장난이나 치며 돌아다니거라.”
“바깥은 아주 즐거웠어요.”
라이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멜피스는 그를 가리듯 앞에 섰다. 치켜든 하얀 얼굴 위로 투명한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사랑받았어요. 사랑을 주기도 했어요. 있잖아요, 할아버지. 바다는…… 책에서 읽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어요.”
“……그만하거라.”
“헨지에게도, 에이든에게도 보여 주고 싶었어요. 멜피스 할아버지도 보고 싶죠? 아버지도 보고 싶을 거예요. 계속 보고 싶은 마음만 품고 살아가는 거, 전 더 이상 못 해요. 그래서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어요. 숲에 갇혀 일평생을 보내는 건, 그거야말로 진짜 지옥이라고.”
이 아이는 알지 못한다. 인간이 얼마나 간악하고 사악한지. 자신의 이득을 위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라이돈은 그저 운이 좋아 쓸 만한 인간의 곁에서 세상을 구경할 수 있었을 뿐. 다른 요정들은 목숨의 위협 속에서 제대로 된 행복을 느낄 수도 없을 것이다.
그에게 현실을 직시해 줘야 했다. 하지만 멜피스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젖은 얼굴이, 너무도 환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눈에 담긴 슬픔은, 오로지 자신과 같은 행복을 느끼지 못한 동족을 향하고 있었기에.
멜피스는 라이돈을 사랑했다. 이 천방지축의 꼬마 왕자님을, 단 하루도 아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만큼 동족을 아꼈기에, 그는 아무런 말을 해 줄 수 없었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 속에서, 멜피스와 라이돈은 그렇게 하염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
에이든과 헨지는 원로들의 아우성에 질려 라이돈의 아지트로 피신했다. 호숫가에 앉은 그들은 물 위로 꽃잎을 던지며 오랜만에 돌아온 친구의 슬픈 부탁을 떠올렸다.
“라이돈 말이야. 그런 모습은 처음 봤어. 걔가 그런 진지한 부탁을 할 줄 아는 녀석이었을 줄은 몰랐지.”
“……마음이 아팠어.”
“뭐가 마음이 아파? 인간을 위해 싸워 달라고 하는데. ……내 날개가 누구 때문에 이 꼴이 됐는지는 안중에도 없는 거지.”
에이든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하자, 헨지의 시선이 그의 등 뒤를 향했다. 잘린 날개를 대신해 만든 얼음 날개는, 섬세한 마력 운용을 통해 진짜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인간은 무서워. 나도 우릴 해치기만 하는 종족을 위해 싸우고 싶진 않아.”
“어차피 싸울 일도 없어. 하이론 님이 허락하실 리 없잖아. 다른 원로님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그 카델이라는 인간, 그 인간이 밀릴 정도면 무척 위험한 상황인 거 아니야? 만약 전쟁에서 마족이 이긴다면…….”
“달라질 건 없지! 마족이건 인간이건, 이 숲엔 아무도 못 들어와. 하이론 님이 계시는 한, 아무도 이곳을 침략할 수 없다고.”
반박하듯 날카롭게 대꾸하면서도, 에이든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잎새가 다 떨어진 줄기를 아무렇게나 던진 그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라이돈이 했던 말, 진짜일까?”
“어떤 말?”
“봉인이 풀렸다는 거. 자기 봉인을 풀고, 요정 왕의 봉인을 풀 힘까지 생겼다는 거 말이야.”
“글쎄.”
“그게 진짜라면, 하이론 님은 바깥에서도 우릴 지켜 주실 수 있는 거잖아. 만약 이 숲의 자원이 다 떨어지면 터전을 옮길 수도 있을 거고…….”
말을 늘어놓던 에이든이 짧게 혀를 차며 머리를 헝클였다.
“몰라. 사실 라이돈이 조금 부러웠어. 바깥세상 구경, 나도 해 보고 싶었거든.”
“인간들이 가득할 텐데도?”
“인간을 보고 싶은 게 아니야. 세상을 보고 싶은 거지. 우리도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는 거잖아.”
“…….”
“불공평해.”
불만 섞인 중얼거림 끝에는, 다시금 깊은 한숨이 이어졌다. 그의 옆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던 헨지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도 라이돈이 돌아오니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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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와 혼의 결속력 약화. 회복 모드가 활성화됩니다.」
「회복 진행률: 81%」
「완료까지 남은 시간: 6분 50초」
무의 공간에 들어섰으나, 어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카델은 이곳에 들어선 뒤로 어떤 불안도 내비치지 않았다. 되레 편안하고 신중한 태도로 시스템 창을 응시할 뿐이었다.
‘분명 빨간 머리의 공격 직전에 마기가 손등에 닿는 느낌이 들었어. 만약 그 타이밍을 정확히 노릴 수 있다면…….’
그 마기는 빨간 머리의 육체나 다름없다. 자신의 몸을 마기로 변환시키는 기묘한 공격. 또한 본인의 목숨을 적의 코앞에 무방비하게 내어놓는 공격이기도 했다. 카델은 그녀의 약점이 자신이 느꼈던 그 찰나의 감각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을 노려 베어 낸다면 타격을 입힐 수 있을지 몰라. 문제는 타이밍을 잴 시간을 주지 않고 달려드는 적들인데.’
아르파는 자신의 우려대로 요젠의 기운을 과하게 잡아먹은 듯했다. 요젠처럼 암기를 자유자재로 다루지는 못하지만, 충분히 치명적인 수준은 됐다.
‘요젠이 아르파의 공격을 감지하고 막아 줘야 해. 그러는 동안 다른 기사들이 아르파를 몰아붙여야겠지.’
장막의 마력마저 흡수할 녀석이니, 아르파를 상대할 기사는 뛰어난 회피력까지 갖춰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르파와 정면 승부를 겨룰 기사는 루멘밖에 없다.
‘문제는 아르파가 궁지에 몰리면 등장할 로딘인데.’
반을 그토록 가볍게 날려 버린 마족이다. 어중간한 방식으론 막을 수 없다.
‘재생력이 뛰어난 건 아니야. 아예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마법을 통해 단단한 외피를 무시하고 파고들 방법을 찾아야 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카델이 낮은 한숨과 함께 입술을 깨물었다.
‘마법사가 필요해. 기사들을 보좌하고, 마족들을 교란할 수 있을 정도의 숫자가.’
다른 쪽 동맹군도 상황은 비슷하리라 예상됐다.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순 없었다. 그렇다면 이전에 생각했던 대로, 핀하이족의 도움을 바라는 수밖에.
‘라이돈에게 부탁해야 해.’
아직 그에게 수락의 말을 듣진 못했지만, 지금은 핀하이족의 힘을 빌리는 것이 시급했다. 카델은 조금씩 줄어드는 회복 시간을 응시하며 정신을 정돈했다. 라이돈에게 있어 죄인이 될지라도, 자신은 끝까지 그들의 세계를 구해 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