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0화 (400/521)

이전처럼 적을 한 방에 보내 버릴 강력한 기술을 사용할 순 없다. 마력을 모으는 동안 아르파가 등장한다면 다시 기운을 빼앗길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르파의 주의를 끌 만한 정도면 충분하다. 그렇게 등장한 아르파를 라이돈이 붙든다면, 빨간 머리와 아르파를 한꺼번에 해치울 마법을 준비할 예정이었다.

“냄새가 너무 심해, 자기. 코가 떨어져 버릴 것 같아.”

라이돈은 진심으로 괴롭다는 듯 코끝을 문질렀다. 빨간 머리의 근방에서 넘실대는 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마기는 촘촘하게 얽힌 실 가닥을 연상케 했다. 구멍 난 천을 메우듯, 마기 줄기는 끊임없이 그녀의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카델은 자신들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눈길 하나 주지 않는 마족을 주시했다.

‘이렇게까지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관심을 주지 않아.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닐 테고. 방어 수단이 없는 건가? 아니면 이쪽을 위협으로 느끼지 않기 때문일지도.’

적의 접근에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가 누구든 제압할 자신이 있기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혹은 본인을 지켜 줄 대상을 믿는다든지.

‘아르파는…… 보이지 않는다.’

아직 마법을 전개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지면의 불꽃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고, 아르파 역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그녀의 안전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위협적으로 느껴질 만한 마법을 전개한다면, 아르파는 분명히 나타날 거야.’

카델은 곧장 마력을 끌어 올렸다. 뻗은 손바닥 위로 바람이 뒤섞인 불꽃의 소용돌이가 만개하듯 몸집을 불렸다.

“대기해, 라이돈. 곧 내 힘을 흡수한 마족이 등장할 거야. 그 녀석이 나타나는 즉시 두 마리를 한꺼번에 묶어 줘.”

“흐응, 감히 카델의 기운을 빼앗아 가다니. 가장 먼저 날개를 뜯어 버려야겠어.”

“섣불리 공격했다간 너도 마력을 빼앗길 수 있어. 명령 이외의 행동은 금물이야.”

“난 자기 명령조가 좋더라.”

카델은 여전히 몸을 수복하기 바쁜 마족을 조준했다. 비대하게 불어난 소용돌이는 금방이라도 마족을 집어삼킬 듯 위협적으로 휘몰아쳤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준비된 소용돌이를 쏘아 날리는 것뿐. 그러나 카델은 마족을 공격하지 않았다. 미세하게 굳은 표정이 움찔거리며, 눈동자가 굴러갔다.

‘……왜 오지 않지?’

3초. 아니, 2초만 있어도 소용돌이는 눈앞의 마족을 불태울 것이다. 그럼에도 아르파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이대로 저 마족을 공격해도 되는 걸까? 아무리 마력을 조절했다지만, 정면으로 맞으면 절대 멀쩡할 수 없다. 본인을 도와줄 동료도 없다. 그런데도 왜 그녀는 여전히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걸까?

짧은 순간에 여러 생각이 스치며,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카델!”

뒤편에 있던 라이돈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맹렬하게 휘몰아치던 불꽃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

한편, 지상의 마법진.

대지를 휩쓸던 화마는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마법사들이 힘을 쓴 덕도 있었지만, 원흉인 아르파를 제어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도 있었다.

한 뼘 높이로 떠오른 아르파의 사지와 날갯죽지는 밧줄처럼 뻗친 암기에 구속당했다. 그의 사위를 두른 암기의 벽 또한 빈틈없이 퇴로를 차단했다. 꼼짝없이 결박당한 아르파의 앞에서, 요젠이 작게 미간을 구겼다.

“무슨 암기가 이렇게 독해? 이건 뭐, 흡수해도 마음대로 사용하질 못하겠잖아.”

떠들어 대는 내용과는 달리, 아르파는 본인을 구속한 기운을 끊임없이 흡수하고 있었다. 거침없이 빨려 들어가는 암기의 흐름이 느껴진다. 낯설고도 불쾌한 감각. 요젠이 손안의 단검을 가볍게 돌려 잡았다.

“이곳에선 네가 무슨 마법을 써도 소용없어. 내 암기가 막을 테니까.”

“확실히 강한 기운이긴 하지만, 내 마력을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텐데?”

“오래 버틸 필요는 없어. 그 전에 죽여 버릴 거니까.”

아르파의 시선이 요젠의 손안에 들린 단검을 향했다. 짧은 날을 흥건하게 적신 암기. 당연하게도, 기운을 흡수한다고 날붙이까지 흡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순수 무력은 아르파의 약점이었고, 눈앞의 인간은 그것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 단검으로 내 심장을 찌를 건가? 아니면 목? 되도록 얼굴은 피해 줘. 볼썽사나워지고 싶진 않거든.”

“말이 많네.”

“말을 줄이면 살려 줄 건가?”

“조금 덜 고통스럽게 죽여 줄 수는 있어.”

요젠의 싸늘한 대답에 아르파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확 꺾인 고개 아래, 목울대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요젠은 거슬리는 웃음소리를 인내하며 아르파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그러나 보기 좋게 드러난 목을 곧장 그어 버리려던 순간.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이 녀석, 아까부터 기운을 흡수하고 있어. 계속…… 흡수만 하고 있다.’

마법을 사용해 자리를 벗어나려는 시도도, 흡수한 암기를 써먹어 보려는 낌새도 없다. 그는 그저 부지런하게 암기를 흡수하며, 제자리에 얌전히 묶여 있을 뿐이었다.

‘이곳에서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약간의 두려움, 혹은 무력감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반응이 나올 리 없다. 십수 년간의 살육으로부터, 요젠은 죽음의 공포를 맞닥뜨린 이들의 일관적인 반응을 체득했다. 아르파에게는 이곳에서 죽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다.

그 확신의 이유를 알아내기도 전.

“너무 즐겁다. 인간계에 이렇게 쓸 만한 녀석들이 많은지 몰랐어. 알았다면 진즉에 나와서 미리 이놈 저놈 빨아 봤을 텐데. 아쉽게 됐네.”

요젠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의 고개가 향하는 곳은 자신의 뒤편. 암기로 이루어진 벽면이었다. 모든 소음과 공격을 흡수하고 있던 그 벽면에서, 선명한 진동이 느껴졌다.

잔잔한 호수에 파문이 일듯 출렁이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격하게 흔들렸다. 잠시 그 변화에 집중하던 요젠이 빠르게 팔을 치켜들었다. 암기의 감옥이 깨지기 전, 아르파를 해치우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날카로운 검 끝이 아르파의 목을 파고든 순간.

“귀찮게 굴지 마, 아르파! 내가 널 구하러 오는 이따위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지 말라고!”

암기의 벽이 무너지며, 너머의 존재가 드러났다. 거대한 마기의 방패와 그것을 치켜든 우람한 몸집의 고위 마족. 벽을 무너뜨린 그녀가 정면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했다.

단검은 아르파의 살갗을 꿰뚫었으나, 경동맥을 끊어 내기엔 얕았다. 조금만 더 힘을 준다면 확실하게 목숨을 앗아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고작 몇 밀리 앞의 고지를 코앞에 두고, 요젠은 몸을 틀어 돌진을 피하는 쪽을 택했다. 새롭게 등장한 고위 마족에게서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의 파동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0.2초의 미세한 차이로, 방패는 요젠이 아닌 아르파를 직격했다.

“……뭐야? 피했네?”

방패의 주인이 의외라는 듯 요젠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거리를 벌린 요젠이 남아 있는 암기의 벽을 허물고. 쳐들어온 그녀 역시 가볍게 손을 털어 들고 있던 방패를 없앴다. 그러자 가려져 있던 아르파의 얼굴이 드러났다.

“나, 날 치는 줄 알았잖아, 로딘. 죽는 줄 알았다고.”

“죽었다면 그건 네 허접한 반사 신경 때문이었겠지. 고작 인간 하나한테 묶여 있던 주제에 약한 소리까지 해?”

“고작 인간 하나라니? 상당히 강력했거든?”

짧은 흑발과 시원스러운 이목구비가 인상적인 고위 마족, 로딘.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 아르파를 일별하고는, 다시 요젠에게 주의를 돌렸다.

“덤벼, 인간. 고위 마족을 구속할 정도의 능력을 갖췄다면, 가장 먼저 처리해 줘야겠지.”

로딘의 도발에도 요젠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숨 가삐 전투하는 아군과 적들의 틈에서, 꼼짝도 않고 감각을 집중했다.

‘기운의 응집도가 이상해. 처음 보는 종류야.’

보통의 생명체는 기운이 몸 전체에 퍼져 있다. 어느 한 곳에 조금 더 밀도 높은 기운이 응축돼 있을 수는 있어도, 기운이 비어 있는 공간은 없다.

하지만 눈앞의 고위 마족은 달랐다. 로딘의 몸은 중심부가 텅 비어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겉면. 즉, 육체의 윤곽을 이루는 테두리에 모든 기운이 몰려 있었다. 꼭 단단한 껍데기를 가진 갑각류처럼.

“왜 멀뚱히 서 있는 거야, 인간. 설마 선 채로 기절한 건 아니지?”

요젠이 생전 처음 맞닥뜨린 종류의 기운에 당황할 무렵. 근처에서 마족을 상대하던 반이 그에게 접근해 왔다. 곧 로딘과 아르파를 발견한 반이 들고 있던 마족의 머리를 내던지며 인상을 구겼다.

“고위 마족 두 마리는 아무리 너라도 어렵나?”

“……왼쪽의 고위 마족이 심상치 않아.”

“오른쪽은 단장의 마력을 흡수한 마법사잖아. 저놈보다 성가신 거냐?”

“어쩌면.”

“……어쩔 수 없지. 앞을 봐 줄 테니, 쓸 만한 기술을 준비해 봐.”

요젠이 심상치 않다고 말할 정도라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반은 마법진 정리를 미루고 요젠과 합류하기로 했다.

이미 충분한 양의 혈액을 머금은 대검이 공명하며, 요젠의 앞을 가린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아, 멀리서 봤던 광전사네? 잘됐어. 한꺼번에 처리하면 되겠다. 아르파, 너도 내 뒤에서 뭐라도 좀 해 봐.”

로딘은 마침 나타난 반이 반갑다는 듯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마족 놈들이나, 귀족 놈들이나. 하는 짓이 비슷해서 그런가, 볼 때마다 영 기분이 더럽단 말이지.”

나지막이 중얼거린 반이 대검을 고쳐 쥐며 몸의 중심을 앞으로 기울였다. 일단 정면으로 부딪친 뒤, 놈의 실력을 가늠할 셈이었다.

그렇게 반과 로딘이 서로를 향해 한 발짝을 내디딘 순간.

투쾅! 쿠구궁!

우레와 같은 소음을 동반하며, 지면으로 무언가가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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