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려는 낌새도, 기운을 끌어모으는 기색도 없었다. 카델은 반사적으로 장막을 강화하며 빠르게 눈을 굴렸다. 사라진 마족을 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건……?’
마족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빗줄기처럼 가느다란 보랏빛 섬광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마치 실뜨기를 하는 것처럼, 서로 교차하여 공간을 차지한 마기의 줄기. 카델은 제 손등에 닿은 마기를 내려 보았다.
‘아프지는 않다.’
마기가 닿았다고 고통이 느껴지진 않았다. 몸을 움직이면 접촉을 피할 수도 있었다. 그저 거대한 구조물처럼 거슬리게 시야를 방해하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그리 생각한 순간이었다.
키잉―
몸집을 부풀리며 발광하던 마기가, 눈 깜짝할 새 폭발했다. 순식간이었다. 마기는 자신이 가로지르던 모든 것을 관통하고선 사라졌다.
“어…….”
카델의 떨리는 눈동자가 마기에 닿아 있던 제 왼손을 담아냈다.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장막을 둘렀음에도, 그 얇은 마기의 줄기가 제 마력과 살갗, 근육까지 전부 뚫고 관통한 것이다.
한 박자 늦게 핏물이 차오르며, 아릿한 통증이 정수리를 치고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손등을 움켜쥔 카델이 다급하게 전방을 살폈다.
장막을 뚫고 들어올 만큼 강력한 공격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해도, 전투 중 그 무수한 마기를 전부 피할 여유는 없었을 것이었다.
“크아악!”
“끄아아악!”
마기가 사라진 자리. 곳곳에서 아군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주인조차 지키지 못한 장막이 타인을 보호했을 리 없다. 몸 곳곳에 구멍이 뚫린 아군은 끔찍한 고통을 호소하며 주저앉았고, 급소를 꿰뚫린 자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급사했다.
카델은 빠르게 허물어져 가는 아군 사이, 부하들을 찾았다.
“반! 가르엘!”
루멘과 요젠, 라이돈은 가까스로 마기의 범위를 벗어났다. 하지만 반과 가르엘은 아니었다. 미처 공격을 피하지 못한 그들의 어깨와 허리, 허벅지 부근에서 피가 흘렀다.
단숨에 마법진 안으로 뛰어 들어온 카델이 내부 인원의 장막을 강화하며 가장 가까이 있는 가르엘을 찾았다. 오른쪽 허벅지에 부상을 당한 그는 다친 다리를 꿇고 앉아 있었다. 제 곁으로 다가온 카델을 올려다본 가르엘이 곤란한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여기보단 밖에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단장님.”
“……가르엘. 너, 상처가 회복이 안 되는 거야?”
가르엘의 다리에선 재생을 위한 마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으나, 출혈은 끊이지 않았다. 그의 상처는 대부분 스스로 치유가 가능하다. 다만, 격이 높은 고위 마족이 입힌 상처는 그 속도가 더뎠다.
‘하지만 이건 속도가 더딘 정도가 아니야.’
회복되는 기미조차 없다. 다리에 난 두 개의 구멍은 아주 작았으나, 그의 마기는 그 작은 상처조차 메우지 못했다. 하얗게 질린 카델의 얼굴을 바라보던 가르엘의 시선이 움직였다. 피로 흥건해진 카델의 왼손. 그것을 발견한 가르엘의 미간이 구겨졌다.
“손이 엉망이에요. 치유술을…….”
“네 몸도 회복시키지 못하는데 치유술이 제대로 먹힐 리 없잖아.”
그럼에도 가르엘은 카델의 다친 손을 쥐고 마기를 불어넣었다. 상처는 상당한 양의 마기를 불어넣고서야 겨우 지혈이 될 뿐이었다. 그에 가르엘이 짜증스러운 탄식을 내뱉었다.
“어떤 마족의 짓인지 봤나요?”
“짐작 가는 놈은 있어. 단지…… 방금 공격이 어떤 기술인지, 놈의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어.”
“쿤라 님의 정보는요?”
“……몰라.”
이제껏 자신이 아는 게임 속 정보를 쿤라의 지식인 양 꾸며 댔으나, 이번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좀 전의 공격도, 갑자기 모습을 숨긴 마족에 대해서도. 카델은 아는 바가 없었다.
“단장!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카델이 광역 치유술을 재개하는 가르엘의 옆에서 마족의 정체를 고민하고 있을 무렵.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전투하던 반이 달려왔다. 그는 카델이 위험한 전장의 한복판에 들어왔다는 데에 기겁하며 찾아온 것이었지만, 카델은 달려온 반의 상태에 더욱 기겁했다.
“너 어깨가……!”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바깥으로 나가세요. 아직 들어오면 안 돼요.”
멀리서 보았을 땐 그리 심각한 상처가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에 선 반은 상처 난 어깨와 팔은 물론, 가슴께까지 흥건하게 적실 정도로 출혈이 심했다.
하필 반이 주로 사용하는 오른쪽 어깨가 다친 탓에, 계속 공격을 이어 가다 보니 상처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카델은 반에게 억지로 밀려나면서도 말문을 잇지 못했다. 더 이상 어깨의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싸움을 멈추라 명령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꺼내기엔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그가 어깨를 갈아 가며 싸우는 순간에도, 아군은 짓밟힌 개미 떼처럼 쓰러지고 있었으니.
기어코 카델을 마법진 바깥으로 밀어 낸 반이 그의 뺨을 감쌌다.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절대 이 안으로 들어오지 마요. 바깥에서 지휘하는 걸로 충분해요. 알았죠?”
“반…….”
“나도 잃고 싶지 않았어요.”
오라가 휘몰아치는 붉은 눈동자가 카델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걱정 가득한 카델의 얼굴을 훑어 내리며, 힘 있게 말했다.
“모두가 함께했던 그 순간. 나도 잃고 싶지 않았다고요.”
“……!”
“내가…… 저 귀찮은 놈들이랑 내가, 단장의 미래를 지킬게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평소처럼 지휘해요. 우린 단장의 모든 명령을 따를 수 있어요.”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반은 얼빠진 카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곤 다시 전장으로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델이 흉터 진 손을 꽉 그러쥐었다.
‘……그렇게 오래 준비해 왔으면서 전개가 예상이랑 조금 다르다고 당황해서 어쩌잔 거야. 정신 차려, 신여환.’
지금껏 메인 퀘스트가 비틀어진 적이 한두 번이던가. 이번에 등장한 적들은 전부 아무런 정보도 없는 초면이었지만, 그렇다면 싸우면서 알아내면 될 일이다.
‘부하들이 심한 꼴을 당하기 전에 공략법을 찾아내야 한다.’
크게 숨을 들이쉬어 마음을 다잡고, 다시 상공을 살폈다. 마기의 줄기는 바로 재생성되지 않았다. 그 정도 수준의 공격이 연달아 이어진다면 인간들의 궤멸은 순식간일 터. 그런데도 기술이 곧장 재개되지 않는다는 건, 준비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날카롭게 조여진 동공이 바쁘게 하늘을 담아냈다. 상공에선 위치적 우위를 점한 고위 마족과 마물이 무차별 공격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들이 내리찍는 공격이 대지를 시끄럽게 울렸다.
사라진 녀석을 포함한다면, 상대해야 할 고위 마족은 총 셋. 카델은 그들의 모습을 눈여겨보며, 계속해 마기 줄기의 주인을 찾았다.
‘몸을 숨기고 재정비를 하고 있나? 땅에 있다면 기사들이 발견하지 못했을 리 없어.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요젠은 알아챘을 거다. 그러니 녀석은 아직 하늘 위에 있어.’
조금씩 자리를 옮기며, 마기로 더럽혀진 하늘을 쉴 새 없이 훑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저기다!’
드높은 상공의 한 점. 카델의 시선이 닿은 그곳에, 짙은 마기 너머로 몸을 숨긴 마족이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카델의 표정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몸이 파여 있어.’
하늘에 둥실 떠오른 그녀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무덤덤하게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하지만 그 새하얀 얼굴 아래, 얇은 몸뚱이는 쥐가 파먹은 것처럼 이곳저곳이 패어 있었다.
누군가에게 공격받아 생긴 상처가 아니다. 파인 부분에선 피가 나지 않았고, 뼈나 근육이 비치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몸은 조금씩 수복되고 있었다. 들어차는 마기를 따라 팬 부분이 메워지며, 느리지만 착실하게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꼭 어딘가 흩어져 있던 살점이 모여 재생하는 것처럼…….’
어떤 이유,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저 몸뚱이가 완전해지길 기다려선 안 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손을 뻗어 마족을 조준한 카델이 쿤라의 힘을 끌어모았다. 손바닥 위로 모여든 불꽃은 커지지 않고, 되레 금방이라도 소멸할 듯 작아지기만 했다. 그러나 불꽃의 색은 점점 선명하고 짙어졌다.
그 작디작은 원형의 불꽃 속에는, 쿤라의 기운과 카델의 마력이 뒤엉켜 있다. 담긴 위력 자체만 본다면 [폭혼]과 비등할 정도. 하지만 코앞에서 폭발하는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폭혼]과 달리, 이것은 멀리 있는 적을 적중시키는 원거리 마법이었다.
불꽃이 아주 작은 만큼, 조준은 신중해야 한다.
‘다행히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어 주시는군.’
순수 마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몰라도, 이 불꽃엔 쿤라의 기운이 섞여 있다. 그의 기운이 흔들리는 궤도를 잡아 명중률을 높여 줄 것이다.
‘설마 이걸 맞고도 살아남진 않겠지.’
놈은 짐작대로 지나치게 성가신 고위 마족이었다. 여기서 해치우지 못한다면, 앞으로 얼마나 큰 피해를 볼지 모른다.
기술을 완성한 카델이 미세하게 손을 움직여 조준점을 조절했다.
‘제발 맞아라.’
뱀처럼 변한 눈동자가 번뜩이며, 손톱만도 못한 크기의 불꽃에서부터 묵직한 공명음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숨을 참은 카델이 쭉 뻗은 손목을 그러쥐고. 고정된 조준점을 향해 불꽃을 발사했다.
그러나.
“이건 좀 위험한 것 같다. 그렇지?”
불꽃이 손바닥 위를 채 벗어나기도 전. 하늘에서 사뿐히 내려온 한 사내가, 부드럽게 손을 겹쳐 왔다.
“잘 먹을게.”
놀라 굳어 버린 얼굴 위로, 사내의 웃는 낯이 그림자 졌다.
푸른빛이 도는 어두운 머리칼과 길게 찢어진 눈매, 기분 나쁠 만큼 활짝 올라간 입꼬리. 눈앞의 고위 마족은, 기억 속 어느 곳에도 자리 잡지 않았다.
“너무 맛있잖아? 마계로 데려가서 죽을 때까지 빨아 먹고 싶은걸.”
그는 강제로 카델과 손을 깍지 낀 채 우악스럽게 힘을 주었다. 제 완력으로는 절대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카델은 마력을 방출해 그를 떨쳐 내지 못했다.
‘대체 뭐 하는 녀석이지……?’
자신과 쿤라의 힘을 합쳐 발사했던 불꽃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 잡아먹혔다. 놈이 날아와 손을 겹친 순간, 카델은 느낄 수 있었다.
‘내 공격을 전부 흡수했어.’
적중했다면 틀림없이 즉사였을 공격이다. 한 번에 처치하겠다는 생각으로 힘 조절도 관둔 마법. 놈은 그것을 전부 빨아들였다.
‘방어한 게 아니야. 분명히 내 마력이 녀석에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어.’
반사도, 방어도 아닌 흡수라니. 그런 능력을 갖춘 고위 마족이 실존한단 말인가. 밸런스 붕괴에 가까운 적의 등장에 충격에 빠져 있던 카델은, 이내 더욱 끔찍한 사실을 깨달았다.
‘내 마력뿐만이 아니야. 쿤라의 힘까지 흡수했어. 그럼 흡수한 힘은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저 녀석의 수중으로 들어가는 건가?’
그 방대한 기운을 온전히 제어할 수 있는 것이라면. 카델은 온 힘을 다해 맞잡은 손을 비틀며 살벌하게 눈을 부라렸다.
“더러운 손 치워.”
“음, 놓지 않을 거야. 내가 떨어지길 바란다면 마법이라도 써 보는 게 어때?”
“누굴 머저리로 아는 건가?”
“하하! 힘을 흡수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네? 더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는데.”
마족은 얄밉게 웃으며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냈다. 엉킨 손가락의 수가 적어졌음에도 마음대로 깍지를 풀 수 없었다. 절망적인 수준의 힘 차이였다.
카델은 마족이 자신을 조롱하듯 조금씩 손을 떼어 내는 동안, 그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정보 수집을 시도했다.
“너 같은 고위 마족이 있다는 기록은 없었는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녀석인가?”
“이전 전쟁 때의 기록을 말하는 건가? 그렇다면 맞아. 난 아주 젊고 유능한 고위 마족이야.”
“……흡수한 힘은 영원히 네 것이 되는 거고?”
“뭐……. 돌려받고 싶어?”
“당연하지. 널 죽이면 내 마력이 돌아오나?”
“글쎄? 잘 모르겠는데. 궁금하면 직접 실험해 봐. 성공하진 못하겠지만.”
헬 모드에서 새롭게 추가되는 마족이라면, 자신에게 정보가 없는 것도 당연하다. 카델은 휘감은 새끼손가락을 얄밉게 흔들어 대는 놈을 보며 말했다.
“네 이름이 뭐지?”
“아르파. 아르파 솔라비스. 만약 네가 여기서 살아남게 된다면 꼭 내 이름을 널리 퍼뜨려 줘. 오래 산 마족들이 인간계에서 악명을 떨치는 걸 항상 부러워했거든.”
“……처음 듣는 이름이군.”
“그래. 그러니까 이 전투에서 내 위명을 알려야지. 난 아주 의욕이 가득하다고. 솔라비스 가문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솔라비스 가문. 머릿속 깊이 그 이름을 새겨 둔 카델이 게슴츠레 눈을 뜨자, 완전히 손을 떼어 낸 아르파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이야, 이제 좀 활약할 수 있겠네. 계속 어중이떠중이만 보여서 언제쯤 실력 발휘를 할 수 있나, 걱정했는데. 고마워, 인간!”
멀어지는 아르파를 보는 카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녀석, 흡수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거야. 쿤라와 내 기운으로 인간들을 공격할 셈이다.’
이미 한차례 강화한 장막에 계속해 마력을 덧대면서도, 카델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가기만 했다.
‘없어졌어.’
아르파를 상대하는 동안, 빨간 머리 마족이 자취를 감췄다. 굳이 그녀의 행방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다시 나타났다!”
“방어! 방어를 최우선으로!”
“마법사들은 장막을 둘러라!”
사라졌던 마기 줄기가 다시금 그들이 선 지상을 뒤덮은 것이다. 카델은 제 허리께와 뺨을 지나는 마기를 발견하곤 마른침을 삼켰다.
‘만질 수도, 저지할 수도 없는 공격……. 이걸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 거지?’
본체를 처치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아르파와 같은 고위 마족이 있는 한, 그녀를 공격하는 게 결코 순탄하지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한 번에 처치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녀의 공격을 방어할 수단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강화된 장막으로도 공격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카델은 부하들의 위로 추가적인 비늘 갑옷을 둘러 주며 마기가 닿지 않는 장소를 찾아 시선을 움직였다. 그러나.
‘젠장, 너무 멀잖아!’
마법진과 가까이 서 있던 탓인지 공격 범위 바깥과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최선을 다해 달려 나간대도 완전히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 같았고, 괜히 움직였다가 팔에 맞을 공격을 머리에 맞고 즉사할 위험도 있었다.
‘허리와 뺨……. 이 정도면 괜찮겠지.’
결국 카델은 회피를 포기한 채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섰다. 그리고 그런 카델의 시야 속으로, 조금 전에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장면이 들어찼다.
‘적들도 마기의 범위 안에 있어. 날개가 있는 고위 마족조차 피하려는 낌새가 없다. ……어째서지? 마족이라고 마기에 당하지 않는 건 아닌데.’
가르엘의 마기가 마족을 공격할 수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렇게 카델의 머릿속에 새로운 의문이 떠오를 무렵. 마기 줄기가 한층 더 음울하게 발광했다. 이 빛이 꺼지면 또다시 아군의 몸뚱이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리리라. 분하다는 듯 이를 갈던 카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고. 빛이 사그라진 그 순간.
“자기, 설마 그 예쁜 얼굴에 상처를 달려던 생각은 아니었지? 날 믿고 기다린 거지?”
바닥에 있던 몸이 훅 떠오르며, 발아래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상승에 놀란 카델이 휙 고개를 돌리자, 제법 진지한 표정의 라이돈이 보였다.
“……날 구하러 올 필요는 없어, 라이돈. 가르엘을 엄호하라고 했잖아.”
“그런 건 멀리서도 할 수 있다고. 안 되겠네! 대답 안 하는 걸 보니까 역시 그냥 맞을 셈이었던 거야! 앞으론 꼭 내 옆에 붙어 있도록 해.”
“짐짝처럼 들려 다니고 싶은 생각 없거든. 그리고…….”
짧은 놀라움을 걷어 낸 카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는 공격을 피하지 못한 아군을 내려보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분명 감각이 느껴졌어. 빛이 꺼지기 직전, 마기가 피부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고.’
그저 미래의 고통을 예견해 생긴 착각일까? 만약 착각이 아니라면, 자신이 느꼈던 감각이 빨간 머리 마족을 공략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카델의 귓가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카델 경! 지금 뭘 하는 거요!”
“……엑토 경?”
뭘 하고 있냐니. 라이돈 덕에 간신히 공격을 피한 뒤, 뒤늦게 장막의 상태를 확인하려던 참이었다. 혹시 자신이 뭔가를 빠뜨리기라도 한 것일까. 당황한 카델이 엑토의 위치를 찾아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지면에 불이…….”
“흐응, 카델 마력이잖아? 어떻게 된 거야?”
그의 눈 안으로, 사정없이 불타오르는 지면이 들어찼다. 마법진 내부는 물론, 그 바깥의 대지까지. 시뻘건 화마에 뒤덮여 이글거리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서둘러 불을 꺼트리려 했으나, 그럴수록 불길은 거세지기만 했다.
졸지에 불길 위에 서게 된 아군이 열기로 인한 고통과 당혹감을 드러냈다. 이곳에서 이만한 범위의, 제압하기도 어려운 수준의 화염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은 오직 카델뿐이다. 그랬기에 아군의 혼란이 가중된 것이다.
라이돈 역시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카델은 라이돈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인상을 찌푸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머리에 푸른빛이 도는 고위 마족을 찾으십쇼! 녀석이 저와 적룡의 기운을 흡수했습니다!”
차라리 제 마력만 흡수당했다면 이렇게까지 절망적이진 않았을 텐데. 쿤라의 힘까지 합쳐진 마력은 카델조차 저지가 어려울 만큼 강력했다.
“으응? 흡수해? 자기, 자기의 소중한 일부를 마족 나부랭이한테 빼앗긴 거야?”
“미치겠네! 라이돈, 네 마력으로 저 불길을 제압해 줘. 할 수 있겠어?”
“흐음……. 도마뱀의 기운도 섞여 있잖아. 조금 시간이 걸리겠는걸.”
“부탁해. 난 그동안 그 도둑 자식을……. 아니, 역시 빨간 머리 마족부터…….”
아르파도, 빨간 머리 마족도. 아군에겐 전부 치명적이었다. 카델조차 누굴 먼저 처리해야 할지 쉬이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했다. 그렇게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던 카델의 눈이 빠르게 굴러갔다.
“……빨간 머리.”
라이돈과 자신이 자리한 상공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 그곳에 사라졌던 빨간 머리 마족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몸 이곳저곳이 패어 있었으나,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정도가 더욱 심했다. 양팔과 다리는 미처 완성되지도 못했으며, 얼굴은 절반이 날아간 상태.
“꼭 에멘탈 치즈 같네. 징그러워라.”
함께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라이돈이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참으로 적절한 비유였으나, 카델은 맞장구치는 대신 자신의 허리를 감싼 그의 팔을 두드렸다.
“저 치즈 앞으로 데려다줘. 공격하지 말고, 마력을 모으지도 마.”
“불길은?”
“일단 지금은 놔둬.”
아르파는 자신이 빨간 머리를 죽일 수준의 마법을 전개했을 때야 나타났다. 마치 그녀를 향한 모든 공격을 감지하고 있던 것처럼, 가장 위험한 공격을 막기 위해 단박에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굴 먼저 해치워야 할지 모르겠으니, 일거양득을 노려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