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순 머릿속이 아찔하게 흐려질 만큼, 쿤라의 말은 송곳처럼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카델은 고개 숙인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쿤라의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허공을 응시한 채 멈춰 있을 뿐이다.
공동을 채운 것은 침묵이 아니었다. 쿤라가 뿜어내는 지독한 절망. 그의 우울은 멈출 줄을 모르고 몸집을 불려 갔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무슨 기억을 떠올린 건지. 궁금하고 걱정됐지만.
“내 포기를 왜 네가 정해.”
그보다 강하게 치솟는 감정은, 터질 것처럼 가슴을 꽉 메우는 울분. 카델은 숙였던 고개를 들고, 흐리멍덩하게 질려 버린 녹색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내 패배를 왜 네가 단정해. 세계가 붕괴할 때까지 시스템은 사라지지 않아? 만약 그게 사실이래도 난 끝까지 싸울 거야. 시스템이 이 세계를 붕괴시키지 못하도록, 죽을힘을 다해 막을 거라고.”
“……소용없다. 너의, 아니, 이 세계의 모든 것이 힘을 합쳐도 해낼 수 없어.”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말란 말이야!”
카델의 표정이 서럽게 일그러졌다.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이 투명하게 일렁이고, 쿤라를 향한 눈빛엔 원망이 어렸다. 그는 축 늘어진 쿤라의 멱살을 쥐고 거칠게 흔들었다.
“내가 마지막 기회라고 했잖아! 나랑 같이 세계를 구하자며. 재앙을 멈추자며! 그런데 왜 이제와서 약한 소리를 해? 이제 정말 마지막이야. 여기서 우리가 모든 걸 끝내지 못하면, 두 번 다시 미래를 되찾을 기회는 오지 않는다고!”
“아무것도 모르니 희망을 품을 수 있었던 거다.”
모든 걸 기억해 낸 쿤라에게, 과거의 자신이 지껄여 왔던 발언은 전부 허황된 믿음에 불과했다. 이 세계를 구할 수 있으리란 믿음. 210번째 카델 라이토스는 뭔가 다르리란 믿음.
“그러니 무리하지 마라. 네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고, 이 세계를 떠나. 본래 세계로 돌아가 모든 걸 잊으면 된다.”
“뭐……?”
확실히, 210번째 카델 라이토스. 이 신여환이라는 영혼은 지금까지 겪어 왔던 영혼들과는 다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에게 어떠한 희망도 안기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가능성이 있다. 본래 세계로 돌아가 평화로운 생을 이어 갈 힘이 있다. 그런 그에게 실패가 뻔한 싸움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라 할 수는 없었다.
“너의 친절은 이곳의 무엇도 구원하지 못해. 그러니 더 이상 너 이외의 누구도 걱정하지 마라. 무사히 살아서 돌아갈 생각만 해.”
쿤라는 카델에게 자신이 떠올린 기억을 전하지 않을 셈이었다. 전한대도 카델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고, 괜히 시스템의 노여움을 사 쉬운 싸움을 힘들게 끌고 갈 가능성이 생길 수도 있다.
지금껏 자신의 오만으로 쓸데없는 고통을 겪게 해 온 인간이다. 이 이상의 고통을 얹고 싶지 않았다.
“……쿤라.”
급격한 변화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쿤라는 하루아침에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것처럼, 한심할 정도로 약해 보였다. 언제나 자신을 지탱해 주던, 이 세계의 최강자로는 도저히 비치지 않는다.
“왜 이러는 거예요.”
기어이 눈물이 떨어졌다. 전부 포기하라니? 어차피 질 거라니? 모든 걸 버리고 혼자 살아남는 일에만 집중하라니?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난 이곳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거기에는 아마, 당신도 포함된 것 같아.”
서러움에 목이 메었다. 카델은 움찔거리는 쿤라의 손을 움켜쥐고, 애원하듯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지친 것처럼 무력하게 그늘진 표정에 평소와 같은 자신감이 떠오르길 바랐다.
“내가 바라는 게 불가능한 이상일지라도, 나는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내 노력이, 희생이, 결국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다고 해도……. 싸움을 멈추진 않을 거라고요. 그러니까 포기하지 마요.”
“…….”
“당신도 사랑하잖아. 이 세계를 지키고 싶잖아. 그래서 그게 불가능하단 걸 깨닫고,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는 거잖아.”
쿤라는 자신을 향한 간절한 눈빛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과거, 세계를 지키고자 하던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그의 바람에는 오만을 대신한 따뜻한 애정이 섞여 있다는 것.
“도와줘요, 쿤라. 당신뿐만이 아니야. 나에게도 이건 마지막 기회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지킬 수 있게…… 노력이라도 해 볼 수 있게 도와줘요.”
“……이곳은 네 세계가 아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요! 여기엔 단원들이 있어.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이 있어. 난 한낱 이방인일 뿐이지만, 그게 싸움을 포기해야 할 이유는 못 돼요.”
어째서 한낱 이방인인 그가 이토록 간절히 낯선 세계의 안녕을 바라는가. 매번 버거운 운명의 무게를 더해 줬던 주제에, 이제야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일평생 세계를 수호하며 사랑했던 자신조차 포기를 입에 담았다. 그런데 고작 몇 년을 머물며, 몇 명의 존재를 사랑했을 뿐인 그는. 어떻게 이토록 열렬히 노력할 수 있는가.
지독한 패배를, 압도적인 존재의 두려움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니었다. 인간인 그에게 이 전쟁은 몇 번이고 지독한 두려움을 심었고, 카델은 매번 패배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내 모든 걸 걸어서라도 지키겠다고 다짐했어요. 내 목숨, 행복, 미래, 모든 걸 빼앗겨도 좋으니까. 여기까지 와서 혼자 살아남겠다고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렇다. 그는 그저, 강인한 것이었다. 수차례 꺾여 쓰러졌음에도, 쉼도 없이 일어나 상처와 흙을 털어냈다. 그게 버거울 때면, 그가 구원해 준 이의 손을 잡고 울면서라도 일어났다. 영혼을 갉아먹는 괴로움을 기어이 이겨 냈다.
눈앞의 인간에 비하면 자신은 턱없이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살아온 세월이나, 가진 힘의 크기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 사실을 인정한 순간, 제 앞에서 서럽게 울먹이는 얼굴이 선명하게 각인됐다.
“미안하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쑥 사과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에 카델이 덜컥 겁을 먹은 것처럼 어깨를 떨었다.
“뭐가 미안한 건데요……?”
더듬더듬 제 손을 어루만지고, 멈출 줄 모르는 눈물을 닦아 내지도 않고, 울음에 격해진 숨을 몰아쉬었다. 참으로 가여운 꼴이었으나, 이상하게도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네 앞에서 한심한 꼴을 보인 것. 포기하라고 강요한 것. 그리고…… 네 의지를 믿지 않은 것.”
다만 이 울보에게서, 일평생 누구에게도 느껴 보지 못했던 든든함을 느꼈다면. 세계의 수호자란 존재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어졌다면, 자신은 드디어 미쳐 버린 것일까.
“도와달라 말해 놓고는, 먼저 꽁무니를 빼 버리려 했군. ……놀라울 정도로 한심하다. 이러니 이세계의 신이 개입하도록 놔둔 거겠지.”
“…….”
“내가 알아낸 정보를 네게 공유할 생각은 없다. 빙의자에게는 너무 위험한 정보야.”
“……하지만 중요한 정보인 것 같은데요.”
“중요하지. 내게는 중요하다. 하지만 넌 아니야. 넌 지금까지처럼 앞만 보며 나아가면 돼. 이 한심한 자의 우스꽝스러운 과거 따윈 알지 못해도 된다.”
쿤라는 잡혀 있던 손을 빼내, 카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머리를 어루만지자, 카델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쿤라는 그런 그의 귓불을 매만지고, 뺨을 감싸고, 엄지로 흥건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격한 잠꼬대였다고 생각해 주거라.”
안타깝게도, 자신에게는 여전히 패배의 흉터가 남아 있다. 카델이 아무리 힘을 쓴대도,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그를 돕는대도. 시스템을 쫓아내 빼앗긴 영혼의 반쪽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럼에도 쿤라는 카델을 돕기로 했다.
“……너와 함께하는 여정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테니. 포기해선 안 되겠지.”
카델의 강인함을 동경하게 됐으니까. 몇 번이고 절망을 이겨 내며 다져진 그의 의지를, 제 발로 짓밟고 싶지는 않았다. 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작은 세계의 나약한 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인간을. 힘닿는 데까지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 끝이 세계의 붕괴일지라도, 카델의 옆에서. 마지막까지 꺾이지 않을 그의 의지를 지켜보고 싶었다. 그렇게 그의 강인함이 제게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면, 어쩌면.
“……다시는 잠꼬대 같은 거 하지 마요. 잠 같은 거 안 자도 살 수 있잖아요. 앞으로 10초 이상 눈 감으면 때려 버릴 거니까, 조심하라고요.”
쿤라는 목멘 소리로 투덜거리는 카델의 앞에서 작게 미소 지었다. 처음으로 의지하게 된 인간에게선, 짙은 희망의 향내가 났다.
쿤라는 마계가 부활할 모든 가능성을 소멸한대도, 시스템을 이 세계에서 영구히 퇴출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 힘은 어떻게든 갈등의 불씨를 찾아내 세계를 불태울 것이라고도.
하지만 마계의 부활을 완벽하게 저지한다면, 짧게나마 시스템의 영향을 차단할 수 있다. 쿤라는 제게 그 짧은 시간이 필요하다 말했다. 이유를 알려 주진 않았으나, 카델은 캐묻는 대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쿤라를 믿었다. 그는 이 세계를 사랑한다. 자신이 단원들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쿤라 역시 세계를 위해 싸울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 당장 마계에 기운을 흘려보낸다면 좀 더 확실하게 부활의 씨앗을 찾을 수 있겠지만, 이르게 힘을 썼다간 시스템이 제재를 가할 수도 있댔으니까.’
쿤라는 카델이 마계로 내려간 순간, 힘을 빌려준다는 명목하에 함께 탐색을 돕기로 했다. 마왕의 후계자가 살아 있다는 가정 외에도 다른 부활 요소가 있을지 모르니.
그렇게 모든 이야기가 마무리된 뒤. 카델은 주점 하나를 통째로 빌려 단원들을 불러 모았다.
마계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최후의 전투. 길어져 봤자 하등 좋을 것이 없는 싸움이었고, 모두가 최선을 다해 전쟁을 끝내려 할 것이다. 그러니 결국.
‘헤어질 날이 머지않았구나.’
이 전쟁이 끝나고 시스템을 제거할 수 있다면. 시스템의 힘으로 이곳에 머무르게 된 자신의 영혼은 필시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자신의 의지는 상관없이.
그랬기에 하루하루가 소중했다. 단원들과 조금이라도 더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마지막 만찬인가요?”
모이기만 하면 시끌벅적해지는 단원들 사이,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저도 모르게 움찔한 카델이 술잔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옅은 미소를 머금은 가르엘과 눈이 마주쳤다.
“마지막 만찬이라니?”
“전쟁 전의 마지막 만찬이요. 마계에선 술 한 모금 제대로 마실 수 없을 테니까요.”
“아…….”
마지막이란 말에 괜히 혼자 찔려 움츠러든 듯했다. 카델은 머쓱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전력을 다할 거잖아.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전쟁을 끝내고, 다시 인간계로 돌아와서…….”
이렇게 함께 모여 앉아 즐겁게 먹고 마시면 돼. 간단한 끝말이었으나, 목이 멘 듯 뱉어 낼 수 없었다. 문득 들어찬 생각 때문이었다. 만약 전쟁이 끝나고 자신이 사라진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얼마나 괴로워하고, 얼마나 원망할까.
아무것도 모른 채 조금씩 말라 갈 그들을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모든 걸 밝히고 싶었다.
“……단장님?”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종전과 함께 자신이 사라지리란 걸 알린다면, 그들은 결국 전쟁을 기피하게 될 것이다. 단원들의 성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이 전쟁이 끝나지 않게 잘못된 선택을 할지도 몰랐다.
“우는 거예요……?”
그러니 알릴 수 없다. 그 사실이 사무치게 서러웠다. 자신의 짐을 덜 수 없음이 억울한 것이 아니다.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덩그러니 남겨지게 될 그들이, 되찾은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불행하게 살아갈까 봐.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졌다.
“다, 단장? 왜 그래요? 가르엘 경이 무슨 변태 같은 소리라도 한 거예요?”
“그런 거야, 자기? 이 파렴치한! 이번에야말로 얼려 죽여 주겠어!”
“예? 제가 그랬을 리가 없잖아요. 전 누구보다 신사적인 남자인데.”
“다들 조용히 좀 해 봐. 대장, 갑자기 무슨 일이야.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거야? 그럼 혼자 삭이지 말고 말…….”
쏟아지던 단원들의 염려가 일순 뚝 끊겼다. 그에 인지하지 못한 눈물을 허둥지둥 닦아 내던 카델이 의아하게 눈을 깜빡였다. 주위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함께 내려앉은 고요 속, 단 하나의 음성만이 도드라졌다.
“울지 마, 카델.”
사방이 암기의 벽으로 가로막혔다. 이 어둡고 좁은 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은 자신과 요젠뿐.
요젠은 앉아 있는 카델의 앞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머리를 끌어안았다. 단단한 복부에 뺨을 기대자, 따뜻한 온기만큼이나 다정한 마음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돼. 혼자 울고 싶으면 언제든 그렇게 해. 내가 널 지켜 줄게.”
속삭임 같은 위로에 가까스로 멈췄던 눈물이 다시금 흘러내렸다. 카델은 요젠의 허리를 감싸 안고, 그의 배 위에 축축한 얼굴을 문질렀다.
요젠이라면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이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닥쳐올 미래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을 테다. 그 자체로 카델에게는 위로였다.
“대신, 혼자 아프지는 마. 네가 아프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해 줘. 나는…… 그걸로 충분해.”
“……요젠.”
“응.”
“이 전쟁이 끝나면, 행복하겠다고 약속해. 꼭 행복하겠다고. 평생,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겠다고.”
“난 지금도 충분히 행복한걸.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해.”
“…….”
“그래도 약속할게. 네 옆에서 죽을 때까지 행복할 거야.”
성에 차지 않는 대답에 카델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는 투정을 부리듯 움켜쥔 요젠의 옷자락을 흔들며, 눈물 젖은 얼굴로 어둠에 가라앉은 요젠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없어도 행복할 거라고 해.”
“그건…….”
“요젠.”
“……알겠어.”
더듬더듬 카델의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낮은 탄식과 함께 말을 이었다.
“네가 없다면 난 굉장히 힘들겠지만, 그런데도 네가 내 행복을 바란다면, 그렇게 할게. 하지만 난 계속 네 존재를 그릴 거야. 네가 없는 세상에서도 너와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살겠지. 그 추억이 희미해지는 만큼 내 행복도 흐려지겠지만, 마지막까지 잊지 않을 거니까. ……난 죽을 때까지 행복할 거야.”
원하는 답을 들었음에도, 카델은 기뻐하지 않았다. 되레 더 큰 울음을 터뜨리며 요젠의 품에 파고들 뿐이었다.
잠시 그런 카델을 마주 안던 요젠이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암기의 벽이 흔들리고 있다. 바깥에서 가해지는 충격이 암기의 위로 파문을 만들고 있었다. 그 위로 더 강한 암기를 덧대려던 요젠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한순간에 사라진 암기의 벽 너머, 다급한 단원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들은 요젠과 그에게 안긴 카델을 번갈아 보더니, 갖은 야유와 함께 둘을 떨어뜨려 놓았다.
다시 찾아온 소란함 속에서 카델은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난데없이 북받쳐 오른 감정에 민망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런 감정에 잠겨 있기에 그는 이미 코앞으로 다가온 이별을 너무도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그래서, 대장. 큰일이 생긴 건 아니야?”
루멘의 물음에 요란스럽던 분위기가 단박에 가라앉았다. 카델은 부하들의 시선을 받으며 헐떡거리는 숨을 골랐다. 눈물 젖은 눈썹을 깜빡이고, 그러모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너희와 함께하고 싶어. 이렇게 같이 술을 마시고, 장난도 치고, 하루 종일 얘기를 나누고 싶어. 나는…… 나에게 미래가 허락되지 않을까 봐 무서워.”
떨리는 진심에 부하들의 표정이 제각각 변했다. 누군가는 뻣뻣하게 굳었고, 누군가는 일그러졌으며, 누군가는 얼빠진 것처럼 힘이 풀렸다.
“단장이 돼서 할 만한 말이 아니라는 건 알아. 하지만…… 알아줬으면 해. 지금 내가 이렇게 무서워하는 이유는, 전부 너희를, 너희와 함께하는 이 시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걸. 이곳의 누구보다도 난 이 순간을 잃고 싶지 않아.”
그러니 내가 너희를 버리고 떠난대도, 그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고. 꼭 알아주었으면 했다. 그게 솔직한 욕심이었다. 자신이 사라진 세계에서도 그들만큼은, 자신을 잊지 않고 영원히 사랑해 주길 바랐다. 자신 또한 틀림없이 그럴 테니까.
술자리는 카델이 먼저 자리를 뜨며 자연스럽게 해산됐다. 전쟁 전의 마지막 만찬이었으나, 흩어진 모두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기사단은 각자의 공간에서 홀로 시간을 보냈다.
성의 별채로 돌아간 루멘은 정원 벤치에 앉아 깨끗한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카델과 어설픈 임명식을 치렀던 그곳에서, 변함없이 자리한 석상을 만져 보기도 했다. 한숨과 함께 검을 빼낸 그가 얇은 검날을 쓰다듬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반은 종종 들리곤 하던 대장간에 대검을 맡겼다. 거친 전투에 날이 상한 곳은 없는지, 손잡이가 헐거워지진 않았는지. 꼼꼼히 확인해 달라 몇 번이나 당부했다. 대장간을 떠나지도 않고, 대장장이의 손에서 더욱 날카롭게 벼려지는 대검을 지켜보았다.
가르엘은 주점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아무도 없는 주점에 홀로 앉아, 넉넉히 남은 술을 조용히 홀짝였다. 아무리 마셔도 취기는 차오르지 않았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눈빛에선 언뜻 괴로운 감정이 떠오르기도 했다.
밤이 깊었음에도 수도의 거리는 붐볐다. 요젠은 바삐 이동하는 인파 속에 은밀히 파고들었다. 그들은 요젠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고, 요젠도 그들의 눈에 띄기를 바라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기며, 그는 도시의 생기를 느꼈다. 그들의 웃음과 대화 소리, 때때로는 흐느낌을 들으며. 새벽이 지날 때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라이돈은 왕성의 꼭대기, 아무도 오지 못하는 지붕 위에 올라가 그 아래의 경치를 감상했다. 항상 웃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고, 그 좋아하는 주전부리도 가져오지 않았다. 한 마디도 꺼내지 않은 채 조금씩 변화하는 하늘의 색과 서서히 활기를 잃어 가는 거리를 지켜보았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에선 일말의 즐거움도 비치지 않았다.
모두가 밤을 새우며 서서히 밝아오는 아침을 맞이했으나, 카델은 아니었다. 그는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고, 조금이나마 회복된 컨디션으로 눈을 떴다.
감상에 젖는 것은 반나절 정도면 족했다. 그가 겪을 최후의 전투에선, 어떠한 상념도 필요하지 않았으니.
평화의 돌 탈환 작전 당일.
단복을 갖춰 입은 카델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담아냈다.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에 또렷한 회색 눈동자, 서늘한 표정. 예전엔 진짜 카델 라이토스의 정체를 알리는 것이 최종 목적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떤 모습이든, 어떤 형태로든. 망설임 없이 걸음을 돌린 그가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